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보르헤스 읽기] 『픽션들』 2부 같이 읽어요

D-29
사고라는 것은 차이점을 잊는 것이다. 그것은 일반화하고 추상화하는 것이다. 푸네스의 비옥한 세계에는 상세한 것들, 즉, 곧바로 느낄 수 있는 세세한 것만 존재했다.
픽션들 기억의 천재 푸네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그는 한평생 내내 황혼에서 여명까지 그 꽃을 바라보았지만, 마치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처럼 그 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픽션들 기억의 천재 푸네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그는 그런 사실을 내게 말해 주었고, 그 당시에나 그 후에나 난 그것들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 당시에 촬영 기사나 축음기가 없었다고는 하지만, 그때까지 아무도 푸네스와 같은 실험을 해 보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은 거짓말 같으며 믿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미룰 수 있는 모든 것을 뒤로 미루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우리 모두는 우리가 죽지 않을 것이며, 조만간 모든 인간들이 모든 일을 할 수 있게 될 것이고,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는 것 같다.
픽션들 p.144,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기억의 천재 푸네스] 이 단편의 스페인어 제목은 ⟨FUNES EL MEMORIOSO⟩이고, 영역본 제목은 ⟨FUNES THE MEMORIOUS⟩입니다. 개인적으로 '천재'라는 늬앙스까지는 과해 보입니다만, 비상한 기억력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푸네스는 비상한 기억력을 갖게 되었지만 그 때문에 도저히 잠에 들 수 없을 정도여서 저주라고 불러야 할 정도입니다. 흔히 우리는 '기억'에 '힘 력(力)' 자를 붙여서 '기억력'이라고 부릅니다. 기억은 어떤 능력에 가깝고, 기억력이라고 할 때 그 능력은 일종의 '암기력'에 더 가깝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학자들은 기억과 암기는 다를 뿐 아니라 기억 작용의 핵심에는 망각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 망각으로써 개별적인 경험은 테두리가 깎여나간 강가의 조약돌처럼 일반화되고 개념화되면서 비로소 유의미해집니다. 망각은 변화하는 환경에 더 잘 대처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특정 장소에서 쥐에게 약한 전기충격을 주면 쥐는 다시 그 장소에 들어갔을 때 공포를 느낍니다. 처음에는 공포 기억이 생겼던 환경에서만 공포 반응을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유사한 환경에서도 공포 반응을 느끼는 일반화 현상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망각하지 못하도록 조작된 쥐는 일반화된 공포 반응을 보이지 않고, 종내에는 더 위험한 상황에 처한다고 합니다. 푸네스의 완벽한 기억력이 역설적이게도 결함투성이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모든 경험을 기억하지만 그것들을 유의미하게 분류하지는 못하는 거대한 용량의 데이터 저장 장치와도 같습니다. 각각의 정보를 인간이 일반화해서 범주화하기 위해서는 그 유사성을 인식해야 하지만 푸네스에게는 "모든 숲의 모든 나무들의 모든 나뭇잎"이 다르게 보였던 탓입니다. 나중에 푸네스는 "독창적인 숫자 체계"를 고안해내는데요, 숫자 하나하나를 기호로 보고 자신의 경험을 각각에 대응시키는 식입니다. 그런데 숫자와 대응되는 경험들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습니다. 푸네스가 왜 하필 숫자를 택했는지는 쉽게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숫자는 무한하기 때문에 각각에 대응되는 경험이 무한해도 상관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숫자는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수 체계를 지닙니다. 따라서 푸네스에게 시간은 수 체계에 따라 순서대로 적층되는 시계열을 따르지 않고, 각각이 따로 떨어져 있는 1초 이후의 새로운 1초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잠들지 못했을 테고요. 이런 푸네스는 은유를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은유는 단순히 시적인 표현법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은유는 유사성과 차이성의 긴장을 품은 사고의 추상화를 보여준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은유에서는 'A는 B다'라고 말하면서 두 관념 사이를 단번에 잇습니다. 이때 주목해야 하는 것은 유사성입니다. 즉, 범주화에 필요한 미세한 차이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입니다. (한 철학자도 말한 바 있습니다. '먼지 하나도 똑같지 않기 때문에 논리학의 동일성을 받아들이려면 대강 보는 눈이 필요하다.') 이 정신의 은유 작용을 필요한 정도에 따라서 섬세하게 조절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지닌 독특한 능력입니다. 지나치게 세세한 디테일에 주목하게 되면 은유 작용은 일어나지 않을텐데, 아마 세상 모든 사물에 라벨을 붙이다 죽게 될 지도 모릅니다. 본문에서 존 로크가 17세기에 모든 사물에 고유한 이름을 붙이려는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것도 이와 비슷하지 않나 합니다. 머신러닝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인간이 추상화하는 능력을 통해서 어떻게 사물을 범주화하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018년, AI가 블루베리머핀과 치와와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짤이 돈 것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물론 지금은 상황이 달라져서 AI가 인간 수준을 뛰어넘는다고 합니다만, 앞선 사례를 단순히 웃어넘기지 말고 진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아무리 어리숙한 사람이라도 치와와와 블루베리머핀을 즉시 구분할 줄 압니다. 이는 놀라운 일입니다. 머신러닝 개발자들은 머핀과 치와와를 단번에 구분하는 인간의 이 자연스러운 인지 과정을,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인위적인 연산 과정으로 기계에게 학습시려고 갖은 노력을 해왔습니다. 여담으로,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는 푸네스의 정반대 사례가 등장하니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개정판. 일상생활에 불편을 겪는 경증 환자부터 현실과 완전히 격리될 정도로 중증의 정신질환을 겪는 환자들까지 올리버 색스가 엄밀히 관찰하고 따뜻하게 써낸 '우리와는 조금 다른' 사람들의 독특한 임상 기록이다.
