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보르헤스 읽기] 『알렙』 같이 읽어요

D-29
이 일은 이전에도 일어났고 앞으로도 일어날 것이다. 너희들은 장작더미가 아니라 불의 미로를 지피고 있는 것이다. 만일 나를 태운 모든 불길이 여기서 합쳐진다면 이 땅에 다 들어갈 수도 없을 것이며, 천사들은 눈이 부셔 아무것도 볼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수없이 이렇게 말했다.
알레프 50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이 이야기의 끝은 오로지 은유로만 이야기할 수 있다. (...) 어쩌면 천국에서 아우렐리아누스가 자기와 판노니아의 요한(정통 교도와 이단자, 증오하는 자와 증오받은 자, 고발인과 희생자)이 불가해한 신에게는 단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하는 게 옳을 것이다.
알레프 신학자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신학자들] 모든 주장은 반박될 여지를 가지고, 정통은 이단을 통해서 자신을 공고히 하곤 합니다.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인데요, 아우렐리아누스와 판노니아의 요한의 반박문으로 인해서 단조파의 교주는 화형당하지만 단조파는 이후 광대파로 이어집니다. 광대파의 신도들은 금욕주의를 일상을 반전시켜서 고행이나 방종을 설교했는데요, 그 구체적인 양상은 조금씩 달랐지만 모두 혼란을 설교했습니다. 교리도 변형에 변형, 혼란에 혼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면서 나중에는 "시간은 반복을 묵인하지 않는다"는 정통 교리에까지 다다릅니다. 그 교리는 언젠가 단조파(환상파)를 반박하면서 아우렐리아누스와 판노니아의 요한이 주장했던 바와 겹치며, 정통 교리와 혼동될 수도 있는 이단의 교리입니다("두려워해야 마땅한 이단은 정통 교리와 혼동될 수도 있는 것들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아우렐리아누스는 요한이 과거 단조파를 반박하면서 썼던 말을 고스란히 인용하고, 요한이 현 이교도를 옹호한 발언을 했었다는 사실을 고발하게 됩니다. 판노니아의 요한이 과거 단조파에 반대하며 썼던 반박문이 시간이 흘러 광대파를 옹호하는 내용이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판노니아의 요한이 화형당하고 난 뒤, 공교롭게도 아우렐리아누스도 공교롭게도 수도원의 오두막에서 잠을 자다가 산불에 휩싸여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동그란 원형의 상징처럼, 시작과 끝, 정통과 이단, 고발자와 희생자, 아우렐리아누스와 판노니아의 요한이 본디 하나의 원을 이루고 있음을 암시하며 소설은 끝납니다.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반박문이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정통이나 이단으로 분류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꽤 흥미로웠습니다. 돌이켜보면, 아우렐리아누스와 판노니아의 요한이 이교도에 대한 반박문을 작성하는 과정은 온갖 인용으로 가득합니다. 성경 속 구절과 각종 신학서의 구절이 없었다면 반박문은 완성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인용이야말로 '다시 말하기'라는 점에서 두 사람은 이미 단조파와 환상파의 교리를 실천하고 있었음이 드러납니다. 좀더 엄밀히 말하면 인용은 '상황과 맥락을 달리하여 반복하기'입니다. 판노니아의 요한이 쓴 반박문은 정확히 같지만 시대와 상황이 바뀌자 정통에서 이단이 되고 있는 것을 보면 됩니다. 이 모든 사건들이 작품 초반에 플래시포워드로서 공공연히 암시되고 있음을 보는 것도 재미있는 감상 포인트입니다. 초반부에 단조파의 교주인 에우포르부스는 화형당하며 다음처럼 말한 적 있습니다.
⟨이 일은 이전에도 일어났고 앞으로도 일어날 것이다. 너희들은 장작더미가 아니라 불의 미로를 지피고 있는 것이다. 만일 나를 태운 모든 불길이 여기서 합쳐진다면 이 땅에 다 들어갈 수도 없을 것이며, 천사들은 눈이 부셔 아무것도 볼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수없이 이렇게 말했다.⟩
알레프 50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이 이야기의 끝은 오직 은유로만 이야기할 수 있다. 그것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 하늘의 왕국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아우렐리아누스는 하느님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하느님은 종교적 차이에 대해 너무 무관심해서 그를 판노니아의 요한으로 여겼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느님의 신성한 정신이 혼란스럽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일 수도 있다. 어쩌면 천국에서 아우렐리아누스가 자기와 판노니아의 요한(정통 교도와 이단자, 증오하는 자와 증오받은 자, 고발인과 희생자)이 불가해한 신에게는 단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하는 게 옳을 것이다.
