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사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잘 죽는 것이라는 생각을 요즘 들어 부쩍 자주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시간 동안 만날 책들, 시간에 대한 욕심이라는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네요. 저도 제 삶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남은 시간 동안 제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채울 수 있는 삶이길 바라게 되는 것 같아요.
[그믐밤] 19. <주종은 가리지 않습니다만> 부제: 애주가를 위한 밤
D-29
연해
poiein
1. 지방 소도시 거주자여서 와인샵이 매우 귀한데, 1~2년전부터 편의점에서 와인 사는 게 널널해져서 행복해졌죠. 점주님과 문자 주고받으며 구할 수 있게 되면서 와인 구입에 대한 허기가 많이 가셨어요. 와인은 이 소설처럼 '분연한 권력의 세계'일수 있겠지만, 제겐 그저 늦은 밤 책 일을 때 함께 하는 친구같은 존재입니다.
2. 임금노동자로 야근을 주구장창하느라 책 한 번 만지지 못하고 쓰러져 잘 때
3. 우리집 와인셀러에 가만히 누워 있다가 바라보면 말 걸때입니다. 그냥 와인이 말을 겁니다.ㅎㅎ^^
+
와인 인터넷 카페나 동호회 정모 참여해보면 와인을 일종의 권력놀이로 삼는 사람들이 있긴 했어요. 그래봤자 술인데, 놀이에 시큰둥한 사람들끼리 옹기종기 모여 잔 부딪히면 세상사 다 잊고 잠깐 충만한 순간이 좋았습니다. 그랬는데 역병이 창궐하면서 만나지 못한 2~3년이 제법 긴 시간이더라구요. 다시 발동이 도통 걸리질 않으니 말예요. 다들 혼자, 집에서, 침묵속에서 마시고들 있나 봐요.
유안
그럼요,늦은 밤 와인은 그저 친구같은 존재 :)
저는 아주 방금 읽던 책을 내려놓고 그믐에 왔는데요, @poiein 님 말씀을 읽다보니... 갑자기 와인을 읽으며 책을 더 읽을까 싶어졌어요. 와인이 말을 거네요..쓰는 일을 좀 더 하고 자려고 했는데, 정말이지 와인이 강력하게 말을 겁니다...!
연해
와인이 말을 건다는 두 분의 말씀에 가만히 미소 지었는데, 김혜나 작가님의 소설에서도 "계속 빚다 보면, 술이 말하는 이야기가 들려"라는 문장이 참 좋았던 기억도 떠오릅니다.
저는 지난주 그믐밤 북토크 때 마시고 남은 '화요'가 아직도 냉장고에 있어요.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얘가 말을 거는 것 같은데(조용히 해), 어찌해야 할지 고민입니다(하하하).
유안
@연해 님 말씀 보면서 '달콤 쌉싸름한 탁주'와 '얼리지'의 주인공이 같이 있는 모습을 상상해봤어요.! 새로운 술을 만들고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하하 한 명이 술에 대한 아는 것들을 설명해주고, 다른 한 명이 이렇게 만들면 더 맛있겠다고 시도해보고...행복하겠네요!
술빚는소설가
화요 같은 증류주는 유통기한이 없으니 두고두고 오래 드셔요~ 참고로 건강에 좋은 적정 음주량은 2잔씩 주2회 정도 마시는 거라고 합니다 ㅎㅎㅎ
거북별85
2번이 너무 공감가네요~~임금노동자로 야근을 주구장창하다가 책 한번 만지지 못하고 쓰러질때!! 저도 일하다보면 당장의 일을 해결하느라 책 근처도 못갈 때도 있는데 이런 날이 일주일만 넘어가도 우울해지더라구요~ㅜㅜ 그래도 집에 와인바가 있다니 멋지네요~~^^
프렐류드
1. 소주는 혼자 마시지 않는데, 와인은 어쩐지 혼자 마셔도 어색하지 않은 술입니다. 레스토랑에 가서 마시기에는 가격이 너무 비싸서 친구들과 집에서 마실때 좋기도 하구요.
2. 삶의 빈틈이 너무 많네요. 먹다 남긴 와인을 코르크 마개를 뒤집어 끼워서 생긴거만큼 큰 틈요. ㅠㅠ
3. 와인이 가장 맛있어 보이는 순간은 아무래도 아무래도 와인을 따서 코르크향을 맡아봤을 때의 낯선 향이 코로 스밀때죠.
