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보르헤스 읽기] 『알렙』 같이 읽어요

D-29
사실 나는 유일무이한 존재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것에 관심이 없다. 철학자처럼 나는 글쓰기의 기술을 통해 전달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내 정신 속에는 분노를 자아내는 하찮은 것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내 정신은 단지 위대한 것만을 수용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결코 한 글자와 다른 글자 사이의 차이를 결코 파악할 수 없었다. 참을성이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에 나는 글을 배울 수 없었다. 가끔 나는 그것을 유감스럽게 여긴다. 밤과 낮이 너무나 길기 때문이다. 당연하지만 내게 소일거리가 없는 건 아니다. 나는 돌진하려는 양처럼 어지러워 바닥에 나동그라질 때까지 돌로 만든 복도를 뛰어다닌다. 또한 우물 지붕의 그늘이나 복도의 한쪽 모퉁이에 쭈그리고서 나를 잡는 술래잡기 놀이를 한다. 그리고 지붕 위에서 뛰어내려 내 몸을 피로 물들이기도 한다. (···) 그러나 그토록 많은 놀이들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또 다른 아스테리온의 놀이이다. 나는 그가 나를 찾아오고 그에게 우리 집을 보여 주는 척한다. 나는 아주 정중하게 인사하면서 "그러면 이전의 교차로로 갑시다."나 "이제 또 다른 마당으로 나가 봅시다." 혹은 "나는 당신이 이 도랑을 좋아하시리라는 걸 알지요."나 "이제 모래로 가득한 저수조를 보게 될 겁니다." 또는 "어떻게 지하실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지 보시게 될 겁니다." 따위의 말을 한다. 가끔씩 나는 실수를 범하고, 그러면 우리 둘은 기분 좋게 웃는다.
알레프 86-87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들 중의 하나가 죽으면서 언젠가 나의 구원자가 도착할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때부터 나는 고독이 고통스럽지 않다. 그건 나를 구해 줄 사람이 살고 있고, 마침내 그가 일어나 먼지 위로 강림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알레프 아스테리온의 집,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저는 배경지식 없이 읽어서(처음 읽을때 주석 잘 안 읽는편;;;) 마지막에 아스테리온의 정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마지막에 아스테리온이 미노타우르스라는 것을 알게해주는 부분이 없어도 저는 이것저것 상상하며 참 재미있게 읽었겠다 싶긴한데, russist님 말대로 끝까지 읽고나니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더군요. 즐거운 독서였어요. 그리스 신화, 영웅이 아닌 괴물의 시선... 이라는 면에서 결은 많이 다르지만 헤라클레스가 물리친 괴물 게리온의 시선으로 서술한 앤 카슨의 <빨강의 자서전>도 생각났습니다(저에게 다소 난해했던...) :) <아스테리온의 집> 설정이 너무 흥미로웠는데 좀 짧아서 아쉬웠네요. 앤 카슨처럼 더 길게 써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빨강의 자서전 - 시로 쓴 소설앤 카슨에게 큰 명성을 안겨준 대표작. 그리스 신화 속 헤라클레스의 12과업 중 열 번째 노역의 에피소드를 영웅이 아닌, 그가 화살로 쏘아 죽인 빨강 괴물 게리온의 입장에서 다시 쓴 작품이다. 신화 속 영웅과 괴물의 이야기는 비정하고 아름다운 소년 헤라클레스와 빨강 날개를 단 외로운 소년 게리온의 사랑 이야기로 옮아간다.
제가 이 책의 후속편 레드닥>을 읽으려다가 ㅎㅎㅎ 이건 두 권다 사서 읽어야겠다 싶어서 일단 닫았습니다. 저는 가끔 그런 책이 있더라고요. 꼭 사서 메모하고 밑줄쳐야하는.
앗 그런 방법이ㅠ 저로선 각주 안 본 눈을 사고 싶을 정도였어요··· 앤 카슨의 책은 꼭 한번 읽어보리라 다짐하는데 자꾸 뒤로 밀리고 있네요. 책 추천도 감사합니다!
얼핏 대화를 훑어만 보다가 각주 이야기와 그리스 신화 니야기가 있어서 각주를 가리고 읽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스테리온이 미노타우로스임을 알게 되니 쾌감이 살짝 있네요. 한 번 더 읽고 돌아오겠습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또 다른 아스테리온의 놀이이다. 나는 그가 나를 찾아오고 그에게 우리 집을 보여 주는 척한다. (…) 가끔씩 나는 실수를 범하고, 그러면 우리 둘은 기분 좋게 웃는다.
