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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이 답이 되는 순간》발췌, 수정, 요약 내용입니다.
D-29
바닿늘모임지기의 말
바닿늘
우리가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는?
멸종한 생명을 전시하는 이유는 뭘까요? 우리가
공룡을 왜 연구할까요? 옛날에 살았던 짐승들이
라고 생각할 때는 몰라도 진화라는 걸 알고 부턴
그들과 우리 인간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을지가
궁금하잖아요. 그리고 생각할 게 또 하나 있죠.
그들이 왜 멸종했을까? 이걸 알고 반면교사 삼으
려는 거예요. '삼엽충은, 공룡은 왜 멸종했을까?'
그들의 멸종을 교훈 삼아 우리 호모사피엔스는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지속할 수 있을까를
따져보는거죠.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랑 같
아요.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과거의 찬란
함을 배우려는 게 아니거든요. 역사를 배우는 건
망한 역사를 배우는 거예요. 한나라, 로마, 고려,
통일신라, 조선 모두 다 망했어요.
'왜 망했지?' 그 망한 이유를 알고 '우리는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지속할 수 있을까?'의 답을 찾기 위해
역사를 배우는 거죠. 자연사도 마찬가지예요. 그들
이 왜 멸종했는지를 알아보고, 그렇다면 환경이 이
렇게 변할 텐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에 대한 답
을 찾기 위해서 자연사를 배우는 거죠. 인류라고 영
원히 존재하지는 못할 거예요. 다만 생명체가 평균
적으로 130만년쯤은 존재해야 하는데, 호모사피엔
스는 30만년밖에 안 됐어요. 그런데 지금 생물들이
멸종되는 속도가 워낙 빠르니까 '여섯 번째 대멸종'
위기라고 얘기해요. 지금까지 다섯 번의 대멸종이
지나갔고, 현재 여섯 번째 대멸종이 이뤄지는 중이
라는 거죠. 대멸종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 중 70
~95%가 사라지는 것인데, 그때마다 최상위 포식
자는 반드시 멸종했어요. 현재 지구에 있는 개체는
무게로만 따져보면 호모사피엔스가 가장 많죠.
지난 다섯 차례 대멸종을 보면 사람은 결코 여섯 번
째 대멸종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거예요. 자연사가
가르쳐준 진리예요. 과학자들은 여섯 번째 대멸종
이 짧으면 500년, 길면 1만 년 안에 완성될 것이라
고 말해요. 여섯 번째 대멸종이 이미 시작됐다면 인
류의 수명이 짧으면 500년, 길면 1만 년밖에 안 남
았어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500년은 짧고, 1만
년은 너무 긴데, 몇천 년은 되지 않겠어?' 이렇게들
생각했는데, 지금처럼 기후위기가 급격화 된다면
정말 500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고요. 10년 전에도 제가 기후위기를 얘기했지만,
지금과 달리 10년 전만 해도 약간은 여유가 있었
어요. 지금은 정말 급박함이 느껴질 정도로 빠르게
변하고 있어요. 지금 지구상에는 생물이 약 2,000
만 에서 1억 종 살고 있다고 알려져 있어요. 굉장히
많은 것 같지만 지금까지 지구에 등장했던 생물의
1%에 불과해요. 나머지 99%는 멸종했어요.
이렇듯, 자연의 역사란 결국 멸종의 역사를 의미
합니다. 사라져버린 것들의 역사라고나 할까요.
모든 생물은 결국 멸종해요. 3억 년 동안 고생대
바다를 지배했던 삼엽충도 멸종했고, 1억 5,000
만 년 동안 중생대 육상을 지배했던 공룡들도 소행
성 충돌 단 한방에 멸종했죠. 물론 공룡의 멸종에
대한 이론은 100가지가 넘지만요. '공룡' 하면 사
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 공룡은 왜 멸종했
느냐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은 멸종한 이유가 아니
라, 어떻게 살았는지를 궁금해 해야 하는 거잖아요.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도 혹시 멸종 되는 거 아닐까
를 걱정하는 대신, 어떻게 살아남을까를 같이 고민
하고 방법을 찾으면 좋겠죠.
바닿늘
바닿늘
자연현상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인간으로 살면서 자기 기준을 갖는다는 것은 필요
합니다. 자기 기준이 있어야 일관되게 살 확률이
커지고, 논리적 모순 없이 살기만 해도 다른 사람
한테 예측가능성을 주기 때문에 훨씬 더 믿을만한
사람이 될 수 있고, 사회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기도
수월합니다. 중요한 건, 이때 자기가 세워놓은 기준
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이 사실
을 알면 자기 기준에 따라서 살다가 뭔가 좀 이상하
면 '틀렸나?' 하고 바꿔 볼 수 있기 때문이죠.
인간의 문제는 오히려 답이 틀릴 수 있다는 것, 내
가 늘 옳은 건 아니라는 것, 나아가 본래 절대적으
로 옳거나 그른 것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
니다. 최대한 자기 기준을 만들어서 그 기준과 모순
없이 일관되게 살도록 노력하되 끊임없이 점검해
나가는 것이 최선 아닐까요?
마음이란 것은 정의가 잘 안 되는 단어라서 과학계
에서는 의식이라는 말을 더 많이 쓰는 편이죠. 아직
의식이 무엇인지 합의 된 정의가 없어서 뭔지 잘 모
르는 겁니다. 물론 의식이 있어서 나오는 현상은 있
죠. 의식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손도 움직이고, 고
통을 느끼기도 하는 것 같긴 해요. 하지만 그런 현
상을 일으키는 배후에 이 모두를 관장하는 좀더 고
차원적인 뭔가가 있는지에 대한 증거는 아직 없죠.
증거가 없을 때 과학에서는 그냥 모른다고 그래요.
제가 어디 가더라도 별로 겁이 없는 것이, 질문을
받았을 때 모르면 모른다고 하면 돼요. 모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거든요. 지금 과학도 모르는 게
많죠. 하지만 과학은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요. 과학이라는 학문이 역사적으로 다른 학문
과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무지를 공개적으로
인정한다는 거예요.
신의 섭리에서 과학의 질문으로
학문의 역사를 보면 서양의 근대과학이 1600년대
쯤에 탄생했다고 믿어지는데, 그전까지는 철학과
신학이 과학의 역할도 담당했어요. 오늘날 우리의
감각으로 신학은 주로 인간의 도덕과 삶에 관한 이
야기를 해야 할 것 같지만 그 당시 신학자들은 별을
이야기하고, 천문 현상과 기상현상을 이야기 했거
든요. 심지어 물질을 이루는 근원도 이야기했잖아
요. 누가 무엇을 묻든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성경
에 있어." 이렇게 말해야지 성경에도 답이 없는 게
있다고 하는 순간 이단이 되고 죽임을 당할수도 있
었어요. 반면 과학은 시작부터 명확하게 무지를 인
정해요. 그리고 객관적이고, 재현 가능한 물질적인
근거를 기반으로 얻은 증거로만 이야기하거든요.
그걸 일반화시킨게 귀납법이죠. 그렇게 해서 얻어
진 것만 가지고 이야기 하라는 건 그렇지 못한것에
대해서는 입 다물라는 뜻 이죠. 실제로 입을 다물
어요. 갈릴레오는 한 번도 인간의 도덕에 관해 책
을 쓴 적이 없고, 뉴턴도 예술에 대해서 이론을 만
든 적이 없고요. 자기가 진행한 실험을 통해 얻은
지식만 가지고 이야기하라는 뜻은, 잘 모르는 분야
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하라는 의미예요. 그래서
과학자들은 모르는 게 많아요. 제가 종종 이런 질
문을 받아요. "귀신은 있나요? 영혼은 있나요?"
그러면 답은 아주 쉽죠. "몰라요." 왜냐하면 없다는
것은 증명할 수 없거든요. 예를 들어 누군가 "유니
콘이 있나요? 없나요?"라고 물었을 때 "유니콘이
있겠어요? 없죠"라고 답하니 질문한 사람이 과학
적으로 증명해보라고 하면 어떻게 하죠?
지금부터 우주 전체를 샅샅이 찾아봤는데 유니콘이
없다, 여기도 없고, 저기도 없다. 그게 증명이에요.
그러니까 무(無) 존재의 증명은 모집단 전체를 샅샅
이, 시간 전체를 통틀어서 우주의 탄생부터 끝까지
다 확인 했는데도 없다는 것을 보여줘야만 증명인
거예요. 있다는 건 증명할 수 있어요. 보여주면 되
니까요. 그래서 과학은 있다는 것만 이야기해요.
없는 건 얘기 안 해요. 놀라운 건 법칙이 만들어지
면서 불가능해 보이던 것들까지도 이야기하기 시작
했다는 거예요. 에너지 보존 법칙이 있으니까 에너
지가 보존되지 않는 현상은 불가능 하다는 말을 하
죠.이런 예측 가능성이 생기게 된 거죠.
뭔가 좀 이상한 사람들?
이상한 건 특별하고 고유한 거래요!
제가 종종 하는 이야기지만 세상에 쉬운 일은 없는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 제가 체육을 못했거든요.
건강도 안 좋았고 체육 시간이 너무 싫었어요. 공을
가지고 하는 건 다 못해요. 그래서 축구나 야구를
잘하는 친구들이 정말 부러웠어요. 많은 분이 과학
이 어렵다고 하는데, 다른 것들은 쉬울까요? 절대
쉽지 않다고 생각해요. 대체 그런 편견이 어디서 왔
을까요? 자기와 다른 틀을 가지고 세상을 보는 사람
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언제
나 좋은 게 아닌가 싶어요. 저는 과학자로 오랫동안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항상 과학으로 세상을 보는
게 익숙했거든요. 아주 오만할 때도 있었죠. 대학
다닐때는 진짜 '이 세상 모든 진리는 결국 물리로
다 알아낼수 있을 텐데, 다른 건 왜 배우지?'
이렇게 생각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나중에 인문
학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인생관이 바뀌었죠.
인간은 과학의 틀 안에서 다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잖아요. 인간이 만들어낸 상상이 있고, 그것을
이해 하려면 과학보다 오히려 인간의 역사를 봐야
하고, 인간 언어의 한계를 이해해야 하고, 인간은
언어로만 얘기하는 것은 아니라서 예술도 알아야
하고... 뒤늦게 다른 것들을 공부하면서 '내가 정말
세상을 좁게 봤구나!' 이런 마음이 들더라고요.
인생의 목표
개인적으로는 언제나 그래왔지만 재밌게 살자는게
목표예요. 제가 어떻게 인생을 살아왔는지 돌아보
면 '재밌겠는데'라고 생각되면 선택했던 것 같거든
요. 물론 하기 싫지만 하는 것도 있죠. 먹고살아야
하니.. 지금도 '이걸 할까, 저걸 할까?' 고민될 때는
가급적 "이게 재밌겠다. 해보자" 하고 선택해요.
다들 "그거 왜 하냐?" 할 때도 "재밌으니까 하지."
이런 식으로 계속 선택을 했어요.
바닿늘
2023. 1. 27.
본문 발췌 후 덧붙였던 글.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알면 알 수록..
여러 퍼즐들이 머릿속에서
조립 되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소크라테스가
'필로소피(지혜에 대한 사랑)'
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는 스스로 모든 것을 안다고
자처하는 소피스트에 대하여
자신은 지혜의 소유자가 아닌
무지자로서 오직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의 좌우명도..
