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까지 읽으면서 미로/미궁 이미지가 많이 나왔지만, 이번 작품 마지막의 직선 미로가 인상적이었어요.
갈림길도 허용하지 않고 앞뒤로만 움직일 수 있는 미로라니.. 이거 반칙아닌가요 ㅎㅎ
(3) [보르헤스 읽기] 『픽션들』 2부 같이 읽어요
D-29
모시모시
russist
저도 이 직선의 미로 부분을 언급하는 대목이 인상적이었어요. 아킬레우스의 거북이가 등장하는 제논 역설의 또 다른 버전 같기도 합니다.
1부 모임에서 말했듯이 미궁과 미로는 그 구조와 문화적 맥락이 조금 다른데요, 양측 모두 통로라는 하나의 선을 상정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르스를 죽이려고 떠날 때 미궁 속에서 길을 잃지 말라고 아리아드네가 실타래를 건네준 것을 떠올려보시면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미로를 굳이 수학으로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내용인즉, 모든 미로는 두 개의 직선과 수학적으로 위상동형이라는 내용인데, 이를 통해 미로에서 길을 찾기도 합니다. 위상동형이라는 수학 용어를 모르더라도 '하나의 입구와 하나의 출구를 잇는 단 하나의 통로가 있는 모든 구조물'은 크게 두 덩이로 나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쉽습니다. 미로 탈출법이라고 흔히 알려진 우수법이나 좌수법 역시 이러한 성질을 이용한 것임을 추측할 수 있어요. 그러므로 미로/미궁 자체가 하나의 선을 에워싼 구조물인 셈입니다. 다음 링크를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은근 잡다한 지식: 아무리 복잡한 미로라도 쉽게 푸는 법] https://m.blog.naver.com/design_woo_/223276056137?isInf=true
모시모시
흥미롭네요! 우수법, 좌수법을 생존용(?)으로 들어 알고는 있었는데 이런 수학적인 원리가 있었는지 몰랐네요.
양주
이 소설은 앞서 읽었던 소설들보다는 길이가 긴 편이고 추리를 하는 구성이라 재미있었습니다. 현장에 있던 책들의 내용을 탐구하는 뢴로트의 모습에서 영화 '세븐'의 모습도 조금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뢴로트는 샤를라프의 덫(?)을 알면서도, 어쩌면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였음에도 자신의 추리가 맞음을 확인하기 위해 그곳으로 뛰어든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뢴로트가 말하는 또 다른 삶에선 두 인물이 어떤 새로운 모습으로 대결할지도 상 상되는, 마름모의 형태가 그려지는 소설이었습니다!
russist
그러고 보니 세븐도 떠오르네요! 상징처럼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게 없는 것 같아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russist
[~죽음과 나침반] 원문에 보면 음모론자의 행태를 설명하는 아주 적확한 대사가 나옵니다. 보르헤스전집 기준 212쪽에서 "우린 지금 세 발 달린 고양이를 찾아야 할 필요는 없네"라는 대사입니다. 세계문학전집에서는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 필요는 없을 것 같네"라고 말 그대로 간단히 의역돼 있습니다. 이 부분의 원문은 "No hay que buscarle tres pies al gato"이며, 번역기를 돌려 보면 대충 '고양이에게서 다리 세 개를 찾을 필요는 없다' 정도가 됩니다. 이는 간단한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사람을 일컫는 스페인어의 관용 표현입니다만, 이 관용어에 얽힌 에피소드는 그리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참고로 아래 내용은 조금 깁니다.