생각하니 재밌네요.
유안
오 맞아요! 와인은 혼자 마셔도 어색하지 않죠! 집에서 한 잔씩, 와인은 그렇게 마시는 술이라 제가 와인을 더 좋아했구나..하는 깊은 깨달음을 방금 얻었어요.
와인이 맛있어 보이는 순간이 코르크향 맡을 때라는 말씀을 읽 다가 갑자기 생각났는데요! 막 따 놓은 와인에서 이런 저런 향이 나올 때 저도 은근히 기분이 좋아지는데, 커피 원두 막 열었을 때처럼요, 그런 향긋한 느낌이 막 딴 와인병에 있는 것 같아요. (오늘 커피 원두 사와서 막 열어보고 향을 맡으며 갑자기 기분까지 좋아졌던 게 갑자기 기억났거든요) 커피 원두 봉투 열 때와 와인병 딸 때, 저도 그 순간을 굉장히 기분 좋게 생각해왔었네요~
거북별85
명절 때 시댁과 친정을 다녀오고 그냥 무생물처럼 늘어져 있느라(정말 4년만에 가장 많이 늘어져 있었어요.^^) 오늘 최유안 작가님의 <얼리지>를 오늘 출근하면서 읽었습니다. 그런데 기차안에서 너무 푹 빠져서 읽었어요.. 와인에 문외한이라 공감을 못하겠지라고 지레 짐작했는데 와인을 권력과 연결시키는 구조가 참 흥미로웠습니다.
임교수란 인물이 참 얄미운데 어쩔수 없이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는 인물이라 안타까웠어요.. 지금도 어디든 있는 사람이겠죠. 디플로마를 따고 나름 자신감을 갖고 있는 자신의 제자인 주인공을 살살 자기 밑으로 두는 능력도 출중하시구... 디플로마를 없지만 와인업계를 쥐락펴락하는 그의 모습이 참 안타깝네요... 그 모임에 초대된 주인공이 이물질처럼 느껴지는 모습도 그렇구(주인공에게 깊이 몰입되더라구요.).. 문장과 전개가 참 재미있고 공감가고 새로 알게 된 느낌이 들어 좋았어요.
1. 전 와인에 대해서 아는 바는 없지만 그냥 옛날 미국이나 유럽 영화를 보면 왠지 풍요로운 집단의 모임이라면 하나쯤은 갖추어야 할 부의 상징같은 느낌이네요. 커다란 TV 속 부유한 나라의 흥겨운 모임을 보며 난 초록색 병의 소줏를 두부김치와 곁들이며 봐야 할 거 같은 느낌. 낯설어 보이지만 왠지 속하고 싶다는 바램도 잠깐 들기도 하는....
다행인건 그 때의 와인과 소주의 위상이 옛날과는 바뀌었다는게 감사한 일인거 같아요.^^;;
3. 와인이 가장 맛있어 보이는 순간은? 왠지 연말분위기 입니다. 행복한 웃음과 풍족한 음식들 사이에서 레드와인이 곁들여 있다면 맛있어 보입니다. 전 해산물보다는 스테이크와 레드와인이 더 잘 떠오르는 건 아무래도 과거 미디어의 영향일까요?
유안
저도요! '와인'이라고 하면 '레드와인'이 화이트와인이나 샴페인보다 먼저 떠올라요. 신기한 일이죠..!
맞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미디어의 영향도 있을 것 같고요, 말씀을 읽으며 고민해보니, 와인이 애초에 레드와인으로 시작해서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레드 와인이 압도적으로 숫자도 많고 마시는 사람도 많은 탓이 아닐까 추측도 되었어요. 디오니소스적에도 포도주는 붉은 색이었을 거라는 얘기를 와인 역사를 공부할 때 배웠던 기억이 납니다....
