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도 하나가 빛을 반짝인다. 오딸롤라는 어느쪽이 옳고, 어느 쪽이 그른지에 대해 판단이 서지 않는다. 그러나 마치 다른 사람들에게 도박이나 음악이 그러하듯 그는 순전히 위험 자체의 맛에 끌리는 그런 사람이다. ”
『알렙』 p.39,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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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oHey
“ 오딸롤라는 일꾼들의 마차 바퀴 소리 틈바구니로 반데이라가 몬떼비데오로부터 곧 도착할 거라는 말을 듣는다. 그는 이유를 묻는다. 누군가가 가우초가 된 한 외지인이 그의 위에 군림하려고 들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오딸롤라는 그게 단지 농담에 불과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그 얼토당토 않는 말이 사실이었으면 하고 바란다. 얼마 후 그는 반데이라가 정치가들 중의 한 사람과 적이 됐고, 그래서 그 정치가가 더 이상 그에게 도움을 주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
『알렙』 p.44,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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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oHey
거칠게 나누자면, 보르헤스 작품은 <틀뢴, ...>이나 <죽지 않는 사람들>, <바벨의 도서관> 같은 류의 알레고리로 가득한 작품과 <<불한당들의 세계사>>의 작품들이나 <죽어 있는 사람> 같은 날것 그대로의 야생성으로 가득한 가우초나 뒷골목 이야기로 대별되는 것 같습니다. <죽지 않는 사람들>을 읽고 나서 이 작품을 읽으니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오랜만에 보르헤스를 다시 읽으면서 그가 야만과 문명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뒤에 이어지는 <전사와 포로에 관한 이야기>와 연결해서 생각하니 더욱 그렇습니다.). '순전히 위험 자체의 맛에 끌'리는 오딸롤라와 같은 사나이들의 세계는 우리가 살아가는 곳과 아주 다른 우주처럼 느껴지지만, 정치가와 적이 된 두목이 몰락의 위기에 처하는 상황은 그 세계 또한 우리가 그 질서를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우주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반대로 우리 우주의 질서 또한 야생(?)의 힘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도요. 생각이 잘 정리가 안 되지만 읽으면서 대충 이런 생각들을 떠올렸던 것 같네요 ^^;
SooHey
뭘 잘못 눌렀는지 같은 글이 복붙되었네요;; 그믐에는 삭제 기능이 없나봐요;;;;;
모시모시
하하. 냉탕 온탕 공감되네요. :) 저는 보르헤스 작품들 원래 알고있던 건 <...푸네스>, <바벨의 도서관> 정도였고 <<픽션들>> 밖에 읽은게 없다 보니, 말씀하신 야생(!) 계열 이야기들이 매우 새롭게 다가와요. (굳이 제 선호를 따지자면 알레고리류? 다 이해하지 못해도 아름답다고 느끼도록 형식과 내용이 신비롭게 조화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보르헤스 작품 중 가우초가 등장하는 작품목록도 다 모아서 한 번 쭉 읽어보고 싶습니다.
매번 작품들에서 연결고리를 발견하며 재미있어하고 있는데, 이런 발견과 놀라움을 보르헤스 초심자의 특권(ㅎㅎ)이라 생각하며 즐겁게 따라가고 있습니다.
russist
아, 정말 공감되는 분류입니다.
보르헤스의 작품이 후기로 갈수록 좀더 간결한 이야기 형태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점도 한번 살펴볼 만한 지점입니다. 작가들이 젊고 혈기 왕성할 때는 전위적이고 복잡하고 사변적인 이야기를 쓰다가, 나이가 들면서 점점 간결하고 소박한 스타일을 보이는 것은 비단 글쓰기라는 장르에만 국한된 사례는 아닌 듯합니다. 결국 마지막에는 클래식, 순정으로 가는 게 아닌가 합니다. 돌고돌아서 자기가 앉아 있었던 터를 파서 보물을 발견하는 유의 이야기는 언제 어디서 어떤 식으로 읽어도 즐겁습니다😃
SooHey
아무래도 기운이 빠지니 군더더기를 줄이고 에너지를 아껴 정수를 향해 가게 되는 것이 아닐지.. ㅎㅎ 20대를 돌아보 면 부끄러워지는 것처럼... 이성복과 오규원의 시가 변화해 간 것처럼요. ㅎㅎ (사실 이성복은 그 과잉이 정수인데, 좀 아쉽긴 합니다..ㅠ) 보르헤스 또한 마찬가지겠지요. 아마 말년에 시력을 거의 잃어 구술에 의지해야 했던 탓도 있는 듯 하고요. 초기작도 후기작도 나름대로의 매력을 가지지만 그래도 두뇌 마사지를 해 주는 소싯적 작품들에 좀 더 끌리긴 합니다. :)
화제로 지정된 대화
russist
[~죽어 있는 사람] 오딸롤라가 파국으로 향해가는 조짐이 곳곳에서 보입니다.