알레프 59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SF식으로 말하면 ‘평행세계가 가능하냐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이다 사람도 죽이는 이야기’라는 생각을 하며 읽었습니다. 역사 속 인물들의 이름을 대거 사용하며 마치 역사 소설을 읽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재밌고요. 결말…너무 좋습니다. (?)
하하하. 뭔가 비유가 묘하게 와닿네요. 저를 포함 마지막 문장을 수집해 주신 분들이 많은걸 보니 다들 결말이 마음에 드셨나봐요. 전 특히 이 작품이 어려웠는데 모임지기님의 각 종파의 어원에 대한 해설, 다른 분들의 감상이나 문장수집을 보면서 어느 정도 힌트를 받아 읽어나갈 수 있었어요. 저는 단조파 교주, 판노니아의 요한, 아우렐리우스가 돌고 돌아 같은 결말을 맞게되는 부분, 아우렐리우스가 교묘하게 요한의 말을 인용하여 화를 불러오는 부분, 그리고 마지막 결말에서 이 모든 것이 헛되었음을 암시하는 부분이 제일 하이라이트로 기억에 남았습니다. "너희는 장작더미가 아니라 불의 미로를 지피고 있는 것이다." 이 표현 너무 멋졌어요.
저도 각주가 많이 붙는 만큼 어렵게 읽히더라고요. 황병하 역을 갖고 있는데 도서관에서 빌려온 송병선 역이 조금 더 편하게 읽혀서 이걸로만 읽고 있습니다. (왜 샀나…ㅎㅎㅎ) 인용하신 문장 저도 좋았습니다. 도입부에 흉노족의 파괴행위로 시작한 것부터 불과 미로. 화형이 서로 얽히며 이어지는 것. 이제 세번째 단편이지만 강렬함이 화르륵 타올라서 좋았어요.
한국어 문장으로 읽으면 황병하 선생님의 번역이 좀 거칠게 읽히긴 합니다. 그럼에도 최초 번역되었던 1990년대를 생각하면 정말 대단하다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황병하 선생님의 번역과 각주를 읽고 있으면, 당시 인터넷도 상용화되지 않았을 시기였을텐데도 불구하고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해박한 지식에 새삼 놀라게 됩니다. 송병선 선생님의 번역은 더 뒤에 나왔기 때문에 어떤 부분에서는 매끄럽게 읽히고, 또 일부 오역도 수정되었기 때문에 보르헤스를 처음 읽는 분에게는 아마 더 익숙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봅니다. 그렇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특정 작품에 한해서는 황병하 선생님의 번역도 대단히 훌륭하고, 그 특유의 맛이 있다고 봅니다. 양쪽 번역을 번갈아보다 보면 어느 한쪽 번역에서 그냥 지나친 부분도 다른 번역에서는 또 달리 보게 되어서 저에겐 더 좋더라고요.
한 번만 읽고 말 책이 아니니까 우선 송병선 역으로 다 읽고 좀 지나서 황병하 역으로 찬찬히 다시 살펴볼까 합니다. ^^
이번 작품은 평소보다 좀더 복잡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도 반복해서 읽다 보면 반복해서 나오는 메시지가 보이긴 합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평행세계보다는 평행이론 쪽에 더 가깝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플루타르코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폼페이의 죽음에 눈물을 흘렸다고 언급한다. 아우렐리아누스는 요한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지 않았지만, 그는 이미 자기 삶의 일부가 되어 버린 불치의 병에서 치료된 사람이 느낄 법한 감정을 느꼈다.
알레프 58,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어쩌면 천국에서 아우렐리아누스가 자기와 판노니아의 요한(정통 교도와 이단자, 증오하는 자와 증오받은 자, 고발인과 희생자)이 불가해한 신에게는 단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하는 게 옳을 것이다.
