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보르헤스 읽기] 『픽션들』 같이 읽어요

D-29
윗글은 일직선상의 시간과 공간이 아닌 삶. 불확실한 현재만이 경험가능한 존재이고 기억과 희망으로 과거와 미래의 의미를 부여하는 시간개념인 듯 합니다. 상상의 행성 (관념의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경험적 관점을 기반을 두고 있지 않나 생각되는 학파의 의견과 또한 양자역학 세계의 다차원적 세상과 삶에 대한 또 다른 상상의 관념들의 표현들이 흥미로왔습니다.
이상할 정도로 물리학자들이 좋아하는 소설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물리학자들의 책을 읽다보면 심심찮게 『픽션들』의 한 구절이 인용돼 있으니까요. 분명 과학자들에게도 영감을 줄 만한 부분이 있기는 한가봅니다. 다만 소설의 특정 내용을 곧장 현대물리학의 이론과 연관짓는 것은 다른 문제이고, 달리 섬세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기 때문에 말을 아끼겠습니다... 어쨌든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혹성(틀뢴)에 있는 나라들은 본질적으로 관념적이다. 그들의 언어와 언어로부터 파생된 종교, 학문, 형이상학 등과 같은 그 모든 거들은 관념론을 전제하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 세계란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물체들의 집합이 아니다. 그들에게 있어 세계는 독립적인 행위들의 이질적 연속이다. 그것은 연속적이고, 시간적이지 공간적인 게 아니다.
픽션들 30쪽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현재> 틀뢴의 언어들과 방언들이 파생되어 나온 가상적 <우르스프라헤(원초적 언어)>에는 명사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부사적 기능을 가진 단음절 접미사(또는 접두사)에 의해 수식된 비인칭 동사들은 존재한다. ...중략... 북반구 언어들 ...중략... 에 있어 원초적 핵은 동사가 아니라 단음절 형용사이다. 명사는 형용사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진다.
픽션들 31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나는 이 혹성의 사람들이 우주를 공간이 아닌 연속적인 시간 속에서 발전하게 되는 정신적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었다. 스피노자는 소진되지 않는 우주의 신성을 확장과 사유의 성질에서 찾았다. 그러나 틀뢴에서는 그 누구도 확장이라는 공간성(단지 어떤 상태에서만 특별히 존재하는)과 사유(우주와 완벽한 동의어인)가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해, 그들은 시간 속에서 공간이 유지될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할 거라는 말이다. 지평선에서 솟아오르는 연기, 이어 들판에서의 불, 그리고 이어 그 화재를 불러일으킨 반쯤 끄다 만 담배꽁초에 대한 지각은 관념들의 연합을 가리키는 하나의 예로 간주된다. ...중략... 이러한 일원론 또는 절대관념론은 모든 과학을 무효화시킨다. 하나의 사실을 설명(또는 판단)한다는 것은 그것을 다른 사실과 결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틀뢴에 있어 그러한 연계는 주체의 후 상태로섯 그것은 전 상태(하나의 사실)에 영향을 미치거나, 그것을 조망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정신적 상태는 전혀 축약이 불가능하다. 단순히 그 정신적 상태에 이름을 부여하는 - 말하자면 그것을 분류하는- 것은 하나의 왜곡에 다름 아니다. 그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우리는 틀뢴에서는 과학, 심지어 유추의 행위까지도 존재하지 않음을 연역해 낼 수 있다.
픽션들 33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2005년에 처음 읽은 후 세 번째로 읽었습니다. 처음 읽을 때 이 작품은 일종의 관문이었습니다. 어렵고, 지루하고, 각주는 많고... 마치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초입처럼 성으로 들어가기 위해 돌파해야 하는 철책이나 건너야 하는 해자 같았지요. 삼독쯤 되느 여러가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2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제 안에 쌓여온 것들이 이 작품에서 여러 가지를 발견하게 합니다. 읽으며 떠오른 것들을 메모하느라 여백이 지저분해졌습니다. 생각의 꼬투리들 각각을 파고들자면 한달도 읽을 수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그중에서 가장 명료하게 떠오른 생각은 이 작품이 실체(실재)를 인정하지 않는 틀뢴이라는 관념의 세계가 현실로 틈입해오는 과정을 통해 담론의 진실효과를 보여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전의 독서에서는 알지 못했던 나름의 깨달음을 얻는 알찬(!) 시간이었습니다.
