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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이 답이 되는 순간》발췌, 수정, 요약 내용입니다.
D-29
바닿늘모임지기의 말
바닿늘
우리가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는?
멸종한 생명을 전시하는 이유는 뭘까요? 우리가
공룡을 왜 연구할까요? 옛날에 살았던 짐승들이
라고 생각할 때는 몰라도 진화라는 걸 알고 부턴
그들과 우리 인간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을지가
궁금하잖아요. 그리고 생각할 게 또 하나 있죠.
그들이 왜 멸종했을까? 이걸 알고 반면교사 삼으
려는 거예요. '삼엽충은, 공룡은 왜 멸종했을까?'
그들의 멸종을 교훈 삼아 우리 호모사피엔스는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지속할 수 있을까를
따져보는거죠.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랑 같
아요.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과거의 찬란
함을 배우려는 게 아니거든요. 역사를 배우는 건
망한 역사를 배우는 거예요. 한나라, 로마, 고려,
통일신라, 조선 모두 다 망했어요.
'왜 망했지?' 그 망한 이유를 알고 '우리는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지속할 수 있을까?'의 답을 찾기 위해
역사를 배우는 거죠. 자연사도 마찬가지예요. 그들
이 왜 멸종했는지를 알아보고, 그렇다면 환경이 이
렇게 변할 텐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에 대한 답
을 찾기 위해서 자연사를 배우는 거죠. 인류라고 영
원히 존재하지는 못할 거예요. 다만 생명체가 평균
적으로 130만년쯤은 존재해야 하는데, 호모사피엔
스는 30만년밖에 안 됐어요. 그런데 지금 생물들이
멸종되는 속도가 워낙 빠르니까 '여섯 번째 대멸종'
위기라고 얘기해요. 지금까지 다섯 번의 대멸종이
지나갔고, 현재 여섯 번째 대멸종이 이뤄지는 중이
라는 거죠. 대멸종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 중 70
~95%가 사라지는 것인데, 그때마다 최상위 포식
자는 반드시 멸종했어요. 현재 지구에 있는 개체는
무게로만 따져보면 호모사피엔스가 가장 많죠.
지난 다섯 차례 대멸종을 보면 사람은 결코 여섯 번
째 대멸종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거예요. 자연사가
가르쳐준 진리예요. 과학자들은 여섯 번째 대멸종
이 짧으면 500년, 길면 1만 년 안에 완성될 것이라
고 말해요. 여섯 번째 대멸종이 이미 시작됐다면 인
류의 수명이 짧으면 500년, 길면 1만 년밖에 안 남
았어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500년은 짧고, 1만
년은 너무 긴데, 몇천 년은 되지 않겠어?' 이렇게들
생각했는데, 지금처럼 기후위기가 급격화 된다면
정말 500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고요. 10년 전에도 제가 기후위기를 얘기했지만,
지금과 달리 10년 전만 해도 약간은 여유가 있었
어요. 지금은 정말 급박함이 느껴질 정도로 빠르게
변하고 있어요. 지금 지구상에는 생물이 약 2,000
만 에서 1억 종 살고 있다고 알려져 있어요. 굉장히
많은 것 같지만 지금까지 지구에 등장했던 생물의
1%에 불과해요. 나머지 99%는 멸종했어요.
이렇듯, 자연의 역사란 결국 멸종의 역사를 의미
합니다. 사라져버린 것들의 역사라고나 할까요.
모든 생물은 결국 멸종해요. 3억 년 동안 고생대
바다를 지배했던 삼엽충도 멸종했고, 1억 5,000
만 년 동안 중생대 육상을 지배했던 공룡들도 소행
성 충돌 단 한방에 멸종했죠. 물론 공룡의 멸종에
대한 이론은 100가지가 넘지만요. '공룡' 하면 사
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 공룡은 왜 멸종했
느냐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은 멸종한 이유가 아니
라, 어떻게 살았는지를 궁금해 해야 하는 거잖아요.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도 혹시 멸종 되는 거 아닐까
를 걱정하는 대신, 어떻게 살아남을까를 같이 고민
하고 방법을 찾으면 좋겠죠.