'나는 내가 무지하다는 걸 안다'
였다고 기록되어 있다죠.
해당 내용을 읽으면서..
두 가지 퍼즐이 옆에 붙었어요.
'메타인지'와 '과학적 사고'가
어쩌면 소크라테스로부터 시작
됐겠다는 추측을 해봤습니다.
이런 추측을 한 이유는..
아예 근거가 없는 건 아니고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책,
《질문이 답이 되는 순간》
김 상욱 교수님 파트 중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들은
물질에 대한 이론도, 인간의 도덕에
대한 이론도 만들고, 음악과 예술에
대해서도 다 이야기했지만..
당시의 기술로 과학 분야까지는
답하지 못한다는 것을 미리 알고,
처음부터 자신들의 연구 분야를
한정한 것으로 해석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신 중심의 세계관이 지배했던
시기였던만큼 당연하겠지요..)
물질적으로 실험할 수 있는
것만 다루면 답이 나오기에,
이렇게 연구하는 분야를
'과학'이라고 하자고 해서..
이런 배경으로 인해,
처음에는 과학이 철학의 한 분야
였다고 김 상욱 교수님은 말합니다.
알려져 있다시피,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사상에 일부
영향을 받은 제자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 빼고
모든 분야를 섭렵했을 정도로
엄청난 인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였습니다.
평소,
플라톤의 '철인정치'를
무진장 싫어하는데요..
그가 말한 철인
(지혜의 덕을 갖춘 자)이
'소크라테스'였다고 가정하면..
조금은 설득력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 조차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던 영역까지..
소크라테스는 경지에 올라있었던 거죠.
철학자 최진석 교수님이
동양의 노자를 '현대철학자'
라고 불려도 될 정도였다며
그에 대한 근거를 말하는데..
설득 됐던 기억이 납니다.
어쩌면 서양의 소크라테스
역시 지금에 와서 해석해본다면..
'현대철학자'라고 불려도 될 정도의
인물이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적다가 보니..
제가 마치 철학 전도사 같네요.;;
...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두 가지 퍼즐이 달라붙은 이유는..
지금껏 인류 역사에서 사람들의
사고체계를 크게 뒤바꿔버린
몇 번의 사건이 있다고 한다면..
저는 두 가지를 먼저 떠올립니다.
1. 지동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진 것.
2. 진화론이 정설로 받아들여진 것.
지구가 태양계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지동설과 생명이 어떻게 진화해왔는지를
설명하는 진화론은, 알아갈수록 흥미로운
주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직관적으로 납득이 되거든요.
메타인지는..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구분하는 능력입니다.
'자기객관화'능력 이라고
저는 평소에 생각합니다.
과학적 사고의 핵심은..
증명된 것만을 사실로
받아들인다는 겁니다.
다시 김 상욱 교수님의 파트를
조금 가져와서 예시를 적어볼게요.
Q : 세상은 뭘로 이루어졌지?
A : 원자로 되어 있지.
Q : 증거가 있나?
A : 증거가 있지. 이 증거에 의하면,
이건 곧 빨간색이 될거야.
(정말 빨간색이 됨)
같은 이유로 명확하게
증명되지 못한 것은..
"모른다"로 일관합니다.
...
위에도 적었듯이..
소크라테스의 좌우명은
'나는 내가 무지하다는 걸 안다'
였다고 합니다.
이 좌우명 자체가
메타인지인 셈이죠.
그리고..
그는 사람들이 질문을 통해 행동의
정당성과 결정에 책임을 지게 했고,
추론과 숙고하는 과정을 통해 입장을
명확하게 밝히도록 했다고 합니다.
과학적 사고를 키워 준 셈이죠.
이 두 가지 만으로도..
현대철학자라 불릴만 하지 않나요?
괜히 스티브 잡스가
이런 말을 한 게 아니겠지요.
"소크라테스와 점심을 먹을 수
있다면 애플이 가지고 있는 모든
기술을 포기할 수 있다."
오늘은 이쯤 적을게요.
적고 보니.. 저 꽤나;;
소크라테스에 진심이네요.
바닿늘
복잡한 신경회로, 도대체 그것들은
어디서 왔으며 어떤 특성을 가졌을까?
머릿속에서 특정 노래가 계속 반복재생 되는듯한
경험을 다들 한 번쯤은 한 적 있을 거예요. 정확한
답은 뇌과학자들도 잘 모르는데, 서양사람들은 그
것을 뇌 안쪽에 벌레가 돌아다닌다고 표현해요.
브레인웜이 돌아다녀서 계속 같은 노래가 떠오르
는 거라고 얘기하죠. 특정 노래를 강박적으로 되
풀이하는 경험을 전세계 인구의 90% 이상이 경
험해본 적 있다고 하니, 뇌의 보편적인 현상인 건
맞는 것 같아요. 그 노래를 되풀이함으로써 안정
감을 느끼려고 하는 것 같은데, 아직 원인은 잘 몰
라요. 특정 노래에 꽂혔다는 얘기는, 그 음악을 들
으면 도파민이 분비될 정도로 좋은 거예요. 원래
음악은 기쁨이자 보상이니까요. 그러니까 계속 듣
고 흥얼거리게 되는 거겠죠.
우리 뇌는 수천억 개의 신경 세포들이 서로 복잡
하게 가지를 뻗어서 연결돼 있고, 그러다가 좀더
자주 신호를 주고받고 함께 반응했던 세포들끼리
는 서로 가지가 연결되기도 하지만, 별로 상관없
는 것들끼리는 가지치기를 하는 방식으로 뇌가
서서히 성장과 변화를 겪거든요. 그게 뇌 가소성
이잖아요. 그러니, 복잡하게 뻗어 있는 가지들로
인해 어떤 생각들이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은 지
극히 자연스러운 거예요. 같은 자극에 대해서도
다른 반응이 만들어지는 것이 복잡한 신경 회로의
경이로움이죠. '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났을까?'
하고 억지로 그 의미를 찾으려고 애쓸 필요는 없
어요. 다만 평소 걱정하고 불안해했던 생각이 좀
더 자주 떠오를 가능성이 높긴 하겠죠. 굉장히 자
연스러운 일이에요. 어떤 영상이 떠오를 때 그것
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어요.
오히려 무작위적으로 생각이 떠오를 때 '어, 이런
방향으로 생각의 가지가 뻗어나가네!' 하면서 그
생각이 또 다른 생각으로 뻗어나가는 과정 자체
를 즐기시면 됩니다. 다만 기승전 다음에 늘 똑같
은 하나의 결론에 이른다면, 그때부터는 좀더 흥
미로운 대화가 가능하죠. 꿈이 현실에 대한 암시
라고 생각해서 '이게 아무 이유없이 꿈에 나타날
리 없어. 뭔가 의미가 있을거야.' 이렇게 믿었던
적도 있었어요. 그래서 실제로 맞으면 '예지몽',
틀리면 '역시 꿈은 반대'라고 해석하고요. 그런데
요즘 최신 수면 연구를 보면, 꿈이라는 건 논리적
개연성 없이 무작위적인 이야기구조를 가지고 있
으며, 그것이 꼭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거나 그 사
람의 무의식을 지배했다고 과도하게 해석할 필요
는 없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어요. 다만 내적 불안
을 시뮬레이션하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요.
'요즘 내 뇌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걸까?'
물론 어린이나 청소년도 깜빡깜빡 하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것은 청소년기의 특징이에요. 집중력이
다양한 곳으로 분산되어서 하나에 오래 집중하지
못해요. 그런데 성인이 깜빡깜빡하는 건 자연스러
운 노화로 인해 뇌 용량이 조금씩 줄어들어, 현재
에만 집중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세상을 하
나의 스포트라이트로 한 지점만 비추고 보는 거라
고나 할까요? 그런데 저도 마찬가지고, 누구나 겪
는 일이에요. 대화 중 주제를 벗어 나듯이요. 아까
말하던 꿈에 대해 마저 말하자면, 우리 꿈이 각별
한 의미가 있거나 예지력이 있는 건 아니니 지난
밤 꿈에 너무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 좋지 않은 꿈
을 꿨다고 불안해하거나 좋은 꿈을 꿨다고 너무
충동적으로 일을 벌이지는 말잔거죠. 좋은 꿈이
고백을, 로또를, 사업을 성사시켜주지는 않는다!
자발성, 인식의 확장을 위한 전제조건
현재 내 삶의 진폭이 이만큼인데, 더 많은 걸 경험
해서 그 진폭을 늘려보려는 노력은 할 수 있어요.
그러면 내 인식체계가 더 확장될 수 있잖아요. 그
런 맥락에서 삶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것
은 좋은 태도라고 할 수 있죠. 그렇지만 오로지 자
발적이어야 가능한 일이에요. 예를 들어, 아이들
이 싫어하는 음식이 있으면 부모가 억지로 그것만
계속 먹이는 교육을 하던 시절도 있었죠. 그런데
아이들이 채소를 싫어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채소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가진
독이 아이들의 입에는 쓰거든요. 어린 시절에는
미각이 발달해서 어른들이 느끼지 못하는 쓴맛을
느끼기 때문에 채소를 거부하는 거죠. 아이는 그
냥 써서 뱉었을 뿐인데 "너 지금 반항해?" 하면서
어른들이 자의적으로 해석할 때가 있어요.
인간에 대한 몰이해가 폭력적인 강요로 이어지고,
심지어 "다 너를 위해서야"라고 말하기도 해요.
그래서 인식체계를 확장하는 건 중요하지만 오로
지 자발적인 깨달음과 자발적인 노력이 전제되어
야 해요. 주위에서는 그 노력을 응원해주고 지켜
봐줘야 하고요. 예를 들면 당사자가 다른 사람과
만나 대화를 하거나 책을 통해 간접 경험을 하거
나, 여행을 하면서 더 넓은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
식으로 자발적 동기들을 키워야하는 거죠. 지난
100년간 뇌를 연구했던 많은 학자들은 뇌를 입
력에 대한 결과 값을 뱉어내는, 그러니까 자극에
반응하는 블랙박스쯤이라고 생각해왔어요. 안에
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모른 채 그랬죠. 그런
데 아주 작은 동물, 하다못해 쥐도 그렇게 행동하
지 않는 거예요. 거대한 뇌를 가진 동물들은 스스
로 질문하고 답을 찾도록 설계되어 있어요.
'이거 뭐지? 여긴 어디지?' 하다못해 물을 마셔도
'이 물 맛있네. 어디 거지?' 이렇게 자신이 의식하
지 못하는 순간에도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스스
로 답을 찾아요. 놀라운 건 그렇게 질문하고 답을
얻는 순간 기뻐한다는 거예요. 궁금했던 것에 해
답을 얻으면 우리 뇌에서는 도파민(쾌락)이 분비
돼요. 보상의 회로가 쾌락을 유발하는거죠.
"그거 알면 뭐가 좋아?" "그거 어디에 쓸모가 있
어?" 라고 물으면 사실 유익할 건 별로 없는데,
그냥 질문하고 답을 구하는 과정 자체가 우리 뇌
의 기능이고, 답을 얻으면 그 자체가 보상인 거예
요. 그것이 유익하거나 필요해서가 아니라요. 그
랬더니 어떤 일이 벌어졌냐면, 가만 놔둬도 돌아
다니며 탐색하고, 그렇게 세상에 대한 이해가 넓
어지니 어떤 사건에 대해 적절한 다음 행동을 취
할 수 있고, 그 이후의 상황도 예측하게 되었어요.