거의 20년 만에 다시 읽는 것이군요.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네요. 정돈해서 말해야 한다는 부담은 가지지 마시고 여백에 쓰신 내용도 한번씩 공유해주시면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처음 읽는 입장에서 돌파해야 하는 해자와 같았다는 부분에 공감이 되네요. 저는 공성전을 원했던게 아니고 (단편집이라는 서식에서 보통 생각할 수 있는) 동네 산책 같은 것을 생각했던터라 더더욱. 이 집 저 집 구경할까 했는데 첫 소설부터 단단하게 서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사뭇 [불한당들의 세계사]와도 다른 톤의. 하지만 이 성벽은 앞으로도 벽돌 하나 하나 다시 꼼꼼하게 살펴보는 재미가 있겠습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안녕하세요?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참여해 주셔서 조금 놀랐습니다. 이전에도 그믐에서 독서모임을 열어 보긴 했지만 이렇게 많은 인원이 참여한 적은 처음이라서 당혹스럽기도 합니다.😅 그래서 다양한 분들이 모여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만큼 몇 가지 원칙을 공유하면 어떨까 하는데요, ⏤먼저, 인용구를 공유해주실 때는 [책 꽂기]나 [문장 수집] 기능을 활용해주세요. 일반적인 대화와 구분하기 위함입니다. ⏤또 각 단편을 논하는 시기를 나눠놓기는 했지만, 독서 속도가 서로 다른 만큼 대화 주제가 마구 뒤섞일 수 있습니다. 제가 화제로 지정해놓은 단편에 말풍선을 눌러서 [이 대화에 답하기] 기능을 활용해주세요. 그래야 나중에 참여하신 분들도 [게시판] 기능을 활용해서 각 단편의 대화 타래를 보고 흐름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2/1-2/3) - 알모따심에로의 접근 (2/4-2/6) -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2/7-2/9) ※ 2/10 설날은 쉬세요. - 원형의 폐허들 (2/11-2/13) - 바빌로니아의 복권 (2/14-2/16) - 허버트 쾌인의 작품에 대한 연구 (2/17-2/19) - 바벨의 도서관 (2/20-2/22) -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2/23-2/25) 다양한 분이 참여하는 만큼 다들 서로 배려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짧은 단편이지만 얘기할 구석이 정말 많습니다. 모든 부분을 언급할 수는 없으므로 제가 인상깊게 본 부분에 대해서만 간단히 언급하겠습니다. 전반부에 나오는 이교도의 '아홉 개의 동전' 에피소드입니다. 틀뢴에서 X가 아홉 개의 동전을 잃어버렸는데 후일 차례대로 Y가 네 개, Z가 세 개, 마지막으로 X가 두 개의 동전을 주운 사건이 일어납니다. 상식에 근거한 사람들은 틀뢴의 이교도가 '동전을 주운 경험'을 별개의 사건으로 인식하기보다는 '과거에 잃어버린 동전'과 연관지어서 '동일(identity)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발견하다'와 '잃다'라는 동사로 설명하게 된 것일 뿐이라고 반박합니다. 이교도의 말처럼 되려면 X, Y, Z가 모두 동일인이어야 하는데, 각 동전들은 '동일'한 것이 아니라 사실상 '동등/등가(equality)'한 것에 불과하므로 그렇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틀뢴을 논파하려는 사람들은 늘 과거에서 현재 방향으로 인과관계가 축적된다고 전제하고 있지만, 틀뢴에서는 꼭 그렇지는 않은 듯합니다. 틀뢴에서는 단 하나의 주체가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순으로 후에 일어난 사건이 과거에 일어난 사건에 영향을 미치는 일도 왕왕 일어납니다. 틀뢴의 한 주립 교도소의 에피소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도소장은 죄수들에게 그들이 발견해야 할 유물의 사진을 미리 보여주면서 그것을 찾아오면 석방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죄수들은 삽과 곡괭이를 갖고 녹슨 수레바퀴 하나를 발견하는데 이상하게도 그것은 발굴을 시작했던 날짜 이후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죄수들이 석방될 목적으로 유물을 발굴했던 것인지(최신의 과거를 발견한 것인지), 아니면 똑같이 석방될 목적으로 녹슨 수레바퀴와 비슷한 무언가를 현실에서 창조해낸 것인지(과거를 모사한 현재, 또는 미래를 만들어낸 것인지) 모호하게 서술되고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과거가 '고정불변한 것',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지점에서 정말 그런지 되묻게 됩니다. 과거는 미래만큼 열려 있고 또 창조 가능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암시되고 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일상의 시계열을 넘어서 때론 그 역방향으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후반부 후기에서도 보듯 환상의 세계가 현실로 범람해서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사례는 많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톨킨의 판타지 세계관이 대표적입니다. 오늘날 익숙한 서양 판타지사의 근간은 거의 톨킨에서부터 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언어학자였던 톨킨은 실제로 자기 세계관 안에서 요정어를 만들어내기까지 했다고 들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 무수한 파생물, 즉 불을 뿜는 용과 뾰족한 귀를 지닌 요정을 현실의 스크린과 각종 전시회장에서 목도하고 있습니다. 때론 현실보다 더 현실 같기도 합니다. 더 많은 얘기를 할 수는 있겠지만 이 정도로 간단히 정리하고 대화는 계속해서 열어둔 채, 다음 단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예상 표절 - 문학과 예술의 전통적 연대기를 전복하여 무한히 확장된 독서의 세계로 빠져들다<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으로 독서의 근간을 뒤흔든 피에르 바야르가 이번에는 문학과 예술의 가장 민감한 이슈인 ‘표절’의 개념을 전복시키는 주장을 펼친다. 이 책에서 문제 삼는 표절은 과거의 것을 후대에서 도용하는 전통적인 표절이 아니라, 미래의 작품이나 아이디어를 앞선 세대에서 도용하는 이른바 ‘예상 표절’에 관한 이야기이다.