바닿늘
바닿늘
자연현상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인간으로 살면서 자기 기준을 갖는다는 것은 필요
합니다. 자기 기준이 있어야 일관되게 살 확률이
커지고, 논리적 모순 없이 살기만 해도 다른 사람
한테 예측가능성을 주기 때문에 훨씬 더 믿을만한
사람이 될 수 있고, 사회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기도
수월합니다. 중요한 건, 이때 자기가 세워놓은 기준
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이 사실
을 알면 자기 기준에 따라서 살다가 뭔가 좀 이상하
면 '틀렸나?' 하고 바꿔 볼 수 있기 때문이죠.
인간의 문제는 오히려 답이 틀릴 수 있다는 것, 내
가 늘 옳은 건 아니라는 것, 나아가 본래 절대적으
로 옳거나 그른 것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
니다. 최대한 자기 기준을 만들어서 그 기준과 모순
없이 일관되게 살도록 노력하되 끊임없이 점검해
나가는 것이 최선 아닐까요?
마음이란 것은 정의가 잘 안 되는 단어라서 과학계
에서는 의식이라는 말을 더 많이 쓰는 편이죠. 아직
의식이 무엇인지 합의 된 정의가 없어서 뭔지 잘 모
르는 겁니다. 물론 의식이 있어서 나오는 현상은 있
죠. 의식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손도 움직이고, 고
통을 느끼기도 하는 것 같긴 해요. 하지만 그런 현
상을 일으키는 배후에 이 모두를 관장하는 좀더 고
차원적인 뭔가가 있는지에 대한 증거는 아직 없죠.
증거가 없을 때 과학에서는 그냥 모른다고 그래요.
제가 어디 가더라도 별로 겁이 없는 것이, 질문을
받았을 때 모르면 모른다고 하면 돼요. 모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거든요. 지금 과학도 모르는 게
많죠. 하지만 과학은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요. 과학이라는 학문이 역사적으로 다른 학문
과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무지를 공개적으로
인정한다는 거예요.
신의 섭리에서 과학의 질문으로
학문의 역사를 보면 서양의 근대과학이 1600년대
쯤에 탄생했다고 믿어지는데, 그전까지는 철학과
신학이 과학의 역할도 담당했어요. 오늘날 우리의
감각으로 신학은 주로 인간의 도덕과 삶에 관한 이
야기를 해야 할 것 같지만 그 당시 신학자들은 별을
이야기하고, 천문 현상과 기상현상을 이야기 했거
든요. 심지어 물질을 이루는 근원도 이야기했잖아
요. 누가 무엇을 묻든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성경
에 있어." 이렇게 말해야지 성경에도 답이 없는 게
있다고 하는 순간 이단이 되고 죽임을 당할수도 있
었어요. 반면 과학은 시작부터 명확하게 무지를 인
정해요. 그리고 객관적이고, 재현 가능한 물질적인
근거를 기반으로 얻은 증거로만 이야기하거든요.
그걸 일반화시킨게 귀납법이죠. 그렇게 해서 얻어
진 것만 가지고 이야기 하라는 건 그렇지 못한것에
대해서는 입 다물라는 뜻 이죠. 실제로 입을 다물
어요. 갈릴레오는 한 번도 인간의 도덕에 관해 책
을 쓴 적이 없고, 뉴턴도 예술에 대해서 이론을 만
든 적이 없고요. 자기가 진행한 실험을 통해 얻은
지식만 가지고 이야기하라는 뜻은, 잘 모르는 분야
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하라는 의미예요. 그래서
과학자들은 모르는 게 많아요. 제가 종종 이런 질
문을 받아요. "귀신은 있나요? 영혼은 있나요?"
그러면 답은 아주 쉽죠. "몰라요." 왜냐하면 없다는
것은 증명할 수 없거든요. 예를 들어 누군가 "유니
콘이 있나요? 없나요?"라고 물었을 때 "유니콘이
있겠어요? 없죠"라고 답하니 질문한 사람이 과학
적으로 증명해보라고 하면 어떻게 하죠?
