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에 쓰신 글입니다.
그럼에도, 현재 인지심리학자들의 말들과 크게 다르지 않네요..
에픽테토스가 말한 '외부와 내부 사이의 층'을 통해 외적 상황을 '인지' 하는 것 처럼,
'주관적인 인식'을 어떻게 해야할지를 한번 더 고민해보게 하는 문장이였습니다.
무소유
D-29
Adler
도우리
오늘까지 읽은 부분에서 인상적인 내용을 알려 주세요.
Adler
“ 나는 당신을 이해합니다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언론 자유에 속한다.
남이 나를, 또한 내가 남을 어떻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이해하고 싶을 뿐이지. 그래서 우리는 모두가 타인이다. ”
『무소유 - 양장본』 p.31, 법정스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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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ler
“ 누가 나를 추켜세운다고 해서 우쭐댈 것도 없고 헐뜯는다고 해서 화를 낼 일도 못된다.
그건 모두가 한쪽만을 보고 성급하게 판단한 오해이기 때문이다.
오해란 이해 이전의 상태 아닌가.
문제는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달린 것이다.
실상은 말밖에 있는 것이고 진리는 누가 뭐라 하건 흔들리지 않는다.
온전한 이해는 그 어떤 관념에서가 아니라 지혜의 눈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 이전에는 모두가 오해일 뿐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무슨 말씀, 그건 말짱 오해라니까. ”
『무소유 - 양장본』 p.33, 법정스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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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ler
우리는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저 이해하고 싶을 뿐이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그 행위 자체가 의미 있는 것 같습니다.
'오해란 이해 이전의 상태다.'
이해하려 노력하지만, 본질적으론 이해할 수 없으므로 필연적으로 오해를 하고,
그 오해의 과정이 반복되어야 비로소 조금씩 이해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읽었네요.
'우리는 모두 타인입니다.'
이해보다 오해가 앞서는 타인이므로
내가 남에게 비춰지는 모습보다,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라고 읽혀지네요.
Adler
바닷가의 조약돌을 그토록 둥글고 예쁘게 만든 것은 무쇠로 된 정이 아니라, 부드럽게 쓰다듬는 물결이다.
『무소유 - 양장본』 p.35, 법정스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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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우리
오늘까지 읽은 부분에서 인상적인 내용을 알려 주세요.
Adler
“ 인간의 일상 생활은 하나의 반복이다.
어제나 오늘이나 대개 비슷비슷한 일을 되풀이하면서 살고 있다.
여기에는 자기 성찰 같은 것은 거의 없고 다만 주어진 여건 속에 부침하면서 살아가는 범속한 일상인이 있을뿐이다.
(중략)
그래서 자기가 지닌 생생한 빛깔은 점점 퇴색되게 마련이다. ”
『무소유 - 양장본』 p.39, 법정스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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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ler
“ 사형수에게는 일분 일초가 생명 그 자체로 실감된다고 한다.
그에게는 내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오늘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에 살고 있으면서도 곧잘 다음날로 미루며 내일에 살려고 한다. ”
『무소유 - 양장본』 p.40, 법정스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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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ler
일상이 지겨운 사람들은 때로는 종점에서 자신의 생을 조명해 보는 일도 필요하다. 그것은 오로지 반복의 깊어짐을 위해서.
『무소유 - 양장본』 p.41, 법정스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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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ler
우리의 뇌는 반복적인 루틴에 에너지를 많이 쏟지 않게끔 진화해왔다 합니다.
생존을 위해, 새로운 환경의 변화에 민감해야했죠.
그래서 뇌는 일상적인것, 반복적인 것들은 자동으로 처리합니다.
그 결과 지겨움을 느끼고 권태가 찾아오게 된다고 하죠.
저자의 말처럼 우리는 범속한 일상인입니다.
대개 비슷비슷한 일을 되풀이하며 살아가죠.
그렇기에 우리는 지루함에 빠집니다.