‘흐뢰니르’의 조직적인 생산 (11권에서 언급한 바에 따르면) 고고학자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도움을 주었다. 그것은 이제 미래에 맞먹을 정도로 탄력적이고 유연해진 과거에 대해 정보를 얻거나, 심지어 그것을 변형할 수 있도록 해 주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아주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두 번째 ‘흐뢰니르’(다른 ‘흐뢴’에서 파생된 ‘흐뢰니르’)와 세 번째 ‘흐뢰니르’(어떤 ‘흐뢴’에서 생신 ‘흐뢰니르’)는 처음 것과의 차이를 과장한다. 그리고 다섯 번째 ‘흐뢰니르’는 거의 동일하고, 아홉 번째 ‘흐뢰니르’는 두 번째 ‘흐뢰니르’와 혼동되며, 열한 번째 ‘흐뢰니르’에서는 원래의 것에는 없는 순수한 선(線)들이 발견된다. 이런 과정은 정기적으로 일어난다. 열두 번째 ‘흐뢰니르’에서는 퇴보하기 시작한다.
픽션들 31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알모따심에로의 접근~] 약간 늦었습니다. 이번에는 비평 형식의 글입니다. 보르헤스는 봄베이 출신의 마르 바하두르 알리라는 변호사가 쓴 『알무타심에로의 접근』이라는 장편 소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출간 즉시 인기를 얻으면서 수많은 판본으로 변형되어 출간되었다고 합니다. 보르헤스는 『알무타심에로의 접근』이 판본을 거듭하면서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추적합니다. 평에 따르면 『알무타심에로의 접근』이 초판본에서 훌륭했으나 점점 쇄를 거듭하면서 작가가 '천재가 되려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일종의 신학적인 구도(求道) 소설로 전락했다고 말합니다. 여담이지만 저도 한국어판 『픽션들』에 대한 전반적인 감상(비평 아닙니다!)을 말해보고 싶습니다. 처음 읽는 분들도 이 단편 소설이 '존재하지 않는' 소설에 대한 비평(혹은 각주)이며, 그로써 소설 형식을 확보하고 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민음사에서 나오는 두 판본들은 각주에서 각 단편의 핵심적인 내용을 친절하게(?) 스포하고 있습니다. 행여나 독자가 이해하지 못하고 지나칠까봐 전전긍긍하는 마음이 느껴질 정도였으니까요. 근데 스페인어 원본이나 영어 번역본을 보면, 이 정도로 많은 각주가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한국어 판본에서는 각주로 지나치게 개입한다는 인상이 듭니다. 이게 편집자의 의도인지 역자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둘 다 일러두기도 없거든요. 엄청나게 아쉬운 점입니다. 다 양보해서 황병하 선생님의 보르헤스 전집 번역본은 정보 검색이 용이하지 않은 1990년대를 생각하면, 정보 전달용 각주가 필수적이었을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그러나 세계문학전집 번역본은 십여 년이 흐른 뒤인 2011년에 출간되었고, 필요하면 독자 스스로 정보를 찾아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더욱이 문학 작품에서 저자의 각주는 단순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소설이나 시적 장치의 일부로 읽혀져야 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한국어 판본의 각주는 너무 아쉽습니다. 한편, 보르헤스전집시리즈에 비해 세계전집시리즈는 폰트나 레이아웃, 맞춤법이 현대적이어서 더 친숙하게 느껴지고 실제로 몇몇 표현은 좀더 매끄럽게 읽히긴 합니다. 하지만 그게 반드시 더 좋은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매끄럽게 읽힌다고 해서 더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정말 모든 게 좋았다면 시기상 뒤에 나온 세계전집시리즈만 남겼을 텐데,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아 각 판본의 장단이나 호불호가 명확한 듯합니다. 아직까지도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두 판본이 함께 출간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최신 판본이라고 해서 더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바하두르 알리의 『알무타심에로의 접근』처럼요.
