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번 시의 다나이데스는 신화에 의하면 다나오스의 딸 50명들을 통칭하는데 아버지 명령에 따라 신혼 첫날밤 아이깁토스의 아들 50명 (참 많이들도 낳았지요?)들을 한 명 빼고 다 죽여서 그 벌로 지옥에서 계속 구멍이 송송 뚫린 물통을 퍼붓는다네요. 열받을 때 술마시면 안되는데...^^;; 직장에서 열받으면 꼭 술을 마시게 되더라구요. 그래서 이 시가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증오는 술집 구석의 취객,
술에서 갈증이 마냥 새로 태어나
레르나의 히드라처럼 새끼를 치는 것만 같다.
- 그러나 술꾼들은 다행히 정복자를 알아 모시지만,
증오 앞에 떨어진 애처로운 운명은
결코 탁자 아래 쓰러져 잠들 수도 없다는 것.
송승환 시인. 문학평론가와 함께 보들레르의 『악의 꽃』 읽기 2
D-29
borumis
ICE9
아침 출근 버스와 지하철에 꽉 끼어서 시 한편 겨우 읽었습니다^^;;
62번 [서글프고 방황하는]에서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방황하는 화자의 모습이 담긴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화자의 '현실'은 '더러운 도시'/'검은 대양'/'진창'의 이미지와 닿아있는 듯하구요, 이 현실의 속성으로 '열차'와 '쾌속 범선'이 제시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이 속성들은 근대/속도/이성의 대표적인 이미지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파리 구 시가지를 도시 정비하면서 쭉쭉 뻗은 도로와 하수시설을 정비한 시기의 공기를 담고 있는 듯 여겨졌구요.
화자가 바라보는 '이상'은 시에서 '향기로운 낙원'/'초록빛 낙원'/'순결한 낙원' 등의 표현으로 집약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이 '낙원'은 손에 닿지 않는 머나먼 곳에 있을 뿐이구요. 이 손에 닿지 않는 '낙원'의 이미지가 '초록빛'으로 빛나는 것 또한 의미심장하네요. 저는 여기서 <위대한 개츠비>의 바다 건너 있는 데이지 저택의 '초록색 불빛'을 떠올리기도 했고, 영화 <Shape of Water>의 포스터도 생각났습니다. 강렬한 빨간색 드레스와 빨간색 신발을 신었던 여인이 물 속에서 괴물과 포옹하고 있는 (다소 암울한) 청록색의 물빛을 떠올렸습니다. 이 '초록빛'이 화자가 앞에서 언급한 현실, '더러운 도시'와 '향기로운 낙원'사이의 간극을 가득 메우고 있는 느낌입니다. 이 '초록색'은 현실에서 이루어지기 어려운 이상 혹은 사랑을 암시하는 것은 아니었나 떠올려보면서요. 그래서 이 '초록빛 낙원'이라는 표현이 어느 순간 생생히 다가온 느낌이었습니다.
ICE9
- 그러나 천진난만한 사랑의 초록빛 낙원은,
은밀한 기쁨 가득한 순결한 낙원은,
벌써 인도보다, 중국보다 더 멀어졌는가?
『악의 꽃』 131p, 62.서글프고 방황하는,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지음, 황현산 옮김
문장모음 보기
ICE9
희붐한 아침이 올 때면,
너는 내 빈자리를 볼 터인데,
저녁까지 그 자리 싸늘하리라.
남들이 애정으로 휘어잡듯이,
너의 목숨과 너의 젊음에,
나는, 나는 공포로 군림하리라.
『악의 꽃』 132p, '유령',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지음, 황현산 옮김
문장모음 보기
borumis
아 저도 이 부분 참 좋았어요.
ICE9
63. '유령'이란 시에서는 '유령'이란 제목과 마지막 문장의 '공포'라는 시어가 연결되는 것 같아요.
사람에게 '공포'를 주는 대상은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어쩌면 우리가 느끼는 '공포'란 '인간의 인식 능력 내에서 규정할 수 없는 무언가'에 공포를 느끼지 않을가 싶습니다. 좀 더 간단히 말해, 우리가 모르는 대상, 우리의 통제를 벗어난 대상에 대해서요... 이 시에서도 화자가 '공포'로 군림할 것이라는 표현은 '너'의 통제 밖에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구요. '너'의 목숨과 젊음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무언가를 화자인 '나'는 갖고 있는 이유가 아닐까합니다.
보들레르의 시 여러 편에서는 '이교도' 혹은 '이민족' 여인이 종종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이 시에서도 '갈색 여인'이 등장하네요. '갈색 여인'은 아프리카인처럼 '토착적'이고 '원시적'인 혹은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은 대상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마지막 시행의 이 '공포'는 어쩌면 식민주의적/남성적/정복적 문명이 가져올 암울한 운명을 암시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생각해보면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이미 수많은 아프리카인들을 사탕수수 농장의 노에로 아이티로 데려와 지배한 역사도 떠오릅니다.