거북별85
2 나의 '얼리지'는 뭘까?? 생각해 보니 여유로움, 참을성(지금도 일반인보다는 높은편이라고 자신하지만 아무래도 에너지가 부족해지면서 점점 낮아지는거 같아요~ㅜㅜ) 등이 떠오르네요
가족들과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다 창밖으로 늬엿늬엿 지는 해를 여유롭게 바라보며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책들을 방바닥에 늘어놓고 자다깨다 반복하며 책을 읽고 상상하던 여유가 요즘은 많이 사라진거 같아요 그 때는 그 시간이 백수처럼 느껴져서 가끔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나이들스록 느끼는 건 쓸데없는 시간과 사건은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때 불안한 미래보다 그 여유로운 시간을 오롯이 더 즐겼더라면 좋았을텐데 싶어요 지금은 여유는 없지만 짧은 시간이라도 밀도있게 다정하게 보내고 싶어 가족들과 시간을 내는 편입니다
예전보다 에너지를 덜 들이고 상황을 판단하려는 경향도 안타깝지만 점점 늘어나는 거 같구요 차근차근 다 듣고 두루두루 살펴보기보다 빠르게 판단하고 선택하려는 경향이 늘어나는거 같구 아무래도 여유가 없고 직업적 특성 때문인거 같은데 음~~이렇게 아쉬운 저의 얼리지를 조금이라도 곁에 두고자 책을 읽고 이야기 나누기를 계속 찾아서 이어나가는 중이랍니다
유안
@거북별85 님 말씀 중에 '불안한 미래' 이 말씀에 정말 공감했는데.. 그것이 우리를 점점 참을성 없게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불안하니까, 여유도 없어지고, 효율적인 판단을 하는 쪽으로 스스로를 변화 시켜온 것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맞아요, 여유있는 시간이 정말 적어도, 그래도 그 쉼을 밀도있는 다정한 시간으로 채우며, 살아보아요! 책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거북별85
전 이번에 최유안 작가님 <얼리지> 너무 재미있게 읽었어요 다음에 작가님 책들 찾아서 읽어봐야겠어요^^
정말 와인이 거대자본과 연관이 있긴 한가요?? 와인과 음모론이라니 상상도 못했지만 공감이 가더라구요
<얼리지>의 임교수는 <달콤쌉싸름한 탁주>의 백선생보다 더 무섭고 싫었어요 백선생은 그냥 생각없는 무례한 사람이라면 임교수에게 찍히면 왠지 이세상과 작별해야할것 같은 힘과 치밀함을 가진 사람같았어요 그의 치밀한 무례함에 반격도 시도하기 힘들거 같구~
불안한 미래는 저에게는 그림자처럼 함께 가는 감정인 거 같아요 그럼에도 이처럼 책을 읽고 좋은 이야기를 나눌 공간이 있는 것만 해도 쉴 틈을 주어 감사하지요
최유안 작가님 다음 작품 구상도 있으실까요7?? 작품들이 오피스 위주로 보이던데 그 부분도 신기하고 왜일까 궁금했습니다~~^^
연해
백 선생과 임 교수를 비교해 주신 대목에서 빵 터졌습니다.
"백선생은 그냥 생각없는 무례한 사람이라면 임교수에게 찍히면 왠지 이 세상과 작별해야할 것 같은 힘과 치밀함을 가진 사람같았어요."
맙소사, 무려 이 세상과 작별이라니요(ㅋ). 어쩜 이렇게 표현을 찰떡같이 잘해주시는 걸까요. 근데 저도 딱 이런 마음이었습니다. 대놓고 무례한 사람보다 웃으면서 교묘하게 괴롭히는 사람들이 더 무섭죠. 찍히면 무조건 도망쳐야 합니다. 웃으면서 다가와 소리 없이 칼을 꽂을 사...(저 너무 또 멀리 가고 있나요)
김새섬
그도 그럴 것이, 내게 와인은 일종의 예술이었다. 나오는 것마다 다른 맛과 향을 내는 포도주는 차라리 예술의 영역이었고, 나는 그것을 경험하고 알리는 예술가였다.
『주종은 가리지 않습니다만』 얼리지, 최유안 , 김혜나 외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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냅다
1. 미국에 10년, 독일에 7년째 살면서 이제 와인은 부담없고 편안한 술이 되었어요. 그 전에는 선뜻 다가가기 어려운 친구였고요.
2. 실은 얼리지라는 메타포를 제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나 싶어서 답글을 다는데 시간이 좀 걸렸어요. 처음 이곳에서 얼리지라는 단어 설명을 듣고 저는 되게 긍정적인 좋은 의미로 받아들였거든요. 그래서 혼란이 좀 있었던 것 같아요.