6은 나무 7은 돌고래박상순의 시는 우리 시의 새로운 방향을 암시하는 매우 전위적이고 따라서 낯선 느낌이 드는 시이다. 어느 시대에나 전위적인 예술가들은 당대의 미적 인식을 부정하는 자기 파괴성을 보여준다. ─이승훈
그러나 P선생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어떤 물건 앞에서도 그것을 친숙한 물건으로 보지 않았다. 시각적인 면에서 볼 때, 그는 생기가 없는 추상의 세계에서 길을 잃고 있었다. 현실의 시각 세계는 그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현실의 시각적 자아가 없었다. 그는 사물에 대해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보지는 못했다. 휴링스 잭슨은 언어상실증이나 좌반구 장애 환자들은 ‘추상적’이거나 ‘명제적’인 사고 능력을 상실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런 환자들을 개에 비유한다(사실은 개를 언어상실증 환자에 비유한다). 그러나 P선생의 뇌는 기계처럼 정확하게 기능했다. 시각 세계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면에서 그는 컴퓨터와 똑같았다. 더 놀라운 점은 그가 중요한 특징이나 도식적 연관관계를 토대로 컴퓨터와 똑같은 방식으로 세계를 구성해낸다는 것이었다. 얼굴의 부분을 그린 그림 세트를 이용해 범인의 몽타주를 만들 때처럼, 그러한 도식은 현실과 전혀 대응하지 않더라도 나름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중, 올리버 색스 지음, 조석현 옮김, 이정호 그림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만 따로 읽을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비교하며 다시 보니 내용을 곱씹게 되네요. 부분을 정확하게 보지만 하나의 완성된 형태로 조합하지 못한다는 점이 흥미로워요.
정말 그렇습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은 여러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아. 어렴풋이 올리버 색스 책에서 관련된 내용 본것같다고 생각했는데 콕 집어 알려주시니 감사합니다. :) 추상의 세계에서만 사는 것, 구체의 세계에서만 사는 것 둘 중에 선택해야만 한다면;;; 어떤게 더 나을지 생각해보게 되네요.
그죠... 보르헤스의 ⟨기억의 천재 푸네스⟩와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는 추상화라는 인간 정신을 서로 다른 두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 같아요. 굳이 표현하자면 푸네스가 구체성의 세계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면, 올리버 색스의 글에 나오는 P선생은 추상성의 세계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합니다.
같이 읽을 만한 재밌는 시가 있어서 공유합니다. 보르헤스전집판 표지를 디자인 하신 박상순 시인의 시 ⟨6은 나무 7은 돌고래, 열 번째는 전화기⟩입니다.
6은 나무 7은 돌고래박상순의 시는 우리 시의 새로운 방향을 암시하는 매우 전위적이고 따라서 낯선 느낌이 드는 시이다. 어느 시대에나 전위적인 예술가들은 당대의 미적 인식을 부정하는 자기 파괴성을 보여준다. ─이승훈
첫 번째는 나 2는 자동차 3은 늑대, 4는 잠수함 5는 악어, 6은 나무, 7은 돌고래 8은 비행기 9는 코뿔소, 열 번째는 전화기 첫 번째의 내가 열 번째를 들고 반복해서 말한다 2는 자동차, 3은 늑대 몸통이 불어날 때까지 8은 비행기, 9는 코뿔소, 마지막은 전화기 숫자놀이 장난감 아홉까지 배운 날 불어난 제 살을 뜯어먹고 첫 번째는 나 열 번째는 전화기
6은 나무 7은 돌고래 90-91쪽, 박상순 지음
잠깐 짚어두고 갑니다. 제가 갖고 있는 보르헤스전집판본(2019년 52쇄)에서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습니다. 187쪽 중간에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또한 그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14의 3에 있는 개와 (정면에서 보았을 때) 4의 3에 있는 개가 왜 똑같은 이름을 가져야 하는지 골머리를 앓았다." 영어 판본과 스페인어 원문으로 해당 내용을 찾아보고 비교해본 결과(DeepL Pro를 활용했습니다), 이렇게 옮겨지는 게 좋을 듯합니다. "또한 그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3시 14분에 있던 개와 (정면에서 보았을 때) 3시 15분에 있는 개가 왜 똑같은 이름을 가져야 하는지를 두고 골머리를 앓았다."