계피s
오늘부터 참여해도 괜찮을지요.
borumis
그럼요. 아직 시작한지 얼마 안되었어요~
숨쉬는초록
안녕하세요. 시 읽기에 참여합니다.
65번 <달의 슬픔>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1. 햇빛이 사라진 저녁은 달이 존재감을 드러내는 시간이지만, 달은 '죽어갈 듯 길고 긴 기절'에 빠지고 '꿈'을 꾸고 '환영'을 봅니다. 날이 밝으면 변함없이 뜨겁게 이글거리는 해와 달리, 달은 매달 사위어갑니다. 달의 눈물도 곧 말라버리겠지요.
그런데도 그 달이 흘린 눈물을 시인은 손바닥에 받아 제 가슴에 간직하려 합니다. 달이 사위어가는 걸 어찌할 수 없으니 달의 눈물이라도 간직하려는 걸까요? '죽어갈 듯'한 달이 느끼는 슬픔, 그 달을 향해 시인이 느끼는 슬픔을 간직하고 싶은 걸까요?
사라지는 것(달, 달의 눈물)을 언젠가는 사라질 육신을 지닌 시인의 사라질 기억 속에 간직한다는 게 아이러니합니다. 사라지는 것, 죽어가는 것, 영원하지 않은 것을 가슴속에 간직하려는 시인의 간절한 몸짓에서 슬픔과 안타까움과 서글픔을 느낍니다.
시간이 얼마나 빠르게 지나가는지요. 어느새 성장해 달라진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스쳐 지나가는 시간을 붙잡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오랜만에 들여다본 사진 속 아이의 얼굴은 이런 적이 있었나 싶게 낯설게 느껴집니다. 지금 이 순간을 영원히 마음속에 새기고 싶어 가끔 아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봅니다. 하지만 정신없이 일상을 살아가느라 마음속에 담아둔 그 때의 아이 얼굴을 곧 잊어버리겠지요.
2. 모두 잠들고 시인 혼자 깨어있는 저녁은 달과 마주하는 고요한 시간, 아무도 보지 못하는 것(달의 슬픔, 달의 눈물)을 시인이 볼 수있는 시간,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달의 슬픔을 느낄 수 있는 시간입니다.
'이 파리한 눈물을 오목한 그 손바닥에 받아,
해의 눈 못 미치는 제 가슴에 간직한다.'
저는 이 문장이 참 마음에 들었어요. 아무도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 특별한 시선을 지녀서, 사위어가는 것(달, 달의 눈물)을 가슴속에 간직하려는 경건한 마음이 있어서 시인은 '고통'으로 가득한 현실(<서글프고 방황하는>에서 그린 것처럼)을 살아갈 수 있는 걸까요? 아무도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시선을 갖고 싶습니다. 사라지는 아름다운 것들을 가슴속에 고이 간직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삶의 고통과 버거움을 조금은 잊고 살 수 있지 않을까요?
3. '때로는 한가롭고 나른하다못해, 이 지구에,
슬그머니 눈물 한 방울 흘려보내면'.
달이 권태로워서 일부러 눈물을 흘려보냈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이 시집의 첫 번째 시 <독자에게>에서 시인은 '권태'에 대해 시인 자신도 알고 독자도 안다고, 그 정도로 권태가 세상에 퍼져 있다고 말합니다. <달의 슬픔>에서는 그 권태가 '더 게으르게', '얼빠진', '한가롭고 나른하다못해'로 표현됩니다.
달이 권태로워서 일부러 흘려보낸 눈물을 시인이 소중히 간직하는 것은 달에게서 시인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일까요? 죽어갈 듯하면서 권태로움을 느낀다는 점이 비슷해서?
ICE9
죄악, 공포 그리고 광기! - 오, 파리한 마르그리트 꽃!
너도 나처럼 가을 해가 아닌가,
오, 이리도 하얀, 이리도 쌀쌀한 내 마르그리트야!
『악의 꽃』 133p, 64. 가을의 소네트,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지음, 황현산 옮김
문장모음 보기
ICE9
저도 65번 시 [달의 슬픔]을 읽고, 막연하게나마 이 시가 참 감각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정적인 분위기를 준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숨쉬는초록 님처럼 '권태'로움과 연관지을 수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권태'로움은 64번 시 [가을의 소네트]에서도 느낄 수 있는 것 같아요.
시의 화자는 '열정'을 싫어한다고 고백하니까요.
이어서 '죄악, 공포 그리고 광기!'라는 단어가 주는 분위기는 상당히 경직되고 무겁네요.
borumis
권태는 약간 우울함과도 연관 있는 것 같아요. 우울증의 증상 중 하나가 anhedonia 거든요..
아무 것에도 흥미나 의욕이 없어지는..