"다리가 셋인 고양이 찾기(Buscarle los tres pies al gato)"라는 관용어를 둘러싼 분분한 의견이 있습니다. 한 블로그 글의 설명에 따르면 해당 관용어는 '더 나쁜 일을 불러올 위험을 무릅쓴 채 운명의 꾐에 빠져드는 사람'이나 '궤변으로 타인을 속여서 불가능한 것을 증명하려는 사람'을 두고 일컫는 말이라고 합니다. 일부 한국어 번역에서는 '긁어 부스럼 만들기'나 '사족 달기'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늬앙스가 미묘하게 달라서 적확한 번역이라 보기는 어려울 것 같고, 마땅히 대체할 말은 없는 듯합니다. 개인적으로 의역보다는 황병하 선생님처럼 직역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스페인의 언론인이었던 호세 마리아 이리바렌(José María Iribarren)은 '다리 셋인 고양이 찾기'가 원래는 '다리 다섯인 고양이 찾기'였다고 주장합니다. 다리 다섯 고양이라는 관용어는 17세기 『스페인어 사전』(1611)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전편찬자였던 세바스티안 데 코바루비아스(Sebastián de Covarrubias)는 이렇게 씁니다. "고양이에게서 다섯 개의 다리를 찾는다는 표현은 궤변과 속임수로 불가능한 것을 설득하려는 사람을 두고 일컫는 말으로서, 고양이의 꼬리가 발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던 데서 유래한다." 그러나 재밌게도 이후에 다른 주장이 제기됩니다. 사전에 앞서 6년 전에 미겔 데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려 "다리 셋인 고양이 찾기"라고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혹자는 돈키호테라는 인물이 광인이기 때문에 말이 안 되는 말을 한 것일 뿐이라고 일축하려 했지만, 애당초 다리가 다섯인 고양이도 말이 안 되기는 매한가지여서 설득력이 없습니다. 뭐가 됐든 오늘날 학자들은 세르반테스 덕분에 '다리 셋인 고양이'라는 관용어가 유명해졌다는 데 동의합니다.
여기서부터가 찐 광기(?)라고 할만한데, 나중에 학자들은 역사에서 어느 표현이 더 빈번히 쓰였는지 통계를 내기에 이릅니다. 결과부터 말하면 '다리 셋인 고양이'의 압승이었습니다. 압도적으로 모든 시대에 걸쳐서 '다리 셋인 고양이'라는 표현을 많이 썼으며, '다리 다섯인 고양이'는 19세기 이전의 텍스트에만 나타났다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20세기 이후에는 사라졌다고 추정된다는 것입니다. 후일 또 다른 고어 학자들이 나타나서 다리를 뜻하는 'pies'라는 단어가 고전 시가에서 '음절'을 의미하며, 따라서 고양이에 해당하는 스페인어 'gato'는 두 음절에 불과하므로 맥락상 '다리 세 개'가 옳다는 표현에 힘을 실어주었는데요... 진실은 뭐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해당 블로그에서 저자는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 우리는 세 다리 고양이를 찾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다섯 다리 고양이이거나..."
얘기인즉,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려면 굉장히 이상한 말과 논리를 많이 붙여야 합니다. 소설의 뢴로트에게도 정확히 적용되는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뢴로트가 언급하는 '직선의 미로' 얘기입니다. 알다시피 미로는 입구와 출구를 잇는 단 하나의 선을 상정합니다. 그리고 그 선은 아리아드네의 실을 떠올리게 하는데요, 아리아드네의 실은 '너무도 어려워서 해결방법이 없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물건이나 방법'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블로그 출처: https://horchataypalomitas.com/buscarle-los-tres-pies-al-gato/
모시모시
헉. 정말 관용구 하나에 얽힌 광기의 역사네요. (통계내는 학자들 진짜 웃기고, 마지막에 고어 학자들이 pies가 고어로 음절이란 뜻이라며 이론을 내세우는 건 그 자체가 '다리셋인 고양이 찾기' 같네요). 항상 유익한 정보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 필요는 없을 것 같네."에서 오컴의 면도날이 생각났었어요.
russist
정말 그러네요! 어쩌면 이 모임 자체도 즐거운 세 발 고양이 찾기 같습니다.
