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탐정은 기호학자다: 움베르토 에코가 앓는 형이상학적 질병>
솔직히 5부는 좀 어려웠습니다. 일단 제가 <장미의 이름>을 영화로, 소설로 접한 게 한참 전이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한 데다가, <전날의 섬>과 <푸코의 진자>는 십여 년 전에 읽으면서 머릿속 ‘어려운 책’ 목록에 넣었거든요. 두 권 다 끝까지 꾸역꾸역 읽기는 했지만 지금은 줄거리가 거의 떠오르지 않는... -_-;;;; 플롯 구조가 엄청나게 복잡하다고 생각했던 기억만 나네요. ㅎㅎ 그나마 <장미의 이름>은 숀 코네리가 윌리엄 수사로 분한 영화를 아주 재미있게 본 덕분에 줄거리는 대충 기억이 납니다. ㅎㅎㅎ
그러다 보니 5부를 읽으면서 조금 힘겨웠네요. ㅠㅠ 다른 독자님들은 어떠셨어요?
이 5부에서 제일 중요한 명제는 “탐정은 기호학자다!”입니다. 우리 독자님들이 5부에서는 이 명제만 확실하게 기억하시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 기호학이라는 학문의 탄생은 탐정 캐릭터의 동시대적인 등장과 그 문화적 궤를 같이합니다.
탐정(혹은 형사)가 접하는 살인현장은 기호학을 간절하게 필요로 합니다. 쓰러진 시체의 모습, 살인도구, 시반이나 시취, 파리, 다잉 메시지 등... 탐정이 현장에서 목도하는 모든 것이 기호들의 향연입니다. 고고학 발굴현장이나 살인사건 현장은 자연기호를 해독해야 하는 전형적인 기호학의 무대인 것입니다. 고로, 탐정은 기호학자라는 명제가 성립합니다. 크으!
에코는 <장미의 이름>을 쓰면서 독자의 모든 관심이 미스터리에만 쏠리기를 원하지 않았으면서 왜 굳이 추리소설의 형식을 선택했느냐는 질문에 <장미의 이름 창작노트>에서 이렇게 밝힙니다.
“독자들로 하여금 우리를 전율하게 할 만한 일(말하자면 형이상학적인 전율을 느끼게 할 만한 일)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고 싶었기 때문에 나는 (무수한 플롯 중에서) 가장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구조, 즉 탐정소설의 구조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제가 놀랐던 부분은 탐정소설이 모든 플롯을 통틀어 ‘가장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추리의 추상적 모델의 성격이 바로 미궁이기 때문에 형이상학적이라는 것입니다. 미궁은 세 종류가 있다고 에코는 말하는데요. 1. 그리스적 미궁, 즉 미노타우로스의 미궁. 여길 빠져나오려면 아리아드네의 실타래가 필요합니다. 2. 매너리스틱한 미궁. 나무뿌리의 구조를 가진 미궁으로 출구는 하나 뿐이며 여길 빠져나오려면 역시 아리아드네의 실타래가 필요합니다. 3. 들뢰즈의 리좀 미궁. 그물로서의 미궁으로 이 미궁에는 중심도 없고 주변도 없고 출구도 없습니다.
에코는 <장미의 이름> <전날의 섬> <푸코의 진자>를 통해 형이상학적 추리소설이라는 도전을 펼쳐보입니다. 기호학자가 쓰는 추리소설...! 오래 전 읽었던 낡은 기억만으로 5장을 정복하기가 쉽지 않아서 일단 지금은 항복을 선언하며, 세 권을 다시 찾아 읽은 후에 다시 한번 5장을 읽어볼 작정입니다.
