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잘 숙지했습니다♡
(4) [보르헤스 읽기] 『알렙』 같이 읽어요
D-29
수서동주민
화제로 지정된 대화
russist
[#일정과 규칙] 『알렙』에 수록된 전반부 8개의 단편을 3일에 한 편씩 읽습니다. 일정은 아래와 같습니다😀
⏤죽지 않는 사람들 (4/1-4/3)
⏤죽어 있는 사람 (4/4-4/6) ※ 4/7은 쉽니다.
⏤신학자들 (4/8-4/10)
⏤전사(戰士)와 포로에 관한 이야기 (4/11-4/13) ※ 4/14은 쉽니다.
⏤따데오 이시도르 끄루스(1829-1874)의 전기 (4/15-4/17)
⏤엠사 순스 (4/18-4/20) ※ 4/21은 쉽니다.
⏤아스테리온의 집 (4/22-4/24)
⏤또 다른 죽음 (4/25-4/27)
간단히 두 가지 규칙을 공유합니다.
1. 단편의 시작과 끝에 제가 간단히 코멘트를 달고 [화제]를 지정해놓겠습니다. 해당 단편에 관한 대화를 나눌 할 때는 [이 대화에 답하기] 기능을 활용해 주세요. 그래야 나중에 참여하는 사람도 [게시판] 기능을 활용해서 각 단편의 대화 타래를 보고 흐름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2. 인용구를 공유해주실 때는 [책 꽂기]나 [문장 수집] 기능을 활용해주세요. 일반적인 대화와 구분하기 위함입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russist
[죽지 않는 사람들~] 첫 번째 단편입니다. 첫 단편부터 꽤 복잡한 구성을 보입니다. 간략히 구조를 살펴보면, 화자가 등장해서 첫 꼭지와 마지막 꼭지(후기)에서 화자의 지인인 뤼생즈 공주가 발견한 한 원고를 얻게 된 경위와 그 후기를 밝히고 있습니다. 문제의 원고는 로마 출신의 군단장인 플라미니오 루포가 쓴 것으로서 '죽지 않는 사람들의 도시'를 찾아 나서게 된 이야기가 담겨 있으며, 원고는 다시 플라미니오 루포가 쓴 다섯 개의 장(章)과 조셉 카르타필루스가 쓴 하나의 후기로 나뉩니다.
단편을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호메로스의 배경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호메로스는 기원전 750년경에 고대 그리스 이오니아 지방에서 활동하던 유랑시인으로서 그 유명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저자입니다. 하지만 저자의 출신지나 가계 계보에 대해서는 모호한 터였습니다. 그러다가 18세기에 접어들어, 일부 문학학자들이 유일 저자로서 호메로스의 실체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합니다. 호메로스 논쟁으로도 불리우는 이 논쟁은 마치 셰익스피어 논쟁처럼 작가가 한 사람인지 아니면 여러 사람인지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합니다. 양측 모두 논리와 근거가 탄탄했는데, 호메로스가 한 사람이 아닐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호메로스의 양대 서사시에서 한 사람이 썼다고는 볼 수 없는 텍스트상의 무수한 모순과 불일치를 그 증거로 제시해왔습니다.