알레프 87,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의식은 단지 몇 분만 지속된다. 내 손이 피로 물들지도 않았는데 그들은 차례로 하나씩 쓰러진다. 그들이 쓰러진 곳에 그들은 남고, 시체들은 한 복도를 다른 복도들과 구분하는 데 도움을 준다.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 모르 지만, 그들 중의 하나가 죽으면서 언젠가 나의 구원자가 도착할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때부터 나는 고독이 고통스럽지 않다. 그건 나를 구해 줄 사람이 살고 있고, 마침내 그가 일어나 먼지 위로 강림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내 귀가 세상의 모든 소리들을 들을 수 있다면, 나는 그의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나를 복도들이 더 적고 문들이 더 적은 곳으로 데려다 준다면 좋으련만. 내 구원자는 어떻게 생겼을까? 나는 생각한다. 그는 황소일까 아니면 사람일까? 혹시 사람의 얼굴을 지닌 황소일까? 아니면 나처럼 생겼 을까?
알레프 88,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아침 햇살이 청동 검에 비쳤다. 이제 칼에는 피의 흔적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믿을 수 있어, 아리아드네?" 테세우스가 말했다. "미노타우로스는 거의 방어하려고도 하지 않았어."
알레프 89,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아스테리온의 집] 완전히 동일한 한 사람도 관점에 따라서 둘로 갈라지고 분열될 수 있다는 것이 '아스테리온 놀이'가 아닐까 합니다. 동일한 신화적 대상이 3인칭의 영웅된 관점에서는 괴물 미노타우로스이지만, 1인칭으로 들어가면 스스로 고귀한 아스테리온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요. 우리는 미로 바깥에서 미로의 역사와 그 의미의 변천사와 미노타우로스의 신화를 자세히 논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미로 속에 들어간 사람으로서 아스테리온이 어떠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신화가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고, '괴물'은 언제나 타인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괴물 미노타우로스가 아니라 1인칭의 '나' 아스테리온으로 들어가는 경험은 허구의 장르인 소설로만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한번씩 어떤 소설을 볼 때, 이 작품이 다른 장르라면 어땠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봅니다. 예컨대 ⟨아스테리온의 집⟩이 영화였다면 어떨까요? 저로선 잘 그려지지 않습니다. 보르헤스가 의도했던 탐정 소설적인 구도는 오직 텍스트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좋든 싫든 관객에게 스크린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보여져야 하고, 또 스크린은 좋든 싫든 우리 바깥의 외부 대상을 시각적으로 재현해서 관객 앞에 내놓아야 하기 때문에 아스테리온의 목소리가 아니라 외양을 처음부터 드러내야 합니다. 그 점에서 영화는 시각적인 것에 일차적으로 묶여 있는 장르가 아닌가 합니다. 그렇다면 이 단편 소설에서 1인칭은 필연적인 선택일 것입니다. 우리는 타인의 삶을 얼마든지 논할 수 있지만, 자기 자신의 삶을 타인의 삶처럼 논하지는 못합니다. 소설은 그 불가능함을 잠시나마 가능하게 해주는 장르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소설은 1인칭의 내면으로 곧장 이행할 수 있다는 대단히 특출한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편 소설을 통해서 우리가 영웅의 관점에서 괴물 미노타우로스가 아니라 1인칭의 왕자 아스테리온을 경험할 수 있는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이 단편을 통해서 제가 알게 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괴물은 언제나 타인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연관성은 너무 방대하고 비밀스러워서 현재를 무효화하지 않고는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단 하나의 머나먼 사건조차 폐기할 수 없다. 과거를 변경한다는 것은 단 하나의 사건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그건 그 결과들을 무효로 만드는 것인데, 그 결과들은 무한하게 확장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것은 두 개의 세계사를 만드는 행위이다.
