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로 속에서는 자신이 어디 있는지 중요하지 않다: 형이상학과 추리소설, 폴 오스터의 <뉴욕 삼부작>>은 제목을 본 순간 반가웠습니다. 폴 오스터의 작품 중 유일하게 제대로 읽은 게 이 책이었기 때문에... 이 책을 읽으며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가장 또렷하게 기억나는 첫 이야기만 떠올려봐도, 시작 부분은 추리 장르의 모습을 흉내내고 있지만 그 내용 전개가 서서히 장르의 것과는 달라져 가고, 결말 또한 이게 뭐지? 싶은 느낌이었으니까요. 뭐랄까, 갑자기 뚝 끊겨버린 음악 같은? 그런데 그게 끊긴 게 아니라 음악가가 정말로 거기서 음악을 마무리한 걸 안 황당함?
이 글에서 특히 중점적으로 다룬 '유리 도시'에서는 '폴 오스터'라는 이름으로 탐정 활동을 하는 작가의 이야기가 나오지요. 작가와 작중 탐정 사이의 관계를 두고 고찰(혹은 장난)하는 이 작품에서 탐정을 하기로 한 작가의 이름이 퀸임을 떠올리고 웃음이 나왔습니다. 엘러리 퀸을 연상하게 하는 이름이니까요. '작가=작중 탐정'의 구도로 가장 유명한 이름! 하지만 엘러리 퀸의 작품과는 달리 폴 오스터 탐정(작가)은 혼돈을 질서로 바꾸지 못하고, 오히려 혼돈을 더욱 큰 수렁으로 확장시킬 뿐이었지요. 이 글에서는 미로라고 표현한... 하지만 어질러진 무언가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시도 역시 결국은 새로운 무질서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 이 글에서 그런 생각을 슬쩍 본 듯합니다.
(여담이지만 제가 최근 준비중인 작품의 가제를 <부산 3부작>이라고 정한 것 역시 폴 오스터의 이 책 제목을 빌려온 것이었습니다. 본질은 취하지 않고 껍데기만 취하는 듯합니다만... 물론 정식으로 나오면 제목은 바뀔 겁니다.)
[박소해의 장르살롱] 13. 추리소설로 철학하기
D-29
무경
borumis
아 무경님도 작가이신가보네요! 부산 3부작! 흥미롭습니다.
전 실은 뉴욕3부작을 폴 오스터 작품 중 가장 좋아해서.. 보르헤스나 울리포 집단 등 이런 메타 픽션적 요소가 있는 책을 일부러 한 때 많이 찾아 읽었어요. 레이몬드 챈들러의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이 패러디 요소가 많이 담겨있듯 고전적 추리소설도 그런 전지적 역사적 구조가 반추리소설에 의해 뒤집혀질 가능성을 많이 담고 있어서 이를 통해 더 넓은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반면 더 해체와 무기력의 방향으로 나아갈 발판이 된 문학적 흐름이 흥미롭네요.
무경
제 프로필 사진에도 걸어두었습니다만, 일제강점기 배경으로 추리소설 써서 책 냈습니다. <부산 3부작>도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요. (이참에 홍보해두자... 허겁지겁)
박소해
폴 오스터를 가장 좋아하지는 않지만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하나로 생각하는 이유는 그가 가지고 있는 ‘현대성’ 때문입니다. 백휴 작가님이 이번에 다뤄주신 게 계기로 <뉴욕 3부작>을 다시 재독하게 될 듯합니다.
무경
6부까지의 독후감을 무척 산만하게 늘어놓았습니다. 사실상 인상을 스케치한 정도에 불과한 듯합니다. 글들을 읽으며 머릿속에서 몽글몽글 솟아오르는 생각이 많았지만, 그것들이 두부처럼 제 형태를 굳히려면 아직 시간과 계기가 필요할 거 같습니다. 유념해 주셨으면 합니다.
borumis
움베르토 에코는 지식인으로서 예전부터 보수적 파시즘에 대항한 자유 지성을 옹호하면서도 또 이에 반해 민주주의가 포퓰리즘이나 우민정치로 변질될 위험을 경계해온 딜레마를 작품에서 보여주는데 그렇기 때문에 대중적인 장르 추리소설을
택하면서도 쉽고 명확한 결론을 내려주지 않는 듯합니다. 애드소를 화자로 택하거나 회고 방식을 택한 것도 좀더 객관적인 거리를 두려고 한 것 같았는데 또 정답을 쉽게 도달할 수 없는 망설임을 보여준 것일 수도 있겠네요. 이런 딜레마가 지금도 문학적 해석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정치사회적 향후 앞길과 맞닿은 문제의식을 과거에 대한 해석으로부터 이끌어내는 점에서 에코의 소설들이 전 매력적이었어요.