다른 독자님들의 화이팅을 기원합니다. :-)
[박소해의 장르살롱] 13. 추리소설로 철학하기
D-29
박소해
박소해
“ 에코는 삶의 덧없음이라는 대가를 지불하면서, 그 힘의 무게를 자신이 설계한 저울에 달아보는, 이론의 차원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야기의 차원에서도 특유의 지적 모험을 감행하고 있다. 학자이자 소설가의 심각한 형이상학적 질병으로 보이는 이런 지적 풍경이야말로 내가 세 편의 소설을 읽으면서 얻은, 뜻밖이면서도 또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전혀 뜻밖이지 않은, 수확물의 모든 것이다. ”
『추리소설로 철학하기 - 에드거 앨런 포에서 정유정까지』 백휴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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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경
한 걸음 양보해서 한국 추리작가의 작품이 대단치 않다고 치자.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 또한 형편없음을 생각해보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추리소설로 철학하기 - 에드거 앨런 포에서 정유정까지』 <초자아는 숭고의 탄생지다: 서미애와 칸트> p.255, 백휴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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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경
이 문장을 처음 본 순간 느낀 짜릿한 쾌감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요? ㅋㅋ
박소해
ㅋㅋㅋㅋ 그 쾌감 저도 느끼고 있네요. 아니 이 시간에 안 주무시고 뭐하십니까? 라고 묻고 있는 안 자고 있는 사람.
무경
잠 자다가 깨어버리고 다시 잠이 오지 않으면 글을 쓰거나 책을 읽거나 여기를 기웃거려야지요 ㅋㅋ
박소해
3번 선택지를 진행자가 매우 좋아합니다. :-)
미스와플
한국 추리소설에 대해 폄하하는 말을 들은 적 저도 있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지요. 그 의견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 말을 한 사람은 그 이후 한국 추리소설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는 취급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됩니다.
박소해
후후후 이 의견을 박제해 놓고 싶습니다.
borumis
이제야 서미애와 칸트까지 읽었네요. 저도 이 문장에 사이다~라며 밑줄을.. 근데 저는 추리소설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다지 탁월한 시각을 갖고 읽지는 못한 것 같아요. 이번 챕터는 그나마 칸트 사드 부분은 이해할 것 같았는데 중간 나온 라캉이나 지젝과 관련된 내용의 태반은 이해 못한 듯..;; 어쩌면 저 또한 단순 소비적인 독서를 하지 않았나하고 반성합니다.
박소해
저는 황세연 작가님과 지젝 파트를 읽고 있는 중입니다. :-) 한부의 밀도가 워낙 높아서... 읽고 난 뒤에도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네요.
박소해
<6. 미로 속에서는 자신이 어디 있는지 중요하지 않다: 형이상학적 추리소설, 폴 오스터의 <뉴욕 삼부작>>
폴 오스터는 작가의 초월적 위치(메타)를 부정하고 더 나아가, 작가를 등장인물이 사는 소설 세계 안으로 밀어 넣으려는 발칙한 상상력을 <뉴욕 삼부작>에서 발휘합니다. <뉴욕 삼부작>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메타 소설인 것이죠.
형이상의 문제를 다루기에 <뉴욕 삼부작>은 형이상학적 추리소설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혹자는 탐정의 추리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작가의 지위를 부정하기에 반추리소설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탐정은 작가가 제멋대로 조종하는 줄에 매달린 인형에 불과한 존재인데 그 줄을 끊고 난 뒤 탐정의 운명은 어떻게 변할까요?
백휴 작가님은 고전추리소설 - 하드보일드 추리소설 - 형이상학적 추리소설의 흐름을 범죄와 관련하여 꿰는 방식으로 파악할 수도 있고 한 범주로 파악하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읽어본 걸 종합해보면,
1,2부 고전추리소설 (포, 보르헤스, 애거사 크리스티)
3부 하드보일드 추리소설 (레이몬드 챈들러)
4-6부 형이상학적 추리소설 (줄리아 크리스테바, 움베르토 에코, 폴 오스터)
이렇게 흐름을 크게 나눠볼 수 있겠네요.