알레프 또 다른 죽음,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다중우주, 평행우주, 메타버스를 연상케하는 재미있는 소설이었습니다. :) 사실 이런 상황(기억의 왜곡, 같은 일에 대한 진술의 엇갈림, 자기가 말한 것도 또는 들은 것도 잊어버리는 망각) 살면서 크고 작게겪지 않나요? (상사가 지시하거나 의견을 말해놓고 망각하는 상황, 분명히 어떤 말을 들은거 같은데 다들 내가 잘못들은거라고해서 혼자 꿈 꾼건가 생각되는 상황 등등) 다음번에 이런일이 제게 생기면 이 작품이 생각날것 같네요. 두 개의 세계가 겹쳐지며 미처 갱신되지 못한데서 혼란이 오는거라고 😂 아, 제사ephigraph읽는 걸 좋아하는데 이 작품에는 제사가 없더군요.
그쵸··· 현실에서 이런 일을 만나면 분통 터질 겁니다🥲 모쪼록 이번 모임도 수고하셨습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또 다른 죽음~] 전반부 모임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정말 멋진 작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미리 수고하셨다고 인사 드립니다😆 사소한 잡담으로 시작하자면, 최근에 본 독일의 철학자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의 강연이 떠오릅니다. 그는 철학으로 깨달을 수 있는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로, 세상은 언어로 종속돼 있지만 언어는 진실의 표현 수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모든 객관적 주장에는 주관적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셋째는 과학적 사실을 포함한 진실은 세상과 완벽히 일치하지 않으며, 외려 진실은 타인에 의해 확인되어야 하는 정당성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근원적 한계로 인해 '유일한' 진실에 다가갈 수 없고, 다만 각자의 주관성에 매몰돼 있으며, 그리하여 오직 타인을 통해서만 주장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죽음⟩에도 비슷한 얘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어쩌면 한 개인의 역사란, 누군가의 망각 위에 또 다른 망각을 포개는 지난한 행위이고, 그 망각의 연쇄고리를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 안에서 이해하고 말하려는 욕망의 산물 이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본격적으로 본문 얘기를 해보면, 소설에 등장하는 페드로 다미안을 둘러싼 여러 사람의 기억이 얽히고, 그에 따라 각각이 서로 모순되는 현실들로 갈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소설에 나오는 주장/증언을 시간순으로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1) 페드로 다미안은 엔트레리오스의 괄레과이 출신입니다. 그는 1904년 우루과이 혁명 당시 아파리시오 사라비아를 추종하여 마소예르 전투에서 용맹히 싸웁니다. 이후 귀향하여 1946년 죽는 그날까지 조용히 여생을 살았습니다. 이는 화자인 보르헤스가 페드로 다미안으로부터 직접 들은 내용과 지인인 파트리시오 가논을 비롯한 주변 정황을 통해서 구성한 삶입니다. (2) 페드로 다미안은 마소예르 전투에 참가하긴 했으나 사실은 겁쟁이처럼 도망쳤습니다. 고향에서 40년 간 은둔하듯이 살았던 것은 전투에서 도망쳤다는 죄책감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죄책감 속에서 1946년 죽었습니다. 이는 마소예르에 전투에 참가했던 디오니시오 타바레스 대령의 기억을 통해서 구성한 다미안의 삶입니다. (3) 얼마간 시간이 흘러, 보르헤스는 후안 프란시스코 아마로 박사와 함께 타바레스 대령을 재회합니다. 아마로 박사의 기억에 의하면 페드로 다미안은 1904년 마소예르 전투에서 용감하게 선봉으로 진격하다가 적군의 총탄에 맞아 전사했습니다. 타바레스 대령은 어쩐 일인지 아마로 박사의 증언에 공감하면서도, 과거에 자신이 말한 내용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4) 한술 더 떠서, 소설 초반부에 1946년 다미안의 부고 소식을 전해주었던 보르헤스의 친구, 파트리시오 가논조차 '다미안이 누구더냐'고 묻는 지경에 이릅니다.
