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보르헤스 읽기] 『픽션들』 같이 읽어요

D-29
‘도서관’의 모든 사람들처럼 나는 젊은 시절 여행을 했다. 나는 한 권의 책, 아마도 편람 중의 편람일 책을 찾아 돌아다녔다. 이제 내 눈은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것조차 알아볼 수 없고, 나는 내가 태어난 육각형의 방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죽을 준비를 하고 있다. 내가 죽으면, 자비로운 사람들이 나를 난간 위로 던져 버릴 것이다. 내 무덤은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허공이 될 것이고, 내 육체는 끝없이 떨어질 것이고, 썩을 것이며, 내가 아마도 무한하게 떨어지면서 만들어 낼 바람 속에서 분해될 것이다.
픽션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아마도 늙고 두려움을 느끼는 탓에 내가 속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유일한 종족인 인류가 멸망 직전에 있다 해도 ‘도서관’은 불을 환히 밝히고 고독하게, 그리고 무한히,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소중하고 쓸모없으며 썩지 않고 비밀스러운 책들을 구비하고서 영원히 존속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픽션들 바벨의 도서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바벨의 도서관] 계속해서 말해보면, 이 단편에서는 지식의 담지자가 아닌 사서를 더욱 부각합니다. 사서는 지식 자체보다는 지식의 편집자를 자처하는 존재입니다. 본문에도 나오듯 책의 내용에서 그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와는 좀 다릅니다(133쪽). 엄청나게 많은 물건을 파는 잡화점, 편집숍, 빈티지숍에 들어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으리라 짐작합니다. 당장 다이소에만 가도 알 수 있을 텐데요, 우리가 찾는 물건이 있는지 점원에게 물어보면 점원은 그 제품이 있는지 없는지 대답하는 것은 물론이고, 물건이 있다면 그것이 어느 섹션에 있는지 번호까지 알려줄 것입니다. 이런 과정은 '거의 즉시' 일어납니다. 생각해보면 놀라운 과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쩌면 「바벨의 도서관」은 이전까지 존재했던, 그리고 앞으로 있게 될 모든 책들의 역사를 쓰고자 했던 장황한 기획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봅니다. 단편 중간에 나오는 에피소드를 봐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책장들 속에 진귀한 책들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것을 찾을 수 없어서 절망합니다. 극단주의자들은 불필요한 책을 모두 불살라버림으로써 원하는 책을 찾겠다는 허황한 계획을 세우기도 하는데요, '불필요한 책'을 몇몇 사람이 지정할 수 있고, 나아가 거리낌없이 불태울 수 있다는 그 사고방식에서 역사의 몇 가지 사례가 떠올랐습니다. 개인적으로 마지막 한 문단은 섬세하게 읽혀야 하지 않나 합니다. 요약하자면 세계는 무한하지만 쓰여질 수 있는 책의 숫자는 유한하다는 의미로 저는 읽었는데요, 이것이 「바벨의 도서관」을 단순한 '무한'으로 설명할 수 없게 만듭니다. 단순히 어떤 것을 '무한'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무지의 토로일 수 있습니다. 보르헤스는 책의 숫자는 유한하지만 그 파생본은 무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스물두 개의 알파벳과 마침표와 쉼표, 그리고 한 개의 공백이라는 유한한 기호로 도서관의 책들이 쓰여진 것처럼요. 현실의 도서관은 유한한 현실의 지면 위에 유한한 크기로 지어질테지만 그 속에는 거의 무한한 세계와 그 세계가 파생할 가능성이 담겨 있다고 해도 될 것입니다. 일찍이 시인 보들레르는 미를 이렇게 정의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유한 속의 무한(l'Infini dans le fini)이다.” 8자를 옆으로 누인, 무한대 기호를 닮은 여덟 번째 단편에서 뵙겠습니다:)
나는 사서들이 책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헛되고 미신적인 습관을 거부하고, 그러한 행위를 꿈이나 한 사람의 손바닥에 나 있는 뒤엉킨 손금들을 가지고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행위와 똑같이 취급하는 한 난폭한 지역을 안다······. 그들은 글쓰기의 발명가들이 원초적인 스물다섯 개의 알파벳을 모방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적용이 우연에 불과하고, 책들은 그 자체로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픽션들 133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드디어 마지막 단편입니다. 모두 수고하셨다고 미리 말씀드리면서 시작합니다. 1부의 표제작이기도 한데요, 제가 보르헤스의 『픽션들』에서 「기억의 천재 푸네스」, 「칼의 형상」과 함께 가장 좋아하는 단편 중 하나입니다. 이 이야기는 1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군과 전쟁을 벌였던 독일군 소속의 중국계 스파이 유춘 박사의 구술서 형식을 띱니다. 