지금부터 우주 전체를 샅샅이 찾아봤는데 유니콘이
없다, 여기도 없고, 저기도 없다. 그게 증명이에요.
그러니까 무(無) 존재의 증명은 모집단 전체를 샅샅
이, 시간 전체를 통틀어서 우주의 탄생부터 끝까지
다 확인 했는데도 없다는 것을 보여줘야만 증명인
거예요. 있다는 건 증명할 수 있어요. 보여주면 되
니까요. 그래서 과학은 있다는 것만 이야기해요.
없는 건 얘기 안 해요. 놀라운 건 법칙이 만들어지
면서 불가능해 보이던 것들까지도 이야기하기 시작
했다는 거예요. 에너지 보존 법칙이 있으니까 에너
지가 보존되지 않는 현상은 불가능 하다는 말을 하
죠.이런 예측 가능성이 생기게 된 거죠.
뭔가 좀 이상한 사람들?
이상한 건 특별하고 고유한 거래요!
제가 종종 하는 이야기지만 세상에 쉬운 일은 없는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 제가 체육을 못했거든요.
건강도 안 좋았고 체육 시간이 너무 싫었어요. 공을
가지고 하는 건 다 못해요. 그래서 축구나 야구를
잘하는 친구들이 정말 부러웠어요. 많은 분이 과학
이 어렵다고 하는데, 다른 것들은 쉬울까요? 절대
쉽지 않다고 생각해요. 대체 그런 편견이 어디서 왔
을까요? 자기와 다른 틀을 가지고 세상을 보는 사람
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언제
나 좋은 게 아닌가 싶어요. 저는 과학자로 오랫동안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항상 과학으로 세상을 보는
게 익숙했거든요. 아주 오만할 때도 있었죠. 대학
다닐때는 진짜 '이 세상 모든 진리는 결국 물리로
다 알아낼수 있을 텐데, 다른 건 왜 배우지?'
이렇게 생각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나중에 인문
학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인생관이 바뀌었죠.
인간은 과학의 틀 안에서 다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잖아요. 인간이 만들어낸 상상이 있고, 그것을
이해 하려면 과학보다 오히려 인간의 역사를 봐야
하고, 인간 언어의 한계를 이해해야 하고, 인간은
언어로만 얘기하는 것은 아니라서 예술도 알아야
하고... 뒤늦게 다른 것들을 공부하면서 '내가 정말
세상을 좁게 봤구나!' 이런 마음이 들더라고요.
인생의 목표
개인적으로는 언제나 그래왔지만 재밌게 살자는게
목표예요. 제가 어떻게 인생을 살아왔는지 돌아보
면 '재밌겠는데'라고 생각되면 선택했던 것 같거든
요. 물론 하기 싫지만 하는 것도 있죠. 먹고살아야
하니.. 지금도 '이걸 할까, 저걸 할까?' 고민될 때는
가급적 "이게 재밌겠다. 해보자" 하고 선택해요.
다들 "그거 왜 하냐?" 할 때도 "재밌으니까 하지."
이런 식으로 계속 선택을 했어요.
바닿늘
2023. 1. 27.
본문 발췌 후 덧붙였던 글.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알면 알 수록..
여러 퍼즐들이 머릿속에서
조립 되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소크라테스가
'필로소피(지혜에 대한 사랑)'
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는 스스로 모든 것을 안다고
자처하는 소피스트에 대하여
자신은 지혜의 소유자가 아닌
무지자로서 오직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의 좌우명도..
'나는 내가 무지하다는 걸 안다'
였다고 기록되어 있다죠.
해당 내용을 읽으면서..
두 가지 퍼즐이 옆에 붙었어요.
'메타인지'와 '과학적 사고'가
어쩌면 소크라테스로부터 시작
됐겠다는 추측을 해봤습니다.
이런 추측을 한 이유는..
