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둘 사이는 frenemy 같은 관계였다고 하는데요. 알렉상드르 뒤마의 ghost writer였던 Paul Meurice가 둘의 공통된 친구였는데 문제는 선배인 위고의 낭만주의에 반기를 들며 낭만주의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보들레르는 위고를 공식적으로는 존경하는 듯했지만 사적으로는 한물 간 구시대의 유물처럼 바라본 듯 합니다. 그리고 레미제라블 등 잘나가는 대가 위고를 내심 질투하는 마음도 있었을 테구요. 반면 위고는 그냥 보들레르를 좀 고생하는 후배 시인으로 바라본 듯 합니다.
보들레르가 보낸 개인적 편지에서 'Hugo continue a m'envoyer des lettres stupides (위고가 계속 나한테 멍청한 편지를 보내고 있어)'를 쓰는 등 여러 자료가 나왔다네요.
https://www.theguardian.com/books/2014/jun/18/baudelaire-victor-hugo-idiot-letter
송승환 시인. 문학평론가와 함께 보들레르의 『악의 꽃』 읽기 2
D-29
borumis
숨쉬는초록
흥미로운 기사네요.
borumis
저 편지가 6만 파운드에 경매된게 신기하네요 ㅎ
숨쉬는초록
보들레르의 시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은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잘 모르겠는데, 저의 감상이 좋다고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시 <백조>에서 화자는 잃어버린 옛 파리를 '그리워한다'고 말하지 않고 상실의 경험을 한 타인을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변한 것, 사라진 것으로 인해 고통받지만, 그건 돌이킬 수 없는, 어찌할 수 없는 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보들레르의 시를 좀 더 이해하고 싶어서 <<전위와 고전>>과 황현산 선생님의 번역과 주해가 실린 <<파리의 우울>>을 주문했어요.
늦깎이
저도 ’전위와 고전‘과 ‘파리의 우울’ 주문해야겠네요.
송승환 선생님 시집들과 평론을 샀는데 제가 읽기엔 너무 어렵네요.
그래도 열심히 읽어보겠습니다.
ICE9
저도 <전위와 고전>이 어려워서 송승환 선생님께서 <악의 꽃>읽기 끝나고 또 열어주시면 참여하고 싶은데요? ^^;
borumis
저는 실은 그 다음 나오는 <키 작은 노파들>도 <어느 빨강 머리 거지 아이에게>처럼 인상적이었는데요. 보들레르는 위고가 <레 미제라블>에서 그렸던 빈곤층, 그리고 가장 허기지고 불행에 시달리고 천대받는 사람들에 주목하며 그 와중에 굽은 등에도 불구하고 '꼿꼿하고 당당'한 자세로 불운의 삶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자세, 매혹적인 눈물로 이루어진 강을 '멀리서 다정하게' 살펴봅니다. 그래서 저는 빅토르 위고와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해도 빅토르 위고에게 바치는 이 시들이 마음에 드네요.
borumis
저는 실은 불문학과도 관련 없고 시도 잘 모르는 이과생이어서;;
아직은 백조가 다른 시들에 비해 어떻게 확연히 탁월한 건지 알레고리 시학이 분명히 드러나는지 주제나 수사법, 시적 태도 그런 건 하나도 모르겠는데요. 송승환님은 이 시를 다른 시에 비해 더 추천하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ICE9
90번 시 <일곱 늙은이>를 다시 읽어보면서 등이 거의 ‘직각’으로 굽은 상태로, 넝마를 주워담은 채 진흙길을 힘겹게 나아가는 한 노인의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이 중에서 ‘바로크풍 유령’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바로크풍’은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면 좋을까요?
