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보르헤스 읽기] 『픽션들』 같이 읽어요

D-29
보르헤스는 초고를 남겼는지 궁금하네요.
나의 자상한 선구자는 우연과의 협력을 거부하지 않았어. 그는 타성적인 언어와 상상에 이끌려 약간 마구잡이로 그 불멸의 작품을 써 내려갔어….. 나의 이 고독한 놀이는 서로 정반대의 두 가지 법칙에 의해 지배되고 있어. 첫 번째 법칙은 내게 형식적이거나 심리적인 변수들을 시험해 보게 만들어 주고 있어. 두 번째 법칙은 원래 작품을 위해 그 변수들을 희생시키고,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런 희생을 합리화시켜 주지. .. 17세기 초에 [돈키호테]를 쓴다는 것은 일리가 있었고 반드시 필요했으며, 거의 숙명적인 작업이었지. 하지만, 20세기 초에는 그런 것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해. P.60-61 세르반테스의 작품과 피에르 메나르의 작품은 글자상으로는 하나도 다르지 않고 똑같다. 그러나 피에르 메나르의 작품은 세르반테스의 작품보다 거의 무한할 정도로 풍요롭다.(그를 비방하는 사람들은 더 ‘모호’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모호성은 풍요로움이다.) p.63
픽션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 대한 자신의 평론과 해석들. 또한 자신이 추구하는 상상의 돈키호테 다시 쓰기의 목적이나 형식을 메나르의 작품을 통해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에서도 보르헤스의 상상력 중심이 우연성이나 보편성 보다 우위에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듯 합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이런 궤변에 가까운 주장을 정말 현실에서 행동으로 옮기려는 사람은 표절 논란에 휩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삐에르 메나르가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돈키호테』의 발췌본을 쓰고도 그 독창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그 대상이 다름 아닌 『돈키호테』이기 때문입니다. 다들 알다시피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가 온전히 자신의 작품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시데 아메테 베넹헬리라는 이가 아랍어로 남긴 기록을 그저 자신이 스페인어로 번역한 결과가 『돈키호테』라고 밝히고 있습니다(이 또한 당시 기사도 소설의 클리셰적인 설정이라고 어디서 읽은 기억이 납니다). 그 발언의 진위 여부를 떠나서, 이미 『돈키호테』 자체도 '원전'으로서 지위가 애매모호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발췌본은 비교적 표절논란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보르헤스가 가상의 저자인 삐에르 메나르를 내세워서 일견 궤변에 가까운 주장을 설득력있게 전개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돈키호테』라는 작품의 특수한 '설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궤변과 논리적인 논변은 한끗 차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삐에르 메나르의 창조성이란 그 창조성이 받아들여지고 해석되는 현실의 맥락까지 포함합니다. 그래서 과거를 현재에 '다시 한번' 복권시키려는 기획은 단순히 과거의 모사인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반복, 즉 오래된 나사의 새로운 회전이 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면, 보르헤스는 삐에르 메나르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많이 다르다고 말합니다. 가장 먼저 작품의 길이가 다르고, 나아가 쓰여진 시기가 다를 뿐 아니라 결정적으로 저자와 그 국적이 다릅니다. 독서는 책의 내용만큼이나 저자와 그가 살았던 시대를 읽는 일이기도 한데요, 현재의 우리에게서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단적으로 페미니즘 리부트라고 불리우는 지금 시대에서 남성과 여성의 글은 달리 읽힙니다. 논쟁의 여지는 있겠지만, '작품은 작품 자체로만 읽혀져야 하며 좋은 작품은 누구에게나 좋은 작품'이라는 말은 더이상 통용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남성 주인공이 지나가는 여성 행인을 죽이는 묘사를 했다고 할 때, 작가의 성별이 남성인지 여성인지에 따라서 독자들은 그 독법이나 비판의 각도를 달리 하기도 하는 게 현실이니까요. 이 자체의 윤리와 옮고 그름에 관한 논쟁은 차치하고서라도 현장에서는 이런 독해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는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과거-현재-미래라는 선형적인 시간관에 근거한 일방통행의 영향 관계가 뒤집히기도 하는데요, 예를 들어 17세기 세르반테스가 쓴 『돈키호테』는 니체의 탄생을 예견하고 있지만, 20세기 삐에르 메나르가 쓴 『돈키호테』는 니체에게서 영향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식입니다. 