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보르헤스 읽기] 『픽션들』 2부 같이 읽어요

D-29
화제로 지정된 대화
[~비밀의 기적] 흘라딕이 헤르 발쉬도르 출판사를 통해 번역가로 활동했다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여러 작가들의 책을 번역하면서 그간 "출판했던 모든 책들"에서 "복잡미묘한 허탈감을" 느낍니다. 근원적으로 자신이 생각한 기준에 작품들이 조금씩 못 미치는 것을 알고, 이내 자신이 직접 시곡을 쓰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시곡의 내용도 주목할 만합니다. 흘라딕은 야로슬라브 쿠빈이라는 등장인물을 내세우는데, 그는 자신이 흠모하는 부인의 남편이 되었다는 망상에 빠져있는 인물입니다. 번역자는 원작자는 아니나 누구보다 원작자의 텍스트에 근접하여 그 텍스트를 도착어로 옮기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시곡 속의 내용은 현실의 흘라딕이 처한 상황을 조금씩 누설하고 있습니다. 한편,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죽음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한 그 사람은 살아 있다고 말할 수도 있으니까요. 따라서 사람은 죽음에 가장 가까워지는 그 순간을 다만 무한히 인지할 수 있을 뿐입니다. 단, 시간이 무한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사키 아타루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한 강연에서 어떤 철학자의 말을 빌려서 "우리는 타인의 죽음을 경험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의 죽음도 엄밀한 의미에서 경험(인지)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죽음이 "모든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라고 말하면서, 곧이어 "모든 가능성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가능성"이라고 부연합니다.
사람은 죽지요. 일개 인간은 죽습니다. 그런데 내가 죽는 것은 확실합니까? 죽을 수 있습니까? (···) 자, 죽기로 결심합니다. 목을 매든 방아쇠를 당기든 본인 마음입니다. 그런데 죽으려는 내게 이상한 사태가 찾아옵니다. 왜냐하면 그 행위를 하고 있는 나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니 영원한 슬로모션이 출현하는 것입니다. 내내 죽어갑니다. 억겁의 세월이 흘러도 계속해서 죽어갑니다. 죽음은 끝나지 않습니다. 본인이 죽은 것을 확인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 괴상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비트겐슈타인이 멋지게 한마디로 정의했거든요. “이제껏 머리뼈를 열어본 인간에게는 모두 뇌가 있었다. 정말 놀라운 우연의 일치가 아닌가?” 그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죽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본인이 죽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물론 본인이 죽은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 또한 아무도 없습니다. 본인이 죽은 것을 아는 망자는 없습니다. 죽은 사람은 자신이 죽은 것을 모릅니다. 자신의 시체를 본 사람은 없습니다. 자신의 시체와 가장 흡사한 것을 보고 싶으면 거울을 보면 됩니다. 그것이 거울의 매력입니다. (···) 어째서 모두 거울을 좋아하냐면 거기에 비친 모습이 자신의 시체,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시체와 가장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종교에서 천국이나 극락, 불성이나 신성은 여러분의 손이 닿지 않는 저편에 있는 동시에 여러분의 자신 속에, 여러분 가까이에 있다고 말하죠. 그러나 자신이 절대 도달할 수 없는 머나먼 장소이자 절대적으로 자신의 가까이에 있는 성스러운 장소는 자신의 시체입니다.
제자리걸음을 멈추고 111-112쪽, 사사키 아타루 지음, 김소운 옮김
제자리걸음을 멈추고자기주장과 색깔이 분명한 일본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의 또 다른 신간. <야전과 영원> 출간 이전부터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의 대성공에 이르기까지 힘차고 거침없이 춤추던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그 시기를 관통해온 약동하는 사유의 흐름을 돌아본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유다에 관한 세 가지 다른 이야기~] 이 이야기는 유다 이스카리옷을 둘러싼 신학적 사변을 다룹니다. 먼저 사족을 달자면, 저는 비신도의 입장에서 성서를 경전이 아닌 하나의 텍스트로 보고 서사적으로 접근하고자 했습니다. 간혹 사실 관계가 틀린 부분이 있을 수도 있는데, 너그럽게 지적해주시면 반영하겠습니다. 유다는 성서 속에 등장하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였다가, 후일 예수를 '작은 은 30'을 받고 배반한 죄로 버려지고 제명되어 끝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인물입니다. 보르헤스는 이 논증 형식의 소설에서, 루네베리라는 독실한 종교인을 내세워서 그가 당대의 학자들과 주고 받은 세 번의 신학적 공박 과정을 소개합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제목에 나오는 이 '셋'이라는 숫자도 성서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상징적인 숫자이긴 합니다.