알레프 59,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전사(戰士)와 포로에 관한 이야기~] 이 단편은 간단한 듯하지만 많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습니다. 먼저, 원제는 ⟨HISTORIA DEL GUERRERO Y DE LA CAUTIVA⟩입니다. 황병하 선생님께서는 ‘전사와 포로에 관한 이야기’로 옮겼지만, 제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스페인어에서 'LA'는 여성 단수 명사 앞에 오는 정관사이기 때문에 ‘LA CAUTIVA’라고 하면 ‘여자 포로’나 ‘포로여인’로 옮길 수도 있습니다. 송병선 선생님께서는 ‘여자 포로’라고 앞선 맥락을 살펴서 좀더 명료히 풀어서 쓰고 있습니다. 시작하기에 앞서 다른 작품과 구분되는 점이라고 한다면, 보르헤스가 화자로서 중간에 직접 등장해서 마치 에세이처럼 진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인지 이번 작품은 역사에 대한 에세이이자 자신의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를 후일담처럼 전하는 소설의 형태를 모두 띱니다. 본문 얘기를 해보면, 보르헤스는 역사가 파울루스(Paulus Diaconus)가 자신의 책에서 고대 게르만족의 한 지파인 롬바르드족의 역사를 기술하면서 드록툴프트(Droctulft)라는 인물을 묘사했던 것을 떠올립니다. 드록툴프트는 롬바르드족이 로마의 도시 라벤나를 침공할 때 자기 부대를 탈영해서 오히려 라벤나를 방어하다가 전사했다고 알려진 역사 속 인물입니다. 전형적인 아르헨티나 평원의 '야만'을 대변하는 자가 로마의 도시인 '문명'의 편에 동조한 것입니다. 보르헤스는 드록툴프트가 "깨우친 자였고, 개종을 한 자"라고 말하면서, 그에게서 "마치 한때는 나의 것이었던 어떤 무엇을 다른 형태로 되찾은 느낌"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보르헤스가 야만에서 문명으로 움직인 드록툴프트에 전적으로 동조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보르헤스는 그 순간 전혀 다른, 사적인 기억을 떠올립니다. 그 기억이란 자신의 영국인 할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보르헤스의 할머니는 당시 경비대장이었던 할아버지가 머무르던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후닌 지역에서 살던 도중, 광장에서 한 영국인 포로여인을 만납니다. 그 여인은 영국 요크셔 출신으로, 부모님을 따라 일찍이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왔지만, 평원의 인디오들에게 습격받고 부모를 여읜 채 포로가 되어 인디오 추장의 부인이 되었습니다. 당시 포로여인은 아르헨티나 평원의 야만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었는데, 이따금 지역에 들러서 필요한 생필품을 사던 도중 보르헤스의 할머니의 눈에 띈 것입니다. 보르헤스의 할머니는 같은 영국인으로서 그녀를 측은히 여기며 대평원으로 돌아가지 말 것을 권합니다. 그러나 의외로 포로여인은 자신이 행복하다고 말하며 자신이 있던 평원을 택합니다. 이 단편에서 유심히 봐야할 점은, 보르헤스가 드록툴프트라는 역사적 기록을 읽으면서 자신의 할머니로부터 들은 개인적 기억을 떠올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보편적인 사료와 개인적인 기억이 맞닿는 지점에 보르헤스라는 화자가 있는 셈입니다. 분명, 아르헨티나의 평원으로서 '야만'과 도시로서 '문명' 사이에서 두 인물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습니다. 하지만 보르헤스에 이르러서 두 사람은 하나의 이야기로 이해되면서, 야만과 문명이라는 일견 극단적인 대립 사이에서 쌍방향의 화살표를 얻게 됩니다. 드록툴프트와 포로여인의 묘사를 황병하 선생님의 번역으로 비교해보겠습니다.
그는 멧돼지와 들소가 득실거리는 형용할 길 없는 숲에서 왔다. 그는 피부가 하얗고, 활기에 넘쳐 있었고, 잔인했고, 우주가 아닌 자신의 대장과 자신의 종족에 충성적이었다. 전쟁이 그를 라베나로 데려온다. (···) 그는 낮과 삼나무들과 대리석들을 본다. 그는 전혀 무질서하지 않게 한데 모여 전체성을 이루고 있는 어떤 것을 본다. 즉, 그는 석상들, 사원들, 정원들, 방들, 원형경기장들, 꽃병들, 기둥들, 탁 트인 정연한 공간들로 구성된 하나의 조직체, 말하자면 한 도시를 본 것이다.