도식적으로 표현하면 삐에르 메나르가 제시하는 문학에서 영향관계는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곧은 일직선 위에 순서대로 놓이지 않습니다. 과거-현재-미래는 삼각형을 이루면서 빙글빙글 순환하는 식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보르헤스는 「카프카와 그의 선구자들」이라는 짧은 산문에서 카프카가 과거의 어떤 작품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을지를 추측한 적 있습니다. 그러면서 제논의 역설, 중국 문학 선집에 실린 일각수 이야기 따위의 사례를 듭니다. 카프카에게서 키르케고르나 브라우닝의 영향을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진짜 보르헤스가 해당 산문에서 말하고자 했던 바는, 카프카의 작품으로 인해 앞서 열거한 작가들을 다시 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현재가 과거를 발굴하고 풍부하게 한 사례에 속합니다. 보르헤스는 이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실제로 모든 작가는 그들의 선구자를 창조한다." 이 내용을 깊게 알고 싶은 분들은 피에르 바야르의 『예상표절』을 보시면 됩니다. 내일은 쉬겠습니다. 저는 놀다 오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또 다른 심문들20세기 가장 중요한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논픽션 전집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4권은 1952년 발간된 <또 다른 심문들>을 1부로, 1975년에 발간된 <프롤로그 중의 프롤로그를 위한 몇 편의 프롤로그>를 2부로 구성해 담았다.
예상 표절 - 문학과 예술의 전통적 연대기를 전복하여 무한히 확장된 독서의 세계로 빠져들다<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으로 독서의 근간을 뒤흔든 피에르 바야르가 이번에는 문학과 예술의 가장 민감한 이슈인 ‘표절’의 개념을 전복시키는 주장을 펼친다. 이 책에서 문제 삼는 표절은 과거의 것을 후대에서 도용하는 전통적인 표절이 아니라, 미래의 작품이나 아이디어를 앞선 세대에서 도용하는 이른바 ‘예상 표절’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후대에 카프카가 글을 써내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선대의 그 글들 속에서 카프카적 특징을 감지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아예 그런 것이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로버트 브라우닝의 시 「두려움과 양심의 가책」이 카프카의 작품을 예언하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우리는 카프카를 읽음으로써 브라우닝의 시를 좀 더 정제된 시각으로 읽을 수 있고 완전히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브라우닝은 오늘날 우리가 읽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시를 읽었을 것이다. 비평 용어에서 '선구자'라는 용어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용어이지만, 논쟁이나 경쟁이라는 의미가 함축된 용어에서 탈피하여 정화시킬 필요가 있다. 실제로 모든 작가는 그들의 선구자를 창조한다. 이들은 미래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바꾸어가듯이 과거에 대한 우리의 관념도 수정한다. 이런 상호 관계 속에서 인간의 정체성과 복수성은 하등의 중요성도 갖지 못한다.
또 다른 심문들 185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정경원 외 옮김
또 다른 심문들20세기 가장 중요한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논픽션 전집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4권은 1952년 발간된 <또 다른 심문들>을 1부로, 1975년에 발간된 <프롤로그 중의 프롤로그를 위한 몇 편의 프롤로그>를 2부로 구성해 담았다.
메나르는 (아마 무의식적으로) 새로운 테크닉을 통해 그때까지 여전히 초보적이고 불완전했던 읽기라는 예술을 풍요하게 만들었다. 고의적인 시대 교란과, 잘못된 원저자 설정의 테크닉을 통해서 말이다. 이러한 무한적용과 테크닉은 우리로 하여금 마치 『오딧세이』가 『아에네이드』보다 후의 작품이고, 앙리 바슐리에 부인의 『켄타우로스의 정원』이 정말로 앙리 바슐리에 부인의 작품인 것처럼 여기도록 만든다. 이러한 테크닉은 가장 잔잔한 작품들조차 모험들로 가득 차도록 만든다. 『예수의 모방』이라는 책을 루이 페르디낭 셀린, 또는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으로 보는 것은 이러한 보잘것없는 정신적 낌새가 이룬 최대치의 혁신이 아닐까?