평원에서 말을 달리며 "순전히 위험 자체의 맛에 끌리는" 오딸롤라의 성정만 봐도 그렇습니다. 그뿐 아니라 반데이라의 휘하에 들어가서도 야심과 충성심을 가지고, 그를 모시면서도 치욕감과 자부심이라는 일견 모순되는 두 감정을 동시에 느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일하게 된 목장의 이름이 공교롭게도 ⟨한숨(suspiro)⟩인 것도, 반데이라가 몬떼비데오로 오면서 "가우초가 된 한 외지인이 그의 위에 군림하려고 들기 때문"에 온다는 소문이 퍼진 것도 다가올 운명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오딸롤라는 저 모든 조짐이 자신을 향한 것임을 명확히 알지는 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본문에서는 '운명'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합니다. 운명은 언제나 다 지나간 다음에 인생의 어느 한 구간을 지칭하는 (불가능한) 삼인칭 시점을 상정한다는 점을 생각해보세요. 운명이 파국의 전조를 보여줄 때, 그 운명의 담지자인 한 개인이 그 조짐을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운명의 관객이 아니라 운명을 살아가는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운명의 관객이 되는 경험은 이런 소설을 읽음으로써만 가능합니다.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는 몇 번이라도 삶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조짐을 반추하고 읽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그러지 못합니다. 단지 우리는 매순간 어떤 선택을 내리고 있고, 그런 선택이 현재를 특정한 미래로 데려다 놓으리라는 사실을 알지만, 그 특정한 미래의 구체적인 양상을 알지는 못합니다. (여담이지만 운명을 내다보려는 버릇은 병이니, 얼른 고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소설과 삶의 차이라는 생각을 한번 해봤습니다.
quentin
운명의 관객이 아니라 주체란 말씀 좋네요. 저는 좀 더 지엽적으로 작중에 등장하는 지명과 인물들의 출신지에 더 흥미가 쏠렸습니다.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사이에 끼인 우루과이의 역학관계와 출신지의 한계를 극복한(?) 반데이라와 오딸롤라의 앞날 같은 것이요. 보르헤스 책을 제대로 다 읽는 건 처음이라 좀 긴장하면서 책을 펼쳤는데 어렵지 않게 읽혀서 다행입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russist
[신학자들~] 보르헤스적인 세계관과 미로를 잘 보여주는 소설이 아닌가 합니다.
소설은 이교인 단조(單調)파, 그리고 그러한 단조파의 변형 교파인 광대파의 교리를 보여주는데, 단조파의 교리란 역사가 원이며 다만 순환적인 시간관에 지배받는다는 것입니다. 정통과 이단의 대립과 그 공박 과정이 결국에는 '수레바퀴'라는 상징 속에서 하나로 합치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단편은 정리한다는 게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복잡한 세부 사항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런 글을 쓰는 일이야말로, 이 선형적인 매체의 의존하는 일이야말로 복잡한 미로를 되짚어가기 위한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를 던지는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설을 언급하기에 앞서서, 번역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은데요, 황병하 선생님과 송병선 선생님의 번역이 조금 달라서, 제가 언급을 할 때는 어느 한쪽으로 통일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원문에 등장하는 교파의 이름과 관련된 고유명사가 본 단편을 이해하는 데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자세히 조사해봤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혹 틀린 내용이 있으면 지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먼저 이교 종파의 이름인 원문으로 ‘monótonos’입니다. 황병하 선생님은 이를 '무변(無變)교'로, 송병선 선생님은 '단조(單調)파'로 옮겼습니다. 'monótonos'는 그리스어 접두사 'mono-(單一)'에 'tonos(accent, 억양)’를 결합해서 만든 단어로 추측되는데, 스페인어로는 ‘지겹도록 반복되고 변화가 없는’ 상황이나 사물을 형용하는 단어로 사용됩니다. 제가 보기에는 '무변교'보다는 '단조파' 쪽이 더 괜찮아 보이긴 합니다. 또한, 단조파의 또 다른 이름인 'anulares'는 두 번역자 선생님 모두 '환상교(파)'라고 옮기고 있습니다만, 이 부분은 번역자의 강한 의역 같습니다. 사전적인 정의를 찾아보면 'anulares'는 '고리, 반지를 낀'이라는 의미를 가진 형용사로서 라틴어에서 '반지'를 뜻하는 'anulus'에서 유래한 단어로 추측됩니다. 흔히 말하는 라틴 문화권에서 해당 단어는 모두 어떤 환형(環形), 수레바퀴의 이미지를 띠고 있습니다.