오. 파본인지 오타인지 오역인지 의도인지 뭔가 이상하네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송병선)에는 제대로 되어있어요. "그는 ‘개’라는 속(屬)적 상징이 형태와 크기가 상이한 서로 다른 개체들을 포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으며, 또한 3시 14분에 측면에서 보았던 개가 3시 15분에 정면에서 보았던 개와 동일한 이름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곤 했다."
한국일보에 기획 기사 [AI시대, 노동의 지각변동] 시리즈를 읽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올립니다. 존 로크가 17세기에 모든 사물에 고유한 이름을 붙이려는 시도가 현재에 와서 다시 시도 되고 있는 것 같아요. 차이점이 있다면 그 작업이 단 한 사람의 광오한 의지로 실행되고 있는 게 아니라,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에 의해 체계적으로 실행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소위 말하는 '데이터 라벨러'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인데요, '디지털 인형 눈알 붙이기'라고도 불리우는 이 작업은 AI가 학습하기 쉬운 형태로 데이터를 가공합니다. AI가 '스스로 학습하고 스스로 이해하고 스스로 진화한다'는 세간의 인식과 달리, AI 기술 발달은 역설적이게도 제삼세계 데이터 라벨러들의 손을 빌려 학습되고 있습니다. 구글에서 reCAPTCHA라는 튜링테스트를 이용해서 특정 사이트에 접근하는 사용자의 학습 데이터를 수집하는 방식과 같습니다(9개나 12개의 이미지를 제시하고 횡단보도가 있는 이미지를 모두 고르라거나, 자전거 이미지가 들어간 타일을 모두 고르라거나 하는 식의 튜링테스트입니다). 요약하면, 오늘날 우리가 ChatGPT나 Bing을 이용해서 손쉽게 자료를 찾아보고 의견을 구할 수 있었던 데는 무수한 제삼세계 데이터 라벨러들의 온라인 인형눈알붙이기 작업이 있었기 때문이죠... 지난 세기 푸네스가 기획했던 허무맹랑한 시도는 오늘에 이르러서 고도로 체계화된 방식으로 재시도되고 있습니다. 이걸 흥미롭다고 해야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다음 특집 기사 시리즈를 보세요. [한국일보-AI시대, 노동의 지각변동] https://m.hankookilbo.com/News/Read/A2024020611470003739
제가 많이 부족하여ㅜ 책을 읽고 나서도 이해되지 않은 부분이 많았었는데 적어주신 내용을 읽다 보니 제가 파악하지 못했던 부분들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알게 된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뇨 전혀 부족하지 않습니다! 저도 시간을 길게 두고 틈틈이 짧은 단편을 여러 번 읽으면서 이런저런 살을 덧붙이는 것 뿐이니까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저는 어떤 책을 이해해야 한다고 접근하기보다 풍경을 감상한다는 자세로 좀 느슨하게 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전나무가 무성한 산길을 지나갈 때 전나무의 생애주기와 역사와 그 생식을 모두 이해해야만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물론 소설로 넘어오면 좀 다르게 얘기할 순 있겠지만, 자세를 무너뜨린 채로 느긋하게 시간을 천천히 두고 여러번 읽어도 괜찮지 않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칼의 형상~] 쭉 따라서 읽기에 별 무리가 없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20세기 초반 아일랜드 독립 운동에 대한 배경 지식이 있으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존 빈센트 문'의 내면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그가 왜 이러한 우회적인 이야기 형식을 택한 것인지 역시 이해할 수 있고요.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 링크를 참고해주세요. 1. [아일랜드 역사④…굶어 죽거나 이민 떠나거나] 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29 2. [아일랜드 역사⑤…민족주의 대두, 거센 독립운동] 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32 3. [아일랜드 역사⑥…對英 전쟁. 내전, 그리고 독립] 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35
이 작품 너무 재미있지 않나요? 마지막의 '시점의 턴테이블'이라 불러야될까... 화자가 바꿔치기되고 이야기 시점이 반대로 탁 돌아서는 순간에 당황스러움과 동시에 쾌감이 있었습니다. (사실 결말에 다가서기 조금 전부터 뭔가 이상하다 이상하다 하면서 읽고 있었지만서도)
너무 재밌죠...! 제가 정말 좋아하는 단편이기도 합니다. 개인적 취향으로는 1부보다는 2부에 수록된 간단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이야기들이 좋습니다.
“내 흉터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겠소.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소. 그 어떤 비난이나 경멸도 누그러뜨리지 말고, 그 어떤 불법적인 상황도 변호하려 하지 마시오."
픽션들 칼의 형상,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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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9일(금) 이번 그믐밤엔 소리산책 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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