값을 입력한 후 출력값을 내라고 열심히 학습시키
지 않아도 질문하는 능력과 답을 얻었을 때의 기
쁨을 경험하게만 했더니 스스로 똑똑해지고, 세상
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게 된 거죠. 그렇게 세상을
더 알고 싶어서 안달난 동물이 바로 우리 인간들
이죠. 그리고 우리가 그걸 '호기심'이라고 정의했
어요. 그러니까 인간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고등
한 동물들은 호기심을 장착한 존재인 거예요.
그렇게 배운 것은 그냥 외운 것보다 뇌에 훨씬 더
오래 저장돼요. 궁금해하던 질문에 답을 얻으면
그것이 장기기억으로 저장될 가능성이 3배나 더
높아져요. 학습능력도 훨씬 좋아진다는 의미죠.
요즘 아이들에게 "학교생활 재밌어? 공부 재밌
어?" 하고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이 다 똑같아요.
"어떻게 공부가 재밌겠어요?" 도파민(쾌)이어야
할 공부가 요즘 아이들에겐 코르티솔(불쾌)과정
이 되어 버린 거죠. 요즘 아이들에게 "학교는 어
때?" 하고 물어보면 "학원보다는 나아요." 이렇
게 대답해요. 하지만 학교는 배우는 곳이고 배운
다는 것은 굉장히 재미있는 일이거든요. 우리는
모두 질문을 품고 살아가는 존재이니까요. 우리
도 스스로 세상에 질문을 던지고, "우리가 원하
는 대로 한번 세상을 살아보자!" 이럴 수 있거든
요. 결국 우리 삶을 얼마나 그런 경험들로 채우느
냐가 중요한 거죠. 우리가 인생 전체를 그렇게만
살 수 없다면, 일부 시간이라도 스스로 선택하고
그런 것들로 채워보면 좋을 것 같아요. 결국 삶이
얼마나 그런 경험들로 채우느냐에 따라 삶의 질
이 결정되고 행복과 만족감을 느끼게 되니까요.
이때 중요한 게 자발성이라는 걸 다시 한번 강조
하고 싶어요. 그래야 답도 찾고 그 과정도 즐기게
될 테니까요.
바닿늘
2023. 8. 25.
본문 발췌 후 덧붙인 글.
뇌과학 좋아하시나요??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뇌과학자를
꼽으라고 한다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정 재승 교수님을 꼽겠습니다.
(물론 다른 훌륭한 분들도,
많은 걸 익히 알고 있습니다만..
대중적인 기준에선 압도적으로
유명하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요즘 제 피드에서는
주로 세 가지를 다룹니다.
정치, 역사, 자연과학.
물론 구분하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죠.
하지만 따지고 보면..
둘 중 한 가지에 속할겁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
이 둘의 차이는
인간이 만든 것과
자연이 만든 것으로
구분할 수 있을겁니다.
(물론 단순화 했지만요..)
이런 식의 구분이라면..
자연과학이 압도적으로
더 거시적인 분야라고
볼 수 있겠지요.
아무리 과학이
발달했다지만,
자연의 모든 것을
설명하진 못했으니까요.
반면, 인문학은 과거에
쌓였던 데이터를 기반으로
지금도 계속 변화중입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제가 정 재승 교수님을
정말 좋아하는 이유는..
최 재천 교수님을
좋아하는 이유와 같습니다.
지혜를 사랑한다는 점에서요.
물론 방식의 차이는 있겠죠.
최 재천 교수님은
시인의 감성이 베이스지만,
생물학자 겸 생태학자로서 자연의
경이로움을 많은 이에게 본인만의
방식으로 알려주고 계시죠.
(최근 책에서도 다뤘듯이..)
정 재승 교수님은
물리학자 겸 뇌과학자로서,
정말 어렵사리 얻은 고차원적인
지식들을 많은 사람들이 조금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다양하게
노력을 하고 계신걸로 알고 있어요.
오늘은 정 재승 교수님에 대해
다루고 있으니, 더 이어 가자면..
정 재승 교수님은
주로 의사결정에 대해
여러 채널을 통해서
대중들과 소통해왔죠.
저는 늦게서야 알았지만..
1세대 과학자 중 단연
돋보이는 엘리트였다고
생각이 듭니다.
과학 대중서의
바이블이라 불릴만한..
<과학 콘서트>도 재미있게
읽었었고, <열 두 발자국>도
읽으려고 사 둔 상태입니다.
애정을 드러내다보니..
시간을 다 써버렸군요.
그래도 괜찮아요.
지금 저의 시간은..
과학의 대중화를 위해
힘 써온 두 분에 비한다면
매우 작은 수준일 테니까요.
바닿늘
새로운 삶의 시스템을 경험해볼 수 있는 시점
신 영복 선생님의 그림 중,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말을 타고 가다가 잠시 서 있는 그림이 있습니다.
저는 그 그림이 의미하는 것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새겨야 할 가르침이 아닌가 싶어요. 코로나, 기후
위기도, 지구 전체가 어쩌면 너나 할것 없이 도로
를 뚫고 달려온 시간의 연속이지 않았나 싶어요.
그 과정에서 자연도 파괴되고, 사람의 관계도 효
율과 손익만 따지면서 각박해지고, 오직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 목표가 되었잖아요. 코로나로 인하여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멈춰야 하고, 떨어져 있어야
하고, 쉬어야 하는 이 시간이 바로 도로를 달려온
우리의 삶을 성찰하고 숲을 걷는 삶으로 전환하라
는 요구가 아닐까 싶은거죠. 그런 면에서만 보면
이번 계기가 새로운 삶의 시스템을 경험해볼 수
있는 좋은 시점 같기도 합니다.
'나의 생존'이 유일한 목표인 자본주의 세계
누구도 배제하거나 소외시키지 않고 모두를 위한
정책으로 사람들의 두려움을 상쇄시켜줘야 할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잘 안 될까요? 사회과학적으로
얘기하자면 자본주의 시스템이 가진 축적의 논리,
신영복 선생님의 표현으로는 이른바 '존재론적 세
계관'이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상황 때문이겠죠.
국가면 국가, 기업이면 기업, 단체면 단체, 그리고
개인에 이르기까지 자기 몸집을 불리고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가 된 거죠. 그래서
지금의 우리는 생존과 승리에 대한 강박관념이 있
습니다. 그런 존재론적 세계관을 가지면 '나'라는
존재의 덩치를 끊임없이 키워야 하잖아요. 하지만
아무리 키워도 나보다 큰 사람이 나타나면 분명히
열패감이나 회의감,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고, 반
대로 나보다 작은 사람에게는 우월감을 느끼기에
이 두 가지가 반복되면 행복해지기는 힘들어요.
그래서 신영복 선생님이 제안하신 것이 '관계론'
입니다. 중요한 건 존재가 아니라 관계라는 거죠.
인간은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라는
사람은 가족, 친구, 동료 등 수많은 관계 속에 존
재하는 것이지, 나라는 개인이 홀로 있을 수는 없
거든요. 우리가 지금껏 살아온 도로의 삶을 어떻
게 성찰하고, 새롭게 바꿔나갈 것인가 하는 면에
서 신영복 선생님의 관계론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신영복 선생님은 우리에게 동양고전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고 시서화에 능한 인문주의자
로 알려져 있지만 본래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분석
하고 규명하는 정치경제학자였어요. 신영복 선생
님이 1989년 성공회대에서 강의를 시작한 이래
맡았던 과목들이 정치경제학과 한국사상사, 고전
강독이었는데, 그 이유는 아마 인간에 대한 너른
이해 없이 메마른 사회과학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믿음 때문이었을 겁니다. 인간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구조를 인식한 이가 진정한 변화를 도모
하기 위해 필요한 연장이 인문정신에 있다고 보신
거죠.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나 국가도 마찬가지입
니다. 국가 역시 수많은 관계 속에서 존재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어떻게 지금의 존재론적 세계
관에서 벗어나 관계 속에서 공존하는 관계 중심의
존재로 성장할 수 있느냐 하는 게 신영복 선생님
사상의 핵심이에요. 하지만 우리는 이미 수십 년,
수백 년을 그렇게 살아 왔으니까 경쟁에서 뒤처지
면 안된다는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경쟁에서 탈락하면 죽을 것 같기에, 내가 이겨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죠.
청년세대 문제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현재의 청년
세대가 가진 가장 중요한 이념이라면 '살아남기'
즉 생존주의인데, 그 이면에는 내가 생존하지 못
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들이 말하는 생존의 개념은 그렇게 거창한 게 아
니에요. 이 체제가 매번 경쟁을 시키잖아요. 이를
테면 2년에 한 번씩 심사해서 정규직 전환을 검토
하는 사회 시스템에서 밀려나지 않고 살아남는게
생존이에요 참 안타까운 일이죠. 이 문제를 해결
할 방법은 어쩌면 그리 어렵지 않을지도 몰라요.
'내가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국가가 나를 살려줄
것이다.' '이 사회가, 이 공동체가 나를 살려줄 것
이다.' 그냥 이런 믿음이면 될지도 몰라요. 구체
적으로 어떤 정책이 필요한지는 잘 모르겠어요.
다만 그것들은 국가와 사회, 기성세대가 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해요. 기본은 그런 데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게 되겠어?" 이런 생각만큼 나쁜게 없어요.
나때 안 되면 내 후대에 될 수도 있으니까요.
자본주의의 한가운데를 걸어가고 있는 우리가 신
영복 선생님이 말씀하신 그런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요? 결코 쉬운 일은 아닐겁니다. 하지만 미
리 절망할 필요는 없어요. 소위 군사독재 시절을
지날 때 누구도 이 사회가 지금처럼 바뀔 거라는
생각을 쉽게 못 했잖아요. 긴 일제강점기를 거쳐
독립을 할 때도 그랬겠죠. 갑자기 대단한 사람이
나타나서 뭘 한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지극히 평
범한 사람들이 나서서 조금씩 바꿔 왔었죠. 물론
그래도 '과연 그렇게 될까?'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바로 이런 식의 사고가 지금 부와 권력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 원하는 바일 수도 있어요.
변화라는 건 원래 한번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고
알게 모르게 조금씩 이루어지는 거예요.
잘 살펴보면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회규
범도 많이 바뀌어온걸 알 수 있어요. 불과 20~30
년 전만해도 아무데서나 담배 피우고 아무렇게나
쓰레기 버리고 살았잖아요. 심지어 비행기나 버스
안에서도 담배를 피웠죠.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일
이지만 택시 안에도 재떨이가 있었으니까요. 그러
다 어느 순간 규범이 바뀌어 있는 걸 느끼게 되죠.
처음에는 작게나마 금연석이 생기고, 흡연실이 생
기고, 그러다가 그러한 규범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니까 이제는 제도로까지 자리잡은 거고. 그
런 변화가 언제 어떻게 올지 아무도 모르는 거죠.
그러니 '뭐가 되겠어?' 이런 생각만큼 나쁜게 없
어요. 나 때 안 되면 후대에 될 수 있는 거니까요.