앞서 살펴본 작품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역시 '소실된 원전'과 '개인적인 구술'이라는 두 가지 서사적 알리바이가 활용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알리바이로 인해서 허구의 상상력이 틈입될 여지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제가 이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내용 자체도 재미있지만 형식이 매우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시작도 끝도 없는 완벽한 원으로 된 아름다운 미궁이 있다면 바로 이 소설이 아닐까 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면, 쫓고 쫓기는 관계에 있는 유춘 박사와 매든 대위는 닮아 있습니다. 유춘 박사는 중국인 출신의 독일군으로서 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하나였던 영국군에 스파이로 잠입해 있습니다. 동료 한 명과 함께 "앙크르 강변에 주둔한 새로운 영국 포병대의 정확한 위치"를 독일군에 발설하려 했지만, 연합군 소속의 매든 대위에게 스파이임이 발각당하고 쫓기는 처지입니다. 유춘 박사는 독일군에 특별한 소속감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이 영국 포병 부대의 위치를 알리려는 이유는 "한 사람의 황인종이 그의 군대를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함입니다. 매든 대위가 스파이인 유춘 박사를 잡으려는 이유도 비슷합니다. 영국-아일랜드의 오랜 역사적 분쟁을 생각하면, 영국군 소속의 아일랜드인인 매든 박사의 위치 또한 위태롭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매든 대위에게 스파이 색출은 아일랜드인으로서 출신지 때문에 의심받는 영국군에 자신을 증명할 "기적적인 호기"일 것입니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는 이렇게 연결돼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원이 그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무한한 꼬리잡기 게임처럼 그려지는 것과 두 사람은 맞물려 있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비겁한 인간이다. 누구가 되었든 간에 위험하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을 어떤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 지금 나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 나는 인류가 점차로 보다 대담한 일에 자신을 내던지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곧 세상에는 전사들과 도적들밖에 없게 될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를 하고 싶다. ⟨대담한 어떤 일을 수행하는 자는 자신이 이미 그것을 완수했다고 생각해야 하고, 마치 과거처럼 절대로 바꿔놓을 수 없는 미래를 자신에게 강요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는 나의 눈들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그날의 해거름과, 밤의 도래를 새겨 담는 동안 나의 계획을 진척시켜 나아가고 있었다. 기차는 물푸레나무들 사이를 감미롭게 덜커덩거리며 달려가고 있었다.
픽션들 150쪽, 152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이야기 자체는 어렵지 않으니 쭉 따라 읽으면 될 것 같습니다. 그보다 저는 보르헤스가 '거울'만큼이나 자주 다루는 소재인 '미로(또는 미궁)'에 대해서 말해보고 싶습니다. 본문에서 유춘 박사는 한 평생 '미로'(소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를 만드는 데 매진하다 죽은 취팽이 자신의 선조임을 밝힙니다. 여기서 잠시 다른 얘기를 해야 하는데, 한국어 판본에서 '미로'로 번역된 단어는 스페인어 원문으로 'Laberinto'입니다. 영어 번역본에서는 'Labyrinth'입니다. 보르헤스전집 판본과 세계문학전집 판본 모두 '미로'로 번역돼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제 개인적인 견해로는 '미궁'이 더 적절해 보입니다. 미로(maze)과 미궁(Labyrinth)은 비슷해 보이지만 역사적인 연원이나 사용되는 맥락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같은 사례라고 보기는 어려우나, '성경'과 '성서'의 차이만큼이나 다르지 않나 합니다. 성경이 종교적 맥락이 더 부각된다면 성서는 책으로서 맥락이 더 부각됩니다.) 제 개인적인 살을 덧붙여서 얘기해보겠습니다. 미로와 미궁은 다릅니다. 본문에서 취팽이 고안하고자 했던 것은 '미궁' 쪽에 더 가깝습니다. 국어 사전에서 정의는 둘을 특별히 구분하지 않고 있기는 합니다. "갈림길과 막다른 골목으로 이루어져서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오기 힘든 구조물", "어지럽게 갈래가 갈라져서, 한번 들어가면 다시 빠져나오기 어려운 길"이라는 사전적 정의에 더 부합하는 쪽은 '미로'로 번역되는 'maze'에 가깝습니다. 미로에서는 분기점이 많아서 길을 찾는 것이 어렵지만 일반적으로 한 가지 올바른 길과 출구를 상정합니다. 반면 '미궁'으로 번역되는 라비린토스(Labyrinth)는 신화, 종교, 문화적 배경이 더 부각됩니다. 목적지 자체가 의미 있다기보다는 그 통로들이 녹아내린 마시멜로처럼 적층된 모습을 보이고, 반복적인 패턴, 루프 구조가 보입니다. 미로 연구가 헤르만 케른에 따르면 기원전 1세기부터 발견되는 '미로'는 비교적 후대에 발명된 것으로서, 중세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면서 점점 방문자로 하여금 길을 잃도록 만드는 특성에 집중된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 라비린토스, 즉 미궁은 좀더 이전의 것으로서 그 원형을 기원전 2000년 경에 부흥했던 크레타 문명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미로에서 통로는 여러 갈래로 갈리며 방문자를 혼란스럽게 만들지만, 미궁은 그렇지 않습니다. 