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보르헤스 읽기] 『픽션들』 같이 읽어요

D-29
화제로 지정된 대화
[~바빌로니아의 복권] 이 단편에서는 〈회사〉의 의지로서 우연이 무한한 갈래로 현실에 나뉘어 적용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명령을 즉흥적으로 만들어낸 주정꾼, 자다가 갑자기 일어나 자신의 옆에서 자고 있던 부인을 목졸라 죽인 정신병자"까지 사실 모두 〈회사〉가 그 의지를 발휘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다만 〈회사〉는 은밀하고 복잡한 방식으로 그것을 마치 우연처럼 행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알아치리지 못합니다. 흥미로웠던 대목은 마지막에 이교도가 교묘히 이교도 신분을 속이고서 〈회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부분입니다. 〈회사〉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모든 사건을 '우연' 탓으로 돌립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테드 창의 엽편 소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떠올라서 즐거웠습니다. 정확히 같은 구조는 아니지만 유사한 점이 상당합니다. SF적 상상력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만 다를 뿐 전체적인 얼개는 비슷하다고 봅니다. 표면적으로 테드 창은 '우연'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말하고 있고, '회사'가 아니라 '결정론'을 말하고 있긴 합니다. 보르헤스식으로 말하자면 테드 창의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보르헤스의 「바빌로니아의 복권」을 발견하게 만들었다고 해도 되겠습니다. 한편, 황병하 선생님의 19번 각주는 그저 역자의 해석 정도로만 받아들이고 넘기는 편이 좋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예컨대 거미로부터 영감을 받아 소설가가 어떤 환상 공간을 창조했다면, 그 환상 공간은 '거미' 이상의 공간이라서 '현실의 거미'로 오롯이 환원되는 것은 아닙니다(과학에서 '창발' 문제와 유사합니다). 마찬가지로 다 양보해서, 보르헤스가 〈회사〉를 썼을 때 각종 종교의 절대자 개념에서 영감을 얻었을 거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이 소설에 나오는 〈회사〉를 종교적인 그것으로 단번에 환원하기에는 큰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회사〉는 사실 절대자를 의미한다'고 말하는 것과 '〈회사〉는 사실상 절대자로 볼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전자에서 소설은 우스꽝스러운 알레고리로 전락하지만, 후자는 다양한 해석에 넉넉히 열려 있으면서도 작중 내용이나 소재를 하나의 알레고리로 환원하지 않으니까요. 수고하셨어요:)
최고의 SF에 수여되는 모든 상을 석권하며 전 세계 21개 언어로 번역 출간된 <당신 인생의 이야기>의 작가, 테드 창의 두 번째 작품집이다. 2002년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출간한 이래 17년 만에 펴내는 소설집이다.
대다수의 사람은 처음 이 장치를 사용할 때 기묘한 게임을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말한다. 불빛이 반짝이는 것을 보이면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되는, 아주 쉬운 게임 말이다. 그러나 게임의 규칙을 이기려고 하면 이내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불빛이 보이기 전에 버튼을 누르려고 하면, 그 즉시 불빛이 반짝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손놀림이 빨라도 1초가 지나기 전에 버튼을 누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버튼을 누르지 않을 결심을 하고 불빛이 반짝이는 것을 기다리면 불빛은 절대 반짝이지 않는다. 당신이 무슨 수를 쓰든, 불빛은 언제나 버튼을 누르기 전에 반짝인다. 예측기를 속일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각 예측기의 중추는 네거티브 타임 딜레이(negative time delay) 회로이다. 이것은 과거로 신호를 보낸다. 이 기술이 초래한 결과들은 1초 이상의 시간 지연이 가능해진 이후에야 비로소 명확해지겠지만, 여기서 경고하려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당장 시급한 문제는 예측기가 자유의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증하고 있다는 점이다.
