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이 땅의 노동자 역사의 주인인 노동자
더 이상 벼랑 끝에 흔들릴 수는 없다 딸들아 일어나라 깨어라
이 땅의 노동자로 태어나 자랑스런 딸로 태어나
고귀한 모성보호 다 빼앗겨버리고 참아왔던 그 시절 몇몇 해
나가자 깨부수자 성차별 노동착취 뭉치자 투쟁이다 여성 해방 노동 해방
이 노래는 성별 문제뿐 아니라 사회의 약자 전반에 대한 우리 사회의 접근 방식을 요약한다. 이 노래를 줄기차게 부르던 시대는 지났지만(?), '여성의 각성'으로 대표되는 주제는 여전히 작동한다.
"딸들아 일어나라"의 문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여성'이 아니라 '딸'이라는 성 역할 지칭은 계몽의 주체로서 남성 어른의 시각을 반영한다. 여성과 딸ㅇ느 다른 사람, 다른 범주이다. 남성 중심 사회의 작동 방식을 상징하는 용어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귀결은 남성 연대이다. 아버지와 아들 간의 남성 연대는 강조되고, 딸은 동성인 어머니가 아니라 남성과의 관계를 통해 사회와 연결된다. 여성이 인간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딸, 어머니, 누이, '창녀' 등의 성 역할로 정의되기 때문이다. 남성의 성 역할과 인간 개념은 일치하지만, 여성에게는 배타적이거나 택일의 문제가 된다.
둘째, 이 노래는 약자에 대한 이중 메시지다. 여성이 의식화돼 '일어나서' 저항하면, 곧바로 '꼴통 페미'로 몰린다. 성별과 무관한 글을 써도 필자가 여성이면 악성 댓글에 시달리는 사회다. 이 노래의 지시대로, 딸들이 일어나도 사회가 반가워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여성이 순종하면 '멍청'하다고 무시하고, 저항하면 '재수 없거나' 최소한 매우 불편해한다. 저항을 해도 하지 않아도 문제라는 얘기다.
셋째가 가장 중요하다. 이 노래는 성차별의 원인을 '여성의 각성 부족'으로 본다. 차라리 그랬으면 '해결'이 간단하련만 현실은 정반대다. 남성에 비해 여성의 '지나친' 각성이 '문제'인 시대다...그런데도 성차별의 원인이 사회나 남성 문화가 아니라 '깨어나지 못한 여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누가 '원인' 제공자인가? 여성, 장애인, 노인, 건강 약자에 대한 모욕과 차별이 그들의 대응 부재 때문인가, 아니면 사회 구조 때문인가? 쉬운 비유를 들면 지금의 환경 파괴는 지구의 잘못인가? 그래서 지구가 변해야 하는가?
이 노래는 위력적이다. 피해자가 해결사로 나서라는 메시지의 목표는, 차별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전가한다. 동시에 가해자에게는 우아한 조정자, 시혜자(권력 배분의 관리자), 배려와 관용의 주체로서 위상을 부여한다. 억압 집단은 조금도 손상을 입지 않는다. ”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성정치학의 쟁점들』 30-31, 정희진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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