루네베리는 일종의 형이상학적 해명을 제시한다. 그는 능란하게 유다가 한 불필요한 행동에 대한 강조로 자신의 논지를 시작한다. 그는 (마치 로버트슨처럼) 단지 성전 안에서 설교를 하고 수천 명의 군중이 보는 앞에서 기적을 행했던 스승의 참 정체를 밝히기 위해서라면 제자가 스승을 배반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일은 일어났다. 성경에 실수가 개입되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에 우연이 게재될 수 있다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상상조차 불가능하다. 따라서 유다의 배반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구원의 경제학에 있어 신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미리 예정된 사건이다.
픽션들 247-248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전 이 작품이 좀 어려워서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신형철 평론가님이 한겨례21에 기고한 글을 발견했는데 내용 이해에 도움이 되었어요. 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1706.html
이런 모든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루네베리는 거의 기적적인 것이 확인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은 하느님이 그런 무관심을 명하셨으며,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가공할 만한 비밀이 이 땅 위에 유포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사실이었다.
픽션들 유다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전 신학적 내용에 대한 해석과 반박보다는 루네베리가 자신의 이론이 외면받자 보인 마지막 반응 ㅡ 하느님이 자신의 비밀이 유포되기 원하지 않으셔서 사람들의 무관심을 명하셨다고;;;; ㅡ 이 흥미로웠어요. 일종의 확증편향이랄까요 정신승리랄까요... 그런데 우리 주위에도 이런 사람들 가끔 있지 않나요? 내가 틀린게 아니라 세상이 틀린거고... 모든 현상을 자기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근거로 어떻게든 해석하는 사람들?... 😅
그렇군요! 누군가에겐 정신승리로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오독처럼 보일수도 있고요. 신형철 평론가님의 마지막 문장이 인상적이네요. "물론 신학적으로는 터무니없는 오독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문학은 이 오독의 빛에 의지해 인간이라는 심해로 내려간다." 제 생각을 덧붙이자면, 오독이라고 해서 다 같은 오독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오독은 자신이 주장하는 바를 관철시키고 텍스트를 깔고 앉아서 자기 스피커를 키우기 위한 것인 반면, 또 어떤 오독은 고정적인 해석에 반기를 들고 텍스트 자체를 열어젖히고 풍부하게 만들기도 하니까요. 저는 루네베리의 논증이 후자 쪽에 더 가깝다고 느껴졌습니다. 어쩌면 독자로서 우리는 어떤 텍스트의 권위적인 해석을 좇기보다는 자기만의 오독을 가져야 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그 독창적인 오독이 아집이 되지 않으려면, 논쟁에 더 열려 있는 자세여야 할 테고요. 반대로 생각하면 루네베리는 세 번의 논증이면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합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유다에 관한 세 가지 다른 이야기] 계속 얘기해보면, 루네베리는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성서의 인물에 대한 이설(異說)을 제기합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예수를 팔아넘긴 데다가 금기시되는 자살까지 행한 인물로서 타락의 상징처럼 여겨지곤 합니다. 히브리어로는 'יהודה(Yehudá)'라고 쓰며, 원래는 '하느님을 찬양하다'라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만, 성서가 번역된 대다수 문화권에서는 유다라는 이름은 배신자의 대명사입니다. 