알렙 68-69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그녀의 이야기 저쪽 너머에는 야만의 삶이 번득이고 있었다. 말 가죽으로 만든 천막, 가축들의 똥으로 지핀 모닥불, 새까맣게 그을린 고기와 생 내장을 포식하는 연회들, 새벽을 틈탄 은밀한 이동. 그리고 목장들의 습격, 고함 소리와 약탈, 전쟁, 웃통을 벗어젖힌 말 탄 전사들이 몰고 가는 수많은 소떼들, 일부다처제, 악취, 그리고 마술. 바로 이 야만 속으로 한 영국 여인이 전락해 들어갔던 것이다. (···) 습지 근처에 있는 한 농장에서 한 남자가 양의 목을 따고 있었다. 말을 탄 인디언 여자 하나가 마치 꿈에서처럼 할머니를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말에서 내리더니 양의 뜨거운 피를 마셨다. 나는 그녀가 이미 그러한 삶의 방식에 젖어 있어 그렇게 한 것인지, 아니면 할머니에 대한 도전과 상징적 표식으로서 그렇게 했는지 알지 못한다.
알렙 72-73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그 여자 포로의 운명과 드록툴푸트의 운명 사이에는 천삼백 년이라는 시간과 바다가 가로놓여 있다. 이제 그 두 사람은 똑같이 회복될 수 없는 존재이다. 라베나의 대의명분을 받아들이는 야만인의 모습과 황무지를 택하는 유럽 여자의 모습은 상반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은 어떤 비밀스러운 충동, 즉 이성보다 더 심오한 어떤 충동에 의해 휩쓸렸으며, 그들조차 설명할 수가 없었을 그 충동을 존중했다. 아마도 내가 들려준 두 이야기들은 단 하나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신에게는 이 동전의 양면이 똑같기 때문이다.
알레프 전사와 여자 포로에 관한 이야기,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보르헤스의 작품을 따라 읽다보니 작품들 중에서도 제가 더 좋아하는 갈래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특히 이번 작품같이 내용과 형식이 아름답게 맞아떨어지는 작품이 참 좋네요. (덜 사변적이라 그런가....) (단순화하자면) 야만에서 문명으로 간 전사와, 문명에서 야만으로 간 여자포로 / 고대의 역사적인 사실과 할머니에게 들은 기억의 역사 / 남성 전사와 여성 포로 / 이러한 대립항이 결국은 동전의 양면이라는 인식이 짧은 글 안에 아름답게 담겨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릴적 한 쪽에 물감을 짜고 겹쳐서 그림을 만들어내던 데칼코마니처럼, 방향은 반대지만 결국은 하나의 그림이 되는 아름다운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화자가 작가 자신임을 중간에 드러내는 게 재밌군요. 제목보고 살짝 긴장했는데 제목이 내용을 직관적으로 드러내는 이야기였네요. 글쎄요. 시작은 이것저것 인용하며 거창한데 저자가 난입한 이후 여자 포로의 이야기는 좀 빈약하단 느낌이 없지 않았고요… 드록톨푸트 쪽은 그가 경험한 야만과 문명이 동등하게 서술되어 있는데 영국인 여자 쪽의 서사는 야만 쪽에만 치중되어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균형이 맞지 않아서야….) 그래도 왠지 침을 꼴깍 삼키며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까 기대하는 맛은 여전합니다. “신에게는 이 동전의 양면이 똑같기 때문이다.”라는 마지막 문장은 앞서 읽은 <신학자들>과도 맞닿는 지점인데 좀 더 읽다보면 보르헤스의 종교관/신앙관이 더 드러날까 싶어 기대되기도 합니다.
그때 마치 꿈에서처럼 원주민 여자가 말을 타고 지나갔다. 그녀는 말에서 내려 따뜻한 양의 피를 마셨다. 나는 그녀가 이미 다른 방법으로는 행동할 수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도전과 그 제스처로써 그렇게 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 여자 포로의 운명과 드록툴푸트의 운명 사이에는 천삼백 년이라는 시간과 바다가 가로놓여 있다. 이제 그 두 사람은 똑같이 회복될 수 없는 존재이다.
알레프 65-66,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알레프'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1권. 20세기 현대 문학의 거장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를 대표하는 열일곱 편의 단편이 수록된 소설집. 중남미 문학의 권위자 송병선 교수가 새롭게 내놓은 이번 번역은 작가 특유의 메마르고 절제된 문체를 생생하게 살리고 의도적으로 사용된 추리, 환상 문학 등의 장르 문법을 존중하여, 현학적이고 고답적인 이미지에서 탈피한 '21세기의 보르헤스'를 지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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