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보르헤스 읽기] 『픽션들』 같이 읽어요

D-29
저도 이 문장에 한참 머물렀어요.
1932년 판에서 순례의 대상이 주인공 자신이라는 사실은 알모타심을 찾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명석하게 정당화하고 있다. 1934년 판에서 이런 사실은 내가 앞서 말했던 얼토당토않은 신학으로 이끈다.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미르 바하두르 알리는 예술의 유혹 중에서 가장 천한 유혹, 즉 천재가 되고자 하는 유혹을 거스를 힘이 없는 사람이다.
픽션들 알모타심으로의 접근,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궁극의 대상을 찾다보니 결국 나였다더라... 라는 이야기는 조금 뻔해보여서, 1932년 보다는 1934년의 작품에 더 흥미가 갑니다만...... (역시 나의 취향은 고급이 아닌거였...ㅎㅎ) 없는 소설에 대한 평론이지만 비교하기위해 언급하는 각종 실제 작가나 평론가, 작품 덕분에 매우 있음직하게 느껴지네요. 허구와 사실의 비율이 매력적입니다.
이야기 자체는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 같은 오래된 라틴아메리카의 설화를 따라가는 듯합니다. 이 소설이 흥미로운 점은 그 형식 같습니다(사실 보르헤스의 모든 소설이 그렇지만). 앞서도 언급했지만, 보르헤스는 『알무타심에로의 접근』이라는 장편 소설에 대한 허구의 비평을 쓺으로써 「알모따심에로의 접근」이라는 자기 단편의 형식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돌고돌아 자기 자신이 된다는 얘기는 이 단편 소설에도 적용됩니다:)
처음 읽었을 때는 각주들이 보르헤스가 붙인 것인 줄 알고 꾸역꾸역 읽었습니다만, 다시 읽으니 대부분이 번역자주이고 '원주'는 따로 표기된 몇 개에 그친다는 걸 번역자님이 친절하게 일러줬다는 걸 보게 되었습니다. 너무 많고 친절한 각주가 아쉽다는 점에 공감합니다. 문장을 따라가는 데에 각주가 방해가 되는 것 같아요. 각주에 신경쓰지 않고 그런가보다... 하고 따라 읽으면 훨씬 몰입이 쉬웠습니다. 그건 그렇고, 설 연휴인데집을 떠나면서 '픽션들'을 (의도적으로) 안 가져와버렸네요. 번잡스런 길에서 읽고 싶지는 않았던 책이라..
처음 읽을 때는 각주를 무시하고 읽되, 나중에 다시 읽을 때 각주를 살펴보면서 읽는 것도 한 가지 방법 같습니다. 각주 중 어떤 내용은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어 보입니다!
굉장히 공감가는 이야기입니다. 당장은, 다시 읽을 여력이 없어서 각주는 읽지 않고 본론만 읽고 있습니다. 마치 즐거운 이야기와 농담을 듣는데 그걸 다시 열심히 설명하는걸 듣는 기분입니다. 마지막 각주의 역주에서는 이제 그만!이라는 기분이 들 정도였습니다. [~ 부분을 제외하고 다른 부분 역시 허구의 산물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제 그만! 너무 친절하십니다! ㅠㅠ. (어쩌면 이 당시에는 라틴아메리카의 문학 연구를 하는 대학원생들을 위해 펴내어진게 아닌가 의심스럽기도 하고. 한국에 나온 보르헤스 관련 책들을 보면 상당히 학구적인 마음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황병하 선생님의 번역이 94년도에 나온 것임을 감안하면, 정말 선구적인 작업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때론 놓치고 넘어갈 법한 대목도 다시 읽게 만들어주기는 합니다. 모든 번역은 자기 시대에 갇혀 있으니, 시대와 함께 읽는 게 옳은 독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시대의 한계 또한 하나의 텍스트라고 생각하고 같이 읽으려고 노력하고 있긴 합니다. 번역자에게 시대는 "아름다울 수 있도록 제한 받은 축복"이라는 말도 있고요. 다만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과거의 한계나 잘잘못, 오류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당장 현재의 관점에서 빨간펜을 긋고 삭제하기보다는 현재와 함께 나란히 펼쳐놓고 그 오류도 함께 공부해야겠지요.
"아름다울 수 있도록 제한 받은 축복"이란 말이 참 깊게 들너오네요. 좋습니다.