한편, 단조파의 변형 종파로 나오는 'histriones'를 황병하 선생님은 '어릿광대교'로, 송병선 선생님은 '광대파'로 옮겼습니다. 사전에 보면, ‘histriones’는 스페인어 ‘histrion’의 복수형으로서 ‘histrion’은 배우, 광대, 걸인을 의미함을 알 수 있습니다. 어원을 살펴보면, 이 단어는 라틴어 ‘histrio’에서 유래했으며, ‘histrio’는 아우구스투스 황제 이전 시대에 정통극에 종사하던 직업 배우를 의미했으며, 아우구스투스 시대 이후에는 비극, 희극, 무언극, 아텔란 소극 따위의 모든 연극 배우를 의미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번역상 차이가 없기 때문에 여기서는 간단히 '광대파'로 쓰겠습니다.
russist
“ 불길이 용서해 주었던 그 책은 특별한 숭배를 받게 되었고, 그 머나먼 지방에서 그 책을 읽고 또 읽었던 사람들은 저자가 더 훌륭한 반박을 위해 그 학설을 언급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잊게 되었다. ”
『알레프』 44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알레프'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1권. 20세기 현대 문학의 거장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를 대표하는 열일곱 편의 단편이 수록된 소설집. 중남미 문학의 권위자 송병선 교수가 새롭게 내놓은 이번 번역은 작가 특유의 메마르고 절제된 문체를 생생하게 살리고 의도적으로 사용된 추리, 환상 문학 등의 장르 문법을 존중하여, 현학적이고 고답적인 이미지에서 탈피한 '21세기의 보르헤스'를 지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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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st
“ 이 일은 이전에도 일어났고 앞으로도 일어날 것이다. 너희들은 장작더미가 아니라 불의 미로를 지피고 있는 것이다. 만일 나를 태운 모든 불길이 여기서 합쳐진다면 이 땅에 다 들어갈 수도 없을 것이며, 천사들은 눈이 부셔 아무것도 볼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수없이 이렇게 말했다. ”
『알레프』 50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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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시모시
“ 이 이야기의 끝은 오로지 은유로만 이야기할 수 있다. (...) 어쩌면 천국에서 아우렐리아누스가 자기와 판노니아의 요한(정통 교도와 이단자, 증오하는 자와 증오받은 자, 고발인과 희생자)이 불가해한 신에게는 단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하는 게 옳을 것이다. ”
『알레프』 신학자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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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로 지정된 대화
russist
[~신학자들] 모든 주장은 반박될 여지를 가지고, 정통은 이단을 통해서 자신을 공고히 하곤 합니다.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인데요, 아우렐리아누스와 판노니아의 요한의 반박문으로 인해서 단조파의 교주는 화형당하지만 단조파는 이후 광대파로 이어집니다.
광대파의 신도들은 금욕주의를 일상을 반전시켜서 고행이나 방종을 설교했는데요, 그 구체적인 양상은 조금씩 달랐지만 모두 혼란을 설교했습니다. 교리도 변형에 변형, 혼란에 혼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면서 나중에는 "시간은 반복을 묵인하지 않는다"는 정통 교리에까지 다다릅니다. 그 교리는 언젠가 단조파(환상파)를 반박하면서 아우렐리아누스와 판노니아의 요한이 주장했던 바와 겹치며, 정통 교리와 혼동될 수도 있는 이단의 교리입니다("두려워해야 마땅한 이단은 정통 교리와 혼동될 수도 있는 것들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아우렐리아누스는 요한이 과거 단조파를 반박하면서 썼던 말을 고스란히 인용하고, 요한이 현 이교도를 옹호한 발언을 했었다는 사실을 고발하게 됩니다. 판노니아의 요한이 과거 단조파에 반대하며 썼던 반박문이 시간이 흘러 광대파를 옹호하는 내용이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판노니아의 요한이 화형당하고 난 뒤, 공교롭게도 아우렐리아누스도 공교롭게도 수도원의 오두막에서 잠을 자다가 산불에 휩싸여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동그란 원형의 상징처럼, 시작과 끝, 정통과 이단, 고발자와 희생자, 아우렐리아누스와 판노니아의 요한이 본디 하나의 원을 이루고 있음을 암시하며 소설은 끝납니다.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반박문이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정통이나 이단으로 분류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꽤 흥미로웠습니다. 돌이켜보면, 아우렐리아누스와 판노니아의 요한이 이교도에 대한 반박문을 작성하는 과정은 온갖 인용으로 가득합니다. 성경 속 구절과 각종 신학서의 구절이 없었다면 반박문은 완성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인용이야말로 '다시 말하기'라는 점에서 두 사람은 이미 단조파와 환상파의 교리를 실천하고 있었음이 드러납니다. 좀더 엄밀히 말하면 인용은 '상황과 맥락을 달리하여 반복하기'입니다. 판노니아의 요한이 쓴 반박문은 정확히 같지만 시대와 상황이 바뀌자 정통에서 이단이 되고 있는 것을 보면 됩니다. 이 모든 사건들이 작품 초반에 플래시포워드로서 공공연히 암시되고 있음을 보는 것도 재미있는 감상 포인트입니다. 초반부에 단조파의 교주인 에우포르부스는 화형당하며 다음처럼 말한 적 있습니다.