91-92쪽,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나는 그리스인들이 알지 못한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불확실성이란 것이었다. 내가 거의 잔인하기까지한 그런 다양한 운명과 마주하게 된 것은 한 제도에 기인한다. 그것은 다른 나라들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거나, 시행되고 있다고 해도 불완전하고 은밀한 방식으로 진행되는 복권이었다. P.78 그것은 단지 인간의 희망만 겨냥한 것이었다. P.79 ‘회사’는 종교적이며 형이상학적인 힘까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손에 넣게 되었다. P.80 그리고 먼지투성이의 하수도에는 틈새들이 있었는데, 사람들 말에 의하면 그것들은 ‘회사’로 가는 길이었다. 바로 그런 장소에다 선하거나, 혹은 악한 사람들이 비밀 정보들을 놓아두곤 했다… . .그 문구는 ‘복권이란 세계의 질서 속에 우연을 삽입시키는 것이며, 실수를 받아들이는 것은 우연을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교리에 의거해 지적하고 있었다. p.83 만일 복권이 우연을 강화시키는 것, 즉 코스모스에 주기적으로 카오스를 불어넣는 것이라면, . . .p.84 하느님의 작업과 비교될 만한 그런 조용한 작업은 온갖 종류의 추측을 불러일으킨다. 혹자는 ‘회사’가 수백 년 전부터 존재하지 않고 있으며, 우리 삶 속의 신성한 혼돈은 단순히 물려 내려온 것이며 전통에 따른 것이라고 무례하게 강조한다. 혹자는 ‘회사’를 영원하다고 믿으면서 최후의 신이 세상을 파괴할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가르친다.. . . ‘회사’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사람들과 비열하기로는 마찬가지인 또 다른 누군가는 바빌로니아가 우연의 무한한 놀이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런 그늘에 숨은 회사의 실재를 긍정하건 부정하건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P.87
픽션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허버트 퀘인의 작품에 대한 연구~] 이번 단편 「알모따심에로의 접근」처럼 허구의 작가가 쓴 허구의 소설에 대한 비평 형식을 취합니다. 여기서도 보르헤스는 허버트 퀘인의 첫 작품을 지인인 한 부인에게 빌려주었다가 돌려받지 못하게 되었다면서 확인할 길이 요원해졌다는 말을 합니다. '원본'을 더 이상 확인할 수 없어졌다는 설정에서부터 상상력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읽어 보시면 알겠지만, 이 단편은 『픽션들』 1부에 대한 메타 해설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황병하 선생님이 각주 28번에서도 쓰고 있듯이 흥미로운 점은 보르헤스가 이 소설을 쓴 시점입니다. 단편 말미 부분에서 보르헤스는 이 소설이 작품집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에 실려 있다고 언급합니다. 그러나 이 소설이 쓰여질 때까지만 하더라도 보르헤스는 그런 단편집을 출간한 적이 없었고,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이라는 동명의 표제작도 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허버트 퀘인에 대한 비평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단편은 단순한 픽션이 아니라 자기 예언적인 발화이었던 셈입니다. 보르헤스가 이 소설을 쓰고 난 다음에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을 완성함으로써 픽션을 현실로 만들었다고 해도 될 것입니다. 이렇듯 보르헤스의 작품은 보르헤스의 행보, 현실의 맥락과 같이 펼쳐놓고 읽어야 이해가 쉽습니다. 픽션의 범위가 지면에 국한하지 않고, 픽션을 다루는 현실까지 확장된다고 저는 느껴졌습니다.
쾌인은 책의 「서문」에서 브래들리의 그러한 역행적인 세계를 창출해 내려고 시도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그러한 세계에서는 죽음이 출생을, 상처가 딱지를, 상처를 입히는 행위에 상처가 앞서 나타난다(『현상과 현실』, 1897, 215쪽). 그러나 『에이프릴 마아치』가 제안하는 세계는 시간 역행적인 세계가 아니다. 단지 그것을 기술하는 방식이 시간 역행적이라는 것뿐이다. 내가 앞서 말했던 것처럼 ⟨시간적으로 거꾸로 씌어 있고, 가지처럼 갈라지는 구조를 가지고 있을⟩ 뿐인 것이다.