픽션들<픽션들>은 2백 페이지도 채 되지 않는 얇은 책이다. 그러나 그 속에는 엄청난 상상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 그 상상은 심심풀이 환상이 아니라 삶과 세상의 미궁에 대한 깊은 통찰과 독창적인 사유로 이루어진 상상이다. <픽션들>은 20세기 문학에서 돋보이는 큰 별이다.
픽션들'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5권. 기호학, 해체주의, 후기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 20세기 주요 현대 사상을 견인한 선구자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대표작. 1941년 발표한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과 1944년 발표한 '기교들'에 수록된 열일곱 편의 단편 소설을 모은 소설집으로, 일생 동안 단 한 편의 장편 소설도 남기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 단편 전문 작가 보르헤스의 문학적 정수를 보여 준다.
만일 내가 잘못 판단하지 않았다면 그러한 플롯을 훌륭하게 전개시키려면 작가는 두 가지 의무를 지게 된다. 첫째, 예언자적 인물들의 다양한 창조. 둘째, 그러한 모습들 속에 어렴풋이 예견할 수 있는 주인공의 창조. 하지만 그 주인공은 단순한 통념이나 유령이 아니어야 한다. 바하두르는 첫번째 것은 만족시킨다. 그러나 두번째 것까지 그러했는지 나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다른 말로 바꿔 말하자면 들을 수 없고, 볼 수 없는 알모따심은 우리에게 무미건조한 최상급들의 남발이 아닌 살아있는 인물이라는 인상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1932년판에는 초자연적 특성들이 거의 제거되어 있다. 〈알모따심이라로 불리는 인물〉은 약간 상징적인 성격을 띠고는 있지만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성격 또한 결여되어 있지 않다. 불행하게도 이 훌륭한 문학 작업 방식은 다음 판에까지 계속되지 않았다. 1934년판─지금 내가 눈앞에 두고 있는─에서 이 소설을 알레고리로 전락한다. 알모따심은 신의 상징으로 변하고, 주인공이 수행하는 수많은 여정의 순간들은 어떤 의미로 한 영혼의 신비주의적 승화의 과정으로 묘사되어 있다.
픽션들 60-61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이것은 한 영혼이 다른 영혼들에게 남긴 미묘한 반영을 통해 그 영혼을 하염없이 찾아가는 작업이다.
픽션들 알모타심으로의 접근,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저도 이 문장에 한참 머물렀어요.
1932년 판에서 순례의 대상이 주인공 자신이라는 사실은 알모타심을 찾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명석하게 정당화하고 있다. 1934년 판에서 이런 사실은 내가 앞서 말했던 얼토당토않은 신학으로 이끈다.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미르 바하두르 알리는 예술의 유혹 중에서 가장 천한 유혹, 즉 천재가 되고자 하는 유혹을 거스를 힘이 없는 사람이다.
픽션들 알모타심으로의 접근,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궁극의 대상을 찾다보니 결국 나였다더라... 라는 이야기는 조금 뻔해보여서, 1932년 보다는 1934년의 작품에 더 흥미가 갑니다만...... (역시 나의 취향은 고급이 아닌거였...ㅎㅎ) 없는 소설에 대한 평론이지만 비교하기위해 언급하는 각종 실제 작가나 평론가, 작품 덕분에 매우 있음직하게 느껴지네요. 허구와 사실의 비율이 매력적입니다.
이야기 자체는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 같은 오래된 라틴아메리카의 설화를 따라가는 듯합니다. 이 소설이 흥미로운 점은 그 형식 같습니다(사실 보르헤스의 모든 소설이 그렇지만). 앞서도 언급했지만, 보르헤스는 『알무타심에로의 접근』이라는 장편 소설에 대한 허구의 비평을 쓺으로써 「알모따심에로의 접근」이라는 자기 단편의 형식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돌고돌아 자기 자신이 된다는 얘기는 이 단편 소설에도 적용됩니다:)
처음 읽었을 때는 각주들이 보르헤스가 붙인 것인 줄 알고 꾸역꾸역 읽었습니다만, 다시 읽으니 대부분이 번역자주이고 '원주'는 따로 표기된 몇 개에 그친다는 걸 번역자님이 친절하게 일러줬다는 걸 보게 되었습니다. 너무 많고 친절한 각주가 아쉽다는 점에 공감합니다. 문장을 따라가는 데에 각주가 방해가 되는 것 같아요. 각주에 신경쓰지 않고 그런가보다... 하고 따라 읽으면 훨씬 몰입이 쉬웠습니다. 그건 그렇고, 설 연휴인데집을 떠나면서 '픽션들'을 (의도적으로) 안 가져와버렸네요. 번잡스런 길에서 읽고 싶지는 않았던 책이라..
처음 읽을 때는 각주를 무시하고 읽되, 나중에 다시 읽을 때 각주를 살펴보면서 읽는 것도 한 가지 방법 같습니다. 각주 중 어떤 내용은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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