픽션들 88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저는 이 단편을 읽으면서는 계속 코딩과 프로그램 개발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조금 과장된 설명이긴 하지만 아주 크고 복잡한 코드로 이루어진 설계가 공개된 프로그램에서 좋은 코드 몇 몇 부분만을 따와 아주 간결하고 범용적인 프로그램을 만들어 배포한다면 그 제작자는 전자인가 후자인가 싶은 거죠. 심지어 개발자들 사이에서는 '바퀴를 다시 발명하지 마라'는 격언까지 존재합니다. 아주 잘 굴러가는 바퀴 외 많은 부품들이 여기 저기 있는데... 까지 생각한다면 표절과 가까워지니 되돌아와서... 다른 의미로는 장편을 멀리하고 단편을 제조하는 보르헤스의 마음이 더더욱 느껴지는 글이었는데, 원문은 어디가고 부분 발췌로만 유명한 문구들이 떠올랐습니다. 식당에 걸려있는 성경 문구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죽음과 죽어감]은 대부분 읽지 않았지만 모두들 상실을 경험할 때 떠올리곤 하는 다섯 단계, 당사자는 자아 실현을 해낸 사람을 두 사람, 가능성 있는 사람은 일곱 사람으로 생각했지만 누구나 자아실현을 생각하게 하는 매슬로우 이론의 날렵한 축약 등을 떠올리게 만들었습니다. (심지어 베토벤과 프로이트는 매슬로우가 생각하기에 결점은 있지만 연구에 인용할 수는 있는 정도로 구분!) 현대 인터넷에서는 이렇게 이야기 다시 축약해서 날렵하게 쓰기로 원작자 자리를 차지하는가 하면 더 '재미있게' 써서 원작자(소재 제공자?)는 존재하기나 하나 할 정도로 희미하게 만들어버리는 경우도 있어 더 흥미롭습니다. 어쩌면 과거 현재 미래 서로 간의 틈입이 옛날부터 전통적으로 언제나 있었다는걸 고증하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고보니 [출발 비디오 여행]과 함께 .. 일단 읽은 내용은 여기까지고, 이번 주말에 나머지 진도를 따라가봐야겠습니다. 다행히(?) [픽션들]을 1부와 2부로 나눠 읽어주셔서 따라가 볼만 하네요.
개인적으로 지금처럼 코딩붐이 일기 전에 전공 과제로 잠깐 공부한 적이 있는데요, 제 적성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다만 그 사고방식은 지금도 많이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인문 쪽에서는 논문 하나를 읽으려고 해도 저작권이니 뭐니 하면서 정보의 접근이 굉장히 제한돼 있는 반면에, 개발자 쪽에서는 깃헙 같은 플래폼이 있는 게 부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쪽도 제한된 정보가 있기는 할테지만, 기본적인 태도 자체가 '다 까놓고 같이 해보자'는 태도가 깔려 있는 것 같더라고요. 당장 출판 쪽은 번역만 해도 더 나은 번역을 시도하려고 해도 기존 판권이 소멸되지 않는 한 현실적이 제약이 많습니다. 책 쪽은 뭐든 느린 게 장점이자 단점 같습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원형의 폐허들~] 1부에서 눈에 익은 소설 형식으로 된 작품은 「원형의 폐허들」과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두 편입니다. 두 편 다 정말 흥미로운 작품인데 그중 첫번째를 다루게 되었습니다. 요약하면 이 단편 역시 돌고 돌아 자기 자신을 깨닫는 유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비교적 다른 작품에 비해 편안하게 읽었습니다. 하지만 첫 문장부터 비범하다고 느꼈습니다. 첫 문장은 '아무도 보지 못한' 사람이 배에서 내렸다고 말하고 있는데요, 그런데 이 소설의 화자만큼은 '그'라고 지칭하면서 '아무도 보지 못한 사람'을 쓰고 있습니다. 이 문장은 "아무도 보지 않은 곳에서 홀로 쓰러진 나무는 어떤 소리를 내었을까?" 하는 오래된 질문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분명 지금도 어디선가 홀로 나무들이 쓰러지는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데, 어쩐 일인지 우리는 쓰러진 나무를 보지 않아도 그런 사건이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압니다. 이 앎은 무엇일까요? 이 소설의 화자도 마찬가지여서, 목격되지 않고 사라져서 우리의 감각으로 포착되지 않았을 테지만 분명히 어디선가 한번쯤은 존재했을 현실을 지면 위에 재현하고(상상하고) 있습니다. 제가 가진 세 판본을 비교해보겠습니다.