논쟁은 20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어느정도 의견에 일치를 보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번역가 박중서 선생님의 설명에 따르면, 호메로스의 대표적인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문자로 정착되기 이전의 시대에서 구전되어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호메로스는 구전의 시대에서 기술(記述)의 시대로 이행하는 과정에 놓여 있던 인물로서, 호메로스가 당시 구전되던 서사시들을 지면 위에서 다만 집대성했을 것이라는 추측입니다. 우리는 흔히 작가라고 하면, 머릿속에서 독창적으로 구상한 얘기를 백지 위에 펼쳐놓는 존재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작가의 역할과 범위를 비교적 넉넉하게 인정합니다. 이전까지 구심점 없이 흩어져 있던 텍스트를 저자라는 필터를 통해 편집하거나 해석하는 행위까지도 저술 행위로 보는 것이죠. 호메로스의 경우도 마찬가집니다. 양대 서사시를 쓰기 이전의 시대에는 이야기라는 것이 시인과 사람들의 입을 오르내리며 조금씩 첨삭을 거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집대성해서 지면에 옮기다 보면 자연히 한 사람의 작품이라고 볼 수 없는 불일치가 도드라집니다. 이렇게 보면 호메로스는 양대 서사시를 머릿속에서 구상하고 지면 위에 쓰는 고전적 의미의 작가라기보다, 당시 구전되던 이야기를 자신의 통일된 기준으로 선별하고 첨삭하고 배치한 일종의 기록자이자 편집자로서 작가였던 셈입니다. (보르헤스 작품 전반에서 편집자이자 문헌학자, 필사가이자 사서로서 작가상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이는 플라미니오 루포의 원고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russist
“ 호머는 ⟪오디세이⟫를 지었다. 만일 무한한 정황들과 무한한 변화들을 가진 어떤 무한한 시간을 상정해 본다면 적어도 한번 ⟪오디세이⟫가 씌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아무도 아닌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단 한 사람의 죽지 않는 인간은 모든 죽지 않는 인간들이다. 마치 꼬르넬리우스 아그리빠처럼, 나는 신이고, 나는 영웅이고, 나는 철학자고, 나는 마귀이고, 나는 세계다. 이것은 바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따분한 방식으로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
『알렙』 28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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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시모시
이 인용을 읽고 지난달에 읽은 <칼의 형상>에서 "한 사람이 어떤 일을 한다면, 그건 마치 모든 사람이 그 일을 한 것과 마찬가지요. (...) 나는 다른 사람들이고, 다른 누군가는 모든 사람이며, 셰익스피어도 어떤 관점에서 보면 저 가엾은 존 빈센트 문이라오." 이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틀뢴....>에 저자주로 달렸던 "셰익스피어의 구절 하나를 여러 차례 반복하여 읊는 모든 사람들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이다." 라는 문구도요.
지난번 모임에서 말씀해주셨 듯이 셰익스피어도 저자 논쟁이 있는걸 감안하니 호메로스와 셰익스피어를 함께 보게 되네요. :) 호메로스에 대한 이야기 감사드립니다.
russist
맞아요. 모든 사람은 한 명의 사람이고 한 명의 사람은 모든 사람을 대변할 수 있다는 일견 궤변 같아 보이는 주장은 보르헤스 작품 전반에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보르헤스가 자주 성서를 인용하면서, 십자가에 매달려 모든 인간의 죄를 대속한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인 것 같아요.
모시모시
“ 나는 미로를 지나왔지만, 반짝거리는 ‘죽지 않는 사람들의 도시’는 나를 공포와 혐오로 가득 채웠다. 미로는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지어진 구조물이다. 즉, 과도할 정도로 대칭을 이루는 그 건축물은 그런 목적에 종속되어 있다. 내가 어설프게 살펴보았던 이 궁전의 건축 구조는 아무 목적도 띠고 있지 않았다. 그곳에는 막다른 복도들, 결코 닿을 수 없는 높은 창문들, 독방이나 텅 빈 구멍으로 이끄는 웅장하고 화려한 문들, 층계와 난간이 아래쪽으로 매달려 거꾸로 된 믿을 수 없는 계단들이 즐비했다. 그리고 거대한 벽의 한쪽 구석에 가볍게 걸려 있는 또 다른 계단은 두세 번 빙빙 돌다가 원형 지붕의 상단에 드리운 어둠 속에서, 그 어느 곳에도 이르지 못한 채 사라지고 있었다. ”
『알레프』 죽 지 않는 사람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알레프'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1권. 20세기 현대 문학의 거장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를 대표하는 열일곱 편의 단편이 수록된 소설집. 중남미 문학의 권위자 송병선 교수가 새롭게 내놓은 이번 번역은 작가 특유의 메마르고 절제된 문체를 생생하게 살리고 의도적으로 사용된 추리, 환상 문학 등의 장르 문법을 존중하여, 현학적이고 고답적인 이미지에서 탈피한 '21세기의 보르헤스'를 지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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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시모 시
저는 죽지 않는 사람들의 도시에 대한 묘사가 인상적이었어요.