픽션들 121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소설 속에서 이미 읽은 '원형의 폐허들' 을 만나니 반가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보르헤스가 이 작품을 쓸 때 이미 '원형의 폐허들'과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을 계획하고 있었는지, 이 작품에서 말해놓고 나서 자기 예언처럼 그 작품들을 썼는지 궁금했고, 후자라면 더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허버트 퀘인 작품의 시간 역행적인 구성이 흥미로웠고, 그동안 읽은 보르헤스의 소설과 통하는 게 있었습니다. 미래의 일들에 대해 세 개의 가정을 하는 경우는 흔해도, 과거의 일들이 세 가지로 분기한다는 점이 특이했어요. 그런 소설을 상상하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문학, 작가, 독자에 대해 꼬집는 듯한 문장들도 인상적이고 앞의 작품들에 비해 술술 읽히는 점도 좋았습니다.
그쵸... 중간에 X, Y, Z로 나뉘어진 소설의 구조를 설명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 작품집에 대한 해설이라고 보면 더욱 흥미진진하게 읽힙니다. 단편집이라고 하면 각기 다른 시기에 쓰인 작품을 그냥 모아뒀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가수의 앨범을 생각해보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 각기 다른 소재의 다른 곡 같지만 그 전체를 쭉 펼쳐 놓고 보면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음을 알 수 있으니까요.
플로베르와 헨리 제임스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술 작품이란 자주 나오는 것도 아닐 뿐더러 그것은 고통스러운 작업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는 데 익숙해지도록 만들었다.
픽션들 p.118,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퀘인은 책의 「서문」에서 브래들리가 가정한 도치된 세계를 언급하는데, 그 세계에서는 죽음이 탄생보다, 상처의 딱지가 상처보다, 상처가 가해 행위보다 앞서 나타난다. 그러나 『에이프릴 마치』가 제안하는 세계는 시간 역행적이 아니며, 단지 이야기를 서술하는 방식이 그렇다. 내가 앞서 말했던 것처럼 ‘역행하고 그물눈처럼 갈라지는’ 소설이다. (...) 가장 뛰어난 것은 퀘인이 처음에 구상했던 X4가 아니라 환상적 성격을 가진 X9이다. 다른 것들은 싱거운 농담들과 쓸모없는 유사 정확성으로 손상되어 있다. 그 책을 시간 순서로 (가령 X3, Y1, Z의 순서로) 읽는 사람들은, 그 이상한 책의 특별한 맛을 음미하지 못한다. 두 개의 이야기(X7과 X8)는 특별한 개별적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그것들은 서로 병렬해 두어야만 효과를 보인다…….