아예 근거가 없는 건 아니고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책,
《질문이 답이 되는 순간》
김 상욱 교수님 파트 중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들은
물질에 대한 이론도, 인간의 도덕에
대한 이론도 만들고, 음악과 예술에
대해서도 다 이야기했지만..
당시의 기술로 과학 분야까지는
답하지 못한다는 것을 미리 알고,
처음부터 자신들의 연구 분야를
한정한 것으로 해석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신 중심의 세계관이 지배했던
시기였던만큼 당연하겠지요..)
물질적으로 실험할 수 있는
것만 다루면 답이 나오기에,
이렇게 연구하는 분야를
'과학'이라고 하자고 해서..
이런 배경으로 인해,
처음에는 과학이 철학의 한 분야
였다고 김 상욱 교수님은 말합니다.
알려져 있다시피,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사상에 일부
영향을 받은 제자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 빼고
모든 분야를 섭렵했을 정도로
엄청난 인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였습니다.
평소,
플라톤의 '철인정치'를
무진장 싫어하는데요..
그가 말한 철인
(지혜의 덕을 갖춘 자)이
'소크라테스'였다고 가정하면..
조금은 설득력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 조차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던 영역까지..
소크라테스는 경지에 올라있었던 거죠.
철학자 최진석 교수님이
동양의 노자를 '현대철학자'
라고 불려도 될 정도였다며
그에 대한 근거를 말하는데..
설득 됐던 기억이 납니다.
어쩌면 서양의 소크라테스
역시 지금에 와서 해석해본다면..
'현대철학자'라고 불려도 될 정도의
인물이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적다가 보니..
제가 마치 철학 전도사 같네요.;;
...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두 가지 퍼즐이 달라붙은 이유는..
지금껏 인류 역사에서 사람들의
사고체계를 크게 뒤바꿔버린
몇 번의 사건이 있다고 한다면..
저는 두 가지를 먼저 떠올립니다.
1. 지동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진 것.
2. 진화론이 정설로 받아들여진 것.
지구가 태양계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지동설과 생명이 어떻게 진화해왔는지를
설명하는 진화론은, 알아갈수록 흥미로운
주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직관적으로 납득이 되거든요.
메타인지는..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구분하는 능력입니다.
'자기객관화'능력 이라고
저는 평소에 생각합니다.
과학적 사고의 핵심은..
증명된 것만을 사실로
받아들인다는 겁니다.
다시 김 상욱 교수님의 파트를
조금 가져와서 예시를 적어볼게요.
Q : 세상은 뭘로 이루어졌지?
A : 원자로 되어 있지.
Q : 증거가 있나?
A : 증거가 있지. 이 증거에 의하면,
이건 곧 빨간색이 될거야.
(정말 빨간색이 됨)
같은 이유로 명확하게
증명되지 못한 것은..
"모른다"로 일관합니다.
...
위에도 적었듯이..
소크라테스의 좌우명은
'나는 내가 무지하다는 걸 안다'
였다고 합니다.
이 좌우명 자체가
메타인지인 셈이죠.
그리고..
그는 사람들이 질문을 통해 행동의
정당성과 결정에 책임을 지게 했고,
추론과 숙고하는 과정을 통해 입장을
명확하게 밝히도록 했다고 합니다.
과학적 사고를 키워 준 셈이죠.
이 두 가지 만으로도..
현대철학자라 불릴만 하지 않나요?
괜히 스티브 잡스가
이런 말을 한 게 아니겠지요.
"소크라테스와 점심을 먹을 수
있다면 애플이 가지고 있는 모든
기술을 포기할 수 있다."
오늘은 이쯤 적을게요.
적고 보니.. 저 꽤나;;
소크라테스에 진심이네요.
바닿늘
복잡한 신경회로, 도대체 그것들은
어디서 왔으며 어떤 특성을 가졌을까?
머릿속에서 특정 노래가 계속 반복재생 되는듯한
경험을 다들 한 번쯤은 한 적 있을 거예요. 정확한
답은 뇌과학자들도 잘 모르는데, 서양사람들은 그
것을 뇌 안쪽에 벌레가 돌아다닌다고 표현해요.