이것은 한 영혼이 다른 영혼들에게 남긴 미묘한 반영을 통해 하염없이 찾아가는 작업이다. P.45 알모타심은 하느님의 표상이 되고, 주인공이 거치는 세세한 여정은 일정 부분 영혼이 신비적 충만감으로 승화하는 과정으로 그려진다……이러한 진술들은 서로 상이한 인류에 맞게 자기자신을 주조하는 단 하나의 유일신이라는 개념을 암시하려고 한다. …또 다른 해석도 있다. 그 해석은 전능하신 분이 누군가를 찾고 있으며, 이 누군가 보다 우월한 누군가를 찾고 있고, 그렇게 시간의 끝까지, 아니, 끝없이 그 과정이 이어지거나, 아니면 이 모든 것이 아마도 주기적으로 순환할 것이라고 추측한다. P.47-48 시무르그는 그들 각자이며 동시에 모두라는 것을 깨닫는다. “지성이 인지할 수 있는 천국에서 모든 것은 모든 곳에 존재한다. 그 어떤 것이건 모든 것이다. 태양은 모든 별들이며, 각각의 별은 모든 별들이며 태양이다.” p.50 주석
픽션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구도자를 향한 희망과 과정 그리고 환원. 너도 나도 모두 부처라는 불교의 가르침이 생각나는 글이었습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알모따심에로의 접근] 마지막 각주에 이르면 『알무타심에로의 접근』이 다양한 영미 소설과 페르시아의 신비주의에 영향을 받았음이 드러납니다. '알모타심(Al-motásim)'이라는 이름은 아랍어로 '도움을 구하는 자'라는 의미가 밝혀지고, 바하두르 알리의 소설 속 법대생이 찾고 있던 대상이 그 자신이었음이 암시됩니다. 이 자체는 천일야화에 나올 법한 교훈적인 서사입니다. 고향을 떠나 먼 여정을 떠나지만 결국 깨달음을 얻고 돌아와서 자기가 딛고 섰던 자리를 파서 보물을 발견하는 유의 이야기 말입니다. 이 자체는 그다지 놀랍다고 할 수 없습니다만, 보르헤스의 허구적인 비평이 덧붙여지면서 이 단편이 형성되는 과정은 매우 놀랍습니다. 바로 이야기 안쪽의 자기 반영성이 이 단편을 구성하는 형식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액자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면, 『알무타심에로의 접근』이라는 장편 소설에 대한 비평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알모따심에로의 접근」이라는 제목이 보입니다. 허구의 장편 소설을 다룸으로써 그 자신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내용과 형식이 아름답게 맞물려 있는 것을 보여주는 탁월한 제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짧은 소설은 읽으면 읽을수록 생각이 확장되고 심오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보르헤스의 소설답게 묘한 느낌이 듭니다. 바하두르 알리의 소설을 평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 이야기는 '알무타심에로의 접근'이라는 소설이 판본을 거듭하며 변형되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소설 속의 이야기는 '찾는 대상이 자신'라는 것을 암시하는 '탐정소설'이라고 하네요. 갖은 모험을 통해 찾는 대상이 자신인 이야기. 찾음을 당하는 사람이 찾는 사람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신비주의 ... 법대생이 힌두인을 죽임으로서 순례를 시작한다는 점에서 죽은 힌두인이 자신이 찾고 있는 사람(알모타심)이라는 느낌도 받게 되네요. 이 소설의 내용은 50번 각주에 나오는 시 '새들의 대화'의 내용과 동일합니다. 새들이 찾고 있던 것들이 자신들이고, 자신들이 각기 한 사람이면서 또한 모두라는 것. 인도인이 쓴 소설이 이 시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작중 화자인 평론가가 말합니다. 하지만 보르헤스 스스로 이 소설을 쓸 때 그 시에서 시작한 것 아닌가 싶네요. 새들의 대화(아타르) --> 알모타심에로의 접근(인도인) --> 알모따심에로의 접근(보르헤스) 자신이 찾고 있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이야기. 죽은 영혼이 환생하여 미완성된 영혼을 구한다는 내용도 예전 책들(혹은 작가)이 이후 책들(이후 작가)에게 영향을 주거나 신비주의적으로는 환생시킨다는 은유로 읽혔습니다. 내용과 형식이 일치한다는 말씀 흥미로웠습니다. 역시 짧아도 밀도가 매우 높네요.