달님이 그래서 슬픈 눈물을 흘렸을까요
ICE9
@borumis 다시보니 말씀해주신 우울의 감정이 다른 시에서도 느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혹시 원문을 보실 수 있다면, 67번 시 ‘부엉이들’에 등장하는 ‘소린’과 ‘운동’이란 단어가 뭔지 알 수 있을까요? 갑자기 귱금해졌습니디^^ 황현산 선생님은 어떤 단어를 이렇게 옮기셨을까 궁금합니다.
borumis
소란: le tumulte (영어는 tumult 소란, 법석, 동요, 혼란, 파란...)
운동: le mouvement (영어는 movement 움직임, 운동, 동작, 변혁활동...)
꼼짝않고 자리를 지키는 사색하는 부엉이들이 오히려 우울한 시간을 기다리는 것 같네요. 부엉이들처럼 현자들은 소란과 운동(사회적 격동)에서 멀어져서 상아탑 속에서 고고히 떨어져 사색하며 사회와 동떨어진 관조의 자세로 보수적인 status quo를 유지하는 자들이라고 비판하는 것일까요? 어쩌면 그 기성세대가 두려워해야 했던 소란과 운동, 그리고 찰나의 지나가는 그림자가 지나가기 때문에 더 소중하고 두고두고 벌을 받아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게 아닐까요?
ICE9
와~ 영어 까지 비교해주셔서 감상이 더 풍성해지는 것 같습니다.^^
두 단어가 모두 프랑스어(혹은 라틴어(?))에서 온 단어언가 봅니다.
저도 '부엉이들'에 대해서는 비슷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지혜'의 상징 같은 이미지 보다는, '이방의 신들처럼'이란 표현에서
영원히 존재하며 권태로움을 느끼는 신 같은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변화와 일탈에 위기감을 느낄 수 있는 기득권으로 볼 수도 있겠구요.
이들을 송승환 님이 언급해주신 18-19세기 파리의 현실과 연결지어보면,
전통적인 공동체와 결별한 개인, 혹은 도시 속의 익명성 속에 고립되어버린
시민들의 우울감과 권태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딴생각도 같이 해보고요.
그렇다면 여기에서 '부엉이'는 권태와 무기력 속에 잠식되어, '그저 순응하는 존재들'이라고
볼 수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이런 분위기는 앞의 66번 시 '고양이들'에서도 보이는 것 같아요.
이 시에서 '어둠의 정적과 공포를 탐구'하는 고양이들은 결국
몽상가/기득권/권태를 특징으로 하는 존재들의 이미지가 맞닿아 있다고 느껴집니다.
또 '부엉이들'의 마지막 연에서 '지나가는 그림자'란 무엇을 말할까 궁금해지네요.
borumis
참 제가 참고하는 원문은 John E. Tidball의 영어번역과 함께 보들레르의 프랑스 원문이 수록되어있고 1868년 판의 모든 시들 뿐만 아니라 1857년 초판에서 출판금지받은 6편의 시들을 수록했습니다. 보들레르의 프랑스어 시도 운율이 뚜렷한데 Tidball도 같은 소네트 형식을 따라가며 rhyme을 유지해서 소리내어 읽기 참 좋습니다. 부엉이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Les Hiboux
Sous les ifs noirs qui les abritent,
Les hiboux se tiennent rangés,
Ainsi que des dieux étrangers,
Dardant leur oeil rouge. Ils méditent !
Sans remuer, ils se tiendront
Jusqu’à l’heure mélancolique
Où poussant le soleil oblique,
Les ténèbres s’établiront.
Leur attitude au sage enseigne,
Qu’il faut en ce monde qu’il craigne :
Le tumulte et le mouvement.
L’homme ivre d’une ombre qui passe
Porte toujours le châtiment
D’avoir voulu changer de place.
숨쉬는초록
67번 시 <부엉이들>.
검은 주목, 붉은 눈, 줄지어 앉은 부엉이들. 분위기가 기묘하네요. 캄캄한 밤에는 붉은 눈들과 달빛만 보일 것 같아요.
@borumis 님 덕분에 시의 의미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tumult, movement가 프랑스어에서 온 단어인가 보군요.
시즌1 모임에서 주고받은 글을 읽어봤는데, 보들레르는 제2제정기에 활동했다고 해요. 큰 희생을 치르며 숱한 격동의 시기를 거쳤는데 결국 군주제로 돌아간 것을 보고 변혁 운동에 대한 실망감을 표현한 게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그런 혁명, 변혁 운동은 다 부질없다는 뜻, 빛과 그림자가 끊임없이 변하는데 지나가는 그림자와 자리를 바꾸겠다며 목숨 걸고 싸우는 건 어리석다는 뜻은 아닐지요?
그래서 지혜로운 부엉이들은 사색한다고요. 서양에서는 부엉이가 지혜를 상징한다고 해요.
늦깎이
그믐에 회원가입만 하고 어떤 활동도 하질 않았습니다.
시를 잘 모르지만 이 모임에 지금이라도 참여할 수 있을까요. 혼자선 읽기에 너무 어렵군요.
숨쉬는초록
그럼요. 언제든지 들어오세요.
함께 읽으며 느낌과 해석을 나누니 좋습니다.
작성
게시판
글타래
화제 모음
지정된 화제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