브레인웜이 돌아다녀서 계속 같은 노래가 떠오르
는 거라고 얘기하죠. 특정 노래를 강박적으로 되
풀이하는 경험을 전세계 인구의 90% 이상이 경
험해본 적 있다고 하니, 뇌의 보편적인 현상인 건
맞는 것 같아요. 그 노래를 되풀이함으로써 안정
감을 느끼려고 하는 것 같은데, 아직 원인은 잘 몰
라요. 특정 노래에 꽂혔다는 얘기는, 그 음악을 들
으면 도파민이 분비될 정도로 좋은 거예요. 원래
음악은 기쁨이자 보상이니까요. 그러니까 계속 듣
고 흥얼거리게 되는 거겠죠.
우리 뇌는 수천억 개의 신경 세포들이 서로 복잡
하게 가지를 뻗어서 연결돼 있고, 그러다가 좀더
자주 신호를 주고받고 함께 반응했던 세포들끼리
는 서로 가지가 연결되기도 하지만, 별로 상관없
는 것들끼리는 가지치기를 하는 방식으로 뇌가
서서히 성장과 변화를 겪거든요. 그게 뇌 가소성
이잖아요. 그러니, 복잡하게 뻗어 있는 가지들로
인해 어떤 생각들이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은 지
극히 자연스러운 거예요. 같은 자극에 대해서도
다른 반응이 만들어지는 것이 복잡한 신경 회로의
경이로움이죠. '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났을까?'
하고 억지로 그 의미를 찾으려고 애쓸 필요는 없
어요. 다만 평소 걱정하고 불안해했던 생각이 좀
더 자주 떠오를 가능성이 높긴 하겠죠. 굉장히 자
연스러운 일이에요. 어떤 영상이 떠오를 때 그것
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어요.
오히려 무작위적으로 생각이 떠오를 때 '어, 이런
방향으로 생각의 가지가 뻗어나가네!' 하면서 그
생각이 또 다른 생각으로 뻗어나가는 과정 자체
를 즐기시면 됩니다. 다만 기승전 다음에 늘 똑같
은 하나의 결론에 이른다면, 그때부터는 좀더 흥
미로운 대화가 가능하죠. 꿈이 현실에 대한 암시
라고 생각해서 '이게 아무 이유없이 꿈에 나타날
리 없어. 뭔가 의미가 있을거야.' 이렇게 믿었던
적도 있었어요. 그래서 실제로 맞으면 '예지몽',
틀리면 '역시 꿈은 반대'라고 해석하고요. 그런데
요즘 최신 수면 연구를 보면, 꿈이라는 건 논리적
개연성 없이 무작위적인 이야기구조를 가지고 있
으며, 그것이 꼭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거나 그 사
람의 무의식을 지배했다고 과도하게 해석할 필요
는 없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어요. 다만 내적 불안
을 시뮬레이션하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요.
'요즘 내 뇌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걸까?'
물론 어린이나 청소년도 깜빡깜빡 하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것은 청소년기의 특징이에요. 집중력이
다양한 곳으로 분산되어서 하나에 오래 집중하지
못해요. 그런데 성인이 깜빡깜빡하는 건 자연스러
운 노화로 인해 뇌 용량이 조금씩 줄어들어, 현재
에만 집중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세상을 하
나의 스포트라이트로 한 지점만 비추고 보는 거라
고나 할까요? 그런데 저도 마찬가지고, 누구나 겪
는 일이에요. 대화 중 주제를 벗어 나듯이요. 아까
말하던 꿈에 대해 마저 말하자면, 우리 꿈이 각별
한 의미가 있거나 예지력이 있는 건 아니니 지난
밤 꿈에 너무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 좋지 않은 꿈
을 꿨다고 불안해하거나 좋은 꿈을 꿨다고 너무
충동적으로 일을 벌이지는 말잔거죠. 좋은 꿈이
고백을, 로또를, 사업을 성사시켜주지는 않는다!
