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승환 시인. 문학평론가와 함께 보들레르의 『악의 꽃』 읽기 2

D-29
90번 시 <일곱 늙은이>를 다시 읽어보면서 등이 거의 ‘직각’으로 굽은 상태로, 넝마를 주워담은 채 진흙길을 힘겹게 나아가는 한 노인의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이 중에서 ‘바로크풍 유령’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바로크풍’은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면 좋을까요?
이게 원문에서도 baroque로 되어있는데요. 영어로는 strange, odd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보들레르가 1864년 벨기에에 2년 있으면서 여러 바로크풍 교회들을 다니면서 바로크풍 예술에서 영감을 받은 듯한데요. 여기서 style jesuite (예수회 양식)와 style joujou (장난감 양식?)와 루벤스 양식과의 조화를 발견하고 감명받았다고 하는데요. 바로크풍 양식에서 그는 antiquite nouvelle (새로운 옛날)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제가 찾아본 논문에서 (프랑스어여서 죄송) 보들레르는 baroque를 한 시대의 양식이 아니라 좀 다른 의미의 형용사로 썼다고 합니다. Baroque의 동의어인 bizarre한 느낌으로 썼을지 모르지만 이 논문의 저자는 보들레르가 또 다른 의미로 baroque 를 썼다고 합니다. 이 글을 제가 어설프게나마 번역해보면: '바로크는 비어있는 여백을 싫어했다. 보들레르는 거기에서 원죄에 얽매인 인류의 상징을 볼 수 있었다. 웅장한 예수회 양식의 설교단 앞에서 그는 원죄로부터 세상이 새로 재현되는 것을 보았다' https://www.academiedesbeauxarts.fr/sites/default/files/inline-files/Colloque-Baudelaire-Andr%C3%A9%20Guyaux.pdf
위의 글에서 보들레르는 Malines의 Saint-Pierre-et-Paul 교회에서 고해성사 의자들이 벽을 따라 쭉 붙여서 진열되어 있는 걸 보고 원죄에 사슬로 묶여 있는 인류를 보았다고 하는데요. 이처럼 원죄에 묶여있는 인류의 사슬을 불멸의 얼굴을 지닌 일곱 명의 똑같은 쌍둥이들의 똑같은 걸음걸이로 빈틈없이 나아가는 바로크풍 양식의 예술같은 행렬에서 보았던 게 아닐까요?
그리고 저는 '는개'라는 표현을 이 시에서 처음 알게 되었는데요. 원서에는 그냥 brouillard (안개)인데 그걸 안개비와 이슬비 사이 정도의 '는개'로 표현한 번역가 분의 표현력이 멋집니다. '누런'과 '는개'는 뭔가 그냥 안개보다 더 alliteration도 느껴지고 더 늘어지는 듯이 잘 어울리네요. 그 뒤에 오는 '누런 누더기'와도 두운이 맞고요. 그리고 이 시에서 한 명의 노인이 아니라 계속 반복되고 증폭되는 노인들의 모습이 나오는데요. '나는 일곱 번을 헤아렸다, 일분마다 하나씩. 늘어나고 늘어나는 이 음산한 늙은이를!' '그 추악한 일곱 괴물이 불멸의 얼굴을 지녔다는 걸!' 그 외에 '똑같은 허울이 그 뒤를 따랐다' '무엇 하나 구별되지 않았다.' '똑같은 지옥에서 나온~ 쌍둥이는~ 똑같은 걸음걸이로 ' '똑같은 전율' '쌍둥이를' '하나를 둘로 보는' 이렇게 자기 자신을 복제하는 듯이 똑같은 쌍둥이들이 하나 둘 복제되는 걸 보고 보들레르가 도시에서 마치 판에 찍듯이 화폐나 책이나 상품들이 복제되는 양상으로 인간들이 획일화되고 상품화되는 양상을 그렸다고 보는데요. 이들은 끊임없이 복제되고 마치 썩지 않는 플라스틱처럼 계속 죽지도 사라지지도 못하고 지옥을 떠돌아다닙니다. 저주받은 불멸이죠.