픽션들 허버트 케인의 작품에 대한 연구,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에이프릴 마치> 작품 설명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당시에 보르헤스에게 영감을 준 이런 시간역행적 가지치기(?) 서술 방식의 책이 있었을지, 또는 보르헤스가 이 비슷한 방식으로 작품을 시도한 적이 있었을지도 궁금해지네요. (역시 보르헤스의 작품세계 전체나 당대 문학 사조에 대한 지식이 좀 있어야 작품을 더 풍성하게 즐길 수 있는 걸까요? 허허. 그런 지식이 부족한 저는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 ㅎㅎ 하지만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즐거움은 있네요)
보르헤스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라틴아메리카 작가들 특유의 마술적 분위기와 흐름이 있는데 그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았나 합니다. 본문에도 간혹 언급되는 동시대 소설가로서 비오이 카사레스도 있고, 더 이전으로는 우나무노의 『안개』 같은 소설도 있습니다. 더 이후의 코르타사르도 비슷한 주제를 다루기도 했고, 조금 결이 다르긴 하지만 유명한 마르케즈의 작품도 있습니다. 소설의 형식에 천착하고 틀을 비트는 시도가 라틴아메리카 문학에서 많이 나오는 듯합니다. 흔히 소설은 유럽적인 그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읽으면 또 그렇지도 않다는 걸 알게 됩니다. 어떤 점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동아시아의 인식과 흡사한 구석도 많습니다. 그래서 더 친근하고 재밌죠. 한번 천천히 읽어보시기를 바랄게요:)
페드로 파라모멕시코 현대문학의 거장 후안 룰포의 대표작 <뻬드모 빠라모>가 출간됐다. 이 소설은 가히 멕시코의 국민문학이라 할만 한데, 평생 단 두권의 작품만을 남긴 후안 룰포의 문학세계가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안개존재 의지를 희구한 실존철학자이자 소설 구조를 혁명적으로 전복한 20세기 스페인 문학의 선구자, 미겔 데 우나무노의 1914년작 소설이다. 불멸에 대한 집념과 인간 자아에 대한 믿음, 변하지 않는 사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야기한다. 소설 속의 주인공을 작가인 자신과 대면시키고 논쟁하는 독특한 형식의 작품이다.
모렐의 발명보르헤스와 함께 중남미 환상 문학을 이끈 거장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의 대표작. 외로운 망명자인 '나'가 끊임없이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이상한 사람들'을 몰래 숨어서 지켜보다가, 놀라운 사실에 직면한다는 줄거리의 소설이다. 공상과학 소설, 추리 소설, 환상 소설의 측면을 동시에 지닌 흥미로운 작품.
드러누운 밤단편소설의 대가이자 라틴아메리카 붐 소설의 선두 작가로 꼽히는 꼬르따사르 환상문학 대표 중단편 작품을 모은 작품집. 이번 작품집은 꼬르따사르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국내에서 첫 출간되는 책이다. 그간 몇몇 선집에 극히 일부만 소개되었을 뿐인 꼬르따사르의 독특한 문학세계를 조망하게 해주는 대표작을 모두 담았다.
사랑과 다른 악마들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1994년작. 광견병에 걸린 개에게 물린 후 악마에 씌었다는 오해를 받고 수녀원에 감금된 열두 살 소녀와 그녀에게 엑소시즘을 행하라는 명을 받은 서른여섯 살 신부의 금지된 사랑을 종교적 억압과 시대적 광기 속에 순수하고 아름답게 그려냈다.
감사합니다. 마치 <라틴아메리카 환상문학 입문> 수업 교재같군요. 시간을 내어 조금씩 읽어보렵니다(마르케스는 완전 좋아해요!). 코멘트랑 생각할거리 던져주셔서 항상 감사합니다. 뭔가 의미있는 답글을 달 깜냥은 안되어 눈팅할때가 많지만 작품을 읽어내는 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
천천히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저 역시 깜냥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지껄이는 거라고 해도 할 말은 없다고 생각해요. 근데 뭐 그럼 어떤가요😅