박소해
아마 에코는 본인의 철학을 가장 대중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분야가 추리소설이라고 생각해서 그 형식을 채택해 자신의 생각을 펼쳐보인 게 아닌가 싶습니다. 문학이 재미로만 그치지 않고 의미를 확장해나가는 모습이 멋져 보입니다.
박소해
여러분 안녕하세요? 지금에야 짬이 나서 접속했습니다.
다양한 의견들이 쏟아져나오는 활발한 토론이 아주 보기 좋군요. 덕분에 살롱이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됐어요.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신 여러분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저도 프롤로그부터 6부까지 독서하고 사유한 내용을 여기 정리해볼게요. :-)
<프롤로그: 나는 왜 추리소설로 철학을 해왔는가>
첫 두 페이지에서 추리소설가로서의 백휴 작가님의 울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치 우리 철학이 서구나 중국 철학과 다른 주변부 철학 취급 받듯이 추리소설 역시 순문학이라는 강력한 헤게모니 외곽에 위치한 주변부 문학 취급을 받았다는 것이죠. 여기에서 추리소설로 철학을 해보자는 동기가 태동하게 됩니다.
“추리문학은 오락이다, 그리고 한국 추리문학은 수준 이하다”라는 고정 관념에서 탈피하기 위해 백휴 작가님은 국내 작가들의 작품 속 핵심 키워드를 살펴보면서 추리소설로 철학하기를 시도한 것이죠.
서구 추리소설은 인간과 세계라는 이항적 세계관(신과 신의 피조물인 인간)이 일항 세계관(신은 죽었으므로 인간은 스스로 고통을 감내할 수밖에 없다)으로 변해가는 시기에 탄생한 문학입니다.
“추리소설은 메타(초월)을 가능하게 한 은유(메타포)를 의심하는 정신이 분명하다.” 저는 이 말은 추리소설의 핵심 정신이 의심이자 회의이며 기존 헤게모니에 대한 전복이라는 뜻이라고 봅니다. 백휴 작가님은 제대로 살기 위해 낡은 집을 버리거나 새 단장을 하듯이 우리는 매 순간 삶의 요구에 부응하는 새로운 사유를 찾아 나설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덧붙여 유교 국가인 한국에서 추리소설은 범죄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기존 사유를 전복하거나 보완하는 역할을 해왔고 앞으로도 해줄 것이라 강하게 주장합니다. 추리소설이야말로 우리 사유를 새 단장하게 하는 문학이란 뜻이지요.
“니체는 철학이 위험하다고 말했다. 한번 시작된 철학적 사유는 휴식을 모르기 때문이다. ”
추리소설은 살인사건을 다룹니다. 살인은 인간의 극단적 행위죠. 사유 또한 극단적인 사색으로 점철돼 있습니다. 그러니 추리소설 만큼 철학적 사유 또한 위험합니다. 위험한 문학을 다루려면 위험한 사유의 세계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사유와 추리소설은 공히 위반의 문제’란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생각이 옳아 보인다고 백휴 작가님은 결론을 짓죠. 추리소설과 사유에서 ‘극단’을 보았기에 평생 철학하는 추리소설가가 되었다는 백휴 작가님과 함께 자,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추리소설로 철학하기> 읽기를 시작해 봅시다. :-)
박소해
추리소설이 메타(초월)를 가능하게 한 은유(메타포)를 의심하는 정신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추리소설로 철학하기 - 에드거 앨런 포에서 정유정까지』 백휴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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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해
추리소설은 살인사건을 다룬다. 살인은 인간의 극단적 행위에 속한다. 사유 또한 극단적 사색으로 점철돼 있다.