작년에 화가 라울 뒤피의 전시를 본 적이 있는데, 이제 다시 보니까 뒤피가 <동뮬 시집> 삽화에 참여했고, 이 시집을 쓴 시인이 아폴리네르였네요. 이름이 좀 익숙하다 했어요^^;; 워낙 관람자가 많아서 천천히 감상은 못했지만요. 게다가 황현산 선생님이 번역하신 책이라니요! 그림이 마음에 듭니다.
동물시집 - 오르페우스 행렬1911년 3월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와 화가 라울 뒤피의 협업으로 탄생한 『동물시집』이 불문학자 황현산의 번역으로 한국 독자를 만난다. 총 30편의 시와 30점의 판화를 수록한 이 시집에서 서로 쌍을 이루는 각각의 시와 판화는 하나의 동물을 중심으로 삶의 이치를 절묘하게 드러낸다.
아, 저도 이 시집이 표지도 그렇고 너무 탐나더라구요.
보들레르의 시를 좀 더 이해하고 싶어서 <<전위와 고전>>을 조금 읽었어요. 그런데 보들레르 시의 시대적, 사회적 배경을 좀 더 이해할 수는 있겠지만, 시를 감상하는 데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어요. 영화평론가들이 평론가의 눈으로 영화를 보느라 즐기지 못한다고 하지요. 우리 대부분은 음악을 들을 때 몸과 마음을 음악에 맡기고 그냥 느끼고 즐기지, 분석하지 않잖아요. 바흐는 자기가 믿는 하느님을 위해 작곡했다고 해요. 300년 전에 작곡된 바흐의 종교음악을 종교가 없는 제가 즐겨 듣습니다. 문학과 예술은 그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시대와 사회 문화를 뛰어넘어 감상하는 게 가능하지요. 시를 감상하는 것도 노래 부르듯 소리 내어 읽고 마음속에 그림을 그리며 느끼면 된다고 생각해요. 이론으로 무장하면 오히려 감상을 방해할 것 같아요. 물론 우리에겐 지적 호기심이 있고 그게 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는 있어요. 하지만 문학, 예술 작품을 대할 때는 앎보다 느낌이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 자신과도, 타인과도 소통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인데요. 시어가 함축적이고 상징적인데다, 다른 시대, 다른 사회 문화에 살았던 시인의 작품을 이해하려니 어렵습니다. 그래도 그의 시를 읽으며 소통을 시도합니다. 소리 내어 읽어보고 마음속에 그림을 그려보고 의미를 더듬어가며 서로의 해석을 주고받으며. 그렇게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서 더듬어가는 과정이 의미 있는 것 같아요. 그 과정에서 다양한 해석, 창조적인 해석이 나올 수도 있고요. 시 감상에 참여하시는 분들의 모든 해석이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휘리릭 단숨에 읽는 것보다 그렇게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서 의미를 더듬어보고 글로 써보고 서로의 해석을 주고받는 게 훨씬 마음에 오래 남을 것 같아요. 우리나라 국어 교육의 문제인데, 시를 읽고 음미할 시간, 다양한 느낌과 해석을 주고받을 충분한 시간을 갖지 않고 정해진 하나의 해석을 일방적으로 주입하고 그 해석에서 벗어나면 틀린 답으로 간주하지요. 안타깝게도 우리 대부분은 시를 그렇게 배웠어요. 아마 요즘도 그렇게 배우지 않을까요? @borumis 님은 서양에서 공부하셨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래서인지 시 해석을 자유롭게 잘 하신다고 느꼈어요. <백조>가 보들레르 시 중에서 탁월한 시인지는 보들레르 시를 다 읽고 나서 판단해야할 것 같아요. 