개인적으로 폴 오스터 작가님을 엄청나게 좋아하진 않지만 어떤 의무감으로 대학시절 이후 꾸준히 읽어왔습니다. 이 작가님이 그려내는 현대성이 무척 세련되었고, 부럽다는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순수한 독자로 만났던 폴 오스터와, 작가 데뷔를 한 뒤에 만난 폴 오스터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듯합니다. 여전히 타자기로 글을 쓰고 계실까요? :-)
6부를 읽고 아주 오랜만에 <뉴욕 3부작> 재독을 결심했고 어제 서점에 책을 주문했답니다. <뉴욕 3부작>을 근 20년 만에 다시 읽고 6부를 읽으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
박소해
“ 뉴욕은 무한정한 도시, 아무리 걸어도 끝나지 않는 미로였다.(...) 뉴욕은 그에게 언제나 길을 잃은 듯한 느낌을 남겨주곤 했다. 길 위에서 길을 잃을 뿐만 아니라 마음속에서도 길을 잃고 마는 도시였다. (...) 모든 장소가 똑같아지기 때문에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중요하지 않게 된다. ”
『추리소설로 철학하기 - 에드거 앨런 포에서 정유정까지』 백휴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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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해
결국 작가와 탐정은 교체 가능한 존재다.
『추리소설로 철학하기 - 에드거 앨런 포에서 정유정까지』 백휴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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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경
<예리한 눈빛과 따뜻한 미소의 병립 구조: 히가시노 게이고와 마루야마 마사오> 파트는 잔뜩 긴장하며 읽었습니다. 한국 추리작가의 워너비이자 공적(???)인 히가시노 게이고를 다루는 파트니까요! 사실 제 주변에서 추리소설을 '낮잡아' 말하는 사람들이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경우는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 글에서처럼 히가시노 게이고를 높이 평가하는 경우는 꽤 드물어서(높게 평가하는 경우에도 그의 대중성을 높이 쳐주는 쪽이 많았어요) 흥미로웠습니다. 그의 작품 속 명탐정들을 분석하며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추론해내는 과정에서 유사 추리소설의 느낌을 받았습니다. (여담이지만 저는 문헌을 추적하며 그 텍스트의 진면목을 분석해 나가는 과정을 다룬 글을 좋아합니다. 잘 쓴 저작물은 추리소설만큼 재미있거든요!) 같이 언급된 마루야마 마사오라는 이름은 일본에서도 꽤 예전 사람 취급을 받는 듯했지만, 그럼에도 다양한 분야를 건드리며 꽤 많은 저작을 남겼고 아직까지도 그의 생각은 중요한 논쟁거리가 되는 듯하더라고요. 그 이름을 여기서 봐서 또한 뜻밖이었습니다.
사실 이 파트는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의 분석보다는 일본 추리소설계의 흐름을 짚은(그리고 민주주의의 흐름과 연계시키는) 부분이 개인적으로 좀 더 흥미로웠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가 이 글 이후로 사회파와 본격파의 사이를 오가는 진자처럼 보이게 되었습니다. 사상의 대립이 장르의 역사가 된다! 무척 흥미로운 주장입니다.
박소해
개인적으로 히가시노 게이고는 본격/ 사회파 분류 그 자체를 넘어선 대가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앞서 백휴 작가님이 말씀하셨듯 추리소설은 다양하기 때문에 한 작가가 한 추리 장르라고 본다면... 히가시노 게이고는 스스로 한 장르가 된 작가라고나 할까요?
그런 면에서 백휴 작가님이 지으신 “예리한 눈빛과 따뜻한 미소의 병립 구조”란 제목은 적절해 보입니다. 날카로운 트릭과 따뜻한 인간애를 동시에 구현해내는 작가니까요.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님이 워낙 다작을 하다보니 때로 범작이나 평작도 나오곤 해서 “예전만 못하다” “이제 안 읽는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봤습니다만, 저는 막 시작한 작가로서 공부하고 있는 입장이니 이분의 소설을 계속 들이파고 싶습니다.