『추리소설로 철학하기 - 에드거 앨런 포에서 정유정까지』 백휴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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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해
<1. 진리란 표면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에드거 앨런 포와 보르헤스>
1841년 세계 문학의 흐름을 뒤흔드는 일이 벌어집니다. 바로 에드거 앨런 포가 <모르그 거리의 살인>을 발표함으로써 추리문학이 탄생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황금충>이나 <도둑 맞은 편지>를 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만, 이 에드가 앨런 포가 없었다면 과연 셜록 홈즈나 포와로가 나왔을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에드거 앨런 포 작가님에 대해서 사랑과 존경이 절로 우러나옵니다. 포는 낭만주의의 끝물 시기에 예술가의 영감에 의지하지 않고 독자에게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통해 문학의 힘을 키울 궁리를 하다가 추리문학을 내놓게 되었다고 백휴 작가님은 분석하고 계신데요.
저는 어렸을 때 포의 소설을 읽으면서 탐정 뒤팽이 친구와 나누는 대화를 통해 추리해나가는 과정을 보고 정말 감탄에 감탄을 금하지 못했는데요. 정말 추리소설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었죠. <모르그 거리의 살인>은 후에 <빅 보우 미스터리>, <13호 감방의 비밀>, 탐정 브라운 신부 시리즈, <노란 방의 비밀> <세 개의 관>으로 이어지게 되지요.
포의 추리소설에서 백휴 작가가 읽어낸 키워드는 ‘짝패’인데요. 즉 범인의 치밀한 수법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탐정은 범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도둑 맞은 편지>나 <윌리엄 윌슨>에서도 이 짝패 키워드는 발견됩니다. <도둑 맞은 편지>에서 뒤팽과 범인인 장관 D의 이름 이니셜이 같죠. <윌리엄 윌슨>은 아예 대놓고 도플갱어를 다루죠.
보통 추리문학사는 ‘솔루션 - 스포일러’에 근거한 자기 동일성의 역사라고 보여지지만, 포의 소설은 다릅니다. 포의 소설은 ‘다시 읽을 가치가 있는 솔루션’으로 이해돼야 합니다.
문호 보르헤스는 추리소설가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작가인데ㅡ 그는 포의 유지를 오롯이 받든 작가이기도 합니다. 그는 1941년 <끝없이 두 갈래 길로 갈라지는 정원> 1942년 <죽음과 콤파스> <이븐 하칸 알-보카리, 미궁에서 죽다>를 발표합니다.
탐정 뒤팽은 시인이자 수학자인데요. 언뜻 정반대의 영역 같지만 이 두 능력을 공유해야 탐정으로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어윈은 뒤팽의 이런 이중화된 능력이 분석적 추리소설의 표준적 요소라고 봅니다. 어윈은 이러한 이중화를 분석적 추리소설의 요건인 동시에 고급예술과 저급예술을 나누는 기준으로 봅니다. 그는 분석적 추리소설가로 포와 보르헤스를 꼽고 있습니다. 즉, 미스터리의 해결보다는 미스터리 자체에 중요성을 부여했단 뜻이죠.
미스터리> 미스터리의 해결
어윈의 논리에 따르면 표준적인 추리문학사는 포의 생각을 억압해다고 봐야 합니다. 즉 ‘포- 보르헤스’가 잊힌 방계 추리문학사를 형성한다는 것이죠. 윌키 콜린스의 <월장석>에 포가 억압되기 전의 지적 분위기가 남아 있지만...
‘지식은 수수께끼를 드러낸다’란 명제. ‘솔루션 - 스포일러’의 짝에서 보면 이 명제가 유지되는 한 추리문학은 불가능합니다. 미스터리가 해결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미스터리가 미스터리의 해결보다 언제나 크다면 결국 해결은 제한적이거나 무의미한 것이 아닐까요. 미스터리가 미스터리의 해결보다 클 때 지식 밖의 어떤 영역, 지식으로 제어하지 못한 강력한 힘이 추리소설 속으로 흘러듭니다.
포의 추리문학사는 기존 추리문학사를 폐기/극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표준적인 추리문학사를 탈 - 중심화하는 것이죠.