소설로 돌아가 보니 얼리지라는 단어 안에 고인 서늘한 기운이 이해가 되었어요. ‘유일한 손실의 공간’이라 하셨으니, 채워지지 않은 것, 결핍 같은 것을 말하겠죠. 사회적 얼리지로 만든 술이라고 왜 말하지 않냐는 한동찬의 힐난을 겹쳐보면 ‘술병 안에 든, 술 이외의 세계’를 말하는 것도 같고요. 술맛이 변질되었거나 산화되었음을 알려주는 표식이 될 수도 있다고도 하니 그렇게 변질되고 잃어가는 것에 관한, 아름답고 의미있는 메타포일 수 있겠다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얼리지는 꼭 필요하고 중요한 것,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유안 작가님의 질문에 여전히 어떻게 답을 달아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긍정적이기도 부정적이기도 한 단어를 두고 제가 갈피를 못 잡는 것입니다.
침묵이 없는 말은 말이 아니듯, 삶이 빈틈없이 꽉 채워져 충만하다면 그건 애초에 삶이 아닐 것 같아요. 아마 얼리지 없이는 와인도 존재하기 어렵겠죠. 틈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제대로 숨 쉬면서 살기 어렵고, 그러므로 반드시 만들어 두어야 하는 공간이고, 그러므로 얼리지는 손실의 공간이라기보다 그 얼리지까지가 충만한 와인 한 병이 아닐까 싶어요.
3. 하루를 힘차게 달리다 오후 서너시쯤 정신이 약간 너덜너덜해질 무렵, 냉장고에 시원한 화이트 와인이 있다고 생각하면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아이들이 투닥투닥 싸우는 소리를 배경으로 그 때 꺼내 마시는 와인 한 잔이 제일 맛있어요.
유안
1. 오래 타지 생활을 하고 계시는군요! (그곳이 타지가 아닐 수도 있지만요..!) 그러면서도 한국 책도 계속 읽으시고, 이런 모임들을 꾸준히 해나가시는 동력이 갑자기 궁금해졌어요!! 멋지신데요!
2. 너무 멋진 말씀이세요. 말씀하신대로 사전적인 의미의 '얼리지'라는 것 자체는 중립적인 단어입니다. 이 단어를 제목으로까지 세우게 된 경위가 생각났는데요, 애초에 얼리지는 술이 병입되면서 끝까지 채울 수 없어 남겨둔,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공간이에요. 그런데 얼리지가 어느 정도냐에 따라 그 와인이 상했는지 상하지 않았는지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소설에서 한동찬이 이야기한 '사회적 얼리지'는, 사회를 와인에 비유해서, 사회가 부패해서 늘어난 얼리지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그렇지만 얼리지 자체는 @냅다 님 말씀처럼 해석할 수도 있겠네요! 그리고 변질되어가는 것에 대한 아름다운 메타포라는 해석도 참 아름다웠어요!
그래서 얼리지라는 단어를 삶에 비유하자면, 본인의 손실된 부분, 원했든 원치 않았든 사라진 부분이라고 생각했어요. 인간에게 손실의 공간이 없기는 어려우니까요. 저는 이 질문을 북토크 때 받았었는데요, 덕분에 내 삶에서 의도치 않게 손실된 부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그 덕에 제가 지금의 형태로, 이런 생각의 구조를 갖추며 살게 되었다는 것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얼리지가 어떤 형태로 각자의 삶 안에 존재하든, 그것을 되짚어보시며 여러분도 그런 경험을 해보시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3. 와 서너시쯤 화이트와인! 시도해봐야겠어요, 해가 막 짙어지는 그 시간의 화이트와인 한 잔은 상상만으로도 맛있겠네요....! :)
연해
@냅다 님의 2번 답변을 읽고 생각이 조금 더 열린 기분이에요. 저는 얼리지를 손실이자 결핍의 의미로도 생각했는데, 긍정적이기도 부정적이기도 하다는 말씀과 "침묵이 없는 말은 말이 아니듯, 삶이 빈틈없이 꽉 채워져 충만하다면 그건 애초에 삶이 아닐 것 같아요."라는 말씀 덕분에 말이죠.
오후 서너시쯤의 와인 한 잔이 제일 맛있으시군요. 저에게 술은 저녁에만 허용(?)되는데, 이것 또한 새롭습니다.
연해
“ 나는 와인에 집중하는 내 모습이 좋았다. 굳이 잘 다니던 회사를 집어치우고 와인 공부를 시작한 이유가 그거였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술이 좋다기보다 와인이 좋았다. 와인은 내게 절박함보다 고결함이었다. 각박한 세상 속에 살더라도 고고함은 잃지 않겠다는 일종의 비기였다. ”
『주종은 가리지 않습니다만』 얼리지, 김혜나 외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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