찐 부부
겉으로 옥신각신해도 그것 때문에 균열이 생기지 않는, 이젠 어쩔 수 없이 둘이 같이 가야만 하는, 이런 둘 사이를 미묘한 끈이 묶고 있다. 잘 안 보이는 이 끈은, 둘 사이에만 있고 남과의 관계엔 없다.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들에 대한 말은 반드시 맞지 않고 헛다리만 짚을 뿐이다. 남의 부부에 대한 말이 대부분 그렇듯 이들의 관계에 대해 뭘 모르고 하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 관계가 지상에 하나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만남은 처음엔 별로였다. 별 놈 없다였다가 이제 내 반쪽에 대적할 자가 없게 되었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또는 사랑으로 시작되었다가 신뢰와 의리, 정으로 그 관계가 지속되었다. 이제 하나만 빠져도 불완전체다. 둘은 마치 혼연일체가 되기 위해 이 세상에 온 듯하다. 이보다 더한 콜라보나 명 콤비는 쉽게 찾을 수 없다. 사랑이 싹트는 연애 시절과 신혼 초의 가난한 생활, 아이를 기르던 행복했던 순간들을 포함해 둘이 산전수전 공중전, 우주전까지 겪었다. 사내못사내 피 튀기며 싸우고 이제 서로 힘에 부쳐 절충점에 이르렀다. 삐거덕거리는 과정을 거쳐 어느 정도 맞춰진 것이다. 그러나 완전히 끝난 건 아니다. 종전이 아니라 휴전 상태다. 둘이 엉겨붙어 굴러가면서 처음보다 좀 더 동그스름해졌을 뿐이다. 상대의 치명적인 급소나 역린(逆鱗)은 피하는 단계에 왔다. 그러면서 수용할 건 수용하고, 포기할 건 포기한다. 대내외적으로 찰떡궁합, 일심동체가 되어 맹활약 중이다.
은밀한 장소에서나 있을법한 필터링 없는 남녀 간의 육체적 대화와 찰진 육두문자가 난무하며 주변 공기를 끈적이게 하고 혼탁하게 물들임과 동시에 시청자의 수준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신체 용어가 날 것 그대로 날아다니는 리얼 19금 드라마, <LTNS>처럼 나쁜 짓까지도 그 부부는 함께한다. 남의 불륜 협박으로 먹고살지만 이들의 관계가 깨지지 않는 건 실은 상대를 어쩌면 나보다 더 아끼는 마음이리라. 그는 내게 무조건 온다. 이혼하고도 내게 오게 되어 있다. 의지가 향하는 곳은 결국 그들만의 접점을 다시 구성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들 사이에 가장 익숙했던 음란한 짓부터 시작한다. 내가 슬프거나 위험에 처하면 상대는 반드시 달려온다. 아니 자동으로 내가 먼저 그를 구하기 위해 달려간다. 서로가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이고 관계다. 다른 사람과는-오직 우리 둘 사이에만 있는-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 비록 이혼했지만 그들의 무의식 저 심연(深淵)에는 원래 자리했던 곳, 언젠가는 가정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이건, 이민 간 사람이 고국에 가서 생을 마감하고 싶다거나, 시한부 인생의 장기 입원 환자가 자꾸 집에 가자고 하는 것하고 비슷할 터이다. 생리적으로 그들은 그곳이 그립고 끌린다. 생명이 있는 한, 거기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을 수 없다.
이들을 끈으로 이어주는 건 그 유일무이한 관계 때문이다. 일탈이나 외도로 다른 사람과 그걸 재현해 보려고도 했지만 “이게 아닌데.”라는 것만 거듭 깨달을 뿐이다. 그와 나만 그 관계를 구현할 수 있고, 그건 우릴 지배하고 있다. 서로를 강하게 끌어당기는 N극과 S극이 되어 서로를 진짜로는 배신하지 못하게 만들어 놨다. 내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는, 우릴 이어주는 그 신묘한 끈은 다른 사람과의 사이에선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 끈에 우린 둘 다 중독되었다. 지칠 때 자연스럽고 익숙한 그곳으로 가서 몸과 마음을 쉬고 싶다. 그래야만 뭔가 부족하고 불완전했던 것이 비로소 완결되는 느낌이다. 다른 관계는 흔들리고 정착이 안 된다. 마치 주부 9단이 이제 친정도 시집도 아닌 자기 집 주방에서 손에 익어 제대로 음식을 만들면서 “아, 진정 여기가 내 왕국이었어!” 하며 새삼 깨닫듯이. 서로에게 포로가 되고 말았다. 그걸 잊지 못해 둘은 다시 만나게 되어 있다. 그 끈이 서로를 자석처럼 당겨 다시 접점을 이룬다. 다시 교점을 이루며 서로가 절대 대체가 안 되는 존재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내 마음에 들어앉아 그 자리를 누구에게도 내줄 생각이 없다. 마음의 여러 조각 중에서 유동되지 않는, 그 자리를 그는 꿈쩍 않고 차지하고 있다. 내 마음의 요지부동 상수이고, 나머지는 변수다. 그것도 모자라 그는 내 마음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붙박이로. 나머지 20인 변수는 그 자리에 절대 들어오지 못한다. 다만 변두리만 맴돌 뿐이다. 그는 안 먹으면 생존이 보장되지 않는 밥이고, 나머진 안 먹어도 그만인 심심풀이 땅콩이다. 어떤 매력적인 이성에게도 난공불락인 내 마음의 요새에서, 그는 천하무적이 되어 움직일 줄 모른다.
기사단장 죽이기
D-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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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살기
지금은 잠시 그것을 잊을 정도로 사회가
우울 사회로 진입했지만, 역시 인간에겐
생존과 번식이라는 본능이 있 는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본능이므로 다시 회복할 거라고 본다.
