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보르헤스 읽기] 『픽션들』 같이 읽어요

D-29
화제로 지정된 대화
[서문] 서문은 각자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책에 들어가는 일종의 표지판 같은 것이기도 해서 주의깊게 읽을 만한 몇 가지 대목이 있습니다. 오늘은 표지 얘기를 조금 해보겠습니다. 민음사판에는 에셔의 유명한 그림인 ⟨그리는 손(drawing hands)⟩이 표지 삽화로 들어가 있습니다. 보르헤스 소설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훌륭한 표지 기획이 아닌가 합니다. 그림에서는 현실의 묘사 수준이 셔츠 커프스에서 펜끝으로 갈수록 정밀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셔츠의 커프스에서는 거친 실선으로 된 드로잉이 노골적으로 보이다가, 점점 손등을 타고 넘어가면서부터 작은 핏줄이 도드라지고 손의 명암도 세밀하게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사실적인 묘사는 펜끝을 향하면서 정점을 이룹니다. 그러다 다시 펜 끝에서 거친 실선이 나오면서 묘사의 세밀한 정도도 뚝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 순환 과정이 보르헤스의 소설을 읽는 과정을 멋지게 보여준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에셔의 그림을 자세히 보면 알겠지만, 관객은 그림의 사실적인 묘사에만 치중하는 게 아니라 그림의 경계가 어디인지 끊임없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림에서 서로를 그리는 두 개의 손은 직사각형 종이 바깥으로 약간 튀어나가 있습니다. 그런데 알다시피 이 전체가 그림입니다. 그렇다면 펜이 올려진 종이까지 그림이라는 말인데, 이때부터 관객은 진짜 종이의 경계, 그림을 담고 있는 액자의 범위가 어디인지 묻게 됩니다. 자연히 그림 내부에 몰렸던 시선은 바깥쪽으로, 그러니까 종이라는 형식과 그것을 이루는 질료 쪽으로 옮겨갑니다. 마찬가지로 보르헤스의 소설을 읽을 때도 '진짜 액자의 경계는 어디인가?', 그것을 자꾸 물어보면 도움이 되리라 짐작합니다. 먼저 이야기에 푹 빠지는 것이 중요하지만, 한번 다 읽은 다음에는 푹 빠진 경험에서 빠져나와서 '내가 무엇을 읽었는지' 되새겨보는 게 중요할 것 같습니다.
옛날에 제우크시스(Zeuxis)와 파라시오스(Parrahasios)라는 화가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 중 누가 더 사실적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느냐는 기술을 겨루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림이 지나치게 사실적이었기 때문에 새가 날아와 그림 속 포도를 따먹으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림의 완성도에 만족한 제우크시스는 한껏 가슴이 부풀어 “자, 이제 자네 차례일세.” 하고 파라시오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파라시오스가 벽에 걸린 그림에는 보자기가 덮여 있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제우크시스는 “보자기를 벗기게.” 하고 재촉했습니다. 그 순간 승부가 가려졌습니다. 왜냐하면 파라시오스는 벽 위에 ‘보자기 그림’을 그렸기 때문입니다.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 우치다 다쓰루의 혼을 담는 글쓰기 강의 ⟨가장 강한 메시지는 ‘자기 앞으로 온’ 메시지다⟩ 중, 우치다 다쓰루 지음, 김경원 옮김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 우치다 다쓰루의 혼을 담는 글쓰기 강의문학, 철학, 교육, 정치, 문화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며 비판적 지성을 보여주고 있는 일본의 대표적인 사상가 우치다 다쓰루가 정년퇴임을 앞두고 진행한 마지막 강의 ‘창조적 글쓰기’를 책으로 엮었다.
방대한 양의 책을 쓴다는 것은 쓸데없이 힘만 낭비하는 정신나간 짓이다. 단 몇 분에 걸쳐 말로 완벽하게 표현해 보일 수 있는 어떤 생각을 500여 페이지에 걸쳐 길게 늘어뜨리는 짓. 보다 나은 방법은 이미 그러한 생각들을 담고 있는 책들이 존재하고 있으니까 하나의 코멘트, 즉 그것들의 요약을 제시하는 척하는 것이다. (···) 보다 그럴 듯하고, 보다 무능력하고, 보다 게으르게도 나는 상상의 책 위에 씌어진 주석으로서의 글쓰기를 선호했다.