자발성, 인식의 확장을 위한 전제조건
현재 내 삶의 진폭이 이만큼인데, 더 많은 걸 경험
해서 그 진폭을 늘려보려는 노력은 할 수 있어요.
그러면 내 인식체계가 더 확장될 수 있잖아요. 그
런 맥락에서 삶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것
은 좋은 태도라고 할 수 있죠. 그렇지만 오로지 자
발적이어야 가능한 일이에요. 예를 들어, 아이들
이 싫어하는 음식이 있으면 부모가 억지로 그것만
계속 먹이는 교육을 하던 시절도 있었죠. 그런데
아이들이 채소를 싫어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채소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가진
독이 아이들의 입에는 쓰거든요. 어린 시절에는
미각이 발달해서 어른들이 느끼지 못하는 쓴맛을
느끼기 때문에 채소를 거부하는 거죠. 아이는 그
냥 써서 뱉었을 뿐인데 "너 지금 반항해?" 하면서
어른들이 자의적으로 해석할 때가 있어요.
인간에 대한 몰이해가 폭력적인 강요로 이어지고,
심지어 "다 너를 위해서야"라고 말하기도 해요.
그래서 인식체계를 확장하는 건 중요하지만 오로
지 자발적인 깨달음과 자발적인 노력이 전제되어
야 해요. 주위에서는 그 노력을 응원해주고 지켜
봐줘야 하고요. 예를 들면 당사자가 다른 사람과
만나 대화를 하거나 책을 통해 간접 경험을 하거
나, 여행을 하면서 더 넓은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
식으로 자발적 동기들을 키워야하는 거죠. 지난
100년간 뇌를 연구했던 많은 학자들은 뇌를 입
력에 대한 결과 값을 뱉어내는, 그러니까 자극에
반응하는 블랙박스쯤이라고 생각해왔어요. 안에
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모른 채 그랬죠. 그런
데 아주 작은 동물, 하다못해 쥐도 그렇게 행동하
지 않는 거예요. 거대한 뇌를 가진 동물들은 스스
로 질문하고 답을 찾도록 설계되어 있어요.
'이거 뭐지? 여긴 어디지?' 하다못해 물을 마셔도
'이 물 맛있네. 어디 거지?' 이렇게 자신이 의식하
지 못하는 순간에도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스스
로 답을 찾아요. 놀라운 건 그렇게 질문하고 답을
얻는 순간 기뻐한다는 거예요. 궁금했던 것에 해
답을 얻으면 우리 뇌에서는 도파민(쾌락)이 분비
돼요. 보상의 회로가 쾌락을 유발하는거죠.
"그거 알면 뭐가 좋아?" "그거 어디에 쓸모가 있
어?" 라고 물으면 사실 유익할 건 별로 없는데,
그냥 질문하고 답을 구하는 과정 자체가 우리 뇌
의 기능이고, 답을 얻으면 그 자체가 보상인 거예
요. 그것이 유익하거나 필요해서가 아니라요. 그
랬더니 어떤 일이 벌어졌냐면, 가만 놔둬도 돌아
다니며 탐색하고, 그렇게 세상에 대한 이해가 넓
어지니 어떤 사건에 대해 적절한 다음 행동을 취
할 수 있고, 그 이후의 상황도 예측하게 되었어요.
값을 입력한 후 출력값을 내라고 열심히 학습시키
지 않아도 질문하는 능력과 답을 얻었을 때의 기
쁨을 경험하게만 했더니 스스로 똑똑해지고, 세상
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게 된 거죠. 그렇게 세상을
더 알고 싶어서 안달난 동물이 바로 우리 인간들
이죠. 그리고 우리가 그걸 '호기심'이라고 정의했
어요. 그러니까 인간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고등
한 동물들은 호기심을 장착한 존재인 거예요.
그렇게 배운 것은 그냥 외운 것보다 뇌에 훨씬 더
오래 저장돼요. 궁금해하던 질문에 답을 얻으면
그것이 장기기억으로 저장될 가능성이 3배나 더
높아져요. 학습능력도 훨씬 좋아진다는 의미죠.
