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강의를 하면서 그런 걸 느껴요. 강의 잘하는 한 선배(JYP)가 저한테 "자꾸 청중한테 함께 고민해보자"라고 제안하지 말라고. 강의를 듣는 청중은 고민에 대한 해결책을 원한다고. :) 허시먼은 어떤 문제에 대한 완전하고 유일한 해법은 불가능하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던 사상가잖아요. 당연히 명쾌한 해법을 원하는 카리스마 교수를 원하는 학생과는 궁합이 안 맞았겠죠.
[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03. <앨버트 허시먼>
D-29
YG
소피아
이 포스트 읽으면서 장면이 그려져서 잠시 (약간 크게) 웃었어요 (죄송).
YG: 여러분 함께 고민해 봅시다!
청중: (동공지진) 내가? 고민을? 여기서? 왜? (어리둥절)
장내 고요 - 청중들 경직 -
YG님은 허시먼과는 다른 상황인 것 같아요. 일단 말씀은 잘하시니까.
허시먼은 강의 중에 웅얼거리거나 멍하니 있거나 무슨 말 하는 지 모르게 혼자 내적으로 방황했던 상황. 신은 공평하다 ㅋ
YG
아이고, 저는 @소피아 님 글 보면서 빵 터졌습니다. 하하하! 그런데 또 사석에서 허시먼은 대화를 주도하는 사람이었다잖아요, 이 언밸런스라니! (새러는 완전히 사교계의 여왕이었던 듯하고.)
롱기누스
저도 동감합니다. 특히 학부생들과 함께 토론하면서 이건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런 경우에는 어떨까? 라는 식으로 그들의 의견을 듣고 나누길 원했는데... 참 잘 안되더라구요. 요즘 학생들은 특히 학원강의에 익숙해져인지 말씀하신 명쾌한 답을 원한는 것 같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롱기누스
진전되어 가는 것 중에 원래의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앨버트 허시먼 - 반동에 저항하되 혁명을 의심한 경제사상가』 p.598., 제러미 애덜먼 지음, 김승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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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기누스
급히 해결하고 서둘러 바로잡고 빠르게 고치고자 하는 충동은 사람들이 대안을 고려하는 데 도움이 되기보다는 방해가 되었다
『앨버트 허시먼 - 반동에 저항하되 혁명을 의심한 경제사상가』 p.599., 제러미 애덜먼 지음, 김승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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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기누스
기존의 개혁의 개념, 즉 변화를 가로막는 긴장을 제거하는 것을 개혁의 목표라는 개념에서 나아가 변화를 강제하고 추동해낼 수 있는 긴장을 창출하는 것이라고 보았던 허시먼의 관점이 흥미로웠습니다. 변화는 결국 긴장에 의해 동력을 얻게되고 이것이 없으면 정체상태에 빠지는 것을 현장에서 경험했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을 가질 수 있었지 않을까요. 긴장도 갈등도 부채가 아니라 변화에 있어 중요한 자산이 될 수 있다는 유연한 사고. 존경합니다.
롱기누스
“ (주류 이론의 공통적인 문제점은) 개발이란 모든 장애를 일거에 제거하는 과정이며 그렇게 하고나면 그 경제가 '발달된' 새 균형점을 향해 순조롭게 나아가리라 보는 견해였다. 허시먼은 이것이 허황된 생각이며 인과관계가 거꾸로 된 주장이라고 지적했다. 그가 보기에 '압력', 긴장, 불균형을 만들어 내는 것이 운동을 추동하는 기본 동력이 되어야 했고, 그 다음에는 그것이 더 많은 마찰과 긴장을 내놓을 수 있어야 했다.
긴장을 만드는 장애와 제약들에는 '숨겨진 합리성'이 있었다. 그러한 장애와 제약들을 만들어냄으로써 그것들을 해결하려는 쪽으로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이란 개념으로 앨버트 허시먼은 '숨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