픽션들 16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이번 달은 정말 변명할 여지가 가득한, 너무나 바빠서 일 때문에 놀이가 손에 안 잡히는 나날이었습니다. 돈키호테의 저자까지 저번에 읽어놨는데도 댓글 하나 달기 힘들더군요. 읽고 나서 조금씩 달려고 했던게 벌써 얼마 안 남았네요. 저번에 이어 이야기해보면, 제가 가지고 있는 책은 1판 47쇄에 2015년 4월 7일에 나왔습니다. 아무래도 도서관에서 비슷한 시기에 전 권을 매입한 것 같은데, 같은 2015년임에도 쇄가 약 2배 가까이 차이가 납니다. 출판일은 1권이 나온 후 5일 후에 나왔다고 되어 있는데 이만큼이나 차이가 나는걸 보면 더 많은 사람을이 이 책을 사랑해줬나 봅니다. 서문의 단편 이야기는 꽤 재미있었습니다. [방대한 양의 책을 쓴다는 것은 쓸데없이 힘만 낭비하는 정신나간 짓이다.] 이 말을 하고 무사할 수 있는 다른 작가를 떠올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P
이 모임은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것에도 목적이 있지만, 나중에 보르헤스의 글을 읽는 데 더 도움을 줄 목적으로 개인적으로 만든 모입니다. 일종의 '보르헤스 아카이빙'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해요. 모임은 끝나도 기록이 남아 있을테니 시간에 구애하지 마시고 읽으셔도 될 것 같아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오래간만에 다시 읽었습니다. 몇 번 읽은 기억이 나지만 읽을 때마다 낯선 구석이 보이긴 합니다. 식상함을 무릅쓰고서라도 책읽기를 등산에 비유해보자면, 이전 산행에서 걸었던 걸음이 지금 산행에서 걸어야 할 걸음을 대신해주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이 복잡한 이야기를 매끄럽게 정리할 능력이 제게는 없습니다... 다만 읽고 느낀 점을 간단히 공유할 수는 있을 텐데, 제가 잘못 알고 있다거나 이상한 부분은 거리낌없이 지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단편은 총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앞부분에서는 '틀뢴'이라는 가상의 혹성을 발견하게 된 사연과 틀뢴의 특징이 자세하게 인용되고 있고, 뒷부분에서는 저자의 후기 형식으로 '틀뢴'이 탄생하게 된 배경과 현실에 끼치는 영향과 그 구체적인 사례를 조망하고 있습니다. 무수한 책이나 연도 같은 사실관계가 언급되고 있습니다만 그것들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것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그 각각을 하나씩 찾아보고 확인하는 것도 이 단편을 즐기는 한 가지 방법이 아닐까 합니다. 보르헤스가 서문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단편은 『틀뢴의 제1백과사전 제11권』라는 방대한 책의 작은 각주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초반에 나오는 비오이 까사레스는 소설가입니다. 엄청나게 흥미로운 소설을 많이 썼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참고하시길😃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라틴아메리카 문학에 남긴 업적의 상당수는 ‘비오르헤스Biorges’(비오이와 보르헤스)에게 그 공로가 돌아가야 한다고 재조명되는 오늘, 보르헤스의 오랜 문학적 동반자이자 20세기 환상문학 역사의 새 장을 연 선구자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의 단편선이다.
모렐의 발명보르헤스와 함께 중남미 환상 문학을 이끈 거장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의 대표작. 외로운 망명자인 '나'가 끊임없이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이상한 사람들'을 몰래 숨어서 지켜보다가, 놀라운 사실에 직면한다는 줄거리의 소설이다. 공상과학 소설, 추리 소설, 환상 소설의 측면을 동시에 지닌 흥미로운 작품.
죽음의 모범 - 보르헤스 가명 소설 모음집라틴 아메리카 문학을 대표하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와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가 가명의 소설가인 ‘오노리노 부스토스 도메크’를 내세워 만들어 낸 공동의 단편 소설 모음집이다. 전례를 찾기 어려운 새로운 형태의 문학 실험으로, 평단으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그날 밤 비오이 까사레스는 나와 저녁식사를 같이 했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일인칭 화자를 바탕으로 한 소설작법에 관해 긴 시간의 논쟁을 벌였었다. 이 화자는 사실을 생략하거나 흐트러뜨리고, 단지 몇 명의 독자들⏤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수의 독자들⏤에게만 경이로울 수도 있고, 하잘것없기도 한 현실을 간파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다양한 모순 속에 개입한다. 우리는 거울들이란 게 괴물스러운 어떤 무엇을 소지하고 있는 사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그토록 깊은 밤 그러한 깨달음은 매우 당연한 것이다). 그때 비오이 까사레스는 우크바르의 한 이교도 창시자가 거울과 성교는 사람의 수를 증식시키기 때문에 가증스러운 것이라고 했던 말을 기억해 냈다.
