(4) [보르헤스 읽기] 『알렙』 같이 읽어요

D-29
화제로 지정된 대화
[엠마 순스~] 내용 자체는 직선적이고 간단한 편에 속합니다만, 현실의 사실과 소설적 진실 사이의 차이점에 대한 보르헤스의 사고관을 엿볼 수 있는 단편입니다. 추측컨대, 주인공 엠마 순스의 아버지인 엠마누엘 순스 씨는 1916년 경에 로웬탈 방직 공장에서 경리 계원으로 일을 하다가 기금 착복을 했다는 억울한 혐의를 받고 해고된 인물 같습니다. 소설은 엠마 순스가 1922년 1월 14일 그녀의 아버지가 베루날 수면제를 먹고 자살했다는 편지를 받으면서 시작됩니다. 엠마 순스는 아버지의 억울한 혐의를 미리 알고 있었고, 이에 따라서 아버지를 대신해서 은밀히 복수를 행하기로 마음 먹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보르헤스가 정통적인 단편 소설을 쓰는 데도 능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아래 소개할 두 문장은 전형적인 추리 소설의 플롯과 서스펜스물의 구성 원리가 잘 집약된 인용구가 아닌가 합니다.
로웬탈은 그녀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엠마 순스는 그 하찮은 사실에서 자기가 유리한 입장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알레프 77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사실 그 이야기는 믿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본질적으로 사실이었기에 모든 사람들을 납득시켰다. 엠마 순스의 말투는 진실이었고, 그녀가 느낀 수치심도 사실이었고, 그녀의 증오도 진실이었다. 또한 그녀가 겪었던 능욕도 사실이었다. 단지 주변 정황과 시간, 그리고 한두 개의 이름들만이 거짓이었다.
알렙 엠마 순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그녀는 얼른 그 날이 지나갔으면 하고 바랐다. 그리고 즉시 그녀는 그런 소망이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의 죽음만이 세상에서 일어난 유일한 사건이었고, 그런 일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종이를 집어 들고는 자기 방으로 갔다. 그러고는 마치 앞으로 일어날 사건들이 어떤 것인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살그머니 그 편지를 서랍 속에 보관했다. 아마도 이미 일어날 사건들을 보기 시작했을 것 이다. 그녀는 자기가 되려고 하는 사람이 이미 되어 있었다.
알레프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엠마 순스] 소설의 세부 사항에도 논할 내용이 많기는 하지만, 여기서는 현실의 사실과 무관하게 소설은 장르로서 소설적 진실을 탐구한다는 점을 중점적으로 말해보고 싶습니다. 소설에서 엠마 순스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서 로웬탈 공작을 죽일 계획을 세우고 실행합니다. 현실로 이러한 사건을 가져온다면 엠마 순스는 사실이 아닌 일을 거짓으로 꾸며서 없는 죄를 뒤집어 씌울 계획을 세우고 실행했다는 점에서 무고로 처벌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소설은 현실이 아니라는 간단한 사실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엠마 순스의 무고를 운운하지 않고도 그 소설적 기법과 진실성을 논할 수 있습니다. 즉, 현실의 사실과 소설적 진실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현실의 사실과 소설적 진실을 혼동하면서, 거기에 함부로 도덕적 잣대를 들이밀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드라마 속 악역을 연기하는 배우를 찾아가서 뺨을 때리는 행위만큼이나 어리둥절한 상황이 되기 십상입니다. 소설은 얼마든 도덕적으로 논의될 수 있지만, 그러한 논의에 앞서서 소설은 허구의 장르로서 나름의 자유와 도덕적 유예 공간을 확보한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유예공간에서 자유와 부자유, 도덕과 비도덕, 법과 범법의 경계를 사유할 여지가 생기는 것이고요. 그러므로 소설의 사실을 현실과 등치에 놓고 잘잘못을 논하며 소모적인 논의를 하기보다, 애초에 소설이 지향하고자 했던 소설적 진실이 무엇인지 얘기해보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보르헤스가 엠마 순스를 통해서 전달하고자 했던 소설적 진실은 마지막 구절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신영복 선생님의 글 한 대목도 같이 첨부합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믿기 힘든 것이었지만 본질적으로 그것은 진실이었기에 모든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엠마 순스의 그 떨리는 어조는 진실이었고, 그녀의 증오는 진실이었다. 그녀가 겪었던 분노 또한 진실이었다. 단지 주변 정황과 시간, 그리고 한두어 사람의 이름들만이 거짓이었을 뿐이었다.
