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보르헤스 읽기] 『픽션들』 같이 읽어요

D-29
나는 비겁한 인간이다. 누구가 되었든 간에 위험하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을 어떤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 지금 나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 나는 인류가 점차로 보다 대담한 일에 자신을 내던지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곧 세상에는 전사들과 도적들밖에 없게 될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를 하고 싶다. ⟨대담한 어떤 일을 수행하는 자는 자신이 이미 그것을 완수했다고 생각해야 하고, 마치 과거처럼 절대로 바꿔놓을 수 없는 미래를 자신에게 강요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는 나의 눈들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그날의 해거름과, 밤의 도래를 새겨 담는 동안 나의 계획을 진척시켜 나아가고 있었다. 기차는 물푸레나무들 사이를 감미롭게 덜커덩거리며 달려가고 있었다.
픽션들 150쪽, 152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이야기 자체는 어렵지 않으니 쭉 따라 읽으면 될 것 같습니다. 그보다 저는 보르헤스가 '거울'만큼이나 자주 다루는 소재인 '미로(또는 미궁)'에 대해서 말해보고 싶습니다. 본문에서 유춘 박사는 한 평생 '미로'(소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를 만드는 데 매진하다 죽은 취팽이 자신의 선조임을 밝힙니다. 여기서 잠시 다른 얘기를 해야 하는데, 한국어 판본에서 '미로'로 번역된 단어는 스페인어 원문으로 'Laberinto'입니다. 영어 번역본에서는 'Labyrinth'입니다. 보르헤스전집 판본과 세계문학전집 판본 모두 '미로'로 번역돼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제 개인적인 견해로는 '미궁'이 더 적절해 보입니다. 미로(maze)과 미궁(Labyrinth)은 비슷해 보이지만 역사적인 연원이나 사용되는 맥락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같은 사례라고 보기는 어려우나, '성경'과 '성서'의 차이만큼이나 다르지 않나 합니다. 성경이 종교적 맥락이 더 부각된다면 성서는 책으로서 맥락이 더 부각됩니다.) 제 개인적인 살을 덧붙여서 얘기해보겠습니다. 미로와 미궁은 다릅니다. 본문에서 취팽이 고안하고자 했던 것은 '미궁' 쪽에 더 가깝습니다. 국어 사전에서 정의는 둘을 특별히 구분하지 않고 있기는 합니다. "갈림길과 막다른 골목으로 이루어져서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오기 힘든 구조물", "어지럽게 갈래가 갈라져서, 한번 들어가면 다시 빠져나오기 어려운 길"이라는 사전적 정의에 더 부합하는 쪽은 '미로'로 번역되는 'maze'에 가깝습니다. 미로에서는 분기점이 많아서 길을 찾는 것이 어렵지만 일반적으로 한 가지 올바른 길과 출구를 상정합니다. 반면 '미궁'으로 번역되는 라비린토스(Labyrinth)는 신화, 종교, 문화적 배경이 더 부각됩니다. 목적지 자체가 의미 있다기보다는 그 통로들이 녹아내린 마시멜로처럼 적층된 모습을 보이고, 반복적인 패턴, 루프 구조가 보입니다. 미로 연구가 헤르만 케른에 따르면 기원전 1세기부터 발견되는 '미로'는 비교적 후대에 발명된 것으로서, 중세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면서 점점 방문자로 하여금 길을 잃도록 만드는 특성에 집중된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 라비린토스, 즉 미궁은 좀더 이전의 것으로서 그 원형을 기원전 2000년 경에 부흥했던 크레타 문명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미로에서 통로는 여러 갈래로 갈리며 방문자를 혼란스럽게 만들지만, 미궁은 그렇지 않습니다. 미궁은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에움길이며 오직 하나의 길만 있습니다. 미로의 목적은 방문자를 길에 가두고 의도적으로 혼란을 주어 길을 잃게 하기 위함이지만, 미궁은 하나의 공간을 남김없이 산책하게 만들며 엄청나게 우회하지만 계속해서 걸으면 누구나 그 중심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즉, 미로가 의도된 혼란의 공간이라면 미궁은 내면적이고 명상적인 산책 공간에 가깝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조금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정원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 단편에서 '갈라짐'은 혼란을 초래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인생의 끝없는 분기점' 전체를 상정하는 하나의 상징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과거 문학가들이 '거울'만큼이나 '미궁'에 이끌린 것도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본문 얘기를 좀 해보면, 중간 부분에 스티븐 알버트가 유춘과 나눈 선문답 같은 대화에서도 앞선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스티븐 알버트는 그 해답이 '장기(chess)'인 수수께기를 낼 때,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장기'라는 단어라고 말합니다. 이는 미궁의 중심부가 텅 비어 있는 것과 비교될 만합니다. 미궁은 거대한 에움길로서 중심부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 중심부는 텅 비어 있습니다. 방문자는 텅 빈 중심부를 추측하면서 그 사색적인 에움길을 걷습니다. 취팽에게 책을 쓰는 일과 미궁을 건설하는 일이 같은 일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미궁이 단순한 구조물에 그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나 한 권의 책을 끝까지 읽으면, 또 반복해서 읽으면 이 미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읽어도 어떤 책들은 그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남는 것은 의미의 진공, 텅 빈 중심부입니다. 하나 재미있는 점은 미궁의 텅 빈 중심부에 도달하는 순간 우리는 미궁이 바로 '안팎이 뒤집어진 공간'이라는 인식 하나를 얻게 된다는 점입니다. 미궁의 텅 빈 중심부, 그 막다른 벽을 본 사람은 다시 걸어온 모든 걸음을 걸어서 입구로 되돌아가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아가 미궁은 방문자로 하여금 다시 왔던 길을 돌아나가게 하는 구조 자체에 목적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박술 번역가는 매우 탁월하게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다이달로스=비트겐슈타인이 구축한 미궁의 가운데에는 무엇이 있는가? 거기에는 아무런 답도 없다. 그토록 두려워했던 미노타우로스도 없다. 그곳은 길이 끝나는 곳이다. 걸어온 모든 길이 뒤집히는 곳이다." 한 권의 의뭉스러운 책을 읽는 것, 미궁의 에움길을 걷기, 저는 이 두 가지가 같다고 봅니다. 미로와 미궁의 차이를 잘 정리한 글이 있으니 한 번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미로와 미궁] https://brunch.co.kr/@soolpark/2.
나는 나와 피를 나누고 있는 어떤 사람이 붓으로 정교하게 쓴 다음과 같은 문장을 뚫어져라 읽었다. 나는 그 말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다양한 미래들에게(모든 미래들이 아닌)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을 남긴다.⟩ 나는 다소곳이 편지를 돌려주었다. 알버트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나는 이 편지를 입수하기 이전에 한 권의 책이 무한한 책이 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단지 순환적인, 원형의 책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지막 페이지와 첫번째 페이지가 동일해 무한히 계속될 수 있는 그런 책 말입니다. (···)"
픽션들 158-159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Eagerly yet uncomprehendingly I read the words that a man of my own lineage had written with painstaking brushstrokes: I leave to several futures (not to all) 'my garden of forking paths'. I wordlessly handed the paper back to Albert. He continued: "Before unearthing this letter, I had wondered how a book could be in finite. The only way I could surmise was that it be a cyclical, or circular, vol ume, a volume whose last page would be identical to the first, so that one might go on indefinitely. (···)"
픽션들 ⏤Andrew Hurley, Collected Fictions, pp. 124-125.,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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