게다가 그 시가 탁월하다는 것은 평론가들의 평이고, 시를 감상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 시를 탁월하다고 느껴야 하는 건 아니지요. '들어서 좋으면 그게 좋은 음악이다'라는 게 저의 지론인데, 시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시가 잘 이해되지 않더라도 뭔가 마음에 와 닿는 게 있다면 그것으로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오 그렇군요. 맞아요, 전 미국과 유럽에서 주로 공부해서 각자 저마다 시나 소설 등을 제멋대로 해석했고 그걸 바탕으로 에세이를 썼죠. 선생님은 시인의 삶이나 당시 시대에 대해서만 짧게 이야기해주고 어려운 단어의 의미 정도만 알려주고 나머지 그 시의 해석은 그냥 학생들이 알아서 시 속에서 찾아보고 생각해보게 하는 수업방식이었어요. 저는 실비아 플라스를 그냥 좋아했는데 처음에는 어떻게 그 좋아하는 이유나 그 시가 말하고 있는 걸 표현할 지 잘 몰라서 다양하게 추측해보면서 토론과 에세이 쓸 때 썰(?)을 풀어보았고 한국처럼 객관식 문제로 풀어본 경험이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아마 선생님이 숙제 봐주기 힘드셨을 듯..;;) 그리고 실은 goodreads라는 온라인 독서커뮤니티에서도 서양고전 토론하는 분들과 에밀리 디킨슨이나 T.S. 엘리엇 등 시를 읽으면서 토론을 종종 하곤 해요. 근데 저는 '전위와 고전'은 물론이지만 아직 평론가의 시 해석을 잘 본 적이 없어서 궁금했어요. 번역가 분도 송승환 시인분도 문학평론가라고 해서 평론가들은 어떤 식으로 시를 바라보는지 어떤 시를 훌륭하다고 판단하는지 알고 싶었어요. 제 느낌이야 저는 알지만 평론이라는 건 좀더 다양한 사람들이 읽는 거니 어떤 criteria를 갖고 보는 건지 알고 싶어지더라구요.
그러고보니 보통 시를 개별적으로 몇편씩만 읽었지 한 시인의 전체 시를 한꺼번에 읽은 경험이 별로 없었던 것 같네요. 말씀하신 대로 다 읽고 나서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감사합니다.
96번 <노름>에서 나온 켕케 등이 뭘까 했는데 둥글고 비어 있는 심지와 유리 굴뚝이 달려 있어서 불 주변으로 공기가 흐를 수 있게 한 오일 램프인가봐요. Quinquet라고 불어에서 온 듯 하네요. 영어로는 Argand lamp라고 합니다. https://en.wiktionary.org/wiki/Argand_lamp#English
97번 <죽음의 춤>에서 저는 이상하게 이 부분이 맘에 들던데요. "살에 취한 애인들, 그 사람들은 인간 뼈대의 이름 없는 우아함을 이해하지 못하지." 저도 실은 해부학을 좋아해서 인간 뿐만 아니라 동물 뼈도 그 기능이나 진화를 생각해보며 관찰하기 좋아합니다. 박물관의 공룡 뼈 같은 걸 보고 경이로움을 느끼는 것처럼 인간 뼈대의 이름 없는 우아함을 표현하기도 이해시키기도 힘든 것 같아요. 이 시를 보면서 얼마 전 본 그림들이 생각나는데요. 흑사병의 시대를 그린 페테르 브뤼헬의 '죽음의 승리'에서 '제 품 안에 해골을 안지 않았던 자 누구이며, 무덤의 것을 먹고 살지 않은 자 누구인가?'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장면들이 곳곳에서 보입니다. 수많은 해골들 가운데 섞여 있는 몇몇 안되는 살아 있는 자들마저 모두 죽음의 냄새가 납니다. 우리는 살에 취해서 그 밑의 본질을 못 보고 환락의 마연과 삶의 잔치 속에서 실은 주검의 춤을 추는 눈먼 춤꾼들일 뿐이죠. 죽음이 이 가소로운 인류의 미친 짓에 제 빈정거림을 섞어넣는 것은 어디서든지 언제든지 일어나고 있고 역병의 시대 뿐 아니라 평소에도 현재진행중인데 안타깝게도 그런 야유를 알아 듣는 이들이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공포의 매력에는 오직 강자들만 취할 뿐!'이란 말처럼 역병처럼 또다른 수많은 삶을 앗아가는 전쟁에서도 실은 강자들만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에 들떠서 떠들지 나머지는 영문을 모르고 떠밀리고 있겠죠.