기원은 쉽게 배제되곤 합니다. 우리는 ‘포- 보르헤스’ 라인을 염두에 두어야 탈- 중심화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박소해
미스터리>미스터리의 해결
『추리소설로 철학하기 - 에드거 앨런 포에서 정유정까지』 백휴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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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해
“ 미스터리가 미스터리의 해결보다 언제나 크다면 결국 해결은 제한적이거나 무의미한 것이 아닌가. 여기서 해결 밖이나 지식 밖의 어떤 영역, 그것이 원초적 욕망으로 불리든 무의식으로 불리든 지식으로 제어하지 못한 강력한 힘이 추리소설 속으로 흘러든다. ”
『추리소설로 철학하기 - 에드거 앨런 포에서 정유정까지』 백휴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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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해
저는 1장에서 개인적으로 제가 본격 추리문학에 대해 가져왔던 여러가지 의문점을 해소할 수 있었는데요. 일부 본격 추리소설은 퍼즐 그 자체를 만들어내거나 푸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듯해서 독서를 마친 후 만족스럽지 못했어요. 막연했지만 제가 추리소설을 읽으면서 단지 퍼즐을 푸는 것 그 이상을 원한다는 건 분명했어요. 그런데 이 1장을 읽고 나서야 그동안 제 불만족의 기원을 깨닫게 됐습니다. 저는 미스터리의 해결보다 미스터리 그 자체를 원했던 것이죠. 추리소설 안에서 미스터리의 해결을 그려내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더 나아가 소설 자체가 거대한 미 스터리가 되게 한다면, 결말이나 반전이 알려져도 다시 읽을 맛이 있는 소설이 된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됐습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그런 방식으로 제 소설을 쓰고자 노력해왔던 것 같습니다. <해녀의 아들> 역시 그 선상에 서 있는 작품이고요. 신인작가로서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아마, 앞으로 제가 나아갈 길은 ‘포-보르헤스’라는 두 명의 걸출한 대문호가 이미 걸었던 방계 추리문학사의 길이 아닐까요? :-)
박소해
<2. 삶은 가면놀이다: 애거사 크리스티와 니체>
2장은 제가 정말 좋아하고 사랑하는 애거사 크리스티 여사의 소설과 니체 철학이 짝을 이루고 있는 장입니다. 백휴 작가님은 애거사 크리스티의 키워드를 한 마디로 노스탤지어라고 단정 짓습니다. 왜 그럴까요? 애거사 크리스티 작가 본인이나 작품을 들여다 봤을 때 아주 집요하게 반복되는 패턴이 있습니다. 시골의 대저택, 그 저택에 사는 부유한 지배계급, 그들 사이에 일어나는 유산 다툼이나 치정, 살인... 애거사 크리스티의 문학은 한 마디로 한때 ‘해가 지지 않았던 대영제국’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그래서일까요? 개인적으로 애거사 여사의 후기작들(1960년대 이후)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애거사 여사의 황금기는 아무래도 1920년대 <스타일즈 저택의 살인>부터 1940년대까지입니다.
저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은 언제나 철 들기를 거부하는 어린 아가씨의 모험극 같이 느껴집니다. 적당히 우아하고 적당히 아름다우며 적당히 재미있지요. 그러면서도 인간에 대한 관찰력이 예리하고 뛰어나 아주 긴장감이 넘치는 장면들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애거사 여사의 내면에는 마치 나이 먹기를 거부하고 영원한 젊음을 누리고 싶어하는 에고가 도사리고 있는 듯해요. ‘깊이가 부족한 것 아닌가’란 지적을 들을 수 있는 세계관이지요. 그런데 어떡합니까. 바로 그 ‘얕음’이 애거사 여사 작품의 매력인 것을요. 언뜻 평평한 것 같으면서도 갑자기 치고 나오는 예리한 한 마디가 여사의 강점이거든요.
애거사 여사가 자주 그려내는 시골마을은 그저 무대장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미스 마플의 입을 빌려 작품 속에서 이렇게 말하죠.
“나는 당신이 이곳을 무대 장치로 생각하길 원해요.”
즉, 우리는 애거사 여사의 소설을 읽는 동안 영국 시골마을에서 벌어지는 인간군상극을 관람하게 되는 겁니다. 지나치게 양식화되어 있고 늘 비슷비슷하다고요? 바로 거기에 애거사 여사의 강점이 있는 건데요? 혹자는 그 반복되는 패턴이나 양식이 싫어서 애거사 여사의 소설을 단순하고 고루하다며 싫어하기도 해요. 하지만 저는 그 정형성, 그 양식이야말로 작가로서 애거사 여사가 가지고 있는 엄청난 재능이라고 봐요. 그 양식은 일종의 지문과도 같아서 책 어디를 펼쳐 봐도 몇 문장만 읽어봐도 애거사 여사의 소설이란 걸 바로 알 수 있거든요. 다른 추리작가 중에 그렇게 책을 펼치고 단박에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는 작가가 몇 명이나 될까요?