이어서 얘기해보면, (1)과 (2)에서 모두 다미안은 마소예르 전투에 참가했고, 이후 엔트레리오스로 귀향하여 조용한 여생을 살다 1946년에 죽습니다. 하지만 그 세부 내용은 조금 달라서 (1)에서 다미안은 마소예르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웠지만 (2)에서 다미안은 겁쟁이처럼 도망쳤음이 밝혀집니다. 그러나 (3)에 이르러서 다미안은 1904년 마소예르 전투에서 전사했음이 밝혀집니다. 요약하면, (1)과 (2)는 같은 현실을 공유할 수 있지만, (1)과 (3), (2)와 (3)은 같은 현실을 공유하지 못합니다. 죽은 시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4)로 인해서 앞선 사실 관계를 따지려던 보르헤스의 모든 수고가 의뭉스러워지고 있습니다. 각각의 사실 관계는 서로 모순됩니다. 인간의 불완전한 기억과 망각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그 각각을 논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느 하나를 택하면 나머지 것들은 모두 거짓이거나 불완전한 기억, 망각의 산물이 됩니다. 그런데 재밌게도 보르헤스는 서로 모순되는 세계를 하나로 합칠 수 있는 초자연적인 추측을 채택합니다. 이 추측을 (a)라고 부르면, (a) 울리케 폰 쾰만은 (1)과 (3)을 양립시킵니다. 페드로 다미안은 1904년 마소예르에서 전사했지만, 귀향하고자 하는 영혼의 강한 열망 덕분에 신은 40년 간 그를 고독한 그림자로 살도록 '잠시' 허락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조금 복잡해집니다. 울리케 폰 쾰만의 추측을 생각하면서 보르헤스는 두 개의 텍스트, 두 명의 인물을 떠올립니다. 바로 이탈리아의 신학자인 피에르 다미아니(Pier Damiani)와 단테의 ⟪신곡⟫ 천국 21편에 나오는 피에트로 다미아노(Pietro Damiano)입니다. 보르헤스가 떠올렸다는 ⟪신곡⟫의 두 시행은 “Poca vita mortal m'era rimasa /quando fui chiesto e tratto a quel cappello”으로 추측되는데, 영역본으로는 “Not much of mortal life was left to me /when I was sought for, dragged to take that hat”입니다. (여기서 hat은 추기경의 모자를 의미합니다. 단테에 따르면, 피에트로 다미아노는 주님의 종으로서 추기경이 되었으나 모든 성직에서 물러나 수도원에 들어가 평범한 수사로 일생을 마감하고 천국에 이른 인물입니다.) 정확한 사실은 알기 어렵지만, 단테의 피에트로 다미아노는 11세기 신학자 피에르 다미아니를 연상시키며, 보르헤스에 따르면 그는 '신이 한때 존재했던 것을 존재하지 않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요약하면, 보르헤스는 울리케 폰 쾰만의 초자연적 추측에서, 단테의 피에트로 다미아노와 11세기 신학자 피에르 다미아니를 떠올리고, 이 두 인물을 통해서 다시 피에르 다미안의 삶을 자신의 방식으로 추측합니다. 보르헤스의 추측을 편의상 (b)로 부르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b) 보르헤스는 (2)와 (3)을 양립시킵니다. 1904년 피에르 다미안은 마소예르 전투에서 도망쳐서 엔트레리오스에 숨어 살며, 언젠가 설욕할 그 날을 위해 전생(全生)을 가다듬습니다. 마침내 1946년, 다미안은 죽음 직전의 정신착란 상태에서 1904년의 마소예르로 가고, '그리스식 꿈의 그림자' 속에서 비로소 용맹하게 싸운 끝에 전사합니다.
역사 1)을 말살하고 역사 2)로 대체하는 과정의 시차에서 발생한 혼란을 화자/작가가 목격해버리고 만 것이군요. 하지만 진실을 곧이 곧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픽션으로 완성되었기에 특별대우를 받았고요. 전후 관계를 꼼꼼이 따져야해서 살짝 복잡한가 싶었지만 역시 두 번 읽어서 해결했습니다. 두 판본으로 교차해 읽으니 이해하기가 더 편했네요.
과거를 변경시키는 것은 단지 사실 하나를 바꾸는 게 아니다. 그것은 무한으로 펼쳐져 있는 그것의 결과들을 폐기시켜 버리는 것이다. 다른 말로 바꿔 말해 본다면 이러하리라. 그것은 바로 두 개의 세계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과 같다.