죽지 않는 사람들의 도시를 젖과 꿀이 흐르는 유토피아라기 보다는 황량하고 공포와 혐오를 일으키는 곳으로 묘사한 점이 보르헤스가 '불멸'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있었나 짐작해보게 했습니다.
필연적으로(?!) 에셔의 작품도 떠올랐고, 찾다보니 Miguel Herranz라는 사람이 이 묘사에 영감을 받아 그린 스케치도 있네요. :) https://mherranz.myportfolio.com/the-city-of-the-immortals
제가 상상한 건 Herranz의 스케치보다는 조금 더 클래식한 모습이었어요. :)
russist
이렇게 그림으로 보니 또 다르네요! 멋집니다...
SooHey
제가 가진 『알렙』의 면지에 '05. 4'라고 적혀 있는 걸 보니 『픽션들』처럼 19년 전쯤 읽었던 모양입니다. 『픽션들』 못 지 않게 좋아했는데, 뭘 알고 좋아했었는지 모르겠네요. ㅎ 아마 그 미스테리하면서 신비로운 분위기와 삶과 세계에 대해 생각하도록 자극하는 내용들에 홀렸던 게 아닌가 합니다.
그때도 어렴풋이 느끼긴 했지만 다시 읽으니 결국 이 소설이 하고자 한 이야기는 첫머리에 던져둔 베이컨의 말로 수렴되는 것 같습니다. "지구 아래에 새로운 것은 없"으며 "모든 지식은 단지 회상일 뿐"이며 "모든 새로운 것은 단지 망각의 결과일 뿐"이라는 제사의 말은 "끝부분에 가까워지면서 기억의 영상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오직 남아 있는 것은 '말들'뿐이다"라는 작품 말미의 문장과 수미상관을 이루면서 이야기들, 생각들, 철학들은 과거의 그것들의 재해석 또는 재창조일 뿐이라는 작가의 생각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는 듯합니다.
「바벨의 도서관」으로 묘사되었던, 닫혀 있으면서도 무한한 그 도서관에서 보르헤스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본 것일까요? 그걸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오르는 느낌입니다;
russist
저도 오래간만에 다시 읽으면서 느낀 건데 정말 이 단편 하나만으로도 할 말이 많아서 책 한 권도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너무 재밌지 않나요!?
SooHey
닫혀 있지만 무한한... 어렵고 재미있는... 마성의 작가라 하지 아니할 수가 없네요 ㅎㅎ;;
화제로 지정된 대화
russist
[~죽지 않는 사람들] 이어서 얘기해보면, 문제의 원고의 마지막 부분에서 골동품상이었던 조셉 카르타필루스는 '나'로 추정되는 플라미니오 루포의 기록 곳곳에서 두 사람 이상의 흔적이 엿보인다고 말합니다. 호메로스의 양대 서사시에서 한 사람의 것이라고 볼 수 없는 텍스트상의 불일치와 모순이 도드라지는 것처럼요. 보르헤스는 애당초 저자의 실체와 원전으로서 지위가 모호한 과거의 고전 작품을 다시 패로디하는 수법을 즐겨 씁니다. ⟪픽션들⟫의 ⟨돈키호테의 저자, 삐에르 메나르⟩에서도 이미 한 차례 살펴본 바 있습니다.