100번 <당신이 시샘하던 마음 넓은 그 하녀> 이 시를 읽으면서 처음 생긴 질문은 '왜 하녀를 시샘했던가? 마음이 넓어서? 아니면 살아 있을 때 그녀가 갖고 나는 못 가졌던 그 어떤 것 때문에?'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살아 있을 당시에는 시샘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불쌍한 망자들이 큰 고통을 받으니 꽃을 바쳐야 한다고 합니다. 10월의 을씨년스러운 바람을 가지치기 늙은 인부처럼 표현하네요. 이 무덤 위 찬 바람과 대조되는 포근한 시트 속의 산 사람들의 그림 속에서 더 살아남은 자들에 대한 '배신감'이 강조되고 어떤 생존자의 죄책감마저 느껴집니다. 이는 그 뒤의 '검은 몽상~긴 세월'에서 외로움과 쓸쓸함이 더 짙어집니다. 차디차고 영원한 잠자리에서 빠져나와 조용히 안락의자에 앉은 그녀는 홀로 있던 긴 세월 사이 어른이 된 아이 (시인을 얘기하는 걸까요?)를 어머니 같은 눈으로 바라보며 눈물 흘립니다. 앞에서 언 해골에 스며드는 '겨울의 눈의 물'은 '꺼진 눈자위에서 떨어지는 눈물'이 되고 이런 오르페우스 신화의 에우리디케를 바라보듯 한 이 경건함에 나는(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하며 시인은 묻습니다. 저는 이 시가 앞서 말한 죽음의 시 중 가장 클라이맥스 같았는데요 (물론 앞으로 또 다른 시들을 읽겠지만) 그녀가 살아 생전 누리지 못했고 천대받았던 삶 속에서 이루지 못한 삶 너머의 어떤 '근엄함'과 '경건함'을 보여주며 지금껏 우리가 구더기나 해골 허무 등으로 비천한 위치에 있던 죽음을 오히려 더 비참한 삶보다 더 성스러운 위치에 놓는 듯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고통받고 죽은 이들 뿐 아니라 이런 고통과 죽음 속에 한정된 인간의 조건을 잊지 않고 어떻게 반응할지 되묻습니다. 지옥에서 아내를 데려오려고 했던 오르페우스처럼 보들레르는 무덤 속의 해골의 위치로 내려가서 9행에서부터 14행까지 땅 속을 여행하다가 15행부터 그녀를 지상의 위치로 데려옵니다. 하지만 빠져나온 그녀는 말없이 '꺼진 눈자위'에서 눈물을 떨굽니다. 그 꺼진 눈자위에서 우리는 한정되고 허무한 삶과 영원한 죽음의 무한, 그리고 거기서 나온 눈물이, 그리고 기억이 우리의 삶의 한계를 초월하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하녀의 '넓은 마음(grand coeur)'과 죽음과 우리의 기억은 마치 문학처럼 우리의 제한된 삶을 넘어서 '그 어딘가'에 이르는 유일한 경건함이고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그것을 시샘하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하녀의 넓은 마음은 문학의 초월성을 나타낸 걸까요? 아마 이 시를 세월호 10주년에 읽어서 더 와닿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아이가 기억교실에 가서 대통령도 자리를 비운 그곳에서 노랑 리본을 바치는데 그들의 경건한 영혼에게 무어라 대답할 수 있을지 저도 되물어봤습니다. 참고로, 이 시는 보들레르의 친모보다 더 지극정성으로 그를 돌본 하녀 마리에트에게 바쳤을 것 같은데요. 아마 그 시샘하던 당신은 보들레르를 어릴 때도 거부했지만 성인이 되서는 더 매몰차게 내쳐버린 친어머니였을 것 같습니다. 하녀라는 신분으로 지금도 보잘것없는 잔디 아래 잠들어 있건만 그가 꽃을 바치고 그녀를 기리고 싶었던 마음을 담은 이 시가 전 대리석보다 아름답고 그녀가 장작불처럼 후르륵 불러주던 자장가처럼 다정하면서도 애달프게 느껴지네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borumis @ICE9 @숨쉬는초록 @늦깎이 여러분들께서 인지하고 계셨듯이, 시인의 삶과 당대의 분위기를 모두 이해한다고 해서, 시 자체를 이해하고 바로 소급 적용될 수는 없지요. 