표면적으로 유다가 예수를 배신한 이유는 물욕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만, 일각에서는 이런 이유가 일차원적 교훈성만 부각하는데다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인지 유다는 다양한 작품에서 2차 창작의 대상이 되었는데요, 보르헤스 역시 이러한 성서의 공백, '석연치 않은 부분'에서 시작하여 상상의 나래를 폅니다. 흔히 종교적 교훈을 말하는 사람들은 유다의 사례를 반면교사 삼습니다. 유다의 행동은 종종 베드로에 비견되기도 하는데요, 베드로는 예수의 죽음을 앞두고 첫 닭이 울기 전에 예수를 세 번 부정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후일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회복의 길로 나아간 반면, 유다는 후회의 늪에 빠져 더 큰 죄악인 자살에 이르고 말았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루네베리는 이러한 주장에 동의하지 않고, 자신만의 이설을 폅니다. (1) 먼저, 루네베리는 유다가 상위질서의 거울인 '하위질서의 예수'를 표방한다고 주장합니다. '말씀'이 자신을 낮추어 인간으로 육화한 것처럼, '말씀'의 제자인 유다도 자신을 낮추어 밀고자를 자처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신학자들은 즉각 루네베리의 논증을 공박합니다. 그러나 루네베리는 유다가 "하늘의 왕국을 알리고,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고, 문둥병을 낫게 해주고, 죽은 사람들을 부활시키고, 악마들을 쫓아내기 위해"(마태 10:7-8, 루카 9:1) 발탁된 사람 중의 하나이며, 유다는 단순히 물욕에 눈이 먼 배신자가 아니라며 두 번째 논증을 폅니다. (2) 유다는 오히려 기독교의 금욕주의를 저만의 방식으로 실행했다는 것입니다. 금욕주의자들이 신의 영광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스스로 육체를 비하하고 삶을 고통에 처하는 것처럼, 유다 역시 "명예와, 안락과, 평온과, 천국을 거부"하는 식으로 금욕주의를 철저히 실천했다는 것입니다. 루네베리는 유다를 이렇게 평가합니다. "유다는 영혼을 비하하며 고행했다. 좀 덜 영웅적으로 쾌락을 거부했던 사람들처럼, 그는 명예와 안락, 평화와 천국을 포기했다." 시간이 흘러 루네베리는 세 번째 논증을 폅니다. (3) 바로 하느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을 인간으로 낮추었고, 이에 따라 낮추어진 인간은 '완전무결함/무죄성(impeccabilitas)'과 '인간성(humanitas)'을 동시에 가질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하느님의 고통을 십자가에서 겪은 고뇌로 한정한다는 것은 오히려 불경스럽다고 루네베리는 주장합니다. 하느님은 "부정한 인간, 영원한 벌을 받아 끝없이 깊은 구렁에 빠질 정도"가 되어야 하며, 알렉산더나 피타고라스, 루릭이나 예수가 될 수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유다가 되기를 택했다는 것(He was Judas)입니다. 다시 한번 루네베리의 주장은 불경으로 받아들여지고 업신여김 당합니다. 이 공박을 끝으로 루네베리는 더 이상 논증을 진행하지 않습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하느님이 그런 무관심을 명령하셨으며, 하느님께서 자신의 가공할 만한 비밀이 이 땅 위에 유포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루네베리는 노년이 되어 쓸쓸히 병환으로 죽습니다. 여기서부터 제 생각입니다. 총 세 번에 걸친 루네베리의 논증은 성서의 맥락과 꼭 맞물립니다. 왜냐면 루네베리가 논증을 세 번으로 끝맺음으로써, '유다가 바로 하느님'이라는 주장을 부인한 신학자와 세인들의 위치가 (예수를 세 번에 걸쳐 부인한) 베드로의 위치로 역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로서는 이런 구성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오. 베드로의 세 번의 부정과 연관지을 생각은 못했는데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작품에 대한 해석의 폭이 넓고 깊이가 깊으셔서 같이 읽으면서 문학을 독해하는 법에 대해 많이 배웁니다. 너무 즐거워요!