알렙 92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일흔이 넘은 노인이 있었습니다. 집도 절도 없고, 편지도 접견도 없는 분입니다. 전과는 본인이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많았습니다. 당연히 감방에서 대접도 못 받고 한쪽 구석에서 조그맣게 살고 있는 노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자기의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내는 때가 있습니다. 신입자가 들어올 때입니다. 신입자가 입소 절차를 마치고 감방에 배치되어 들어오는 시간이 아마 이 시간쯤 됩니다. 대부분의 신입자들은 문지방을 밟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들어와서 누가 지시하지 않아도 알아서 화장실 옆 자리에 가서 앉습니다. 대단히 긴장된 이 순간이 노인이 나서는 순간입니다. "어이 젊은이" 하고 부릅니다. 그렇게 다정한 소리는 아니지만 신입자는 그 소리가 매우 반갑습니다. 그러고는 노인다운 몇 가지 질문을 합니다.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형은 몇 년이나 받았고 만기는 언제냐는 등 정말 눈물 나는 얘기입니다. 그러고는 이어서 "일루 와 봐" 하고는 노인 옆으로 불러 앉히고는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내가 말이야"로 시작되는 긴 인생사를 이야기합니다. 신입자가 들어오자마자 시작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삼일 지나서 이 노인이 감방에서 별 끗발이 없다는 걸 알고 나면 일정日政 때부터 시작되는 그 긴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 사람이 없습니다. 첫날 저녁에 바로 시작해야 꼼짝없이 끝까지 듣습니다. 그가 빠트린 것이 있으면 우리가 채워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노인의 이야기가 계속 각색된다는 사실입니다. 창피한 내용은 빼고, 무용담이나 미담은 부풀려 넣습니다. 1~2년 사이에 제법 근사한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 있습니다. 자기도 각색된 이야기에 도취되어 어떤 대목에서는 눈빛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젊은 친구들은 노인네가 '구라푼다'고 핀잔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런 심정을 잘 이해합니다. 과거가 참담한 사람이 자위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비가 부슬부슬 오는 늦가을이었습니다. 하염없이 철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그 노인의 뒷모습을 우연히 목격하게 됩니다. 노인의 야윈 뒷모습이 매우 슬펐습니다. 저분이 늘 얘기하던 자기의 그 일생을 지금 회상하고 있는 건 아닐까. 만약 저 분이 다시 인생을 시작한다면 최소한 각색해서 들려주던 삶을 살려고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각색한 인생사에는 이루지 못한 소망도 담겨 있고, 반성도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노인의 실제 인생사와 각색된 인생사를 각각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전자를 '사실'이라고 하고 후자를 '진실'이라고 한다면 어느 것을 저 노인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소망과 반성이 있는 진실의 주인공으로 그를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그가 늘 이야기하던 일정 시대와 해방 전후의 험난한 역사가 그의 진실을 각색한 것이 사실로서의 그의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사람을 이해하는 방식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관한 고민이기도 하지만 진실이 사실보다 더 정직한 세계 인식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보는 것은 그때 그곳의 조각에 불과합니다. 시적인 관점이라는 것은 사실성과 사회미에 충실하되 사실 자체에 갇히지 않는 것입니다.