양주
"다리가 셋 혹 은 다섯인 고양이 찾기" 이야기는 너무 새롭습니다! 저는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으로 읽고 있는데 이런 차이가 있는 것 역시 흥미롭고 신기하네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russist
[비밀의 기적~] 하루 쉬고 다시 시작합니다😃
흘라딕은 죽음 직전에 신에게 지금 자신이 쓰고 있는 희곡을 완성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신은 그의 소원을 들어주지만, 그가 마지막 성질 형용사를 떠올리는 순간, 그리하여 그것이 작품 형태를 갖춰서 사람들에게 읽히기도 전에 죽음을 맞이하게 만듭니다. 신은 작가로서 평생의 작품을 완성하고자 했던 흘라딕의 소원을 들어주긴 했지만 그의 욕망을 이뤄주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흘라딕이 완성했다는 희곡은 아무도 읽지 못합니다. 다만 그가 완성했다는 사실만 알 수 있을 텐데, 흘라딕의 작품을 논하는 것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쓰러진 나무가 어떤 소리를 냈는지 논하는 것만큼이나 아득한 일이 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이 소설은 작품을 완성하려는 작가의 욕망이 얼마나 끈질긴지를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본문에서 그는 이렇게 씁니다. “다른 모든 작가들처럼, 그 또한 다른 작가들의 가치를 평가할 때는 그들이 이룩해 놓은 업적에 근거해 평가하면서도, 다른 작가들이 자신을 평가할 때는 자신이 구상하고 있거나 계획해 놓은 작품들을 가지고 평가해 주기를 바랐다(like every writer, he measured other men's virtues by what they had accomplished, yet asked that other men measure him by what he planned someday to do)." 독자에게 기존의 작품을 통해서 앞으로 있게 될 작품까지 보아주기를 바라는 작가의 태도는, 이렇듯 역사적 시간과 전혀 다르게 흐르는 문학적 시간 안에서만 전달되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모시모시
“ 여명이 틀 무렵, 그는 클레멘티눔 도서관의 한 서고에 숨어 있는 꿈을 꾸었다. 검은 색안경을 낀 사서가 그에게 물었다. “무엇을 찾으시지요?” 흘라딕이 대답했다. “하느님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자 사서가 말했다. “하느님은 클레멘티눔 도서관이 소장한 사십 만 권 중의 한 책에 있는 한 페이지의 글자들 중의 하나에 있어요. 내 부모들과 내 부모들의 부모들은 그 글자를 찾았지요. 나도 그것을 찾느라 눈이 멀어 버렸소.” ”
『픽션들』 비밀의 기적,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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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시모시
클레멘티눔 도서관은 프라하에 있는 아름답기로 유명한 도서관이라고 합니다. 사진으로 보니 신비한 느낌 가득하네요.
russist
이 부분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보르헤스가 이 작품을 발표한 시기는 1943년이라고 하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보르헤스스가 40대 중반 정도였습니다. 보르헤스 자체가 좀 특이한 시기에 태어난 인물입니다. 1899년, 그러니까 19세기의 마지막이자 20세기의 초입에 태어났는데요, 가족력 때문인지 태어나면서부터 시력이 점점 악화됐다고 해요. 그러다가 55세가 되던 해에 완전히 실명했다고 합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클레멘티눔 도서관의 검은 색안경을 낀(시력을 잃은 것으로 추측되는) 사서는 후일 아르헨티나 국립공공도서관 관장이 될 자신을 예견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모시모시
오. 거의 10년도 전에 쓰여진 예언적인 작품이네요.
모시모시
“ 그것은 후대를 위한 작업도, 어떤 문학적 취향의 소유자인지 모를 하느님을 위한 작업도 아니었다. 그는 시간 속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세심하고 비밀스럽게 눈에 보이지 않는 자신의 고상한 미로를 만들었다. ”
『픽션들』 비밀의 기적,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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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로 지정된 대화
russist
[~비밀의 기적] 흘라딕이 헤르 발쉬도르 출판사를 통해 번역가로 활동했다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여러 작가들의 책을 번역하면서 그간 "출판했던 모든 책들"에서 "복잡미묘한 허탈감을" 느낍니다. 근원적으로 자신이 생각한 기준에 작품들이 조금씩 못 미치는 것을 알고, 이내 자신이 직접 시곡을 쓰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시곡의 내용도 주목할 만합니다. 흘라딕은 야로슬라브 쿠빈이라는 등장인물을 내세우는데, 그는 자신이 흠모하는 부인의 남편이 되었다는 망상에 빠져있는 인물입니다. 번역자는 원작자는 아니나 누구보다 원작자의 텍스트에 근접하여 그 텍스트를 도착어로 옮기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시곡 속의 내용은 현실의 흘라딕이 처한 상황을 조금씩 누설하고 있습니다.