무경 작 가님. 긴 의견에 감사드립니다.
추리문학
인사이더/아웃사이더 부분에 대하여
세심하지 못해 오해를 샀네요. 프랑스에 없는
표현은 아니지만 거의 쓰지 않는 것 같아요.
암튼 제 취지는 이렇습니다. 모든 사람이 성공을 바라겠지만, 우리 사회의 경우 정치적으로 철학적으로 구조화(조선시대 권도)돼 있기에 진정한 의미의 바깥에 대한 감각이 부족해요. 우리는 보통 주변부에 머물거나 주변부의 열악한 환경에서 태어났지만 자수성가한 인물을 아웃사이더라 하지만, 프랑스인들은 이 보다는 주변부에서 그보다 더한 바깥(방향성)으로 나아가려는 인물을 일컫기도합니다. 셀린느의 <밤끝으로의 여행 >에 무료봉사를 하는 의사이자 화자인 바르다뮈가 쌩양아치 로뱅송(돈 몇푼에 살인을 저지르다 실패하고 거의 실명에 이른 자신을 사랑한 여자를 눈이 좋아지자 배신하는, 결국 그녀가 쏜 총에 맞아 죽는) 죽자 이렇게 외칩니다.
-오, 위대하도다, 로뱅송이여!!
우리 가치관으론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은 사회적으로 신분보장이 된 의사에
한발을 담그고 다른 발로 주변부와 접촉면(무료봉사)을 가져왔는뎨 로뱅송이라는 이 쌩양아치 새끼가 삶을 걸고 목숨을 던져 바깥이라는 방향으로 시종일곤했기에 위대하다는 겁니다.
강남 정형외과에서 한달에 수억 벌면서 가끔은 무료봉사를 하는 의사가 8.15에 폭주족
리더로서 경찰이나 골탕먹이다가 사고로 죽는 양아치에게 위대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인적틀에 따라 보는 게, 보이는 게 전혀
달라집니다. 그런 취지로 쓴 글인데 축약되어
혼란을 줬네요^^
borumis
아아 아웃사이더가 그런 의미였군요! 크리스테바 부분에서 궁금했던 부분인데 감사합니다. 전 까뮈의 etranger같은 느낌인가 했는데..주변부보다 더 바깥을 향한! 지금 추리문학님 설명을 보니 “풍자를 섞지 않고는 추리소설을 쓸 수 없는 프랑스 전통”을 이해하겠습니다. 아웃사이더적인 것은 육체를 억누르는 정신, 즉 허위 정신을 공격하는 것이군요. 이런 공격성은 질서와 관념으로 이루어진 상징계 밖으로 향하려는 expulsion과 연관돠는 거구요. 하지만 이 상징계 밖은 광기, 즉 이탈 외의 목적을 상실해서 어디로 갈 지 모르고 규정된 내재성을 버린 심연으로서의 x를 사유하는데 오히려 이야기 (로고스)가 이를
회피하는 대체물일 수 있다고 크리스테바는 의문을 제기하나봐 요
박소해
아 자세한 예시와 설명으로 그 부분에 대해 느꼈던 난해함이 어느 정도 해소됐습니다. 감사합니다, 백휴 작가님. 신선한 점은 프랑스에서 보는 아웃사이더가 한국에서 보는 소극적 개념의 아웃사이더와 완전히 다르네요. 한국에서는 중심부 권력에 미치지 못한 자를 아웃사이더라 일컫는데, 프랑스에서는 주변부에서 더 외곽으로 스스로 나아가는 자를 아웃사이더라고 일컫기도 하는군요. 어쩐지 더 멋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님의 이러한 해설이 개정판(벌써 말하면 너무 이른 걸까요?)에 들어가면 독자의 이해를 돕는 데 큰 도움이 될 듯합니다. :-)
추리문학
오타교정: 로뱅송이 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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