. . . .사실 그는 아주 분명하게 자기의 책들에 담긴 실험적 성격들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 책들은 열정적이라는 장점 때문이 아니라 새롭고 간결하면서도 완전하다는 면에서 칭찬을 받을 만한 것이었다.. . . . . 그리고 ‘’나는 예술에 속하지 않고 그저 예술사에만 속해 있다네.“라고 덧붙였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역사보다 저급인 학문은 없었다. P.89 그는 좋은 문학은 아주 흔하여 길거리의 대화조차도 대개의 경우 그런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미학적 행위에는 놀라움이라는 요소가 반드시 수반되며, 암기에 의헤 놀라움을 느낀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보았다. 그는 쾌활하고 솔직하게 지나간 과거의 책들을 ‘비굴하고 고집스럽게 보존하는 행위’를 개탄했다. . . . P.91 . . .하지만 보다 이질적인 작품은 ‘역행하고 그물눈처럼 갈라지는’소설 [에이프릴 마치(April March)]이다. 이 작품을 분석한 어느 누구도 이것이 놀이의 일종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나는 언젠가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 나는 이 소설을 위해 대칭이나 자의적 법칙을, 지루함 등 모든 놀이의 근본적인 특장들을 이용했네.“. . . 이 책의 <서문>에서 브래들리가 가정한 도치된 세계를 언급하는데, 그 세계에서는 죽음이 탄생보다, 상처의 딱지가 상처보다, 상처가 가해 행위보다 앞서 나타난다. 그러나 [에이프릴 마치]가 제안하는 세계는 시간 역행적인 아닌, 단지 이야기를 서술하는 방식이 그렇다. 내가 앞서 맗했던 것처럼 ‘역행하고 그물눈처럼 갈라지는’ 소설이다. P.91-92
픽션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허버트 퀘인의 작품에 대한 연구] 3중 구조로 된 소설 『에이프럴 마아치』와 그 모방인 2중 구조의 희극 『비밀의 거울』의 설명은 흥미롭습니다. 가만히 읽다 보면 이 소설집이 쓰여진 방식도 그러지 않을까 짐작해보게 됩니다. 예컨대 2중 구조로 된 희극 『비밀의 거울』의 1막에서 나오는 인물들은 2막에서 전혀 다른 이름을 가진 인물로 나온다고 설명합니다. 전혀 다른 이름과 직업의 인물이 사실은 같은 인물이었다고 보르헤스는 해설하고 있지만, 독자들은 『비밀의 거울』의 원전을 읽어볼 수 없기 때문에(보르헤스의 말에 따르면 그것이 소실되었기 때문에, 혹은 『비밀의 거울』이 허구의 희극이기 때문에) 그 진위를 판별하기보다는 그저 보르헤스의 해설을 믿고 읽어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하나의 작품은 구체적인 한 시대의 산물입니다. 뛰어난 작품들은 자신이 처한 여건과 한계를 최대치로 활용했습니다. 오늘날처럼 모든 정보가 온라인상에 아카이빙 돼 있고 누구든 원한다면 발언의 사실 여부를 검증할 수 있는 시대와 달리, 보르헤스가 살았던 시대에서는 주로 책을 통해 정보를 제한적으로 얻었습니다. 원전이 소실될 위험이 늘 상존하는 것, 정보의 검증이 제한된 사람들에 의해 제한된 매체로만 행해졌다는 것, 이는 분명 당대의 한계였습니다. 하지만 걸출한 인물들이 그렇듯이 보르헤스 역시 이 제약과 한계를 발판 삼아, '없는 원전'에서부터 자신의 픽션을 출발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기술 발전에 대한 신포도 증후군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과연 인간된 한계를 하나씩 지워가는 기술 발전이 좋기만 한 것인지 묻게 됩니다. 현대의 기술 발전은 인류 진보가 아니라 조급증의 산물일 수 있습니다. 어느 철학자는 지하실에서 불이 났다는 걸 아는데도 불을 끄기보다는 하늘에 더 가까워지려고 지붕을 올리는 미치광이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인간된 한계가 아니라 그 한계를 대하는 우리의 방식과 대처일 수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과거 인류는 얼마든지 낯선 곳에서 길을 잃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처럼 구글맵스가 가야할 목적지의 최단 경로와 환승구를 알려주는 것과 다르게요. 무지와 위험의 영역은 넓었지만 꼭 그만큼 세계를 넓게 상상했습니다. 현재 우리는 원하면 비행기를 타고 48시간 내에 지구 어디든지 갈 수 있지만 정확히 그 이유 때문에 아무데도 가지 않기도 합니다. 가능성으로서 전능함이 완벽한 무능함으로 반전된 시대라고 하면 과장일까요.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들 말합니다. 하지만 그런 세상에서 어쩐 일인지 사람들은 모두 원하는 일을 하면서 살지는 않습니다(그게 좋은 것도 아니고요). 탈진한 채 번아웃에 빠져서 히키코모리가 된 사람은 늘었습니다. 탈진과 번아웃의 세계는 '할 수 있을 수 없음'으로 정의되기도 한다고 들었습니다.