픽션들 18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그들의 책들 역시 우리의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들의 소설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변형을 포함한 단 하나의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
픽션들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산행 비유를 이어서 제대로 난 길이 없는 꼬불꼬불한 산길을 걷는 기분이었습니다. 게다가 울퉁불퉁한 돌이 많아서 걷다 자꾸 넘어지게 되는. 단편 하나를 읽는데 무척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내용이 심오하고 환상적이고 복잡하기도 하지만 문장이 난해하고 문장의 이음이 매끄럽지 않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검은색 바탕의 옛날 책을 가지고 있는데 더 최근에 번역된 책을 읽고 비교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각 분야의 전문가로 이루어진 어떤 집단의 사람들이 틀뢴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나라(혹성)을 만들어냈고 이를 백과사전으로 정리했다는 상상력이 재미있었습니다. 쉴새없이 끼어드는 인명과 지명 속에 헤매고 있자니 정지돈 작가님의 작품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틀뢴의 시간 관념.. 과거와 미래에 대한 이야기, 아홉개의 구리동전, 관념론과 <흐뢰니르>..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도 평행우주나 양자역학과 닿아있어 심오하게 여겨집니다. 완벽하게 이해되진 않았어요. 틀뢴의 환상적 세계와 지구의 현실적 세계가 조우하는 장면들이 제게는 가장 매력적으로 읽혔습니다. 특히 술집에서 죽은 청년이 가지고 있던 '아주 작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무겁기 그지없던 그 물체', 틀뢴의 몇몇 지방에서 신의 형상에 해당하는 그 물체가 인상적으로 남습니다. 두 번 읽고 세 번 읽으면 확실히 이해가 될 것 같으니 나중에 한가한 머리로 재독해 볼 생각입니다.
저도 양쪽 책을 번갈아 읽고 있습니다. 나쁘지 않은 듯합니다. 약간씩 느낌이 다르기도 하고 한쪽 번역본에서는 그냥 지나친 부분도 다른 번역본에서는 또 새로 보이고 그러네요. 즐거운 독서하시길:)
이걸 읽으며 꼭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대규모 언어 모델이 등장한 초기 그것과 대화를 나누다가 경험한 일인데요. '내가 모르는 흥미로운 사회과학책 다섯 권을 추천해줘'라고 물었더니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책들을 추천해줬습니다. 그리고 뒤이은 질문에 그 책의 저자와 그의 학파, 계파의 시조와 그의 제자들, 제자들간의 학문적 차이와 갈등, 논문들과 논문들에서 나온 발췌문들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몽땅 전혀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나중에 '환각'이라고 불리게 되는 효과인데 이제는 대부분 최대한 절제되어 언어 모델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듣기는 쉽지 않아졌습니다. 그런 기묘한 감각이 떠오르더군요. 다만 이 친구는 보르헤스의 책과는 달리 정말 대화를 할 수 있어서 더 실감나고 재미있었습니다. 최근의 생성 영상들을 보면, 세계가 틀륀이 되기 직전 짧은 시대를 살고 있는 기분이 듭니다. 그러나 직접 닥친 현재에서는 모든 언어가 사라지고 학자들이 거기에 다들 집착하기 보다는 (그러니까 다들 서지학적 광기에 물들어버린 세계보다는) 훨씬 개인의 경험 세계가 더 중요해지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가상 현실이 더 구현될수록 현실 현실이 훨씬 또렷하게 빛날 것처럼. (애초에 틀륀 세계가 아주 강렬한 경험주의적 세계관으로 가득 차 있다는게 그 아이러니가 아닐지.)
저도 업무 특성상 ChatGPT를 많이 활용합니다. 다만 ChatGPT는 그 능력이 개발자의 의도에 따라 제한돼 있고, 소위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그 리턴도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말하기가 조심스럽기는 합니다. ChatGPT 덕분에(?) 우리는 인간의 글과 인간의 글을 학습한 AI글이 뒤섞인 시대를 살아가게 될 것임은 자명해 보입니다. 이미 그렇게 되고 있기도 하고요!