이건 인간 누구나, 아니 생명이 있는 거라면
그 어느 것이나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걸 생각하면 인간은 그저 조상과 후손의
DNA를 전달하는 중개자에
불과한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삶이 헛되다.
이럼에도, 20세기와 21세기에 걸쳐
60 가까이 살아오고, 3만 권 가까운 책을 읽었고
책을 5권 내면서
나름대로 얻은 결론이라면,
이 세상에 온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깨닫고 그 기질 대로 사는 거라고 본다.
자기 캐릭터를 열심히 찾아 방해꾼들을 무찌르면서
그걸 가장 잘 살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그래야만 유전자 중간 전달자에 불과한 부질없는 일생에서
그나마 자기의 고유한 성취를 얻을 수 있고
그 속에서 행복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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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을 읽을 때 만사 다 잊고 행복감에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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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게으른데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게 아니면 게으르게
그냥 기본만 하고 대충한다.
아무 눈에도 안 띄게
그게 대개는 먹고 사는 것인데, 즉 직장일인데
거기에 30을 주고, 내 진짜 일에 70을 안배한다.
그런 것에 시간과 에너지를 빼앗기는 게 너무 아깝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위해 루틴을 지킨다.
누가 이걸 흐트러뜨리면 그를 그 자리에서 죽일지도 모른다.
내 루틴이 흐트러지면 내 고유한 업무에
집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책에 모든 게 수렴되어 있다.
모든 에너지가 여기에 집중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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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누구에게나 포용적이고 개방적인가?
일반인이 작가는 포용적(包容的)이고 마음이
개방적일 거라고 믿는 경향이 있는데,
작가는 상대가 뭔가 내가 깨닫지 못한 통상적인 게 아닌
새로운 것, 일상에선 있을 법하지 않은 이론을 펼친다면
그는 한없이 포용적이고, 마음이 무한하게 개방적일 것이다.
그러나 그 상대가 너무 뻔한, 너무 지당하신 말씀으로
나를 가르치려 하고 그러면 안 된다고 충고하려고 들면
(물론 누구나 흔히 말할 수 있는 것을 갖고서)
그에게 포용이나 개방적인 게 아닌
그 반대로 거부하고 편협된 이론으로 누르려고 할 것이다.
작가는 그런 흔하고 누구나 이미 아는 이론으로는
설득이 안 된 다.
뭔가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 기존 틀을 부수는 이론을
들고 그를 설득하면 기꺼이 설득당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한없이 권위적이고
폐쇄적으로 바뀌어 그 상대를 대할 것이다.
상대가 싫어할 것 같은 모습을 일부러 보일 것이다.
자기를 싫어하도록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
뻔한 이야기 좀 그만하라고,
더이상 나는 거기에 엮여
시간 낭비와 에너지를 빼앗기기 싫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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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지금 자기를 지배하는 것을, 그가 가장 관심을 갖고 있고 가장 파고 싶고 좋아하는 것을 쓰게 되어 있다. 어떤 의무나 사명에 의해 다른 주제에 대해 쓰더라도 중간에 이런 자기 관심을 항상 드러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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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은 자기 문화에 대해 자부심이 강한 것 같다. 그리고 그 특징이 겉으로 드러난다. 얼른 보면 막 목욕을 하고 나온 모습이다. 뭔가 청결하고 맑고 깨끗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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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하면 예술을 하자
억압받고 자란 사람은 대개는
남에게 상처를 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것에 대한 뉘우침 같은 건 잘 없다.
그것이 자기 상처에 대한 자그마한 보상이라고 생각하고
자기는 충분히 그럴만하고 내 고통에 비해서는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게 반복된다.
이런 울분을 예술로 승화하면 좋을 텐데.
억울함과 열등감과 울분이 결여된 예술 작품은
그 맛이 너무 밍밍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특유의 한이 서린
판소리나 아리랑이 그렇다.
백인에게 핍박받은 아프리카 음악도 이런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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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맞는 사람
어떤 사람과 대화할 때 그와 같은 시간을 보내면 기가 빨리고
뭔가 상처를 받고 들은 말에 대해 되뇌며 종일 생각하고
그것도 모자라 글로 반박할 때도 있다.
욕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 인간하고 “다신, 만나지 말아야지!” 하고 결심한다.
왜냐면 별로 즐겁지 않고 불쾌하고, 시간이 아깝고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기도하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나중엔, 직장생활이라 할 수 없이
만날 수밖에 없으면 방어막을 친다.
그의 말을 일단은 듣는다.
그의 말을 소재로 한 반박 글을 쓰기 위해
그러면 내 글 실력만은 확실히 늘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안 좋은 것엔 부정적인 것만 있는 게 아니라
관점에 따라서 좋은 점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실제 찾으면 많다.
그리고 그 사람 앞에선 부정적인 견해만 말하는 것이다.
내가 별 볼 일 없는 인간이고 뭔가 염세적이고
회의적인 사람이라고 판단하게 해서
나를 싫어하게 만들기 위함이다.
그러면서 그 사람과의 대화가 즐겁지 않다는 신호를 보내며
싫은 티를 팍팍 내는 것이다.
대개의 사람은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그러나 아무리 기분이 안 좋은 상태에서 술을 많이 먹어도
상대에게 주사를 안 부릴 때가 있다.
아니 못 부리는 것이다.
아끼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뭔가 나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안 해 그런 것 같다.
성정이 비슷해서 상대가 듣기 싫은 말이 어떤 건지
잘 알기 때문이리라.
이런 사람은 자꾸 만나고 싶어진다.
나는 이런 사람을 나와 비슷한 기질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와 MBTI가 맞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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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생 책만 읽고 공부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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