퀘인은 항상 독자란 이미 멸종된 종족이라고 주장하곤 했다. "잠재적이든 실제적이든, 작가가 아닌 유럽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거든."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하곤 했다. 또 그는 문학이 줄 수 있는 많은 행복 중 최고의 것은 상상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런 행복을 누릴 수 없기에, 많은 사람들이 비슷하게 흉내 낸 것에 만족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대중'이라는 이름의 그런 '불완전한 작가들'을 위해 퀘인은 『성명서』에 실린 여덟 개의 이야기를 썼다. 작품 하나하나는 훌륭한 이야기라는 것을 예시하거나 약속하지만, 작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좌절된다. 어떤 이야기는⏤가장 훌륭하다고 볼 수 없는⏤두 개의 줄거리를 암시한다. 허영심에 눈이 먼 독자는 자신이 그 이야기를 창작했다고 믿는다. 나는 세 번째 이야기인 「어제의 장미」에서 「원형의 폐허들」이라는 작품을 끄집어낼 정도로 순진했다. 이 작품은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이라는 책에 실린 이야기 중의 하나이다.
픽션들 96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Quain would often argue that readers were an extinct species. "There is no European man or woman" he would sputter, "that's not a writer, potentially or in fact." He would also declare that of the many kinds of pleasure literature can minister, the highest is the pleasure of the imagination. Since not everyone is capable of experiencing that pleasure, many will have to content themselves with simulacra. For those "writers manques," whose name is legion, Quain wrote the eight sto­ries of Statements. Each of them prefigures, or promises, a good plot, which is then intentionally frustrated by the author. One of the stories (not the best) hints at two plots; the reader, blinded by vanity, believes that he himself has come up with them. From the third story, titled "The Rose of Yester­day" I was ingenuous enough to extract "The Circular Ruins" which is one of the stories in my book The Garden of Forking Paths.
픽션들 ⏤Andrew Hurley, Collected Fictions, p. 111.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바벨의 도서관~] 하루 늦게 올립니다. 이 작품에서 흥미롭게 보았던 부분은 도서관 사서의 이야기입니다. 그 사서는 한 권의 책을 발견한 자로서, 나머지 모든 책의 암호 해독서이면서 완벽한 개론서를 그가 발견했다고 합니다. 사서는 독특한 지위에 놓입니다. 구체적으로 책에 어떠어떠한 내용이 있는지는 일일이 기억하지 못하지만, 어떤 책이 어디에 있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존재입니다. 사서는 지식의 담지자라기보다는 지식의 위치를 특정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사서가 되기 위해서는 책의 내용을 알기보다는 책이 진열되고 배열되고 배치되는 도서관의 구조도가 머릿속에 펼쳐져 있어야 합니다. 이는 내가 무엇을 알고, 또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것과 결부되는 능력입니다. 소설에 나오는 '나'는 사서가 발견했다는 '다른 모든 책의 암호 해독서이면서 완벽한 개론서'인 그 한 권의 책을 찾기 위해, 그 책에서 뻗어나온 무수한 곁가지를 빙글빙글 돌아야 했는데, 심지어 그렇게 했음에도 그 책을 찾지 못하고 인생을 허비했다고 말합니다. 여담인데, 전혀 다른 책을 읽다가 공교롭게도 「바벨의 도서관」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힌트를 얻었습니다. 부분이 전체를 닮은 프랙털 구조의 역사를 다루는 한 수학자의 책이었습니다. 프랙털은 브누아 망델브로라는 수학자가 발견한 기하학의 한 분야라고 합니다. 이 프랙털 구조는 부분이 전체를 닮고 전체가 또 부분을 닮은 자기유사성을 띤다고 합니다. 짐 홀트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괴델과 함께 걸을 때 - 사고의 첨단을 찾아 떠나는 여행오늘날 최고의 과학 작가이자 철학자인 짐 홀트가 쓴 과학과 수학, 그리고 철학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된 쟁점과 주제를 다룬 책이다. 특유의 명쾌함과 유머를 발휘하면서 저자는 양자역학의 불가사의, 수학의 토대에 관한 질문, 그리고 논리와 진리의 본질을 파헤친다.