저는 이걸 읽으면서 앞의 단편과 함께 보르헤스란 사람이 굉장히 익살스럽고 재간을 부리는 사람이라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마 [불한당들의 세계사]를 다시 읽는다면 하하 호호 킄킄하며 읽을 준비를 할 것 같네요. 책을 구해 읽는 사람으로서 얻을 수 없는 책에 대한 괴로움과 고통, 그리고 딱히 구해도 읽지 않을 것 같다는 신포도성 등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정말 큭큭거렸던건 초판본이 없지만 판본 두 개를 비교한 부록을 가져다가 이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19장의 요약에서는 참 '쓸데없이 힘만 낭비'하지 않으려는 꿀만 먹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집니다. 어쩜 이렇게 얄미운데 재미있는 사람이 있는지. (그 사이 제임스 조이스에게도 꿀밤을 한 대 먹이고...)
화제로 지정된 대화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하루 늦었지만 올립니다! 20세기에 삐에르 메나르(피에르 메나르)는 17세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의 불완전한 발췌본과 같은 작품을 씁니다. 하지만 보르헤스는 삐에르 메나르의 작품이 매우 계획된 시대착오라는 점에서 독창적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보르헤스는 일견 궤변에 가까운 전복적인 문학관을 주장하고 있는데요,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불완전한(미완성의) 발췌본이라고 할지라도 그 저자가 다르고 그것이 읽혀지는 시대가 다르다면 독해도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셈입니다. 이는 한 작품에 고정불변한 가치가 있고 시대를 아우르는 의미가 있다는 생각과 배치됩니다. 그 가치와 의미라는 것도 한 작품이 읽혀지고 쓰여진 맥락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아이디어를 극단으로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보르헤스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갑니다. 과거가 현재나 미래에 일방향으로 영향을 미치는 선형적인 문학관을 정반대로 뒤집어서, 현재가 과거에 영향을 미친다는 늬앙스를 내비치기도 합니다.
메나르는 내게 『돈키호테』가 무엇보다도 재미있는 책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애국주의의 축배이며 문법적 오만함이고, 호화롭고 요란한 판본을 낼 기회일 뿐이다. 영광이란 것은 일종의 몰이해이며, 어쩌면 최악의 몰이해일지도 모른다.
픽션들 64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읽혀지는 시대가 다르다면 독해도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셈입니다. 이는 한 작품에 고정불변한 가치가 있고 시대를 아우르는 의미가 있다는 생각과 배치됩니다. 그 가치와 의미라는 것도 한 작품이 읽혀지고 쓰여진 맥락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아이디어를 극단으로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더 나아가 해석이나 이해의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번역도 시대에 따라 달라져야 된다고 생각됩니다. 쓰기의 문학 행위로써의 번역이 본 작품의 단어이면에 내포되는 감정이나 심리적 표현도 가능하다고 상상해 보면 번역도 좀 달라져야 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특히나 심리적 표현의 형용사나 부사의 사용에 많이 민감한 작가인 듯 해서요.
번역도 시대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현실에서는 그러기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시간과 노력이 엄청나게 드는 작업인 반면, 제대로 한다고 해도 누가 알아주기나 할까 싶은 일이기도 하니까요. 학자들도 연구에 더 매진하느라 선뜻 나서지 않는 분위기라고 알고 있습니다. 독자들 개인이 원서를 읽을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주장과 별개로 한국어로 된 좋은 번역서를 가지는 것은 학문적 토대로나 일반 독자들로서나 정말 중요한 일인데도 그에 대한 처우나 번역하는 환경이 좋지 못한 점은 늘 아쉽습니다. 번역가나 출판사의 선의나 희생에 가까운 노고에 기댈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기도 하죠. 그래도 한국에도 아직까지 좋은 번역가분들이 많이 계시는 것 같아요. 감히 제가 평가할 입장은 아니지만 황병하 선생님이나 송병선 선생님의 번역도 정말 좋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지적 활동은 결국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하나의 철학 이론은 처음에는 세상을 그럴듯하게 묘사한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 그것은 철학사의 한 장 - 만일 한 단락이나 하나의 고유 명사로 변하지 않는다면-으로만 남게 된다. 문학에서 이런 소멸 현상, 즉 적절성의 상실은 더욱 잘 알려져 있다. - p. 64
픽션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3.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아, 인간이 지닌 가능성이란 얼마나 무한한가! P.55 그가 쓰려고 했던 것은 [돈키호테] 그 자체였다. “나의 목표는 놀라움 그 자체야.“…”신학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증거-외부 세계, 하느님, 우연성, 보편적 형식들 같은-가 지향하는 최종점은 내가 공표한 소설보다 더 이전의 것도 아니고 더 일반적인 것도 아니냐,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철학자들은 자기 작업의 중간 단계들을 멋진 책으로 출판하는 반면에, 나는 그것들을 없애버리기로 결정했다는 거지.“ 실제로 수 년에 걸친 그의 작업을 증명해 줄 초고는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p.57
픽션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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