화무십일홍이란 말은 흔히 권력의 부질없음을 뜻하는 말로 쓰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여러가지 각도에서 조명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학생에게는 '공부하는 고통은 잠깐' 이라고 읽혀질 것이고,
우리의 인생에 놓고 바라본다면, '우리의 삶은 잠깐' 이겠죠.
그렇기에 반복의 지루함에서 탈출할 방법은
우리의 삶이 붉은 꽃처럼 '잠깐' 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야겠네요.
'종점'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다가 올테니까요.
Adler
이런 생각도 해봤습니다.
신이 인간에게 유한한 수명을 준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한계성을 통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함이 아닐까?'
유한한 수명(한계성)이 주어지기 때문에, 영생이 아니기 때문에, 살아가는 동안 무언가를 이루고자 발악하는건 아닐까?
우리의 삶이 무한하다면, 과연 인류는 포식자의 정점에 오를 수 있었을지도 생각해볼만 하네요.
도우리
오늘까지 읽은 부분에서 인상적인 내용을 알려 주세요.
Adler
“ 법구경에는 이런 비유가 있다.
'녹은 쇠에서 생긴 것인데 점점 그 쇠를 먹는다.'
이와 같이 그 마음씨가 그늘지면 그 사람 자신이 녹슬고 만다는 뜻이다.
우리가 온전한 사람이 되려면 내 마음을 내가 쓸 줄 알아야한다. ”
『무소유 - 양장본』 p.95, 법정스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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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ler
비유가 좋아서 가져와 봤습니다.
녹은 쇠에서 생긴것인데, 점점 그 쇠를 먹는다.
복잡한 수식 없는 간단한 문장인데, 우리의 마음도 이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저번부터 계속 인지심리학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 것 같은데, 결국은 마음먹기(받아들이는 태도의 교정) 나름일테니까요.
도우리
오늘까지 읽은 부분에서 인상적인 내용을 알려 주세요.
Adler
“ 오늘날 우리들의 나날은 한마디로 표현해 소음이다. 주간지, 라디오, 텔레비전 등 대중 매체는 현대인들에게 획일적인 속물이 되어 달라고 몹 시도 보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입술에서도 언어를 가장한 소음이 지칠 줄 모르고 펑펑 쏟아져 나온다. 무책임한 말들이 제멋대로 범람하고 있다. ”
『무소유 - 양장본』 p.146, 법정스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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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ler
“ 외부의 소음으로 자기 내심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 현대인의 비극이다. 설사 행동반경이 달나라에까지 확대됐다 할지라도 구심을 잃은 행동은 하나의 충동에 불과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 소음에 너무 중독이 되었기 때문에 청각이 거의 마비상태라는 점이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소음의 궤짝 앞에서 떠날 줄 모르는 일상인들.
그것을 밑천으로 바보가 되어 가는 줄도 모르는 똑똑한 문명인들.
자기 언어와 사고를 빼앗긴 일상의 우리들은 도도히 흐르는 소음의 물결에 편승하여 어디론지 모르게 흘러가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주고받는 대화도 하나의 소음일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그 소음을 매개로 해서 새로운 소음을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
『무소유 - 양장본』 p.149, 법정스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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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ler
'선택의 역설'이란 용어가 있습니다.
소비자들에게 너무 많은 선택의 폭이 주어지면, 오히려 선택을 망설인다는 내용입니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현대인들에게 많은 정보를 빠르게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지나친 정보의 범람으로 이어져, 진실을 가리기 어려운 수준까지 이르렀죠.
저자께서 말씀하신 '소음의 궤짝' 이란 표현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자기' 언어를 빼앗긴 일상의 우리 라는 표현도 맞는 것 같구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예전에 들었던 팝송도 생각이 나더라구요.
The voice within 이란 곡인데
'When there's no one else, look inside yourself
Like your oldest friend, just trust the voice within
Then you'll find the strength that will guide your way
You'll learn to begin to trust the voice within, oh'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책을 읽어가면서 중요한건, 사색하고 내면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법을 배우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배워가야겠죠.
Adler
심리학자 아들러도 비슷한 내용을 말합니다.
'건전한 열등감이란 타인과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나와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다.'
중간에 참여할 수 없는 모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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