인간이 관계적 존재라는 건 우리가 다 알지만, 자
꾸 잊어요. 그래서 나부터 생각하게 되고, 어떻게
하면 경쟁에서 이기고, 더 커지고, 더 강해질까를
먼저 생각하게 되는 거죠. 사실 자본주의가 만든
이런 사고에서 벗어나기가 쉽지는 않아요. 그러나
그 속에서 그냥 함께 있으면 모든 걸 잊고 편안하
게 숨쉴 수 있는 관계들, 그야말로 작은 숲을 조금
씩 만들어가보는 거예요. 그러다보면 큰 더불어숲
이 만들어지겠죠. 사단법인 더불어숲도 그런 작은
숲의 시작인 거고요. 전에 신영복 선생님을 뵐 때
마다 들었던 생각이 '어떻게 저렇게 다 꿰뚫고 계
실까?' 그러면서도 '어떻게 저렇게 소탈하실까?'
하는 거였어요. 신영복 선생님은 자신과의 관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셨을까요? 춘풍추상(春風
秋霜). 신영복 선생님이 자주 쓰시던 문장입니다.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대하고, 자
신을 대할 때는 가을 서리처럼 엄격하게 대한다"
실제로도 선생님은 그런 삶을 사셨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그 원칙은 지키려고 애쓰셨던 것 같아요.
그리고 선생님이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었
던 비결은 자신을 낮추는 태도였어요. 이를테면
같이 짜장면을 시켜먹으면 가장 먼저 일어나서 뒷
정리를 하셨어요. 그런 태도가 몸에 배어 있었죠.
늘 부지런히 일을 찾아서 하셨고, 그런 모습을 보
면서 '저분은 정말 자기 글처럼 사시는 분이구나.'
이런 생각을 절로 하게 됐어요. 오래전에 선생님
이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사람들
은 내가 모든 답을 가진 줄 안다. 답이라는건 결국
자기 스스로 찾아야 하는 건데, 나보고 자꾸 답을
달라고 한다." 이런 말씀을 푸념하듯이 하신 적이
있는데, 그런 거죠. 답은 누가 주는 게 아니라 결
국 우리가 찾아야하는거죠. 다만 그 답을 상상할
수 있는 상상력의 근거를 신영복 선생님의 책과
말씀, 그분의 삶속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
하는거죠.
바닿늘
2023. 10. 18.
발췌 후 덧붙인 글.
해당 파트의
김창남 교수님은
대중문화평론가이자,
사단법인 더불어숲의
이사장입니다.
사단법인 더불어숲은
"우리 더불어 신영복 선생님의
제자가 되어,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고 지키자."
라는 미션을 품고 있어요.
해당 미션만으로도
문재인 전 대통령이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요.
즉, 이번 다룰 내용은..
신 영복 선생님 파트라고
생각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사실 해당 내용을 다루게 된 것은
최근 '막말 논란'으로 이슈의 중심에
떠오른 김 문수 위원장 덕분(?)입니다.
지금은 주로 책을 읽지만..
책을 읽기 전부터 오래도록
강연을 들어왔었습니다.
요즘에도 좋아하는 분들의
강연은 찾아서 즐겨 듣습니다.
저는 평소..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이
그 사람의 대부분을 보여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하트마 간디의
말로 흔히 알려져 있는..
"내 삶이 곧 나의 메시지다"
라는 말을 특히 좋아하지요.
물론 일방적인 주장만 듣고
전부를 믿을 수는 없을겁니다.
해당 주장에 설득되지만
더 검증을 해보고 싶다면..
답은 간단합니다.
그 사람이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를 확인하면 되죠.
물론 사실을 중심으로요.
(공격포인트만 선택적으로
취사선택하여 주장해서는
매우 곤란합니다.)
해당 책의 내용이..
직접 판단하시는데
조금이나마 도움되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리고..
"신영복 선생을 존경한다면
확실히 김일성주의자다."
라고 말했던
김 문수 위원장이
그동안 걸어온 족적을
제가 사실을 중심으로
짧게 파악한 바는 이렇습니다.
하단 링크의 뉴스 기사
내용을 일부 인용하였습니다.
https://naver.me/x1g8CQqz
광경 하나..
"내가 경기도지사 김문수입니다.
지금 전화 받는 사람 이름이 누구요?
도지사가 누구냐고 이름을 묻는데
답을 안 해? 아니 지금 내가 도지사
라는데, 지금 그게 안 들려요?"
2011년, 경기 남양주 소방서에
전화가 걸려왔다. 김문수 당시
경기도지사가 환자 이송 체계 등을
문의하려고 건 전화였다.
당시 119 상황실 근무자 2명은
김 전 지사의 전화를 장난전화로
오인해 제대로 응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전보 조치 됐다.
이후 과잉 조치 지적에 7일만에
복귀한 것으로 알려졌다.
광경 둘..
"나보고 왜 가자고 해.
사람을 뭘로 보고 말이야.
이러면 안 된다고 당신들.
내가 국회의원 세 번 했어!"
2020년 8월 중순 무렵,
국회의사당역 승강장 앞.
지하철을 기다리던 김문수 전 지사와
일행들에게 경찰이 다가간다.
일행 A씨가 코로나 검진을 받지
않고 돌아다닌다는 이유에서다.
경찰이 김 전 지사에게도 같이
갈 것을 제안하자 김 전 지사는
이처럼 핏대를 세우며 호통을 쳤다.
해당 이슈 말고도..
여러 행적들이 더 있지만
굳이 나열하진 않겠습니다.
김 문수 위원장은
현재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네이버 시사상식사전의
요약에 의하면..
경제사회노동위원회는
노동정책 및 이와 관계된
경제, 사회 정책을 협의하기
위한 기구로..
대통령 자문기구입니다.
과거,
갑질을 일삼았던 의원이..
오래 전에 노동운동을
했었다는 이유를 근거로
이런 직책을 맡고 있습니다.
제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됩니다.
그리고
아무리 표현의
자유가 있다지만..
말을 가려서 해야지요.
'김일성주의자' 라고
낙인 찍는 방식은
정말 치졸합니다.
제발 주장을 할거면..
타당한 근거를 대세요.
정진석 의원에게
라이벌의식을 느꼈는지..
절대 방패를 지닌
'캡틴 코리안'이라도
되었다고 느끼는건지
잘은 모르겠지만..
부디..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바닿늘
별별 이야기, 모든 일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어렸을 때부터 하늘 보는 걸 좋아했어요. 제가 중
학생일 때였던 것 같은데, 아주 인상적으로 기억
에 남아 있는 장면이 있어요. 장마가 끝날 즈음 먹
구름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노을이 지면 무척 예
쁘거든요. 하늘도 다채롭고요. 당시에는 하늘을
보고 연구하는 게 다 천문학인 줄 알았는데, 나중
에 알고보니까 구름, 노을, 비, 무지개 이런건 기
상학에서 다루더라고요. (웃음)
사람들은 별에도 끌리고, 바람에도 끌리고, 노을
이나 구름에도 끌리고, 바다에도 끌린다고 생각
해요. 우주도 자연의 일부니까요. 아주 거대한 자
연이요. 우리가 산에 가서 나무나 꽃이나 바위를
보듯이 달이나 별 같은 우주를 연구할 때도 그렇
게 자연을 탐구하는 마음인 거죠. 어린 아이들도
하늘에 별이나 달이 떠있으면 좋아하잖아요.
우리가 나무만 보지 않고 숲을 보면 다른 시야를
가질 수 있잖아요. 그 시야를 좀더 키워서 지구의
스케일로 보고, 우주의 스케일로 본다면 또다른
시선으로 또다른 사고를 할 수 있을거예요. 저도
천문학을 연구하다보면 가끔 치유받는다는 느낌
이 들 때가 있거든요. 별이 주는 위로가 있어요.
제가 천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를 생각해
보면 중학교 때 같은반 친구가 떠올라요. 고등학
교를 서로 다른 곳으로 가게 됐는데, 친구는 고등
학교에서 천체관측 동아리 활동을 했나봐요. 그래
서인지 성도라고 천구상 천체의 위치를 나타낸 지
도 뒷면에 편지를써서, 직접 찍은 별 사진과 함께
제게 보내줬어요. 그 편지에 "나는 천문학자가 될
거야. ○○대학교 천문학과에 갈 거야." 이렇게
적혀 있었던 게 기억나요. 그때 처음 알았어요.
'천문학과라는게 있구나.' 천문학자가 되는 길이
있구나.' 제 관심은 그걸로 끝나는가 싶었는데….
저희 학교에 지구과학선생님이 두 분 계셨는데,
두 분다 너무 독특하고 재미있으셨어요. 처음에는
"저게 뭔데 저렇게 즐거워하면서 설명하실까?"
이렇게 선생님들에게 관심을 갖다가 점차 천문학
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지구과학 책 후반
부에 천문학에 관한 내용이 나오거든요. 그 모든
일이 고등학교 3년 동안 한꺼번에 일어났죠. 친
구한테 별 사진을 받았고, 지구과학선생님들이
너무 재밌었고…. 부모님은 저를 거의 방임하면
서 키우셨고, 저도 혼자 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
반대는 없었어요. 보통 천문학과에 간다고 하면
부모님들이 반대하시거나 걱정하시거든요. 돈벌
이가 안된다는 선입견 때문이겠죠. 만약 천문학
자가 별 하나를 발견할 때마다 돈을 받는다면 너
무 잔인할 거예요. 평생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테니.. 그런데 다행히 대부분의 과학자들처
럼 보통은 월급을 받으며 살아가요.(웃음)
천문학은 무엇인가?
제가 천문학을 해서 좋은 점 중 하나는 주변에 저
와 비슷한 사람들이 많다는 거예요. 누군가는 비
현실적인 몽상가들이라고 생각할수도 있고, 저
스스로도 가끔 허무맹랑한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래도 그때 제 주변사람들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게 참 좋아요. 어쩌면 저는 천
문학 보다 천문학자들을 더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해요. '우리는 다 지구인들이지' 혹은 '우리는 다
우주인들이지'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 틈에 같이
끼어 있다는 걸…. 한자의 우주는 '집과 집'이라
는 뜻인데, 이 우주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총체'
라고 할 수 있어요. 영어로는 스페이스, 유니버스,
코스모스로 다양하게 번역되기 때문에 헷갈리실
수 있는데, 스페이스는 인간이 장악할 수 있는 우
주공간을 뜻해요. 그래서 우주 탐험, 우주 전쟁 등
을 나타낼 때는 스페이스라는 단어를 사용하죠.
유니버스는 천문학에서 연구 대상이 되는 우주를
의미해요. 이와 달리 코스모스는 유니버스에 종교
와 철학 등이 덧붙은 조화로운 주관적 우주, 그러
니까 카오스와 반대되는 질서 정연한 우주를 뜻해
요. 칼 세이건이 쓴 유명한 《코스모스』라는 책은
그 내용에 천문학 지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
알파가 더해졌음을 알 수 있죠. 천문학계에서는
최근 한 10여 년간 우리 태양계에 속해 있지 않은
외계 행성을 찾는 분야가 빠르게 부상 중이예요.
예전에는 태양계 하면 태양과 수-금-지-화-목-토
-천-해-명 같은 것들을 애기했잖아요. 헌데 이제
는 '우리 태양계'라고 얘기해요. '다른 태양계에
도 지구 같은 행성이 있을까?' '목성 같은 행성이
있을까?' '다른 태양계에도 우리 태양계와 같은
순서가 있을까? 아니면 뒤죽박죽 얽힌 전혀 다른
세계일까?' 이런 의문들이 30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에 가까웠는데 지금은 현실이 됐어요.