⟨누구나 똑같은 마음을 가졌던⟩ 그날 밤 아무도 그가 배에서 내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 아무도 그의 대나무 배가 진흙 수렁 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그 과묵한 사람이 ⟨남쪽⟩에서 왔고, 그의 고국이 강 위쪽의 거친 산기슭에 자리잡은 셀 수 없이 많은 마을들 중의 하나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곳의 언어인 젠드는 그리스어에 오염되어 있지 않았고, 문둥병 또한 드물었다.
픽션들 90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그날 밤, 아무도 그가 배에서 내리는 것을 보지 못했고, 아무도 대나무로 만든 카누가 성스러운 진흙 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며칠 지나자 그 말없는 사람이 ‘남부’에서 왔고 그의 조국이 강의 상류에 위치한 험준한 산기슭에 자리 잡은 무수히 많은 마을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고국은 젠드어가 그리스어에 오염되지 않았으며, 도덕적 부패를 찾아보기 힘든 곳이었다.
픽션들 67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No one saw him slip from the boat in the unanimous night, no one saw the bamboo canoe as it sank into the sacred mud, and yet within days there was no one who did not know that the taciturn man had come there from the South, and that his homeland was one of those infinite villages that lie up­ river, on the violent flank of the mountain, where the language of the Zend is uncontaminated by Greek and where leprosy is uncommon.
픽션들 ⏤Andrew Hurley, Collected Fictions, pp. 92-93.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unanimous night'이 굉장히 인상적이네요. 정확히 무슨 뜻일지 뭐가 더 나은 해석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저 제 마음 나름으로 느끼고 받아들일 뿐. :)
그가 추구하고 있던 목표는 초자연적인 것이기는 했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한 명의 사람을 꿈꾸고 싶었다. 그는 아주 자세하고 완벽한 꿈을 꾸어 현실을 기만하고 싶었다.
픽션들 원형의 폐허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꿈이 투영된 것이라는 사실, 이것이야말로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치욕이고 혼란스러운 것이 아닌가!
픽션들 원형의 폐허,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안도감과 치욕감 그리고 두려움을 느끼면서, 그는 자기 역시 그를 꿈꾸고 있던 또 다른 사람의 환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픽션들 원형의 폐허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그가 추구하고 있던 목표는 초자연적인 것이기는 했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한 명의 사람을 꿈꾸고 싶었다. 그는 아주 자세하고 완벽한 꿈을 꾸어 현실을 기만하고 싶었다. P.68 처음에 꾼 꿈들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조금 지나자 꿈들은 논증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 . . . 그는 우주에 참여할 만한 그런 영혼을 찾고 있었다.p. 69 여러가지 형상의 이 신은 속세에서 자기 이름이 ‘불’이며, 바로 그 원형의 신전에서 사람들이 자기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고 숭배했으며, 남자가 꿈꾸었던 환영에게 마술적으로 생명을 불어넣어 ‘불’인 자신과 꿈꾸는 남자를 제외한 모든 창조물들이 그 환영을 뼈와 살로 이루어진 실제 사람이라고 믿게 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리고 새로 창조된 그 인간에게 제의를 가르친 다음, 강 아래에 피라미드들이 아직 남아 있는 부서진 다른 신전으로 보내 그 허물어진 신전에서도 자신을 찬양하는 목소리가 들리도록 하라고 꿈꾸는 사람에게 명령했다.p.73 불의 신을 모시던 신전의 페허는 불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는 자기 역시 그를 꿈꾸고 있던 또 다른 사람의 환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p.76