borumis
이게 원문에서도 baroque로 되어있는데요. 영어로는 strange, odd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보들레르가 1864년 벨기에에 2년 있으면서 여러 바로크풍 교회들을 다니면서 바로크풍 예술에서 영감을 받은 듯한데요. 여기서 style jesuite (예수회 양식)와 style joujou (장난감 양식?)와 루벤스 양식과의 조화를 발견하고 감명받았다고 하는데요. 바로크풍 양식에서 그는 antiquite nouvelle (새로운 옛날)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제가 찾아본 논문에서 (프랑스어여서 죄송) 보들레르는 baroque를 한 시대의 양식이 아니라 좀 다른 의미의 형용사로 썼다고 합니다. Baroque의 동의어인 bizarre한 느낌으로 썼을지 모르지만 이 논문의 저자는 보들레르가 또 다른 의미로 baroque 를 썼다고 합니다.
이 글을 제가 어설프게나마 번역해보면:
'바로크는 비어있는 여백을 싫어했다. 보들레르는 거기에서 원죄에 얽매인 인류의 상징을 볼 수 있었다. 웅장한 예수회 양식의 설교단 앞에서 그는 원죄로부터 세상이 새로 재현되는 것을 보았다'
https://www.academiedesbeauxarts.fr/sites/default/files/inline-files/Colloque-Baudelaire-Andr%C3%A9%20Guyaux.pdf
borumis
위의 글에서 보들레르는 Malines의 Saint-Pierre-et-Paul 교회에서 고해성사 의자들이 벽을 따라 쭉 붙여서 진열되어 있는 걸 보고 원죄에 사슬로 묶여 있는 인류를 보았다고 하는데요. 이처럼 원죄에 묶여있는 인류의 사슬을 불멸의 얼굴을 지닌 일곱 명의 똑같은 쌍둥이들의 똑같은 걸음걸이로 빈틈없이 나아가는 바로크풍 양식의 예술같은 행렬에서 보았던 게 아닐까요?
borumis
그리고 저는 '는개'라는 표현을 이 시에서 처음 알게 되었는데요. 원서에는 그냥 brouillard (안개)인데 그걸 안개비와 이슬비 사이 정도의 '는개'로 표현한 번역가 분의 표현력이 멋집니다. '누런'과 '는개'는 뭔가 그냥 안개보다 더 alliteration도 느껴지고 더 늘어지는 듯이 잘 어울리네요. 그 뒤에 오는 '누런 누더기'와도 두운이 맞고요.
그리고 이 시에서 한 명의 노인이 아니라 계속 반복되고 증폭되는 노인들의 모습이 나오는데요.
'나는 일곱 번을 헤아렸다, 일분마다 하나씩.
늘어나고 늘어나는 이 음산한 늙은이를!'
'그 추악한 일곱 괴물이 불멸의 얼굴을 지녔다는 걸!'
그 외에 '똑같은 허울이 그 뒤를 따랐다' '무엇 하나 구별되지 않았다.' '똑같은 지옥에서 나온~ 쌍둥이는~ 똑같은 걸음걸이로 ' '똑같은 전율' '쌍둥이를' '하나를 둘로 보는'
이렇게 자기 자신을 복제하는 듯이 똑같은 쌍둥이들이 하나 둘 복제되는 걸 보고 보들레르가 도시에서 마치 판에 찍듯이 화폐나 책이나 상품들이 복제되는 양상으로 인간들이 획일화되고 상품화되는 양상을 그렸다고 보는데요. 이들은 끊임없이 복제되고 마치 썩지 않는 플라스틱처럼 계속 죽지도 사라지지도 못하고 지옥을 떠돌아다닙니다. 저주받은 불멸이죠.
ICE9
작년에 화가 라울 뒤피의 전시를 본 적이 있는데, 이제 다시 보니까 뒤피가 <동뮬 시집> 삽화에 참여했고, 이 시집을 쓴 시인이 아폴리네르였네요. 이름이 좀 익숙하다 했어요^^;; 워낙 관람자가 많아서 천천히 감상은 못했지만요. 게다가 황현산 선생님이 번역하신 책이라니요! 그림이 마음에 듭니다.