플라미니오 루포가 원시 혈거인으로 알고 있던 '아르고스'가 다름 아닌 호메로스였음을 알게 되는 대목에서, 호메로스는 정작 그리스어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모습까지 보입니다. 플라미니오 루포가 아르고스에게 ⟪오디세이아⟫에 대해서 무얼 아느냐고 묻자, 아르고스는 "아주 조금"이라고 대꾸하면서 자신이 ⟪오디세이아⟫를 "창조한지 천백 년의 세월이 흐른 것 같소"라고 말합니다. 황병하 선생님의 번역에서 이 부분은 '창조하다'라고 옮겼지만 송병선 선생님은 '만들다'로 옮겼습니다. 영어판에서 해당 대목은 “since last I wrote it”이고 원문인 스페인어 버전에서는 “desde que la inventé”입니다. 원문은 ‘write’나 ‘creat’보다는 ‘invent’에 더 까가운 셈입니다. 그러므로 문제의 원고는 전통적 의미로 집필(write)됐다기 보다는 구성되고 만들어졌다(invent)고 해도 될 것입니다. 알다시피 영어 단어에서 'invent'는 단순히 만든다는 의미만 가지고 있지 않고 ‘invent an excuse’처럼 쓰여서 날조한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음을 생각하면 꽤 의미심장한 표현입니다. 본문에서는 이런 대목도 나옵니다. "우리는 현실을 쉽게 받아들인다. 아마도 그것은 그 어느 것도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관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인간은 '죽음'을 생각하는 종족입니다. 죽음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의 특성을 보여줍니다. 인간을 제외한 거의 모든 동물은 '죽음'에 대한 관념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했습니다. 이런 죽음 관념에서 인간의 필멸성이 부각되고, 그에 따라 종교가 생겨나면서 인간의 불사성이 신앙 안에서 숭배됩니다. 현생을 넘어서는 "세계를 무한의 숫자 속에 담아 그것들을 현세에 대한 상이나 벌로 운명지어 놓"는 식으로 종교가 기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지 않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그들이 도시를 구축해놓고도, 다시 뱀을 잡아먹고 언어로 의사소통하지 않는 원시 혈거인으로 되돌아갔다는 점을 생각해보세요. 죽지 않는 사람들에게 도시란 "모든 외제적 노고라는 게 헛되다는 것을 깨닫게 된 단계에 이르렀음을 알려주는 표적물"입니다. 생각해보면 죽음이라는 관념은 사람들을 애상적으로 만듦과 동시에, 한계 지어진 시간 안에서 무엇이 소중하고 무엇이 소중하지 않은지를 선별하게 해줍니다. 반대로 죽지 않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무한한 시간은 모든 것의 의미를 퇴색시킵니다. 마침내 이루어낸 것들을 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이 되는' 보르헤스적인 역설이 도출합니다. 무한한 시간 속에서 조셉 카르타필루스와 플라미니오 루포와 아르고스와 호메로스는 각기 다른 삶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무한한 시간을 사는 단 한 명의 죽지 않는 사람으로 수렴합니다.
송병선 선생님의 번역을 기준으로 4장 마지막 부분에서 "단 한 번만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그 어떤 것도 정확하게 길을 잃어버릴 위험에 처해 있지는 않다(Nothing can occur but once, nothing is preciously in peril of being lost)”는 번역은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황병하 선생님의 번역에서는 이 부분이 아예 누락돼 있습니다.) 제 생각에 이 부분은 '길'에 대한 언급이라기보다는 불사성에 대한 언급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습니다. 즉, '단 한 번만 일어나는 일은 없으며, [무한한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은] 소중한 것을 잃을 위험에 처하지 않는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유한한 시간 안에서만 인간은 무언가를 소중하다고 말할 수 있고, 모든 사람이 아닌 개인으로서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루포의 원고 마지막 부분에서 '나'가 보이는 감상이 이해가 됩니다. 놀라운 점은 원고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 '나'가 경험한 불사성이 필멸성으로 역전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무한한 시간 속에서 죽지 않기 때문에 모든 인간의 삶을 경험할 수 있었지만, 모든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나' 역시 역설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마지막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russist
“ 남아 있는 것은 단지 ⟨말들⟩뿐이다. 나는 시간이, 한때는 나 자신을 의미했던 ⟨말들⟩을 그 많은 세기 동안 나를 동반하고 다녔던 어떤 운명을 상징했던 ⟨말들⟩과 혼동되도록 만들었을 거라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다. 나는 호머였던 것이다. 간단히 말해 나는 마치 율리시즈처럼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될 것이다. 간단히 말해 나는 모든 사람이 될 것이다. 즉 나는 죽을 것이다. ”
『알렙』 35-36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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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시모시
저도 마지막 결말 좋았어요. '불사성에서 필멸성으로의 역전' 이라니 표현이 멋지네요. 배워갑니다.