자기유사성이 무슨 의미인지 알기 위해 집안일의 한 사례를 살펴보자. 콜리플라워(꽃양배추)가 좋겠다. 이 채소의 머리 모양을, 즉 그것이 작은 꽃들로 이루어진 방식을 관찰해보라. 이 작은 꽃들 중 하나를 떼어내보라. 어떤 모습처럼 보이는가? 그것은 콜리플라워의 작은 머리처럼 보이는, 역시 자신의 작은 꽃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제 다시 이 작은 꽃들 중 하나를 떼어내보라. 어떤 모습처럼 보이는가? 여전히 더 작은 콜리플라워다. 이 과정을 계속한다면⏤곧 확대경이 필요해질 테지만⏤더욱더 작은 조각들이 전부 제일 처음 나왔던 머리 모양을 닮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콜리플라워는 자기유사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각 부분이 전체를 닮았기 때문이다. 저마다 독특한 형태를 띠는 자기유사적 현상으로는 구름, 해안선, 번개, 은하단, 인체 속의 혈관계, 그리고 어쩌면 금융시장의 상승과 하강 패턴 등이 있다. 해안선을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매끄럽지 않고 더욱 꼬불꼬불한 형태로 보이는데, 각각의 꼬불꼬불한 구간은 더 작은 비슷하게 꼬불꼬불한 구간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것들을 기술해주는 도구가 바로 망델브로의 방법이다. 자기유사적 형태는 본디 삐둘빼둘한 까닭에 고전적인 수학은 이런 형태를 다루기에 부적절하다. 고대 그리스부터 지난 세기까지 수학의 방법들은 원과 같은 매끄러운 형태에 더 잘 맞았다. (원은 자기유사적이지 않음에 유의하라. 만약 원을 더 작은 구간들로 나누면, 각각의 구간은 거의 직선이 된다.)
아인슈타인이 괴델과 함께 걸을 때 - 사고의 첨단을 찾아 떠나는 여행 130-131쪽, 짐 홀트 지음, 노태복 옮김
각각의 진열실 중심에는 낮은 난간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통풍구가 있다. 그 어떤 육각형 진열실에도 위에 있는 층들과 아래에 있는 층들이 무한하게 보인다. 진열실들은 모두 동일하게 배치되어 있다. 각 진열실에는 스무 개의 책장이 있다. 두 면을 제외한 각 면마다 다섯 개씩의 책장들이 늘어서서 네 개의 면을 덮고 있다. 책장의 높이는 바닥에서 천장 높이와 같고, 보통 키의 사서보다 조금 큰 정도이다. 책장이 놓여 있지 않은 두 면들 중의 하나는 일종의 좁은 복도와 연결된다. 그 복도는 모두가 똑같은 형태와 크기를 가진 다른 진열실과 이어져 있다. 복도 좌우로 아주 작은 문간방이 두 개 있다. 하나는 선 채로 자는 방이고, 다른 하나는 생리적인 문제를 처리하는 방이다. 이 공간으로 나선 계단이 지나가며, 이 계단은 아득히 먼 곳으로 내려가거나 올라간다. 좁은 복도에는 거울 하나가 있는데, 그 거울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복제한다.
픽션들 98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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