알렙 111,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아 저는 요즘 총기가 떨어지는지 이런 소설은 여러 번 안 읽으면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두 판본이 있다는 게 이럴 땐 좋은 것 같아요! 항상 모임 꼬박꼬박 참여해주셔서 감사해요! 또 뵐게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또 다른 죽음] 보르헤스는 이런 식의 추측이 "두 개의 세계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이라서, 의도치 않게 현실에서 혼란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합니다. 현실에서 페드로 다미안에 관한 주변 인물들의 증언이나 목격담이 서로 상충하거나, 더 이상 그를 기억할 수단이나 사람이 남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이런 "두 개의 세계 역사"에 동반하는 혼란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르헤스의 추측/상상이 지니는 특별한 점이 도드라집니다. 그것은 바로 (a)와 (b)로 이루어진 두 가지 추측이 일종의 픽션의 세계에 속하며, 픽션의 세계란 상식적인 세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상식적인 추측은 당연히 이런 초자연적인 추측을 배제할 것입니다. 타바레스 대령과 아마로 박사의 증언을 늙은이의 오락가락하는 정신이나 망각 탓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상식'에 따르면, 1904년에 전사한 다미안과 1946년에 죽은 다미안이 전혀 다른 이름을 지닌 두 인물이구나 동명 이인이라고 대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픽션은이런 상식을 염두에 두되, 상식에 매이지 않습니다. 사실에서 출발하되 사실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뭇사람들이 혼동과 망각을 말하면서, 별개로 치부하거나 미치광이의 헛소리라 부를 만한 사건들에서 단 하나의 이야기를 봅니다. 보르헤스로 추측되는 '나'는 현실의 논리를 따져서 '있을 법한 현실'을 채택하고 나머지를 모두 폐기하는 게 아닙니다. 현실의 논리를 넘어서 모순되는 것이 양립하는, 그리하여 '어떠한 것도 가능한 픽션'을 봅니다. 여기서 픽션의 역할이 무엇인지 드러나고 있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보르헤스는 다미안을 아는 가게 주인 아바로아가 죽은 이유는 다미안에 관한 모순된 기억을 너무 많이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모순된 기억이 공존하는 현실을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어서 죽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보르헤스는 왜 자신이 이런 모순 속에서도 죽지 않았는지 궁금해 합니다. 보르헤스는 그 이유로 '픽션'을 듭니다. 픽션이란 모순된 것의 공존이기 때문입니다. 전적인 화해는 아니지만 서로 모순되는 현실을 잠시 허용하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바꿔 말하면, 서로 상충하는 현실을 간직하고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픽션이 필요하다는 의미가 됩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보르헤스는 재밌게도 자신의 이러한 모든 추측을 의심합니다. 자신의 기억조차 의심하면서 앞서 서술한 증언들을 의뭉스럽게 만듭니다.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 과연 사실만 있었는지, 허위는 없었을지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11세기의 이탈리아 신학자 피에르 다미아니의 논문을 읽고 나서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피에트로 다미아노를 연상한 것처럼, 자신이 페드로 다미안이 아닌 인물을 페드로 다미안으로 불렀던 것은 아닌지 마지막까지 생각해봅니다. 그렇다면 보르헤스에게 이 픽션은 이런 의심의 수단임과 동시에 그 결과입니다. 이런 픽션적인 의심만이 모순된 것의 공존으로서 존재한다는 아이러니와 함께요. 마지막으로 짚어보고 싶은 것은, 보르헤스가 초반부에 언급한 랄프 웰도 에머슨의 시 ⟨과거⟩입니다. 보르헤스의 기억에 따르면, 친구 가논이 이 시를 번역하고 있다는 얘기와 함께 피에르 다미안의 부고를 전해왔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가논은 그런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에머슨의 시는 가논에 의해서 번역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에머슨의 시가 없는 셈 될 뿐 아니라 뒤집히기도 함을 말하는 것일까요? 마지막으로 에머슨의 시 ⟨과거⟩ 전문입니다. 한국어 번역은 Claude에게 간단히 규칙을 정해서 요청했습니다.
The debt is paid, The verdict said, The Furies laid, The plague is stayed, All fortunes made; Turn the key and bolt the door, Sweet is death forevermore. Nor haughty hope, nor swart chagrin, Nor murdering hate, can enter in. All is now secure and fast; Not the gods can shake the Past; Flies-to the adamantine door Bolted down forevermore. None can re-enter there,— No thief so politic, No Satan with a royal trick Steal in by window, chink, or hole, To bind or unbind, add what lacked, Insert a leaf, or forge a name, New-face or finish what is packed, Alter or mend eternal Fact.
알렙 에머슨, The Past,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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