담론 -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31-32쪽, 신영복 지음
담론 -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강의> 출간 이후 10년 만에 출간되는 선생의 ‘강의록’이다. 이 책은 동양고전 말고도 <나무야 나무야>,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등 선생의 다른 책에 실린 글들을 교재 삼아 평소에 이야기하신 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 나아가는 탈근대 담론과 세계 인식, 인간 성찰을 다루고 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아스테리온의 집~] 먼저 말씀드리면 이 작품은 송병선 선생님 번역으로 읽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양쪽 번역본을 번갈아가면서 보다가 상이한 부분이 꽤 있어서 원문과 영어 번역본을 살펴보니, 황병하 선생님의 번역본에서 오역으로 추정되는 부분이 꽤 많이 보입니다. 특히 각주 5번이 달려 있는 문장, "허망하게도 나의 어머니는 여왕이 아니었다" 부분은 오역으로 추정됩니다. 원문은 "No en vano fue una reina mi madre;"이고, 영역문은 "Not for noth­ing was my mother a queen;"입니다. 영역본의 'Not for nothing' 부분에 대응하는 원문은 'No en vano'으로 추정되는데, 직역하면 '괜히 ~가 (된 것이) 아니다'가 됩니다. 따라서 그 의미는 "허망하게도 나의 어머니는 여왕이 아니었다"가 아니라 '아닌 게 아니라 나의 어머니는 여왕이었다/나의 어머니는 진정 여왕이었다' 이런 의미가 되어야 하지 않나 합니다. 실제로도 송병선 선생님은 이 부분을 "우리 어머니가 왕비였다는 사실은 무의미하지 않았다"라고 옮기셨습니다. 대충 비슷한 의미 같아요. 그 다음에 오는 문장도 황병하 선생님의 번역은 의아한 부분이 꽤 있는데, 이 모임의 목적은 번역이 아니니까 이쯤 하겠습니다. 소설에 대해서 좀 얘기를 해보면, 양쪽 번역의 각주에서 친절하게 스포(?)하고 있듯이 이 작품은 테세우스의 신화 속에서 죽임을 당하는 반인반수의 괴물 미노타우로스의 1인칭 시점에서 쓰여집니다. 송병선 선생님의 각주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아스테리온은 아스테리우스의 대격(accusative case)으로서, ‘별로 장식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 1인칭의 '나'가 자신이 사는 '집'은 다름 아닌 괴물을 가두는 미궁이었음이 밝혀지는 구조입니다. 생각해보면 모든 미로는 지면에서 바라보면 가로막힌 벽과 드문드문 이어지는 통로만을 보여주지만 하늘쪽으로는 완벽히 뚫려 있기 때문에 완벽한 하늘과 무수한 별들을 보여줍니다. 개인적으로 너무너무 아쉬운 점은 한국어 번역본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이 작품을 접했고, 그 때문에 이 작품을 처음 읽는 기쁨을 온전히 누리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영역본만 해도 작품 초반부터 각주로 이렇게 스포를 하고 있지는 않거든요. 제 생각에 이 작품의 핵심은, 이 작품이 영웅된 관점에서 3인칭의 '괴물' 미노타우로스의 이야기를 다루는 게 아니라, 자기가 괴물임을 알지 못하고 다만 자신을 왕의 자손으로만 아는 1인칭의 '왕자' 아스테리온의 입장에서 쓰여졌다는 사실입니다. 추측컨대 보르헤스의 애당초 의도라면(괴물 미노타우로스가 아니라 비운의 왕자 아스테리온을 경험해보라는), 독자들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아스테리온이 신화 속의 미노타우로스였음을 알게 되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각자 능동적으로 이 작품의 세부 사항을 다시 뜯어보면서 기존의 독해를 반추해보는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미궁의 중심부에 닿았을 때부터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미궁이 시작되는 것처럼, 그렇게 걸어온 길들을 되짚어나가면서 미궁의 구조를 찬찬히 뜯어보고 경험하는 것처럼요. 개인적으로는 작품보다는 작품을 둘러싼 외적 상황으로서 너무 아쉬운 작품입니다. 양쪽 번역본 모두 그 편집에서 작품의 의도를 충분히 살리지 못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만일 저라면 처음이 아니라 마지막 결론부에서 미노타우로스의 이름이 등장할 때 아스테리온에 관한 각주를 넣었을 것 같습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아래에 인용할 '아스테리온의 놀이'는 의미심장해보입니다.