russist
“ ⟨이 일은 이전에도 일어났고 앞으로도 일어날 것이다. 너희들은 장작더미가 아니라 불의 미로를 지피고 있는 것이다. 만일 나를 태운 모든 불길이 여기서 합쳐진다면 이 땅에 다 들어갈 수도 없을 것이며, 천사들은 눈이 부셔 아무것도 볼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수없이 이렇게 말했다.⟩ ”
『알레프』 50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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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st
“ 이 이야기의 끝은 오직 은유로만 이야기할 수 있다. 그것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 하늘의 왕국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아우렐리아누스는 하느님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하느님은 종교적 차이에 대해 너무 무관심해서 그를 판노니아의 요한으로 여겼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느님의 신성한 정신이 혼란스럽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일 수도 있다. 어쩌면 천국에서 아우렐리아누스가 자기와 판노니아의 요한(정통 교도와 이단자, 증오하는 자와 증오받은 자, 고발인과 희생자)이 불가해한 신에게 는 단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하는 게 옳을 것이다. ”
『알레프』 59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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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ntin
SF식으로 말하면 ‘평행세계가 가능하냐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이다 사람도 죽이는 이야기’라는 생각을 하며 읽었습니다. 역사 속 인물들의 이름을 대거 사용하며 마치 역사 소설을 읽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재밌고요. 결말…너무 좋습니다. (?)
모시모시
하하하. 뭔가 비유가 묘하게 와닿네요.
저를 포함 마지막 문장을 수집해 주신 분들이 많은걸 보니 다들 결말이 마음에 드셨나봐요.
전 특히 이 작품이 어려웠는데 모임지기님의 각 종파의 어원에 대한 해설, 다른 분들의 감상이나 문장수집을 보면서 어느 정도 힌트를 받아 읽어나갈 수 있었어요.
저는 단조파 교주, 판노니아의 요한, 아우렐리우스가 돌고 돌아 같은 결말을 맞게되는 부분, 아우렐리우스가 교묘하게 요한의 말을 인용하여 화를 불러오는 부분, 그리고 마지막 결말에서 이 모든 것이 헛되었음을 암시하는 부분이 제일 하이라이트로 기억에 남았습니다.
"너희는 장작더미가 아니라 불의 미로를 지피고 있는 것이다." 이 표현 너무 멋졌어요.
quentin
저도 각주가 많이 붙는 만큼 어렵게 읽히더라고요. 황병하 역을 갖고 있는데 도서관에서 빌려온 송병선 역이 조금 더 편하게 읽혀서 이걸로만 읽고 있습니다. (왜 샀나…ㅎㅎㅎ) 인용하신 문장 저도 좋았습니다. 도입부에 흉노족의 파괴행위로 시작한 것부터 불과 미로. 화형이 서로 얽히며 이어지는 것. 이제 세번째 단편이지만 강렬함이 화르륵 타올라서 좋았어요.
russist
한국어 문장으로 읽으면 황병하 선생님의 번역이 좀 거칠게 읽히긴 합니다. 그럼에도 최초 번역되었던 1990년대를 생각하면 정말 대단하다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황병하 선생님의 번역과 각주를 읽고 있으면, 당시 인터넷도 상용화되지 않았을 시기였을텐데도 불구하고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해박한 지식에 새삼 놀라게 됩니다.
송병선 선생님의 번역은 더 뒤에 나왔기 때문에 어떤 부분에서는 매끄럽게 읽히고, 또 일부 오역도 수정되었기 때문에 보르헤스를 처음 읽는 분에게는 아마 더 익숙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봅니다. 그렇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특정 작품에 한해서는 황병하 선생님의 번역도 대단히 훌륭하고, 그 특유의 맛이 있다고 봅니다. 양쪽 번역을 번갈아보다 보면 어느 한쪽 번역에서 그냥 지나친 부분도 다른 번역에서는 또 달리 보게 되어서 저에겐 더 좋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