즐거우셨으면 다행입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끝~] 문화적인 배경을 모르면 당혹스러울 정도로 간단한 작품처럼 여겨집니다. 저는 솔직히 처음 읽었을 때 지나치게 간단해서(?) 보르헤스가 쓴 게 맞나 싶을 정도였지만, 문화적인 맥락을 알고, 또 보르헤스가 마르띤 피에로라는 동명의 에세이까지 썼다는 사실을 알면 조금은 소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세계문학강의』, 「마르틴 피에로」 참고). 먼저 말하면 소설에 등장하는 마르띤 피에로는 아르헨티나의 유명한 서사시에 등장하는 인물로서 가우초입니다. 이 가우초라는 직업도 아르헨티나를 이해하는 데 굉장히 중요합니다만 나중에 설명하기로 하고, 오늘은 작품 내적으로 제가 의문을 가지고 읽었던 부분만 공유하려 합니다. 제가 처음 읽었을 때 의아하게 느꼈던 부분은 바로 주막의 주인인 '레까바렌'입니다. 가우초 마르띤 피에로와 흑인 사내가 결투를 벌이는 내용과 일견 무관해 보이는 주막 주인의 시선이 소설 전반에 나옵니다. 레까바렌이 반신불구가 된 사연도 설명하고 있고, 실제로 소설 초반은 3인칭 초점 화자로서 기능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또 결투 장면에서는 시선이 사라집니다. 하나 더 특이한 점은 주막 주인인 레까바렌이 창문 너머로 두 사람의 결투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창문이라는 프레임이 소설에 영화적인 분위기를 부여하고 있긴 합니다. 그렇다면 레까바렌은 살아있는 카메라 렌즈로서 시선을 대변하는 걸까요? 그럼 보르헤스는 왜 이런 결투 장면을 레까바렌의 1인칭으로 서술하지 않았을까요? 처음 읽었을 때 저로선 여러 모로 궁금증이 남는 소설이었습니다.
세계문학 강의20세기 가장 중요한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논픽션 전집이 민음사에서 전권 출간되었다. 6권인 <세계문학 강의>는 말 그대로 세계문학사의 지평을 보르헤스의 친절한 안내를 통해 짚어보는 책이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끝]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조금 늦게 올립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가우초 문화와 아르헨티나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서사시 『마르틴 피에로』를 알아야 해당 작품을 면밀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보르헤스가 『세계문학강의』의 2부 전체를 '마르틴 피에로'에 할애해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제가 자세하게 부연할 필요는 없어서, 간단히만 설명하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보르헤스의 단편 「끝」은 호세 에르난데스의 『마르틴 피에로』라는 작품에서 종반부에 나오는 한 에피소드를 보르헤스식으로 각색한 작품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정확히 들어맞는 예시는 아닙니다만, 우리로 치면 조선 시대의 문인 김만중의 『구운몽』을 최인훈 소설가께서 「구운몽」으로 쓴 것과 비슷하다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다시 한번 말하지만 꼭 들어맞는 예시가 아니니 오해하지 말기 바랍니다). 『마르틴 피에로』에서는 흑인과 마르틴 피에로가 끝끝내 싸우지 않고 서로 화해하고 각자 갈길을 가면서 끝나지만, 보르헤스는 이 작품에서 두 사람이 결투를 벌이고 한쪽이 죽는 결말을 쓰고 있긴 합니다. 말 그대로 '끝'인 것입니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기사도 소설을 풍자하고자 쓰여졌지만 풍자를 넘어는 의미를 획득했던 것처럼 호세 에르난데스의 『마르틴 피에로』 또한 가우초들이 처한 현실을 비판적으로 조명하기 위해서 쓰여졌지만 애당초 목표한 바를 넘어서서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서사시가 되었습니다. 보르헤스 역시 그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역사에는 가정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보르헤스는 역사의 모사인 서사시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패로디함으로써 「끝」을 통해서, 역사에 자신만의 상상력을 틈입시키고자 했던 게 아닌가 합니다. 가우초는 남미의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브라질의 대평원이나 팜파스에 살던 유목생활을 하던 목동들로서, 18세기부터 19세기 중반까지 번성했습니다. 가우초는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독립에 커다란 역할을 했고 또 강력한 군벌의 일부로 활동했지만 이후 가우초 정권이 막을 내리면서 하층 계급의 부랑자로 전락하게 됩니다. 