사실 나는 유일무이한 존재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것에 관심이 없다. 철학자처럼 나는 글쓰기의 기술을 통해 전달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내 정신 속에는 분노를 자아내는 하찮은 것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내 정신은 단지 위대한 것만을 수용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결코 한 글자와 다른 글자 사이의 차이를 결코 파악할 수 없었다. 참을성이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에 나는 글을 배울 수 없었다. 가끔 나는 그것을 유감스럽게 여긴다. 밤과 낮이 너무나 길기 때문이다. 당연하지만 내게 소일거리가 없는 건 아니다. 나는 돌진하려는 양처럼 어지러워 바닥에 나동그라질 때까지 돌로 만든 복도를 뛰어다닌다. 또한 우물 지붕의 그늘이나 복도의 한쪽 모퉁이에 쭈그리고서 나를 잡는 술래잡기 놀이를 한다. 그리고 지붕 위에서 뛰어내려 내 몸을 피로 물들이기도 한다. (···) 그러나 그토록 많은 놀이들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또 다른 아스테리온의 놀이이다. 나는 그가 나를 찾아오고 그에게 우리 집을 보여 주는 척한다. 나는 아주 정중하게 인사하면서 "그러면 이전의 교차로로 갑시다."나 "이제 또 다른 마당으로 나가 봅시다." 혹은 "나는 당신이 이 도랑을 좋아하시리라는 걸 알지요."나 "이제 모래로 가득한 저수조를 보게 될 겁니다." 또는 "어떻게 지하실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지 보시게 될 겁니다." 따위의 말을 한다. 가끔씩 나는 실수를 범하고, 그러면 우리 둘은 기분 좋게 웃는다.
알레프 86-87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들 중의 하나가 죽으면서 언젠가 나의 구원자가 도착할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때부터 나는 고독이 고통스럽지 않다. 그건 나를 구해 줄 사람이 살고 있고, 마침내 그가 일어나 먼지 위로 강림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알레프 아스테리온의 집,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저는 배경지식 없이 읽어서(처음 읽을때 주석 잘 안 읽는편;;;) 마지막에 아스테리온의 정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마지막에 아스테리온이 미노타우르스라는 것을 알게해주는 부분이 없어도 저는 이것저것 상상하며 참 재미있게 읽었겠다 싶긴한데, russist님 말대로 끝까지 읽고나니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더군요. 즐거운 독서였어요. 그리스 신화, 영웅이 아닌 괴물의 시선... 이라는 면에서 결은 많이 다르지만 헤라클레스가 물리친 괴물 게리온의 시선으로 서술한 앤 카슨의 <빨강의 자서전>도 생각났습니다(저에게 다소 난해했던...) :) <아스테리온의 집> 설정이 너무 흥미로웠는데 좀 짧아서 아쉬웠네요. 앤 카슨처럼 더 길게 써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빨강의 자서전 - 시로 쓴 소설앤 카슨에게 큰 명성을 안겨준 대표작. 그리스 신화 속 헤라클레스의 12과업 중 열 번째 노역의 에피소드를 영웅이 아닌, 그가 화살로 쏘아 죽인 빨강 괴물 게리온의 입장에서 다시 쓴 작품이다. 신화 속 영웅과 괴물의 이야기는 비정하고 아름다운 소년 헤라클레스와 빨강 날개를 단 외로운 소년 게리온의 사랑 이야기로 옮아간다.
제가 이 책의 후속편 레드닥>을 읽으려다가 ㅎㅎㅎ 이건 두 권다 사서 읽어야겠다 싶어서 일단 닫았습니다. 저는 가끔 그런 책이 있더라고요. 꼭 사서 메모하고 밑줄쳐야하는.
앗 그런 방법이ㅠ 저로선 각주 안 본 눈을 사고 싶을 정도였어요··· 앤 카슨의 책은 꼭 한번 읽어보리라 다짐하는데 자꾸 뒤로 밀리고 있네요. 책 추천도 감사합니다!
얼핏 대화를 훑어만 보다가 각주 이야기와 그리스 신화 니야기가 있어서 각주를 가리고 읽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스테리온이 미노타우로스임을 알게 되니 쾌감이 살짝 있네요. 한 번 더 읽고 돌아오겠습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또 다른 아스테리온의 놀이이다. 나는 그가 나를 찾아오고 그에게 우리 집을 보여 주는 척한다. (…) 가끔씩 나는 실수를 범하고, 그러면 우리 둘은 기분 좋게 웃는다.