픽션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조로아스터교와 유일신에 대한 교묘한 혼합적 상상을 통해 신의 존재와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한 소설이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원형의 폐허들] 앞서 읽은 세 편의 단편과 달리 이 소설은 그냥 이야기를 쭉 따라 읽기 좋으리라 짐작합니다. 따라서 내용 자체보다는 이 소설을 빌미로 단편집 전반의 자기반영성에 대해서 말해보고 싶습니다. 용어를 사용하니 있어 보이는 척(?)하는 것 같아서 쑥스럽기도 한데요, 별 것은 아니고 앞서 세계전집시리즈 표지를 말하면서 에셔를 언급했던 내용과 유사합니다. 쓰는 이의 '쓺'이라는 행위가 작품 안에 포함돼 있다고 편하게 생각해도 좋을 듯합니다. 이런 자기 반영성은 다른 장르에서도 종종 등장하는데요, 일반적으로 서사에 몰입하는 것이 중요할 때에는 '굳이?' 하는 느낌을 줄 수 있고 오히려 몰입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지양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영화를 예로 들어볼게요. 일반적인 영화의 작중 인물은 카메라 렌즈를 똑바로 바라보지 않을 겁니다. 왜냐면 등장인물이 렌즈로 눈을 돌려서 카메라를 바라보게 되면 관객과 눈을 마주치게 되는 셈인데, 이때 관객은 갑자기 관객으로서 자신과 그 위치를 자각하고 몰입에서 깨어나기 때문입니다(「살인의 추억」의 마지막 장면에서 송강호 배우를 생각해보세요). 하지만 이 또한 일반론이어서 '각성' 자체, '미몽에서 깨어남'을 주제로 하는 경우에는 작중 인물이 이상할 정도로 카메라 렌즈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심지어는 관객에게 말을 걸기도 합니다(영화 「빅쇼트」를 보세요). 이 단편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비슷한 효과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꿈속에서 다른 인물의 형상을 빚는 '이방인'은 자신 또한 창조물의 하나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로써 독자는 이제껏 알아왔던 이야기의 세계 바깥에 하나의 레이어가 더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쑥 하고 내가 속해 있던 서사 공간을 빠져나오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런 경험이 보르헤스 소설집 전반에서 반복해서 나옵니다.
자기반영성. 결말에 이르러서는 소설이 시작했던 지점으로 돌아가는 느낌을 받는 경험이 재미있습니다. '원형의 폐허들'은 특히 쓸쓸하고 공허한 정서를 줍니다. 마치 아버지가 아들을 키우고 세상 속으로 보내는 것 같았고, 특히나 불과 자신만이 알고 있는 아들의 약점(?), 그리고 마지막에 자신도 아들과 다름없는 누군가의 꿈이었다는 내용이 쓸쓸한 느낌을 주었어요. 원형의 폐허들.. 이란 타버린 원형의 신전들을 일컫는 것 같은데.. 공간적 배경으로서도 특유의 정서를 주면서 동시에 폐허를 맴도는 유령같은 존재들을 떠올리게 하네요. unanimous night 이란 단어 계속 생각해 보게 되네요. 영문판 올려주시니 좋은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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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누워서 쓰는 서평
무라카미 하루키 -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앨리슨 벡델 - 펀 홈시무라 타카코 - 방랑소년 1저메이카 킨케이드 - 루시
🎁 여러분의 활발한 독서 생활을 응원하며 그믐이 선물을 드려요.
[인생책 5문 5답] , [싱글 챌린지] 완수자에게 선물을 드립니다
내셔널 갤러리 VS 메트로폴리탄
[도서 증정] 저자이자 도슨트인 유승연과 함께 읽는 <내셔널 갤러리에서 보낸 500일> [웅진지식북클럽] 1.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함께 읽어요
🎬영상과 독서를 함께 해요.
[NETFLIX와 백년의 고독 읽기] One Hundred Years of Solitude[IMF외환위기 다시 보기1] 영화 <국가부도의 날>을 보고 자유롭게 이야기 나누어요.영화 <로기완>을 기다리며 <로기완을 만났다> 함께 읽기"사랑의 이해" / 책 vs 드라마 / 다 좋습니다, 함께 이야기 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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