그래서 과학계에서는 다른 태양계에도 지구 같
은 행성이 있는지를 찾고 있고, 생각보다 많이
찾아냈고, 앞으로 더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 걸 생각하면 아까도 말했듯이 우리가 나무
를 보던 시야에서 숲으로, 지구로 그리고 이제는
우주로까지 나아갈 수 있는 거죠.
지구인들이 서로 도우며 사는 법
천문학계에서는 탐사 관측이 끝나면 통상 1년 정
도 자료를 독점하고, 그 이후에는 대부분 공개합
니다. 사실 이 전통은 저도 제가 태어나기 전에 형
성되었기에, 기원에 대해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러한 정서는 미국에서부터 시작된거라고 알려
져 있어요. 냉전 시대에 미국과 구소련이 서로 달
에 가려고 첨예한 '우주 경쟁'을 펼쳤잖아요. 미국
은 그때부터 대부분의 연구 자료를 공개하는 편이
거든요. 예를 들어 미국항공우주국(NASA)에서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했는지, 어떤 문제나 실패가
있었는지도 모두 기록되어 있고, 이 자료들은 원
한다면 누구나 찾아볼 수 있어요. 하지만 구소련
은 그런 과정을 모두 공개하지는 않았죠. 구소련
의 '루나시리즈'도 발사 당시가 아닌 성공한 이후
에 붙여진 이름이에요. 내부 기준에 미치지 못하
면 '루나'라는 이름을 부여하지 않은것 같아요.
결과적으로 다음 세대들이 그 과학기술을 이어받
는 데는 공개된 자료가 있는 쪽이 훨씬 유리했던
거예요. 그리고 10년, 20년이 지나고 전세계인들
이 그 자료들을 공유하게 되면서 처음에는 미국만
의 기술, 미국만의 영광이었던 결과들이 점차 모
든 지구인의 쾌거가 된 거죠. 그 덕분에 미국이 우
주 경쟁 시대를 앞서나갈 수 있었고, 미국 역시 그
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도 그 전통을 유지하는
거라고 저는 추측하는 거죠. 반면 중국은 최근 활
발한 우주 탐사를 펼치고 있지만 공개된 자료는
많지 않아요. 예를들어 지금 달 주변을 돌고 있는
인공위성들이 있거든요. 만약 지구에서 새로운
달 탐사선을 쏜다면 달 궤도에 있는 인공위성들
과 모든 망원경들이 그 탐사선을 관측하려고 기
다려요. 마치 기자들이 연예인 출근길을 찍으려
고 기다리는 것처럼 달 근처에 도착할 때 관측하
려고 대기하는 거죠. 그래서 달에 도착하면 사진
을 찍어주기도 하고, 충돌해서 부서지면 파편을
찾아주기도 하고요. 그런데 중국은 일단 쏘고, 발
사가 성공한 뒤에야 발사 사실을 알려줬거든요.
그래서 망원경과 인공위성들이 관측을 못 했어요.
물론 그들은 성공한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겠지만
그런 중간과정을 공유하지 못한 점은 조금 안타까
워요. 관측이 잘되면 당연히 관측자료도 공개할
텐데, 혹여 우리 탐사선이 잘못된다 하더라도 저
는 그 과정들을 다 공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럴 때 "한국은 수준이 별로야"라고 비웃는 게
아니라 "쟤네가 뭘 잘못해서 저런 결과를 얻었는
지 알아보자. 다같이 알자. 그리고 다음에는 그런
실수를 하지 말자." 이렇게 나아갈 수 있기 때문
이에요. 이때 실패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죠. 기술적인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 애초부
터 설계가 잘못됐거나 과학적으로 생각을 완전히
잘못했거나 정책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어요. 이걸
부끄러워하거나 자존심 싸움으로 생각할게 아니
라 문제점을 찾고 보완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직전의 실패감에서 벗어날 수도 있을 뿐 아니라
'이렇게 했더니 실패하는구나. 다음에는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말아야지' 하고 배울 수 있다
는 거예요. 그리고 나중에 후배들이 보면서 용기
와 격려도 얻을수 있고요. 그리고 '실패해도 괜찮
구나. 계속 하다보면 내게도 기회가 오겠구나'하
는 희망도 얻게 될거예요. 그래서 실패를 인정하
고, 기록하고, 함께 나누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바닿늘
2022. 12. 23. 덧붙인 글
천문학을 좋아하시나요?
저는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물론 좋아하는 만큼의 관심을
유지하기에는.. 어려운 영역입니다.
그래서 적정선을 유지하며,
조금씩 관심을 넓혀가고 있지요.
해당 책은 그런 측면에서
정말 큰 도움이 됩니다.
7명의 전문가를 대상으로 한
인터뷰 모음집 이기에 비교적
쉽게 다가오고 재미있습니다.
나머지 분들은 과거에 조금씩
다뤘었지만, 두 분만 아직 한 번도
다루지 못했더군요.
관심사에 따라
뒤로 밀렸겠죠..;;
당시에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보기 전이라
특히나 더 관심이 없었나봐요.
지금은 코스모스를
정말 인생 책 중에
하나로 꼽습니다.
우주에 대해
알고자 함은..
결국 생명에 대해
알고자함이기 때문입니 다.
꽤나..
철학적인 주제 같아요.
그럼에도 한 참 뒤에서야
심 채경 박사님 파트를
읽은 이유는 역시..
<알쓸인잡> 때문이죠.
스스로에게
10점 만점에 10점을
주겠다고 말하는..
이 분의 정체(?)가
더욱 궁금해졌어요.
제 눈에는 특히나,
뒤늦게 합류한 멤버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너무 마음이 갔습니다.
바닿늘
기본소득의 개념
그리고 오해와 편견(경제 전문가 이원재 대표)
제동: 어떻게 불러드릴까요? 2050 랩 대표?
원재: 랩(LAB) 2050입니다. 2050년에 우리가 좀
더 나은 세상에 살기 위해서는 지금 어떤 정책을 펼
쳐야 하는지를 연구하는 곳입니다. 2050년은 지금
으로부터 30년 뒤니까 한세대 뒤죠.(중략)
원재: 기본소득은 국가가 조건 없이 모든 국민에게
개별적으로 지급하는 현금 소득을 의미해요. 즉 재
산과 소득 수준에 상관없이 모든 국민에게 지급되
는 현금이죠. 기초생활보장제도는 소득이 최저생계
비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생계급여를 지원하
지만, 기본소득은 대기업 회장, 무직자, 기초생활수
급자, 정규직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할 것 없이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지급 되는거예요. 또한 기본
소득은 가구 단위가 아닌 개인 단위로 지급돼요.
4인 가구라면 나이와 성별, 소득에 상관없이 4인
전원에게 각각 지급하는 거죠. 게다가 받는 사람에
게 일을 하라거나 구직 활동을 하라고 요구하지 않
아요. 자원봉사자, 전업주부, 사회운동가들처럼 금
전적으로 노동가치를 인정받지 못해도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기본소득
은 이들에게도 모두 지급되는 거예요. 기본소득과
소득의 재분배를 논하면 늘 따라오는 말이, "그럼
공산주의 하자는 거냐?" "기본소득을 실시하면 누
가 열심히 일하겠냐?"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
는데요, 기본소득과 공산주의는 굉장히 다릅니다.
공산주의는 모든 사람이 노동을 할 수 있도록 국가
가 일자리를 다 보장하는 시스템이죠. 반면에 기본
소득제는 지극히 시장경제적인 발상이에요. "아무
조건 없이 돈을 드릴테니 마음대로 하고싶은 거 하
세요." 그러면 기본 소득이 생긴 사람은 그 돈을 가
지고 시장에 가서 쓰기도 하고, 투자를 한다거나,
기부를 하기도 하고, 자기 마음대로 쓰는 거죠.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하는 겁니다. 지극히 시장경
제적인 발상이에요. 그리고 기본소득은 사회적 신
뢰와 연대감을 형성하는데 좋은 측면이 있어요.
예컨대 이런 거죠.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어릴 때 굉장히 부유하게 지낸 사람도 만나고 몹
시 가난하게 지낸 사람을 만나기도 하잖아요. 재
벌가 3세와 시골에서 나서 어렵게 자수성가 하신
분이 같은 대학에서 동료교수로 만날 수도 있고,
벤처 기업가로 만날 수도 있어요. 그때 서로 이런
얘기를 할 수가 있거든요. "아, 옛날에 우리 국민
학교 때 난로에서 조개탄 때곤 했잖아." 이처럼
같은 세대라면 이런 얘기를 공유할 수 있는 거죠.
그런데 만약 초등학교 시절을 보내는 방식이 달라
진다고 생각해보세요. 예를 들어 미국처럼 상위
10%는 아주 특별한 사립학교에 다니고 개인 교
사가 있다면 사회에서 그렇지 않은 사람을 만났을
때 초등학교 시절 얘기를 꺼낼 수 없겠죠.
서로 경험이 너무 달라서 연대감을 형성할 수 없
을테니까요. 이것을 사회보장제도와 연결해 생각
해보면, 코로나 사태 이후 전국민에게 긴급 재난
지원금이 지급되니까 사람들이 만나면 대부분
"나는 받아서 얼마 썼다." "미용실 갔다." "안경
맞췄다." "소고기 먹었다." 이런 얘기를 스스럼
없이 했잖아요. 그러면서 연대감이 형성되거든
요. 그런데 "나 이번에 실업급여 받아서 소고기
사먹었다.", "나 가난해져서 생계급여 받았거든."
이렇게 얘기하는 거 못 들어보셨잖아요. 연대감이
형성이 안 돼서 그래요.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
는 사람끼리 연대감이 형성되는 것처럼 기본소득
도 보편적으로 보장해야 연대감을 줘요. 반대로
차등을 두기 시작하면 연대감 형성이 안되는 거
죠. 그래서 복지제도를 도입할 때는 가급적 보편
적으로 비슷한 품질을 모든 사람이 누리게 해주
는게 좋다는 것에 많이들 동의해요.
제동: 그런데 기본소득에 대해 반대하는 분들도
적지 않잖아요.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원재쌤 같
은 사람을 이상주의자라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기본소득을 꼭 도입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원재: 저는 19세기 유럽이 만든 질서가 지금 전환
기를 맞았다고 생각해요. 자본주의가 종말을 맞았
다고 얘기하면 엄청 과격한 사람 취급을 받기 때
문에 그렇게 표현하지는 않을게요. 이게 뭐냐면
19세기에 사회보험제도를 만들 당시에는 모든 사
람이 고용된 상태가 가장 이상적이고, 장차 그렇
게 될 거라고 예상한 거예요. 정확히 말하면 성인
남성의 완전 고용을 생각했던 거죠. 그때는 여성
이나 청소년, 어르신은 고려하지 않았으니까요.
특히 어르신 같은 경우에는 지금처럼 고령화가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
었지만 어쨌든 완전 고용이라는 개념이 있었죠.