"어느 그노시스 교도에 따르면 눈에 보이는 세계는 하나의 환영이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궤변이다. 거울과 부권은 가증스러운 것이다. 그것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증식시키고, 분명하게 그런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민음사, 13쪽
안녕하세요? 책에 대한 대화와 구분하고, 인용만 모아서 보고 싶은 분을 위해 [책 꽂기] 기능을 활용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틀뢴의 어느 학파는 시간을 부정하기도 한다. 현재란 확실하지 않고 일정하지 않으며, 미래는 현재의 희망과 같은 것을 제외하고는 실체가 없고, 과거는 실체가 없는 현재의 기억과 같은 것 같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다른 학파는 이미 ‘모든 시간’은 지나갔고, 우리의 삶은 돌이킬 수 없는 과정에 대한 어스레한 기억 혹은 반영이며, 그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왜곡되고 훼송되었다고 단정한다……… 그리고 또 어느 학파는 우리가 여기서 잠들어 있는 동안 우리는 또 다른 어떤 곳에서 깨어 있고, 그래서 모든 사람은 사실상 두 사람이라고 주장한다.p.25
윗글은 일직선상의 시간과 공간이 아닌 삶. 불확실한 현재만이 경험가능한 존재이고 기억과 희망으로 과거와 미래의 의미를 부여하는 시간개념인 듯 합니다. 상상의 행성 (관념의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경험적 관점을 기반을 두고 있지 않나 생각되는 학파의 의견과 또한 양자역학 세계의 다차원적 세상과 삶에 대한 또 다른 상상의 관념들의 표현들이 흥미로왔습니다.
이상할 정도로 물리학자들이 좋아하는 소설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물리학자들의 책을 읽다보면 심심찮게 『픽션들』의 한 구절이 인용돼 있으니까요. 분명 과학자들에게도 영감을 줄 만한 부분이 있기는 한가봅니다. 다만 소설의 특정 내용을 곧장 현대물리학의 이론과 연관짓는 것은 다른 문제이고, 달리 섬세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기 때문에 말을 아끼겠습니다... 어쨌든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혹성(틀뢴)에 있는 나라들은 본질적으로 관념적이다. 그들의 언어와 언어로부터 파생된 종교, 학문, 형이상학 등과 같은 그 모든 거들은 관념론을 전제하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 세계란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물체들의 집합이 아니다. 그들에게 있어 세계는 독립적인 행위들의 이질적 연속이다. 그것은 연속적이고, 시간적이지 공간적인 게 아니다.
픽션들 30쪽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현재> 틀뢴의 언어들과 방언들이 파생되어 나온 가상적 <우르스프라헤(원초적 언어)>에는 명사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부사적 기능을 가진 단음절 접미사(또는 접두사)에 의해 수식된 비인칭 동사들은 존재한다. ...중략... 북반구 언어들 ...중략... 에 있어 원초적 핵은 동사가 아니라 단음절 형용사이다. 명사는 형용사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진다.
픽션들 31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나는 이 혹성의 사람들이 우주를 공간이 아닌 연속적인 시간 속에서 발전하게 되는 정신적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었다. 스피노자는 소진되지 않는 우주의 신성을 확장과 사유의 성질에서 찾았다. 그러나 틀뢴에서는 그 누구도 확장이라는 공간성(단지 어떤 상태에서만 특별히 존재하는)과 사유(우주와 완벽한 동의어인)가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해, 그들은 시간 속에서 공간이 유지될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할 거라는 말이다. 지평선에서 솟아오르는 연기, 이어 들판에서의 불, 그리고 이어 그 화재를 불러일으킨 반쯤 끄다 만 담배꽁초에 대한 지각은 관념들의 연합을 가리키는 하나의 예로 간주된다. ...중략... 이러한 일원론 또는 절대관념론은 모든 과학을 무효화시킨다. 하나의 사실을 설명(또는 판단)한다는 것은 그것을 다른 사실과 결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틀뢴에 있어 그러한 연계는 주체의 후 상태로섯 그것은 전 상태(하나의 사실)에 영향을 미치거나, 그것을 조망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정신적 상태는 전혀 축약이 불가능하다. 단순히 그 정신적 상태에 이름을 부여하는 - 말하자면 그것을 분류하는- 것은 하나의 왜곡에 다름 아니다. 그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우리는 틀뢴에서는 과학, 심지어 유추의 행위까지도 존재하지 않음을 연역해 낼 수 있다.
픽션들 33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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