동물시집 - 오르페우스 행렬1911년 3월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와 화가 라울 뒤피의 협업으로 탄생한 『동물시집』이 불문학자 황현산의 번역으로 한국 독자를 만난다. 총 30편의 시와 30점의 판화를 수록한 이 시집에서 서로 쌍을 이루는 각각의 시와 판화는 하나의 동물을 중심으로 삶의 이치를 절묘하게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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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umis
아, 저도 이 시집이 표지도 그렇고 너무 탐나더라구요.
숨쉬는초록
보들레르의 시를 좀 더 이해하고 싶어서 <<전위와 고전>>을 조금 읽었어요. 그런데 보들레르 시의 시대적, 사회적 배경을 좀 더 이해할 수는 있겠지만, 시를 감상하는 데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어요. 영화평론가들이 평론가의 눈으로 영화를 보느라 즐기지 못한다고 하지요.
우리 대부분은 음악을 들을 때 몸과 마음을 음악에 맡기고 그냥 느끼고 즐기지, 분석하지 않잖아요. 바흐는 자기가 믿는 하느님을 위해 작곡했다고 해요. 300년 전에 작곡된 바흐의 종교음악을 종교가 없는 제가 즐겨 듣습니다. 문학과 예술은 그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시대와 사회 문화를 뛰어넘어 감상하는 게 가능하지요.
시를 감상하는 것도 노래 부르듯 소리 내어 읽고 마음속에 그림을 그리며 느끼면 된다고 생각해요. 이론으로 무장하면 오히려 감상을 방해할 것 같아요. 물론 우리에겐 지적 호기심이 있고 그게 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는 있어요. 하지만 문학, 예술 작품을 대할 때는 앎보다 느낌이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 자신과도, 타인과도 소통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인데요. 시어가 함축적이고 상징적인데다, 다른 시대, 다른 사회 문화에 살았던 시인의 작품을 이해하려니 어렵습니다. 그래도 그의 시를 읽으며 소통을 시도합니다. 소리 내어 읽어보고 마음속에 그림을 그려보고 의미를 더듬어가며 서로의 해석을 주고받으며. 그렇게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서 더듬어가는 과정이 의미 있는 것 같아요. 그 과정에서 다양한 해석, 창조적인 해석이 나올 수도 있고요. 시 감상에 참여하시는 분들의 모든 해석이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휘리릭 단숨에 읽는 것보다 그렇게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서 의미를 더듬어보고 글로 써보고 서로의 해석을 주고받는 게 훨씬 마음에 오래 남을 것 같아요.
우리나라 국어 교육의 문제인데, 시를 읽고 음미할 시간, 다양한 느낌과 해석을 주고받을 충분한 시간을 갖지 않고 정해진 하나의 해석을 일방적으로 주입하고 그 해석에서 벗어나면 틀린 답으로 간주하지요. 안타깝게도 우리 대부분은 시를 그렇게 배웠어요. 아마 요즘도 그렇게 배우지 않을까요?
@borumis 님은 서양에서 공부하셨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래서인지 시 해석을 자유롭게 잘 하신다고 느꼈어요.
<백조>가 보들레르 시 중에서 탁월한 시인지는 보들레르 시를 다 읽고 나서 판단해야할 것 같아요. 게다가 그 시가 탁월하다는 것은 평론가들의 평이고, 시를 감상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 시를 탁월하다고 느껴야 하는 건 아니지요.