한편,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죽음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한 그 사람은 살아 있다고 말할 수도 있으니까요. 따라서 사람은 죽음에 가장 가까워지는 그 순간을 다만 무한히 인지할 수 있을 뿐입니다. 단, 시간이 무한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사키 아타루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한 강연에서 어떤 철학자의 말을 빌려서 "우리는 타인의 죽음을 경험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의 죽음도 엄밀한 의미에서 경험(인지)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죽음이 "모든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라고 말하면서, 곧이어 "모든 가능성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가능성"이라고 부연합니다.
russist
“ 사람은 죽지요. 일개 인간은 죽습니다. 그런데 내가 죽는 것은 확실합니까? 죽을 수 있습니까? (···) 자, 죽기로 결심합니다. 목을 매든 방아쇠를 당기든 본인 마음입니다. 그런데 죽으려는 내게 이상한 사태가 찾아옵니다. 왜냐하면 그 행위를 하고 있는 나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니 영원한 슬로모션이 출현하는 것입니다. 내내 죽어갑니다. 억겁의 세월이 흘러도 계속해서 죽어갑니다. 죽음은 끝나지 않습니다. 본인이 죽은 것을 확인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
괴상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비트겐슈타인이 멋지게 한마디로 정의했거든요. “이제껏 머리뼈를 열어본 인간에게는 모두 뇌가 있었다. 정말 놀라운 우연의 일치가 아닌가?”
그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죽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본인이 죽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물론 본인이 죽은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 또한 아무도 없습니다. 본인이 죽은 것을 아는 망자는 없습니다. 죽은 사람은 자신이 죽은 것을 모릅니다. 자신의 시체를 본 사람은 없습니다. 자신의 시체와 가장 흡사한 것을 보고 싶으면 거울을 보면 됩니다. 그것이 거울의 매력입니다. (···) 어째서 모두 거울을 좋아하냐면 거기에 비친 모습이 자신의 시체,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시체와 가장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종교에서 천국이나 극락, 불성이나 신성은 여러분의 손이 닿지 않는 저편에 있는 동시에 여러분의 자신 속에, 여러분 가까이에 있다고 말하죠. 그러나 자신이 절대 도달할 수 없는 머나먼 장소이자 절대적으로 자신의 가까이에 있는 성스러운 장소는 자신의 시체입니다. ”
『제자리걸음을 멈추고』 111-112쪽, 사사키 아타루 지음, 김소운 옮김
제자리걸음을 멈추고자기주장과 색깔이 분명한 일본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의 또 다른 신간. <야전과 영원> 출간 이전부터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의 대성공에 이르기까지 힘차고 거침없이 춤추던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그 시기를 관통해온 약동하는 사유의 흐름을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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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로 지정된 대화
russist
[유다에 관한 세 가지 다른 이야기~] 이 이야기는 유다 이스카리옷을 둘러싼 신학적 사변을 다룹니다. 먼저 사족을 달자면, 저는 비신도의 입장에서 성서를 경전이 아닌 하나의 텍스트로 보고 서사적으로 접근하고자 했습니다. 간혹 사실 관계가 틀린 부분이 있을 수도 있는데, 너그럽게 지적해주시면 반영하겠습니다.
유다는 성서 속에 등장하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였다가, 후일 예수를 '작은 은 30'을 받고 배반한 죄로 버려지고 제명되어 끝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인물입니다. 보르헤스는 이 논증 형식의 소설에서, 루네베리라는 독실한 종교인을 내세워서 그가 당대의 학자들과 주고 받은 세 번의 신학적 공박 과정을 소개합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제목에 나오는 이 '셋'이라는 숫자도 성서에서 반복해서 등장하 는 상징적인 숫자이긴 합니다.
russist
“ 루네베리는 일종의 형이상학적 해명을 제시한다. 그는 능란하게 유다가 한 불필요한 행동에 대한 강조로 자신의 논지를 시작한다. 그는 (마치 로버트슨처럼) 단지 성전 안에서 설교를 하고 수천 명의 군중이 보는 앞에서 기적을 행했던 스승의 참 정체를 밝히기 위해서라면 제자가 스승을 배반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일은 일어났다. 성경에 실수가 개입되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에 우연이 게재될 수 있다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상상조차 불가능 하다. 따라서 유다의 배반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구원의 경제학에 있어 신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미리 예정된 사건이다. ”
『픽션들』 247-248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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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시모시
전 이 작품이 좀 어려워서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신형철 평론가님이 한겨례21에 기고한 글을 발견했는데 내용 이해에 도움이 되었어요.
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170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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