그게 항상 정책의 목표였고, 경제는 완전 고용을
향해 달려가야한다고 믿고 사회보험제도를 만든
거죠. 하지만 모든 사람이 완전 고용되는 것이 아
닌 상태가 정상이 되면, 다시 말해서 정상상태가
완전 고용이 아닌 다른 형태로 바뀌면 이 제도가
작동을안하게 돼요. 이게 요즘 말하는 새로운 정
상, 좀 어려운 말로 '뉴노멀'이라고 하는거고, 그
래서 기본소득제 얘기가 나오는 거죠. 지금까지
나온 여러 가지 사회보험제도의 핵심은 고용된
사람 중심으로 유지되는 거였어요. 그런데 전국민
고용보험이 확대돼서 문화예술인에게까지 적용이
된다면 공무원들이 찾아가서 소득을 조사하고, 보
험료와 예상 수령액을 설명해야 하는데, 이런 식
으로 접근하면 너무 복잡하고 행정적으로도 비용
이 많이 드니까, 모든사람에게 똑같이 일정한 급
여를 보장하는 기본소득제를 도입하자는 거예요.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든 개인에게 일정한 급여를
평생 보장하는 시스템을 만들면, 지금보다 고용이
불안정해질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모두가 고소득
프리랜서는 못 돼도 기본소득은 받는 프리랜서가
되는 거죠. 그러면 갑자기 상황이 안 좋아져서 아
무 일도 못하게 되어도 어느 정도 소득은 유지가
되는거예요.
제동: 그런데 원재 쌤은 어쩌다 기본소득에 관심
을 갖게 되셨어요? 원재쌤 정도면 굳이 기본소득
에 관심 안 가져도 될 것 같은데요.
원재: 제게는 좀 독특한 경험이 하나 있는데요.
꼭 그것 때문에 기본소득을 생각한건 아니지만
이 경험이 시작이었던 것 같긴 해요. 제가 어릴
때 소록도라는 곳에서 살았어요. 전남 고흥군에
있는 섬인데, 지금 명칭은 국립소록도병원이고,
당시에는 국립나병원이라고 불렸어요. 한센병을
앓고 계신 분들이 치료받을 수 있도록 국가에서
만든 병원이자 마을인데,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거기서 2년 동안 살았어요. 아버지가 공무
원이셨는데 그 병원 직원으로 일하셨거든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분들은 딱 한가지
를 할 수가 없어요 바로 노동이에요. 그러다보니
직장에 고용돼서 일을 할 수가 없는 거죠. "그런
데 소록도에서는 어떻게 잘 사시느냐?" 이유는
단순해요. 모든게 보장돼요. 집, 식사, 의료가 다
제공됩니다. 그러니까 이분들은 노동으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그게 무엇
이 되었건 작은 일이라도 일을 해요. 사람이 일자
리가 없으면 나태해질 거라고 얘기하는 분들은 아
마 이런 모습을 보지 못해서 그럴 거예요. 저는 노
동하지 않고도 생활할 수 있도록 모든 게 다 보장
돼도 사람들은 자기 할 일을 찾아서 한다는 것을
확인한 거예요. 또 한 가지는 소득 자체에 대한 생
각인데요. 우리나라가 IMF 구제금융을 받게 됐을
때 제가 마침 수습기자로 일하면서 충격적인 경험
을 많이 했어요. 그때 새벽마다 경찰서에 다니는
게 일 이었는데, 이틀이 멀다하고 자살 사건이 벌
어지는 거예요. 'IMF 구제금융사태' 하면 은행이
망했던 걸 기억하는 분들이 많겠지만, 제게는 보
통 사람들의 자살로 기억되거든요. '근본적인 문
제가 뭘까?' 생각했을 때 제가 찾은 답은 소득이
었어요. 하지만 정부에서는 그렇게 생각을 안 하
는 것 같더라고요. 정부는 계속 "경제 살리자!"
"일자리 만들자!" 라고 주장했는데 실제로 사람
들에게 심각한 문제는, 지출은 여전히 많고 가족
도 부양해야 하는데 안정적인 소득을 벌 수 없다
는 절망과 불안이었거든요. 소득과 소득의 안정
성이 굉장히 중요한거죠. 두 가지를 조합해서 제
도적으로 구현할 방법을 많이 생각했어요. 근로장
려금이나 고용보험 같은 것도 많이 찾아봤는데,
기본소득제를 접하는 순간 가장 효율적인 해결책
이라는 생각이 든 거죠. 그래서 소득의 문제를 해
결하는 도구로서 기본소득제에 관심을 두게 됐죠.
바닿늘
2023. 10. 18. 덧붙인 글.
기본소득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
기본소득에 대해 관심이
많은 분들은 어느 정도의
개념을 알고 계실테지만..
조금은 모호하게 느껴질
분들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저 스스로도 개념을 조금 더
굳히는 데 도움이 되었고요..)
그리고 기본소득 개념은 상대적으로
많이 모르더라도 기본소득당은 많이들
들어보셔서 아시겠죠??
요즘 용혜인 의원님의 의정 활동을
보며 매번 성장함을 느끼고, 감탄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정말 받아들여지지
않는 개념 중 하나가 기본소득이라고
평소 생각해 왔습니다.
기본소득을 반대하는
논리를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가 공산주의냐!?"
"일을 안하면 다 게을러진다."
등의 논리 같은데요..
이런 저런 것들 따질 것 없이,
딱 결과만 놓고 보자고요.
그간 반대의 목소리를 내왔던
사람의 재산, 그리고 그것이
이뤄낸 결과만 놓고요.
(저는 지금의 정부가 들어 선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그간 반대의 목소리를
내서 재산을 증식한, 혹은 권력을 최대한
으로 쓰며 성장해 온 몇몇 특혜 수혜자
그룹이 만들어낸 결과라고도 생각합니다.
그 그룹은 정치계에도 있고, 검찰계에도
있고, 언론사에도 있었겠죠...)
저는 우리 사회가 미국과 일본의
영향을 엄청 많이 받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지금껏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래요. 역사를 바꿀 수 없으니,
있는 그건 그대로 일단 받아들이자고요.
하지만 이제는 생각해 볼 때입니다.
"그게 옳았나??", "다른 대안은 없을까?"
저는 확신합니다.
기본소득이 적어도,
지금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데
있어서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건강한 정책 중 하나라고.
오늘 소개하는 내용을 보신다면,
조금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실거라고 믿습니다.
(아니.. 믿고 싶습니다.
제가 그랬듯이 말이죠..)
바닿늘
흠.. 다시 보니
제목이 빠져있어서..
각 파트가 누구의 이야기인지
구분이 잘 안되네요.
순서대로 적어보자면..
위에서부터,
이정모 관장, (생물학자의 이야기)
김상욱 교수, (물리학자의 이야기)
정재승 교수, (뇌과학자의 이야기)
김창남 교수, (신영복 선생님 이야기)
심채경 박사, (천문학자의 이야기)
이원재 대표 (기본소득 이야기)
입니다.
유현준 교수 편도 다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시간 될 때 그것까지 추가하겠습니다.
그래야 이 책에 나오는 7명에 대해
모두 조금씩 다루는 셈이니까요.
바닿늘
참고로..
해당 내용들은 제 블로그와 인스타그램 계정에서
각각 6차례에 걸쳐 다뤘던 내용들을 모은겁니다.
바닿늘
https://blog.naver.com/seasky210528
혹시 네이버 블로그로 보는 게
더 편한 분은 블로그 내의 카테고리,
<5번 이상 읽은 책>에서 찾으시면 됩니다.
반응이 나쁘지 않다면..
종종 시간 내서 다른 책들도
5번 이상 다룬 것들 위주로
올려보겠습니다.
바닿늘
건축가
유현준 교수 Part
오리지널과 카피,
왜 사람들은 강남에 살고 싶어할까?
우리는 너무 잘 살아요. 21세기 한국은 1970년대
한국보다 훨씬 더 잘 살아요.그렇기 때문에 사회의
자산도 그만큼 아주 많다는 걸 기본으로 하고 접근
해야 해요. 그 자산을 쌓는 과정에서 빈부격차가
생기고 갈등도 발생하고 있다고 봐야죠.
어떻게 보면 지금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마
어마한 자산과 싸우는 중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한국에서 평당 1억짜리 집을 살 수 있는 가구는
약 32만 가구 정도라고합니다. 평당 1억 원이면
50평짜리 집을 50억 원에 사는거죠. 전국적으로
봤을 땐 32만 가구래요. 생각보다 많죠. 그런데
보통 그런 집에는 애들이 두 명 있거든요. 그 말인
즉슨 자식들에게까지 평당 1억 원짜리 집을 사줄
능력이 되면 평당 1억원짜리 집에 대한 수요가
100만 가구가 된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주로 살고 싶어하는 곳이 강남
이에요. 거기에서 공급이 제대로 안 이루어지면
주변 지역의 집값이 같이 올라갈 수밖에 없는 거죠.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강남에 더 살고 싶어할까요?
건축가로서 제가 보는 관점에서는 대한민국의 모든
주거 형태가 강남을 모델로 만든 복제품, 즉 카피
이기 때문이에요. 대부분 강남처럼 사는 라이프
스타일을 추구하는 거죠.
우리나라에 수많은 도시들이 있지만 전국의 모든
도시가 점점 더 비슷해지고 있기 때문에 그중에서
도 오리지널로 계속 모일 수밖에 없는 거죠. 지방
에서 사업에 성공하든, 토지 보상을 받든, 매각을
하든 돈만 벌면 대부분 강남에 부동산을 사고 싶어
하는 거예요. 안타깝지만 이게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이에요. 지방 각 도시에 고유의 문화가 잘 형성
되지 않았기에 나타난 결과이기도 하고요.
인구가 감소해도
집값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
인구보다 세대를 고려해야 함. 베이비붐 세대
언저리의 인구가 많이 늘었던 세대 때는 한국
사회가 도시화와 핵가족화 되는 것을 경험.
시골에 살던 사람들이 도시로, 대부분 서울로
이사. 농업경제 시대에는 도시 인구가 15%
정도였지만 지금의 한국은 전국민의 91%가
도시에 살고 있음.
90% 넘는 도시화 비율은 전세계에 딱 세 나라
홍콩, 싱가포르, 한국. 대단히 독특한 사례.
경계부에 있는 사람들
집을 살 것인가, 말 것인가?
부동산을 소수가 많이 갖는 것보다 다수가 n분의
1로 나눠서 가지는 편이 더 정의로운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능하면 경계부에 있는 사람들이
주택을 좀더 소유하게 해서 궁극적으로는 우리
국민 모두가 주택을 소유할 수 있게 해주는 게
좀더 건전한 사회라고 보는거죠.
"그건 불가능한 것 아니냐?" 이렇게 회의적이기
쉽잖아요. 그런데 재미난 사례도 많아요. 칠레의
알레한드로 아라베나라는 건축가는 2016년에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았
어요. 그 건축가가 정부 보조금을 받아서 저소득층
을 위한 공공주택을 지었는데, 예산에 맞춰 작은
집(m2)을 짓는 대신 저소득층이 장기적으로 살 수
있는 큰 집(80m2)의 절반만 지은 것.
예를 들어 지붕 아래 공간의 절반만 완성하고, 반은
비워놔요. 돈이 없으니까 반쪽은 거의 합판으로
골격만 짓는 거죠. 일단 반쪽만 완성된 집이라도
가질 수 있게 한 다음, 돈을 벌면 벽에 페인트 칠도
하고, 화장실에 타일도 붙이고, 애가 태어나면 방도
하나 더 만들 수 있게 한 거예요. 그러면 저소득층
이라도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집을 빨리 소유할 수
있게 되잖아요.
사람들이 자기 집을 갖게 되면 눈에 보이지는 않지
만 좋은 점이 있어요. 바로 공동체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거예요. 1950년대에 미국 세인트
루이스에서 푸루이트아이고라는 아파트 33개 동을
지은 후, 사람들을 이주시켰어요. 그런데 불과 2년
만에 슬럼화가 된 거예요.