니체는 원본 따위의 세계란 없다고 주장한 사상가이죠. 해석된 세계만 있을 뿐이라는 겁니다. 애거사의 추리소설에서 이러한 니체 사상의 흔적을 감지하게 됩니다.
애거사의 작품 속에서 보통 범인은 자신이 살인자를 감추기 위해 얼굴에 가면을 씁니다. 그런데 영민한 탐정만이 가면 뒤에 감춰진 본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데, 그 본모습이 또다른 가면에 불과하다면 어쪄죠?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은 서술트릭으로 유명한 작품인데요. 독자는 1인칭 화자가 범인이라는 걸 깨닫고 자신도 범인일 수 있다는 걸 알고 화들짝 놀랍니다. 애거사의 이 소설을 읽으면서 지금까지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던 자신의 모습이 가면일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애거사는 탐색의 눈이 아니라 관찰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던 게 아닐까 라고 백휴 작가님은 말씀하십니다.
”연극은 끝났다! 이야기는 말해졌다!”
구성의 천재로 소문났던 애거사. 잘 만든 연극과도 같은 애거사의 소설은 두고두고 저를 즐겁게 해줄 것입니다.
박소해
<3. 생존 감각을 확보하는 법 : 레이몬드 챈들러와 사르트르>
챈들러. 정말... 저에게는 애증의 이름이죠. 한때 하드보일드에 푹 빠져서 챈들러의 모든 소설을 탐독했더랬습니다.
그런데 이 하드보일드라는 장르가 바로 애거사 크리스티로 대표되는 퍼즐 미스터리에 대한 반동으로 탄생했다는 문학사를 알고 나니 더 흥미롭네요.
저는 하드보일드가 절망의 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3장을 읽으면서 백휴 작가님의 분석에 크게 감탄했는데요. 무엇보다 챈들러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엮은 것이 정말 절묘하다고 생각했어요.
“반성, 사색, 개념화를 거치지 않은 유럽인에 비해 필립 말로는 행동으로 규정되는 사람이다. 과거를 믿지 못하는 사람이니 곧바로 상황에 뛰어든다고 해도 장해가 될 것은 없다. 사랑을 믿지 않으니 여자의 유혹에 진로가 방해받지도 않는다. ”
백휴 작가님은 챈들러의 문학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재즈의 당김음과 궤를 같이 한다고 분석합니다. 툭하면 얻어 터지는 탐정 필립 말로의 무기력은 금융자본의 독과점 지배에 대한 시민의 저항 불가능성을 상기시킨다고 보고요.
대체 챈들러는 왜 이런 암울한 장르를 창조해 냈을까요? 1. 알코올 중독자였던 아버지. 2. 플롯보다 삽화로써의 신을 쓰길 즐겨했던 글쓰기 3. 조어 생산.
하드보일드 탐정 필립 말로는 결코 선의 대변자가 아닙니다. 그는 의미와 질서의 보증인이 아니며 범인 = 악이라는 등식은 말로의 세계에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는 무질서(악)을 제거함으로써 질서(선)이 회복되는 이분법의 세계가 아니라 LA라는 도시로 대표되는 혼란스러운 경계 위의 세계에 삽니다.
“말로는 타락한 경찰에게 죽도록 얻어맞는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말로는 아름다운 여자 팜파탈의 유혹을 뿌리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박소해
죽음, 우연, 슬픔, 고독, 공허, 타락, 기사도 정신, 아이러니, 김릿, 그리고 마지막으로 연민과 조롱... ‘돈도 없고, 가족도 없 고, 전망도 없고, 아무것도 없지(...).
『추리소설로 철학하기 - 에드거 앨런 포에서 정유정까지』 백휴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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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해
여담이지만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님이 레이몬드 챈들러를 좋아하기로 유명하죠. :-)
박소해
저녁밥을 아직 못먹어서 나머지는 저녁을 먹고 나서 계속 할게요. :-)
borumis
박소해님 식사는 잘 하셔야합니다~ ㅎㅎ 어제 저녁 열심히 글 올리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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