『마르틴 피에로』에서는 동명의 가우초를 내세워, 이러한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한 인물의 삶을 노래합니다. 다시 한번 가우초와 아르헨티나의 역사에 대해 논할 기회가 있으리라고 봅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세계문학강의』의 2부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세계문학 강의20세기 가장 중요한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논픽션 전집이 민음사에서 전권 출간되었다. 6권인 <세계문학 강의>는 말 그대로 세계문학사의 지평을 보르헤스의 친절한 안내를 통해 짚어보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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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조 교파~] '불사조'라고 불리우는 피닉스는 수많은 2차 창작물에서 등장한 소재입니다. 빨강과 황금색의 불길에 휩싸여 있다고 묘사되며, 약 500년을 살다가 불에 타 죽고나서 새로 태어나는 신화적 존재입니다. 황병하 선생님의 해설에 따르면 불사조는 훗날 기독교 신앙에 접목되어 부활을 상징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본문 얘기를 좀 해보면, 불사조 교파(The cult)는 종교적 집단처럼 불려지고 있기는 하나 종교적인 색채는 지극히 옅습니다. 화자는 집시들과 비교하고 있는데요, 자신들만의 존재감 넘치는 외형과 문화적 정체성을 강하게 표출하는 집시들과는 판이합니다. 불사조 교파는 존재감이 거의 없으며 심지어는 종교처럼 보이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특별히 박해 받지도 않습니다. 왜냐면 그들을 하나로 묶어줄 성경이 없고, 기억의 공동체이자 망각의 산물로서 특정한 민족에 국한되지도 않으며, 공통의 기억으로서 언어도 없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자신들을 지구상의 어떤 나라의 국민으로 간주하는 일에 거의 전혀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다."(보르헤스전집판, 269쪽) 이름을 짓고, 그 이름의 정의를 규명하는 일에 무심하기 때문에, 또 공기처럼 그 존재 자체가 투명하기 때문에 불사조 교파들은 논란에 휩싸이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비밀'이라고 화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앞에서 불사조 교파의 역사에는 박해라는 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불사조 교파에 동조하지 않는 그 어떤 인간 단체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경험했거나 또는 저지른 그 어떤 박해나 가혹행위가 없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들은 서양에서 벌어진 전쟁이나, 저 머나먼 아시아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세속적인 이유 때문에 적의 깃발 아래 자신들의 피를 흘렸다. 말하자면 그들은 자신들을 지구상의 어떤 나라의 국민으로 간주하는 일에 거의 전혀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다.
픽션들 269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나는 앞에서 불사조 교파의 역사에는 박해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것은 사실이지만, 인간들의 단체치고 불사조 교파의 신자들이 포함되지 않은 것은 없기 때문에, 이 교파의 교도들이 당하거나 가하지 않았던 박해나 가혹행위가 없으리라는 것도 사실이다. 그들은 서양에서 벌어진 전쟁이나 머나먼 동양에서 일어난 전쟁에서 각각 적의 깃발 아래 수 세기 동안 피를 흘렸다. 그들을 지구상의 국가들과 동일시하는 것은 거의 의미 없는 일이다.
픽션들 불사조 교파,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제네바에서 나는 장인들을 만났는데 그들에게 '불사조 교파' 사람들이냐고 묻자, 그들은 전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즉시 자신들이 '비밀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 세상에 알려진 그들의 명칭은 그들이 자신들을 지칭할 때 쓰는 명칭이 아니기 때문이다.
픽션들 불사조 교파,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그러나 신기한 것은 '비밀'이 오래전에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세상이 흥망성쇠를 거듭했고, 수많은 전쟁이 벌어졌고, 수없이 많은 대이동이 있었지만, '비밀'은 너무나 두렵게도 모든 '불사조 교파'신자들에게 다가온다. 혹자는 일말의 주저함 없이, 이제 그것은 본능이라고 주장한다.