마약 밀매와 살인 범죄 같은 온상이 돼서 지은 지
겨우 20년만에 다이너마이트로 다 폭파시켰어요.
다큐멘터리에서 소개한 자료에 따르면 그 아파트에
입주한 주민 대부분이 월세였던 거예요. 그러다가
보니 자기 집에 대한 애착이 없거나 적었던거죠.
'돈 벌면 여기서 나가야지' 하는 생각밖에 안하니까
공동체 형성이 안 되고 점점 더 슬럼화 됐던 거예요.
칠레의 경우처럼 절반만 완성된 집이더라도 내 집
이 되면 정착할 계획으로 주변을 꾸미게 되고, 아이
들이 다니는 학교의 학부모들과도 친해져요. 그러
면서 자연스럽게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자긍심이
생기게 되겠죠. '돈 벌면 떠나야지.'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생활을 하게 되는
거예요. 사실 이건 인간의 본능이기도 하죠.
저도 전에 월세 살 때 집주인 아주머니가 그랬어요.
"나가라고 안 할테니 내 집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런데 어떻게 월세를 내는 집이 내 집이겠어요?
그건 사실 그렇게 생각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죠.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공유경제'라는 말을
싫어해요. 저는 그 말이 교묘하게 사람을 속이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사람들에게 자기 집을 살 수 없도록 만들어놓고서
"한 달에 몇십에서 몇백만 원만 내면 좋은 집에서
호텔 같은 서비스를 받고 사는데 굳이 네 집을 가질
이유가 뭐가 있니?"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조심
해야 됩니다.
건강한 콘택트가 이루어지는 공간
앞서 얘기했던 공유경제는 좁은 의미에서 말씀
드린 건데요, 집이든 사무실이든 자동차든 소유한
사람이나 기업이 있고, 그것을 이용할 때마다 시간
당 돈을 내는 형태잖아요. 하지만 공원 같은 것들은
공공자산이죠. 정부가 소유하고 있긴 하지만, 누구
나 마음놓고 이용할 수 있으니까요. 제가 공원이나
공공자산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린 이유는 공유경제
의 측면 보다는 공통의 추억 때문이에요.
특히나 언택트 사회가 될수록 더 중요해요. 사람들
이 대면하지 않고 온라인상에서 만나기 시작하면
끼리끼리만 모이잖아요. 정보 역시 마찬가지로
알고리즘화 되어서 내가 관심 있는 사람이나 정보,
비슷한 정치 성향의 사람들의 이야기만 계속 소개
해주니까요.
마치 밀폐된 방 안에서 소리를 내면 그 소리가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처럼, 끼리끼리 모여 같은
정보를 주고받다 보면 특정한 정보에 갇히게 돼요.
이걸 '에코체임버 효과' 라고 하는데, 결국 나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끼리만 모이게 됩니다.
비록 나와 생각이 다르더라도 익명성이 보장된
상태에서 공통의 추억이 생겨야 공동체가 만들어
지는 거잖아요. 내가 저 사람이 누군지 알고
만나면, 예를 들어서 제동 씨의 정치 성향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었다면 반대쪽
사람들이 점점 선입견을 갖고 보게 되잖아요.
사실 알고보면 우리는 90%의 공통점을 갖고
10% 정도만 다른데, 우리 사회는 그 10%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건전한 공동체가 형성되려면 익명의 상태에서
섞여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게 가능하려면 공원이나 벤치나 도서관 같은
오프라인 공간에서 공통의 추억을 만들어야겠죠.
그러기 위해서 공공자산인 공간들이 더 많이
생겨야 해요.
공통의 추억과 공통의 꿈
'커먼그라운드'가 필요해!
강 건너편 사람과 이쪽 사람들이 모여서 얘기할 수
있는 중간지대, 조금 어려운 말로 커먼그라운드가
필요. 아침에 현관문 열고 나오면 알겠지만, 지금
우리 주변엔 계속 이동해야 하는 공간들로 가득.
중간지대의 부재로 인해 별다방에 가든, 빽다방에
가든, 자판기 커피를 마시든 이 사회에서 마주하는
많은 공간은 돈을 내야만 쓸 수 있기 때문에 여기
서부터 문제가 발생. 돈 많은 사람은 비싼 데 가고,
돈 없는 사람은 싼 데로 가니까 서로 다른 경제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한 공간에서 공통의 추억을
만들 수가 없는 것.
그러면 서로를 이해하기가 힘들어지고, 소통도
불가능. 공통의 추억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음. 건전한 사회는 계층과
배경에 상관없이 공통의 추억이 많은 사회라고
할 수 있음.
예를 들면 2002년 월드컵 당시 공통의 추억을
많이 만든 것. 그런 추억을 공유할 때 자부심도
생기고, 우리가 한 국민이라는 느낌도 생김.
그리고 공통의 꿈이 있으면 덜 싸우게 됨.
어찌 보면 우리는 공통의 꿈이 없어서 싸우는
지도 모름. 앞으로 함께 이루어야 할 목표가
없으니 자꾸 뒤를 보는 것. 뒤를 보면 당연히
걸어온 길이 다 다르니까 차이점이 드러날 수밖에
없고요. 이제라도 균형을 맞춰야죠. 뒤를 보면 앞도
볼 줄 알아야 하고, 현재뿐 아니라 멀리 볼수록
공통점이 많아질 거예요.
내년 보다는 10년 뒤 목표를 얘기하면 더 오래
함께 할 수 있고, 20년 뒤의 대한민국 사회를
얘기하면 우리는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 있을 거
예요. 조금 더 멀리 내다보면서 우리 모두의 공통
된 꿈, 우리의 비전을 공유하는 것이 지금 이 시대
에는 진짜 필요한 것 같아요.
과거의 공간과 권력,
어떻게 재배치할 것인가?
코로나는 위기이자 기회라고 생각해요.
이 사회의 기본 구조를 많은 부분 흔들어놓고
있거든요. 지금까지 해오던 관성이 깨진 거잖아요.
이 얘기는 공간체계도 그동안 관성으로 해오던
것들이 어느 정도는 와해될 거라는 의미예요.
그러면 '헤쳐 모여'가 되겠죠.
예를 들어 그전에도 재택근무가 가능했지만 직장
상사가 싫어해서 안 했죠. 온라인 예배도 가능했
지만 교회에서 별로 안좋아하니까 모였던 건데,
지금은 좋든 싫든 온라인으로 해야 하니까요.
그러면 공간을 통해 권력을 가졌던 사람들이
권력을 내려놓게 되고, 그 구조가 해체되면서
재배치가 될 거예요.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빨리
공통의 목표를 정하고, 그 꿈을 이루는 방향으로
사회 구조를 재구성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유럽 같은 경우를 보더라도 흑사병이 돌았던 탓에
중세사회를 끝낼 수 있었다고 할 수 있죠.
1,000년 넘게 문자와 신을 독점해온 그 시스템을
종식한 게 흑사병이에요. 전염병 창궐에 무기력했던
교회의 권위가 흔들리면서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문명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죠.
코로나 이후 어쨌든 우리의 생활방식이나 공간
구조를 바꿔야만 하는 상황에서 그것을 어떻게
재배치하느냐, 이것이 우리가 관심 가져야 할
부분인 거죠.
언택트 사회가 되면 집안에서 모든 걸 다 해결할 것
같지만, 오히려 이런 상황일수록 건전한 콘택트를
유발할 수 있는 공간이 집 근처에 많아져야 해요.
지금은 이런 방향으로 도시계획을 바꿔야 할 때인
거죠.
덴마크 건축가 얀 겔이라는 사람이 서로 다른 두
곳에 벤치를 배치해봤어요. 하나는 꽃밭을 바라보는
위치에 놓고, 다른 하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
할 수 있는 위치에 두었어요. 그러고는 어느 쪽에
사람들이 더 많이 앉는지 관찰했어요.
실험 결과는 1대 10으로 사람들을 볼 수 있는
자리를 더 많이 선택했어요. 인간이 자연을 좋아
하지만, 그래도 가장 매력을 느끼는 건 사람이란
의미죠. 그래서 기분 좋게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공간
을 만드는 게 중요해요.
우리 인간은 수십만 년간 진화해오면서 알게 모르게
함께 어우러져 사는 방법을 터득한 종이잖아요.
집단생활을 잘할 수 있는 공간 구조를 만들고,
소프트웨어도 개발하면서 계속 발전 시켜온 거죠.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볼 수 있는 곳에 더 끌리고,
그런 공간을 더 찾게 되죠.
사람은 더불어 사는 본능이 있어서 그에 적절한
공간 구조나 건축 유형을 만들 수 있는 사회가
성장하고 발전한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어요. 예를 들어 그리스에 원형극장이 만들어
진 후 민주주의 사회가 형성, 문화예술이 꽃을
피웠죠. 로마는 원형경기장과 수로를 만들어서
100만 명이 모여살았기 때문에 강력한 제국이
될 수 있었고, 파리는 하수도 시스템을 만들어
많은 사람이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 없이 살 수
있었기 때문에 시대를 앞서나간 문화의 중심지가
됐죠. 지금도 다르지 않거든요. 결국에는 그런
것들을 잘 만드는 사회가 이기는 거죠.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더 나아가 19세기부터는 생명공학의 발전으로
전염병을 상당 부분 통제하기 시작했어요.
예방주사라든지 항생제가 없었다면 인구가
1,000만 명이나 되는 도시는 나올 수 없었을
거예요. 잉카문명이나 마야문명이 멸망한 것도
다 전염병 때문이잖아요. 그래서 결국에는 전염병
에 강한 도시 공간 구조를 만드는 것이 국가 경쟁력
과도 연결돼요.
현대 도시는 물류와 기술이 발달해서 자연을 압도
하기 때문에 어디를 가나 모습이 다 비슷해지는
현상이 생기는데, 그걸 의식적으로 경계해야 해요.
예를 들면 하나의 기관이 대한민국의 모든 도시를
설계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하나의
건설사가 전국의 여러 아파트 단지를 동시에 짓도
록 하니까 도시가 다 똑같아지는 거잖아요.
우리나라는 이미 지방자치제를 하고 있으니 국토
교통부의 건축 기본 법규도 하위법에서 바꿀 수
있게 지방정부에 더 많은 권한을 줘야죠. 그래야
특색 있는 도시 건축물이 나오죠. 법은 법대로 수십
가지가 있고, 주요 도시 개발은 한곳에서 거의 다
하고, 도로망도 다 똑같이 해놓고서 특색 있는 도시
를 만들자고 하면 그게 가능할까요?
해결책은 선택지를 여러 개 만들면 돼요. 다양하게
준비해야 사람들이 자기 취향과 조건에 맞춰 흩어
질거 아니에요. 그러면 자연스럽게 한쪽으로 몰리
는 쏠림 현상을 줄일 수 있겠죠.
이상하고 슬픈 건축 시스템
우리나라 건축 시스템에 폐단이 하나 있어요.
기획을 안 하고 발주를 해요. 건물 지을 때 제대로
된 순서는 먼저 우리 사회나 지역에 필요한 공간이
있는지 알아 봐야죠. 도서관이 필요하다면
"우리 예산으로 한 1,000평짜리 도서관을 지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걸 어디에 짓는 게 제일 좋을까?
살펴 보니 낙후된 지역에 빈 땅이 있는데, 여기에
도서관을 지으면 이 근처 사는 사람들에게 일자리
도 생기고, 주변 공동체와 도시가 좋아질 테니 여기
에 짓자."