'들어서 좋으면 그게 좋은 음악이다'라는 게 저의 지론인데, 시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시가 잘 이해되지 않더라도 뭔가 마음에 와 닿는 게 있다면 그것으로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borumis
오 그렇군요. 맞아요, 전 미국과 유럽에서 주로 공부해서 각자 저마다 시나 소설 등을 제멋대로 해석했고 그 걸 바탕으로 에세이를 썼죠. 선생님은 시인의 삶이나 당시 시대에 대해서만 짧게 이야기해주고 어려운 단어의 의미 정도만 알려주고 나머지 그 시의 해석은 그냥 학생들이 알아서 시 속에서 찾아보고 생각해보게 하는 수업방식이었어요. 저는 실비아 플라스를 그냥 좋아했는데 처음에는 어떻게 그 좋아하는 이유나 그 시가 말하고 있는 걸 표현할 지 잘 몰라서 다양하게 추측해보면서 토론과 에세이 쓸 때 썰(?)을 풀어보았고 한국처럼 객관식 문제로 풀어본 경험이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아마 선생님이 숙제 봐주기 힘드셨을 듯..;;) 그리고 실은 goodreads라는 온라인 독서커뮤니티에서도 서양고전 토론하는 분들과 에밀리 디킨슨이나 T.S. 엘리엇 등 시를 읽으면서 토론을 종종 하곤 해요.
근데 저는 '전위와 고전'은 물론이지만 아직 평론가의 시 해석을 잘 본 적이 없어서 궁금했어요. 번역가 분도 송승환 시인분도 문학평론가라고 해서 평론가들은 어떤 식으로 시를 바라보는지 어떤 시를 훌륭하다고 판단하는지 알고 싶었어요. 제 느낌이야 저는 알지만 평론이라는 건 좀더 다양한 사람들이 읽는 거니 어떤 criteria를 갖고 보는 건지 알고 싶어지더라구요.
borumis
그러고보니 보통 시를 개별적으로 몇편씩만 읽었지 한 시인의 전체 시를 한꺼번에 읽은 경험이 별로 없었던 것 같네요. 말씀하신 대로 다 읽고 나서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감사합니다.
borumis
96번 <노름>에서 나온 켕케 등이 뭘까 했는데 둥글고 비어 있는 심지와 유리 굴뚝이 달려 있어서 불 주변으로 공 기가 흐를 수 있게 한 오일 램프인가봐요.
Quinquet라고 불어에서 온 듯 하네요. 영어로는 Argand lamp라고 합니다.
https://en.wiktionary.org/wiki/Argand_lamp#English
borumis
97번 <죽음의 춤>에서 저는 이상하게 이 부분이 맘에 들던데요.
"살에 취한 애인들, 그 사람들은 인간 뼈대의
이름 없는 우아함을 이해하지 못하지."
저도 실은 해부학을 좋아해서 인간 뿐만 아니라 동물 뼈도 그 기능이나 진화를 생각해보며 관찰하기 좋아합니다. 박물관의 공룡 뼈 같은 걸 보고 경이로움을 느끼는 것처럼 인간 뼈대의 이름 없는 우아함을 표현하기도 이해시키기도 힘든 것 같아요.
이 시를 보면서 얼마 전 본 그림들이 생각나는데요.
흑사병의 시대를 그린 페테르 브뤼헬의 '죽음의 승리'에서 '제 품 안에 해골을 안지 않았던 자 누구이며, 무덤의 것을 먹고 살지 않은 자 누구인가?'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장면들이 곳곳에서 보입니다. 수많은 해골들 가운데 섞여 있는 몇몇 안되는 살아 있는 자들마저 모두 죽음의 냄새가 납니다. 우리는 살에 취해서 그 밑의 본질을 못 보고 환락의 마연과 삶의 잔치 속에서 실은 주검의 춤을 추는 눈먼 춤꾼들일 뿐이죠. 죽음이 이 가소로운 인류의 미친 짓에 제 빈정거림을 섞어넣는 것은 어디서든지 언제든지 일어나고 있고 역병의 시대 뿐 아니라 평소에도 현재진행중인데 안타깝게도 그런 야유를 알아 듣는 이들이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공포의 매력에는 오직 강자들만 취할 뿐!'이란 말처럼 역병처럼 또다른 수많은 삶을 앗아가는 전쟁에서도 실은 강자들만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에 들떠서 떠들지 나머지는 영문을 모르고 떠밀리고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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