픽션들 불사조 교파,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불사조 교파] 황병하 선생님의 각주에서도 보듯, 불사조 교파에게서는 어떤 반복, 나아가 끝없이 거슬러 올라가는 이미지가 환기됩니다. 반복적인 이미지가 '비밀'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것 같기는 합니다만, 그 또한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불사조', '우르만', '무한한 셰익스피어' , '공통의 기억으로서 언어' 같은 소재를 생각해보세요. 보르헤스는 『영원성의 역사』에서 셰익스피어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셰익스피어는 모든 사람과 닮았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서로를 닮았다. 사실 그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다른 모든 이들이 그러하고, 또는 그렇게 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이는 언젠가 오노레 드 발자크가 말한 천재의 미덕에 부합합니다. 천재는 모든 사람을 닮았지만 정작 그와 닮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Le génie a cela de beau qu'il ressemble à tout le monde et que personne ne lui ressemble)는 것입니다. 불사조 교파에도 같은 말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독특하게도 불사조 교파를 한데 묶어주는 것은 '비밀'인데, 정작 그들은 '비밀'을 특별히 공유하지도 않는다고 화자는 말합니다. 그들이 비밀의 내용 자체는 물론이고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비밀은 어떤 미지수 X와 같은 말입니다. 비밀은 다름 아닌 비밀이기 때문에 표현될 수 없다는 역설에 봉착합니다. 만일 비밀이 표현될 수 있고 또 말해질 수 있다고 한다면, 그 비밀의 담지자는 특정한 지위와 보상을 얻거나 바라게 됩니다(음모론을 전파하는 사람들의 제스처를 생각해보시면 됩니다). '비밀을 지키고 있는 충직한 사람'이라는 서사에 복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말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비밀은 더 이상 비밀은 아닙니다. 비밀은 말해지지 않아서 비밀이며, 두 사람 이상이 아는 사실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대관절 비밀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답하기란 퍽 어렵습니다. 화자의 말을 빌리자면, 비밀은 말 그대로 비밀일 뿐입니다. 하나 말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거듭해서 거슬러 올라가는 지난 역사에서도 비밀이 있었고, 앞으로 살아가게 될 미래에도 거듭해서 비밀이 있으리라는 점입니다. 비밀의 자리에 무엇을 놓느냐는 읽는 사람의 마음이긴 합니다. 각자 비밀이 무엇인지 저만의 대답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불사조 교파의 비밀이 '종교' 그 자체라고 할 수도 있고, '행복'이라고 할 수도 있고, '죽음'이라고 할 수도 있으며, '또 '신'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 목록은 끝이 없을 것입니다. 대답에는 저마다의 논리가 있을 테고요. 그러나 뒤집어 생각하면, 어떠한 단어도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그중 어떠한 단어도 정답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방증합니다. 마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고도'가 무엇이냐에 관한 논의처럼요.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저는 미궁을 말하고 싶습니다. 미궁의 중심부가 텅 비어 있는 것처럼 거기에는 무엇이 놓여 있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우리는 미궁의 의의에 대해서 말할 때, 미궁의 핵심에 있는 사물이 아니라 그 핵심부를 에워싼 미궁의 구조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궁의 구조는 차이를 둔 반복입니다. 그리고 불사조 교파의 비밀에 관한 한, 비밀은 말해질 수 없으며 다만 반복되는 형식 아닐까 합니다. 오래된 나사의 새로운 회전, 그것을 형상화한 미궁이라고 정리해도 괜찮지 않을까 합니다.
영원성의 역사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논픽션 전집. 1994년에 첫 출간된 보르헤스 전집이 픽션 모음집이었다면 이번 전집은 보르헤스가 발표했던 논픽션을 모았다. 픽션과는 다른 매력의, 인간적인 보르헤스를 만날 수 있다.
고도를 기다리며'고도'의 의미는 이 작품을 읽고자 하는 사람들의 상황과 처지에 따라 자유롭게 해석될 수 있는 것으로, 이 점에서 <고도를 기다리며>는 철저하게 관객을 향해 열려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때문에 <고도를 기다리며>는 지금까지도 학인들의 연구대상이 될 수 있었으며, 또한 삶의 질곡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는 생의 비밀을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나는 여행자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종합하고, 장로들, 신학자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그것을 통해 나는 ⟨불사조⟩ 교도들에게 있어 유일한 종교적 행위는 의식을 수행하는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바로 그 의식이 ⟨비밀⟩을 구성한다. 내가 이미 지적한 대로 ⟨비밀⟩은 대물림을 하며 이어져 오고 있다. 그러나 그것의 올바른 계승 방식은 어머니가 그것을 자식들에게 가르쳐서는 안 되며, 심지어 성직자도 그러해서는 안 된다. (···) ⟨비밀⟩은 신성한 것이지만 약간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의식은 은밀하고 비밀리에 치러지며, 신자들은 그것에 대해 전혀 언급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것을 지칭할 그 어떤 적합한 말도 없고, 모든 말이 그것을 지칭한다고 생각한다. 또는 보다 정확히 말해 모든 말들은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암시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픽션들 270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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