이런 순서로 가야 하거든요. 그런 다음 도서관 운영
은 누가 어떻게 할지 결정한 후 설계지침이 나와야
죠. 그런데 우리나라 건축 시스템은 거꾸로예요.
예산이 먼저 정해져요. 국가 예산이 얼마 나오면
"우리 도서관 지어야 한대"하면서 일단 지어요.
건물을 짓고 나서 그 건물을 어떻게 쓸지 생각해요.
건물부터 짓고 그다음에 운영자를 정하는 식이죠.
순서가 바뀐 겁니다.
더 슬픈 건, 그렇게 만들어진 건물이 후대에 남길
만큼 디자인이 훌륭한 건물이면 100년 뒤에 우리
후손이라도 잘 쓸 텐데 제가 볼 때는 디자인도 아쉽
다는 거예요. 이건 고질적인 문제 때문입니다.
건물을 지을 때 공정성을 위해서 대부분 공모전을
하거든요. 문제는 발주 부처 공무원들이 심사위원
으로 참여하고, 외부 심사위원까지 공무원들이
추천하니까 건축에 대한 전문성이 떨어지는 거죠.
쉽게 말해서 이런거예요. 여러분이 시험을 봤는데
반에서 중간쯤 하는 애가 채점을 해요. 그러면 이
채점이 제대로 될까요? 이런 일이 누적되면 정말
설계 잘하는 분은 대한민국의 공공건축물 공모전에
안 나가요. 진짜 슬픈 일이에요. 훌륭한 건축가들이
공공건물 짓는 데 참여해야 하는데 내봤자 안 뽑아
주니까 안 내는 거예요. 그럼 설계는 그렇다 치더
라도 시공은 제대로 되느냐? 이것도 문제예요.
조달청 시스템이 어떻게 되어 있냐면, 전엔 최저가
입찰제라는 게 있었어요. 공사비를 가장 낮게 제안
한 쪽이 뽑히게 돼요. 그러다보니 업체들이 로또
사듯이 제안서를 계속 넣어요. 계속 넣어서 누군가
당첨 되면 최저가로 제안을 했으니 실력 있는 비싼
인력을 못 쓰죠. 예를 들어 하루에 10만 원 받는
벽돌공이 있고, 하루에 5만 원 받는 벽돌공이 있다
면 10만 원 받는 벽돌공은 못 쓰는 거예요. 결국은
그 사람이 이 시장에서 퇴출당해요. 실제로 지금은
벽돌 잘 쌓는 분들이 퇴출당하고 거의 없거든요.
이러한 최저가 입찰제가 문제 되니까 이제는
"그럼 우리 평균치로 가자." 그래서 50억 원 정도에
지을 수 있는 건물이 있으면 50억원의 85%만
받겠다고 하는 게 불문율처럼 되어 있어요. 그 값에
가장 가깝게 쓴 업체가 선정되는 거예요. 이것도 또
다른 형태의 로또죠. 숫자만 잘 쓰면 되니까요.
그렇게 선정되면 시공사에서 주인의식을 가지고 그
일을 완성할 이유가 없는 거예요. 다음 프로젝트 때
또 된다는 보장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선정된 다음
이익금을 빼먹고 하청을 줘요. 하청받은 업체는 또
이익금을 빼먹고 2차 하청을 줘요. 그러다보니까
공공건축물의 평당 공사비가 1,000만 원짜리라고
하면, 중간에 차 떼고 포 떼고 실제 공사비는 600만
원도 안 되는 것 같아요. 심지어 설계한 사람이
감리도 못 하게 돼 있고, 심지어 설계가 바뀌는
경우도 있어요. 이 부분만 보더라도 시스템이
잘못된 게 너무나 많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여기서 가장 큰 문제점은 일을 잘하는 사람이 선택
받지 못하는 시장 구조예요. 설계를 제대로 하는
사람들이 떨어지고, 시공을 잘하는 분들이 설 곳이
없어요. 자기 이름을 걸고 책임감 있게 일하는 회사
들이 떠나는 모순적인 구조예요.
제가 우리나라 공공건축물에 바라는 점은 단순해요.
"모든 공공건축물의 심사위원을 제대로 구성하자.
국내에서 안 될 것 같으면 해외에 있는 프리츠커상
수상자들, 로비에 매수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
정말 명망 있는 건축가들에게 익명으로 출품해서
채점하라고 하자."
그리고 시공사 선정 과정도 개선되면 좋겠어요.
아마 전국적으로 따지면 우리나라 건축 관련 예산
은 조 단위일 거예요. 어마어마하죠. 그게 10년만
제대로 운영돼도 우리나라 국토가 바뀌고 국격이
바뀔 거라고 생각해요.
건축은 우리가 숨 쉬는 공기와 똑같아요.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끊임없이 공간의 영향을 받는데
거기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그건 마치 내가 좋아
하는 음악이 있는데도 아무 음악이나 듣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우리가 모두 건축가가 될 필요는 없지만 "우리는
모두 건축주다." 이렇게 생각하면 좋을 것 같아요.
특히 공공건물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어느 정도
지분이 있잖아요. 우리가 낸 세금으로 지어진
건물들이니까요.
어떤 교육자가 말하기를, "지금의 학교는 19세기
건축물에서 20세기의 어른들이 21세기 아이를
가르치고 있다"라고 했어요. 공간은 한 200년이
되고, 선생님이 가르치는 교육은 100년 됐다는
얘기죠. 이제 이 시대에 맞는 교육 목표와 그에
맞는 학교 공간이 새롭게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
해요.
학교의 권위주의와 전체주의가 깨지려면 규모가 좀
작아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시공간의 개념을 좀 다르게 생각 할 필요가
있어요. 앞으로도 코로나와 공존하는 '위드 코로나'
시대가 될 가능성이 높은데, 그러다보면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는 모두 전염병에 취약한 공간이
되겠죠.
그래서 굳이 한군데로 많은 사람을 모을 필요가
없다면 안 모여도 되게끔 해야 하는데 그중에 대표
적인 장소가 학교예요. 학교는 기능이 세 가지인데
하나는 지식 전달, 그다음은 탁아소의 기능이 있죠.
아이를 맡아 돌봐주는 기능인데 중요해요. 그리고
세 번째가 공동체 의식을 키우는 훈련장이에요.
지식 전달은 이제 온라인 수업을 통해서 하니까
굳이 같은 시간에 한 장소에서 수업을 들을 이유가
없어요.
건축가의 일,
먼저 사람을 이해하고, 공간을 만들고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건축가는 보통 집을 설계하지만, 규모가 커지면
아파트나 빌딩이 되고 단지가 되는 거죠. 거기서
더 커지면 도시가 되고, 그러면 전체적인 국토
개발에 대해 생각할 수도 있고요. 작게 들어가면
방 하나가 될 수도 있고, 혹은 한쪽 벽 인테리어가
될 수도 있어요.
어떤 경우는 건축가가 의자 디자인을 하기도 해요.
몸을 지탱하는 최소한의 구조체이니까요. 조명이나
식기를 디자인하는 건축가도 있어서 한없이 미세
하게 들어갈 수도 있어요.
그래서 건축가는 인간과 관련된 모든 공간적인
것들을 다 생각하고, 가구부터 도시까지 종합적
으로 판단한 후 의사결정을 내려요. 어느 하나만
보고 얘기하면 안 되죠. 건물을 디자인할 때도
앞뒤도 보고 바깥에서 보이는 모습도 고려하지만,
건물 안에 있는 사람에게 바깥 경치가 어떻게 보일
것인지도 생각하면서 디자인을 해야죠.
제가 건축가로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경계부
입니다. 디자인할 때도 건ㅁ루 내부에 있는 사람,
즉 소유자의 공간과 길 가는 사람들이 만나는 부분
이 밖으로 투영돼서 건물 외관이 완성되게끔 장치를
만들려고 하거든요. 건축가는 이렇게 여러 가지를
고려하면서 공간 디자인을 해야 하는 것 같아요.
"건축이란 무엇인가?"
관계를 조율하는 감정노동
저는 관축이 관계를 조율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사실 건축이라는 건 존재하면서 동시에 공간을
점유하잖아요.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만의 공간을
확장하려고 하고, 그 공간을 통해서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데, 건축가는 그 공간을 약간 제어할 수가
있어요. 비어 있는 공간에 벽을 하나 세우면 전혀
다른 공간이 되죠. 건축가가 그것을 어떻게 설계
하고 만드는지에 따라서 사람들의 관계가 바뀌고,
사회의 관계도 바뀌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도
바뀌는 것 같아요.
건축의 요소라는 것이 복잡하지 않아요. 벽, 창, 문,
계단, 지붕, 바닥, 기둥 정도밖에 없어요. 몇 가지
안 되는 이 단어를 가지고 복잡한 시를 쓴다고 해야
하나? 소설을 쓴다고 할 수도 있고요.
스마트한 건축가라면
A와 B를 다 만족시킬 수 있는
답을 찾아야 한다
간혹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는 건축주도 있긴 한데,
그때도 다투기보다는 방법을 찾아보려고 해요.
그 이유는 '만일 내가 정말 스마트하다면 건축주의
요구도 만족시키면서 나도 만족하는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어 A와 B가 싸우
니까 둘 중 한쪽에 힘을 몰아줘서 어느 한쪽이 이긴
다고 한들 세상은 바뀌지 않잖아요.
둘 다 만족시키는 뭔가를 보여줘야 하는데, 그 답은
항상 미래에 있죠. 그런 의미에서 참신한 아이디어로
새로운 것을 만드는 사람들이 여러 분야에서 생겼
으면 좋겠어요.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방의 크기
우리나라 중산층이 가장 많이 쓰는 30평대 아파트
가 방3개 화장실 1개로 돼 있잖아요. 그 이유는
1970년대에 농촌에 살던 사람들이 도시로 이사를
왔고, 3대가 함께 살다가 2대가 됐죠. 엄마, 아빠에
아이 둘. 부부가 한방을 쓰고, 애들이 방을 하나씩
쓰면 방 3개가 되는 거죠.
당시에는 남편만 주로 사회생활을 했으니까 아침에
씻고 나가기에 화장실 하나로도 충분했죠. 하지만
점점 맞벌이 부부가 늘어나서 아침에 씻고 나가야
할 사람이 2명이 되니까 화장실 2개, 방 3개가
기본형이 된 거예요.
또 하나 바뀐 점이 가사노동을 덜어준느 쪽으로
가전제품이 발달했다는 거예요. 집안에 세탁기가
들어오고, 냉장고도 양문형으로 바뀌었단 말이죠.
그리고 아침마다 이불을 개서 정리하는 수고를
줄일 수 있게 침대를 놓기 시작했어요. 근데 그게
생각보다 큰 변화예요. 과거에 우리는 방에서
이부자리 깔고 자다가 아침에 일어나면 장롱에
이불을 개켜 넣고 상을 펴고 밥을 먹었잖아요.
하나의 공간이 두 가지 용도로 쓰였단 말이에요.
그런데 방에 침대를 놓는 순간 갑자기 방이 좁게
느껴지는 거예요. 침대 하나가 두 평 정도 된다고
치면, 평당 2,000만 원짜리 아파트에 사는 경우
침대 하나가 4,000만 원을 쓰고 있는 거예요.
어찌 보면 사치이자 부의 상징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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