요즘 아이들에게 "학교생활 재밌어? 공부 재밌
어?" 하고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이 다 똑같아요.
"어떻게 공부가 재밌겠어요?" 도파민(쾌)이어야
할 공부가 요즘 아이들에겐 코르티솔(불쾌)과정
이 되어 버린 거죠. 요즘 아이들에게 "학교는 어
때?" 하고 물어보면 "학원보다는 나아요." 이렇
게 대답해요. 하지만 학교는 배우는 곳이고 배운
다는 것은 굉장히 재미있는 일이거든요. 우리는
모두 질문을 품고 살아가는 존재이니까요. 우리
도 스스로 세상에 질문을 던지고, "우리가 원하
는 대로 한번 세상을 살아보자!" 이럴 수 있거든
요. 결국 우리 삶을 얼마나 그런 경험들로 채우느
냐가 중요한 거죠. 우리가 인생 전체를 그렇게만
살 수 없다면, 일부 시간이라도 스스로 선택하고
그런 것들로 채워보면 좋을 것 같아요. 결국 삶이
얼마나 그런 경험들로 채우느냐에 따라 삶의 질
이 결정되고 행복과 만족감을 느끼게 되니까요.
이때 중요한 게 자발성이라는 걸 다시 한번 강조
하고 싶어요. 그래야 답도 찾고 그 과정도 즐기게
될 테니까요.
바닿늘
2023. 8. 25.
본문 발췌 후 덧붙인 글.
뇌과학 좋아하시나요??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뇌과학자를
꼽으라고 한다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정 재승 교수님을 꼽겠습니다.
(물론 다른 훌륭한 분들도,
많은 걸 익히 알고 있습니다만..
대중적인 기준에선 압도적으로
유명하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요즘 제 피드에서는
주로 세 가지를 다룹니다.
정치, 역사, 자연과학.
물론 구분하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죠.
하지만 따지고 보면..
둘 중 한 가지에 속할겁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
이 둘의 차이는
인간이 만든 것과
자연이 만든 것으로
구분할 수 있을겁니다.
(물론 단순화 했지만요..)
이런 식의 구분이라면..
자연과학이 압도적으로
더 거시적인 분야라고
볼 수 있겠지요.
아무리 과학이
발달했다지만,
자연의 모든 것을
설명하진 못했으니까요.
반면, 인문학은 과거에
쌓였던 데이터를 기반으로
지금도 계속 변화중입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제가 정 재승 교수님을
정말 좋아하는 이유는..
최 재천 교수님을
좋아하는 이유와 같습니다.
지혜를 사랑한다는 점에서요.
물론 방식의 차이는 있겠죠.
최 재천 교수님은
시인의 감성이 베이스지만,
생물학자 겸 생태학자로서 자연의
경이로움을 많은 이에게 본인만의
방식으로 알려주고 계시죠.
(최근 책에서도 다뤘듯이..)
정 재승 교수님은
물리학자 겸 뇌과학자로서,
정말 어렵사리 얻은 고차원적인
지식들을 많은 사람들이 조금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다양하게
노력을 하고 계신걸로 알고 있어요.
오늘은 정 재승 교수님에 대해
다루고 있으니, 더 이어 가자면..
정 재승 교수님은
주로 의사결정에 대해
여러 채널을 통해서
대중들과 소통해왔죠.
저는 늦게서야 알았지만..
1세대 과학자 중 단연
돋보이는 엘리트였다고
생각이 듭니다.
과학 대중서의
바이블이라 불릴만한..
<과학 콘서트>도 재미있게
읽었었고, <열 두 발자국>도
읽으려고 사 둔 상태입니다.
애정을 드러내다보니..
시간을 다 써버렸군요.
그래도 괜찮아요.
지금 저의 시간은..
과학의 대중화를 위해
힘 써온 두 분에 비한다면
매우 작은 수준일 테니까요.
중간에 참여할 수 없는 모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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