미궁은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에움길이며 오직 하나의 길만 있습니다. 미로의 목적은 방문자를 길에 가두고 의도적으로 혼란을 주어 길을 잃게 하기 위함이지만, 미궁은 하나의 공간을 남김없이 산책하게 만들며 엄청나게 우회하지만 계속해서 걸으면 누구나 그 중심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즉, 미로가 의도된 혼란의 공간이라면 미궁은 내면적이고 명상적인 산책 공간에 가깝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조금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정원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 단편에서 '갈라짐'은 혼란을 초래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인생의 끝없는 분기점' 전체를 상정하는 하나의 상징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과거 문학가들이 '거울'만큼이나 '미궁'에 이끌린 것도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본문 얘기를 좀 해보면, 중간 부분에 스티븐 알버트가 유춘과 나눈 선문답 같은 대화에서도 앞선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스티븐 알버트는 그 해답이 '장기(chess)'인 수수께기를 낼 때,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장기'라는 단어라고 말합니다. 이는 미궁의 중심부가 텅 비어 있는 것과 비교될 만합니다. 미궁은 거대한 에움길로서 중심부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 중심부는 텅 비어 있습니다. 방문자는 텅 빈 중심부를 추측하면서 그 사색적인 에움길을 걷습니다. 취팽에게 책을 쓰는 일과 미궁을 건설하는 일이 같은 일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미궁이 단순한 구조물에 그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나 한 권의 책을 끝까지 읽으면, 또 반복해서 읽으면 이 미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읽어도 어떤 책들은 그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남는 것은 의미의 진공, 텅 빈 중심부입니다. 하나 재미있는 점은 미궁의 텅 빈 중심부에 도달하는 순간 우리는 미궁이 바로 '안팎이 뒤집어진 공간'이라는 인식 하나를 얻게 된다는 점입니다. 미궁의 텅 빈 중심부, 그 막다른 벽을 본 사람은 다시 걸어온 모든 걸음을 걸어서 입구로 되돌아가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아가 미궁은 방문자로 하여금 다시 왔던 길을 돌아나가게 하는 구조 자체에 목적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박술 번역가는 매우 탁월하게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다이달로스=비트겐슈타인이 구축한 미궁의 가운데에는 무엇이 있는가? 거기에는 아무런 답도 없다. 그토록 두려워했던 미노타우로스도 없다. 그곳은 길이 끝나는 곳이다. 걸어온 모든 길이 뒤집히는 곳이다." 한 권의 의뭉스러운 책을 읽는 것, 미궁의 에움길을 걷기, 저는 이 두 가지가 같다고 봅니다. 미로와 미궁의 차이를 잘 정리한 글이 있으니 한 번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미로와 미궁] https://brunch.co.kr/@soolpark/2.
나는 나와 피를 나누고 있는 어떤 사람이 붓으로 정교하게 쓴 다음과 같은 문장을 뚫어져라 읽었다. 나는 그 말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다양한 미래들에게(모든 미래들이 아닌)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을 남긴다.⟩ 나는 다소곳이 편지를 돌려주었다. 알버트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나는 이 편지를 입수하기 이전에 한 권의 책이 무한한 책이 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단지 순환적인, 원형의 책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지막 페이지와 첫번째 페이지가 동일해 무한히 계속될 수 있는 그런 책 말입니다. (···)"
픽션들 158-159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Eagerly yet uncomprehendingly I read the words that a man of my own lineage had written with painstaking brushstrokes: I leave to several futures (not to all) 'my garden of forking paths'. I wordlessly handed the paper back to Albert. He continued: "Before unearthing this letter, I had wondered how a book could be in finite. The only way I could surmise was that it be a cyclical, or circular, vol ume, a volume whose last page would be identical to the first, so that one might go on indefinitely. (···)"
픽션들 ⏤Andrew Hurley, Collected Fictions, pp. 124-125.,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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