그래놓고 그 뒤에 1950년의 후기를 덧붙여서 “끝이 가까워지면 기억의 모습들은 남아 있지 않고, 단지 단어만 남는다.”는 말을 재인용하는데 묘하게 이 작품의 제사(베이컨의 에세이에서 인용한)와 공명하며 마무리가 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제사 좀 멋지지 않나요? 어디 써먹고 싶음)
보르헤스의 소설은 다 이해 못해도 느낌적인 느낌(!)으로 읽어나가고 있어요. 모임이 저에게는 큰 도움이 됩니다.
russist
네 재밌게 읽어주셨다면 감사합니다:) 저는 제사를 그냥 넘겼는데 다시 읽어보니 의미심장하네요!
SooHey
생각이 증발하기 전에 쓰려고 다른 글들을 읽지 않고 급하게 제 생각을 썼는데, 저와 같은 생각을 하셨군요! 반갑습니다 :)
SooHey
조셉 카르타필루스에 대한 역주를 보면서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의 주인공(?) 아하스 페르츠가 떠올랐습니다. 검색해보니 전설 속 '방황하는 유대인'은 아하스베루스, 아하수에로라는 이름으로 전해지는데 카르타필루스라는 이름도 언급되고 있습니다.
방황하는 유대인 전설이 제대로 쓰여진 최초의 기록은 웬도버의 로저가 쓴 것을 기초로 하는 《역사의 꽃(Flores Historiarum)》이라는 서적인데 이야기의 배경은 1228년경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1228년 영국을 방문한 아르메니아의 대주교가 세인트올번스 수도원에서 한 이야기인데 카르타필루스라는 유대인 구두장이가 십자가를 끌고가는 예수에게 '얼른 꺼져라, 왜 여기서 쉬고 있냐?'고 폭언을 퍼부었고 예수님이 '나는 이렇게 서서 쉬지만, 너는 최후의 날까지 계속 가야 하리라(쉬지 못하리라)'고 저주하는 바람에 죽지 못하고 영원히 떠돌게 되었다고 한다. 카르타필루스는 이후 기독교로 개종하여 세계를 떠돌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게 된다. https://namu.wiki/w/%EB%B0%A9%ED%99%A9%ED%95%98%EB%8A%94%20%EC%9C%A0%EB%8C%80%EC%9D%B8
호메로스와 마찬가지로 카르타필루스 역시 예수 재림의 날까지 죽지 못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불멸하며 전해지는(하지만 전해지며 변형되는) 이야기 자체에 대한 알레고리가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
russist
이런 얘기도 있군요! 다시 각주를 읽어보니, 이름 하나하나에도 숨겨져 있는 역사적인 디테일에 새삼 놀라게 됩니다.
quentin
즐겁게 읽었습니다. 액자구성으로 뭔가 진실성을 더 하려는 듯한 능청스러움이 재밌었어요. 혈거인이 호메로스임이 밝혀지는 장면이 대단했네요. 이야기가 결국 제사로 수렴한다는 여러분의 말씀에 저도 동의가 되고요. 결말을 읽으며 좀 뭉클했는데 죽지 않는 사람(들)은 결국 ‘이야기꾼’이 아니겠는가…하는 생각도 하게되고요.
읽은지 오래되어서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는데 미로의 묘사가 «바벨의 도서관»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물론 미로의 역할이랄까 의미는 상당히 다릅니다만..
(저 윗 글에 붙이려고 했는데…그믐 사용법을 아직 잘 모르겠네요.)
알레프'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1권. 20세기 현대 문학의 거장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를 대표하는 열일곱 편의 단편이 수록된 소설집. 중남미 문학의 권위자 송병선 교수가 새롭게 내놓은 이번 번역은 작가 특유의 메마르고 절제된 문체를 생생하게 살리고 의도적으로 사용된 추리, 환상 문학 등의 장르 문법을 존중하여, 현학적이고 고답적인 이미지에서 탈피한 '21세기의 보르헤스'를 지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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