알레프 87,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의식은 단지 몇 분만 지속된다. 내 손이 피로 물들지도 않았는데 그들은 차례로 하나씩 쓰러진다. 그들이 쓰러진 곳에 그들은 남고, 시체들은 한 복도를 다른 복도들과 구분하는 데 도움을 준다.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 모르 지만, 그들 중의 하나가 죽으면서 언젠가 나의 구원자가 도착할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때부터 나는 고독이 고통스럽지 않다. 그건 나를 구해 줄 사람이 살고 있고, 마침내 그가 일어나 먼지 위로 강림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내 귀가 세상의 모든 소리들을 들을 수 있다면, 나는 그의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나를 복도들이 더 적고 문들이 더 적은 곳으로 데려다 준다면 좋으련만. 내 구원자는 어떻게 생겼을까? 나는 생각한다. 그는 황소일까 아니면 사람일까? 혹시 사람의 얼굴을 지닌 황소일까? 아니면 나처럼 생겼 을까?
알레프 88,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아침 햇살이 청동 검에 비쳤다. 이제 칼에는 피의 흔적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믿을 수 있어, 아리아드네?" 테세우스가 말했다. "미노타우로스는 거의 방어하려고도 하지 않았어."
알레프 89,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아스테리온의 집] 완전히 동일한 한 사람도 관점에 따라서 둘로 갈라지고 분열될 수 있다는 것이 '아스테리온 놀이'가 아닐까 합니다. 동일한 신화적 대상이 3인칭의 영웅된 관점에서는 괴물 미노타우로스이지만, 1인칭으로 들어가면 스스로 고귀한 아스테리온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요. 우리는 미로 바깥에서 미로의 역사와 그 의미의 변천사와 미노타우로스의 신화를 자세히 논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미로 속에 들어간 사람으로서 아스테리온이 어떠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신화가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고, '괴물'은 언제나 타인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괴물 미노타우로스가 아니라 1인칭의 '나' 아스테리온으로 들어가는 경험은 허구의 장르인 소설로만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한번씩 어떤 소설을 볼 때, 이 작품이 다른 장르라면 어땠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봅니다. 예컨대 ⟨아스테리온의 집⟩이 영화였다면 어떨까요? 저로선 잘 그려지지 않습니다. 보르헤스가 의도했던 탐정 소설적인 구도는 오직 텍스트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좋든 싫든 관객에게 스크린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보여져야 하고, 또 스크린은 좋든 싫든 우리 바깥의 외부 대상을 시각적으로 재현해서 관객 앞에 내놓아야 하기 때문에 아스테리온의 목소리가 아니라 외양을 처음부터 드러내야 합니다. 그 점에서 영화는 시각적인 것에 일차적으로 묶여 있는 장르가 아닌가 합니다. 그렇다면 이 단편 소설에서 1인칭은 필연적인 선택일 것입니다. 우리는 타인의 삶을 얼마든지 논할 수 있지만, 자기 자신의 삶을 타인의 삶처럼 논하지는 못합니다. 소설은 그 불가능함을 잠시나마 가능하게 해주는 장르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소설은 1인칭의 내면으로 곧장 이행할 수 있다는 대단히 특출한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편 소설을 통해서 우리가 영웅의 관점에서 괴물 미노타우로스가 아니라 1인칭의 왕자 아스테리온을 경험할 수 있는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이 단편을 통해서 제가 알게 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괴물은 언제나 타인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연관성은 너무 방대하고 비밀스러워서 현재를 무효화하지 않고는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단 하나의 머나먼 사건조차 폐기할 수 없다. 과거를 변경한다는 것은 단 하나의 사건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그건 그 결과들을 무효로 만드는 것인데, 그 결과들은 무한하게 확장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것은 두 개의 세계사를 만드는 행위이다.
알레프 또 다른 죽음,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다중우주, 평행우주, 메타버스를 연상케하는 재미있는 소설이었습니다. :) 사실 이런 상황(기억의 왜곡, 같은 일에 대한 진술의 엇갈림, 자기가 말한 것도 또는 들은 것도 잊어버리는 망각) 살면서 크고 작게겪지 않나요? (상사가 지시하거나 의견을 말해놓고 망각하는 상황, 분명히 어떤 말을 들은거 같은데 다들 내가 잘못들은거라고해서 혼자 꿈 꾼건가 생각되는 상황 등등) 다음번에 이런일이 제게 생기면 이 작품이 생각날것 같네요. 두 개의 세계가 겹쳐지며 미처 갱신되지 못한데서 혼란이 오는거라고 😂 아, 제사ephigraph읽는 걸 좋아하는데 이 작품에는 제사가 없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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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 그믐,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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