시 자체로 표현된 느낌을 향유하는 독자의 몫도 매우 크다고 생각합니다. <백조>는 시를 쓰려는 사람들, 특히, 시인들에게 시쓰기의 방법과 방향성을 암시하고 있어서 중요하고, 또, '파리'라는 대도시에서 '서정시, 즉 정형시, 소네트'라는 형식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라는 질문을 품고 있어서 중요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지금, 한국 현대시에서 시쓰기의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그리고 자연의 상징에서 대도시의 '알레고리'로 변모하고 있음을 보들레르가 무의식 속에서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약간, 공지가 늦었지만. 다음주까지 '보들레르의 <악의 꽃>' 마지막 시편까지 읽으면 이번 시집 <악의 꽃> 읽기는 마무리가 될 것 같습니다. 계속 좋은 의견들 올려주세요:-)
네, 솔직히 시인의 삶과 당대는 어느 정도 intro만 될 뿐 저희들 각각의 해석이나 감상에 큰 영향은 끼치지 않았어요. (물론 저희가 그걸 그런 지식이 부족해서 그런 걸수도 있지만;;) 시인들에게 시쓰기의 방향성을 암시하는 것이군요.. 생각해보니 위고가 우리는 레미제라블이나 노트르담의 꼽추 등 소설로 주로 알고 있는데 시인이기도 했죠..! 그러고보니 지금의 저희는 이미 자연에서 갈수록 멀어지고 있는 도시의 삶에 익숙해서 너무 당연히 여겼던 도시의 '알레고리'가 그 당시에는 매우 새로운 변화였을 것 같네요.
아직 책의 반까지만 읽은 줄 알았는데 벌써 마지막 시편까지 읽는 건가요?
@borumis 지난 첫 시즌 15편씩 4회=60번. 이번 시즌 15편씩 4회=60편. 이니 제가 계산을 잘못했네요ㅠ 죄송합니다ㅠ 이번. 마지막 주는. 120번 사탄 연도, 까지 읽어야겠네요. 여러분들이 원하시면 시즌 3. 악의꽃. 모임을 만들겠습니다. 적극적으로 의견주셔서 고맙습니다!
출근하면서 훑어보다 110번 시 <순교의 여인>에 눈길이 갔습니다. 시의 배경이 되는 지식은 아직 모르니 혼자 상상해봅니다. ‘순교의 여인’과 머리 없는 시체의 이미지, 그리고 어느 화가의 데생을 보고 있는 듯한 화자의 모습을 떠올리다가 어느 그림이 생각났거든요. 이름을 몰라 한참 찾아보다 ‘유디트’를 주제로 그린 그림들이 보여요. 카라바조의 유디트, 루벤스의 유디트, 클림트의 유디트 등등이 보였습니다. 무표정하거나 때로는 결연한 표정으로....한 손에는 머리를 들고 다른 손에는 피가 묻는 칼을 들고 있는 모습을요. 그리고 머리의 아래에는 피가 젖어드는 베개의 이미지가 시를 통해 연상되었습니다. 또 ‘온실’의 이미지와 ‘유리 관’을 연결지은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장면은 사진가 Robert Frank의 <Flamingo>라는 사진집이 떠오릅니다. 이 사진집의 표지에는 유리병 속에 들어 있는 플라밍고 모형(?) 사진이 담겨있습니다. 어쩌면 ‘갖혀 있다(?)’라고도 볼 수 있겠지요. 인간이 만들어 낸 유리 병속에 스스로를 가둔 인간의 모습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구요. 한편, 이 시에서도 ‘고독’과 ‘권태’라는 단어가 보입니다. 이런 감정(?)들도 어쩌면 근대의 발명품(?)인 것일까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근대가 아니라면 오래 전 문명이 만들어진 후 아주 소수의 계층들에서는 이미 경험했을 법한 이런 감정들이 ‘근대’로 넘어오면서 보다 보편화되어, 혹은 보다 큰 집단이 공유할 수 있게 된 감정들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해요.
오늘도 덕분에 공부 많이 했습니다. 직장 업무 중에 틈틈히 읽었습니다. 선생님들께서 올려주신 글들이 이해하는데 엄청난 도움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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