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읽기 위한 모임입니다 : )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읽기
D-29
수우모임지기의 말
수우
“ 정치사상사에서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가장 큰 기여는 사적 영역으로 간주되던 영역을 정치화했다는 점이다.("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 공사 영역의 구분과 성별화는 근대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모든 인간은 신 앞에, 법 앞에 평등해야 한다는 근대적 보편주의는 여성에게도 적용되어야 했기에 가부장제와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사적 영역은 근대의 보편주의가 지배층인 백인 남성을 기준으로 삼아 다른 존재(여성, 장애인...)를 보편적 인간의 범주에서 제외하기 위해 탄생시킨 개념이다. 그들은 '집에 있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말할 것도 없이 공적 영역은 사적 영역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다. 사적 영역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재생산 노동은 인류를 지속시키지만 철저히 탈정치화, 비가시화 되어왔다. ”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성정치학의 쟁점들』 12, 정희진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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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우
차이가 차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차이를 규정한다는 말은 영원한 진리다. 자명한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성정치학의 쟁점들』 17, 정희진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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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우
“ 우리는 이 땅의 노동자 역사의 주인인 노동자
더 이상 벼랑 끝에 흔들릴 수는 없다 딸들아 일어나라 깨어라
이 땅의 노동자로 태어나 자랑스런 딸로 태어나
고귀한 모성보호 다 빼앗겨버리고 참아왔던 그 시절 몇몇 해
나가자 깨부수자 성차별 노동착취 뭉치자 투쟁이다 여성 해방 노동 해방
이 노래는 성별 문제뿐 아니라 사회의 약자 전반에 대한 우리 사회의 접근 방식을 요약한다. 이 노래를 줄기차게 부르던 시대는 지났지만(?), '여성의 각성'으로 대표되는 주제는 여전히 작동한다.
"딸들아 일어나라"의 문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여성'이 아니라 '딸'이라는 성 역할 지칭은 계몽의 주체로서 남성 어른의 시각을 반영한다. 여성과 딸ㅇ느 다른 사람, 다른 범주이다. 남성 중심 사회의 작동 방식을 상징하는 용어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귀결은 남성 연대이다. 아버지와 아들 간의 남성 연대는 강조되고, 딸은 동성인 어머니가 아니라 남성과의 관계를 통해 사회와 연결된다. 여성이 인간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딸, 어머니, 누이, '창녀' 등의 성 역할로 정의되기 때문이다. 남성의 성 역할과 인간 개념은 일치하지만, 여성에게는 배타적이거나 택일의 문제가 된다.
둘째, 이 노래는 약자에 대한 이중 메시지다. 여성이 의식화돼 '일어나서' 저항하면, 곧바로 '꼴통 페미'로 몰린다. 성별과 무관한 글을 써도 필자가 여성이면 악성 댓글에 시달리는 사회다. 이 노래의 지시대로, 딸들이 일어나도 사회가 반가워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여성이 순종하면 '멍청'하다고 무시하고, 저항하면 '재수 없거나' 최소한 매우 불편해한다. 저항을 해도 하지 않아도 문제라는 얘기다.
셋째가 가장 중요하다. 이 노래는 성차별의 원인을 '여성의 각성 부족'으로 본다. 차라리 그랬으면 '해결'이 간단하련만 현실은 정반대다. 남성에 비해 여성의 '지나친' 각성이 '문제'인 시대다...그런데도 성차별의 원인이 사회나 남성 문화가 아니라 '깨어나지 못한 여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누가 '원인' 제공자인가? 여성, 장애인, 노인, 건강 약자에 대한 모욕과 차별이 그들의 대응 부재 때문인가, 아니면 사회 구조 때문인가? 쉬운 비유를 들면 지금의 환경 파괴는 지구의 잘못인가? 그래서 지구가 변해야 하는가?
이 노래는 위력적이다. 피해자가 해결사로 나서라는 메시지의 목표는, 차별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전가한다. 동시에 가해자에게는 우아한 조정자, 시혜자(권력 배분의 관리자), 배려와 관용의 주체로서 위상을 부여한다. 억압 집단은 조금도 손상을 입지 않는다. ”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성정치학의 쟁점들』 30-31, 정희진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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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우
“ 현실에서는 여성에 대한 차별이 일어나는데도, 남녀 간 의식의 불균형 때문에 "남자가 피해자"라는 착각과 피해 의식이 가능한 것이다.
저출산의 원인만큼 오도된 문제도 없을 것이다. 저출산은 출산기피가 아니라 결혼 기피와 만혼의 결과이다. 그러나 정당, 진보 보수, 여성 단체 할 것 없이 출산 기피에 해결책을 맞추고 있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여성의 진보, 남성의 후퇴'가 아니라 두 집단 간 인식의 불균형이다. 개인 차원에서는 남성이 더 고통스럽다. 이유를 모르니 더 힘들 것이다. 자신이 왜 이혼당하는지, 가사를 '도와준다'고 하면 왜 아내가 불같이 화를 내는지, 자신의 호의가 왜 성희롱인지, 왜 자기만 군대에 가야하는지, '여성 상위' 사회에 왜 여성가족부가 있는지, 왜 집에서 '노는'여자가 '많은지', 왜 여자는 외모로 이득을 보는지...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
”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성정치학의 쟁점들』 32-33, 정희진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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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우
“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 '가치관의 혼돈'중 하나는 가부장제와 신자유주의의 갈등이다. 그런데 이 혼란이 여성보다 남성에게 더 불리하게 작용한다. 가부장제에 줄을 선 남성은 낙오자가 되기 쉽고, 신자유주의에 줄 선 남성은 '약삭 빠르거나' 다소 '유연한' 사고로 현실에 적응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더 중요한 장치는 개인의 선택보다 격화되고 있는 남성 간 계급 차이다.
그러나 '87년 체제'이후 현대 교육의 '피해자'는 남성이 되었다. 여기에는 몇 가지 구조적 요인이 있다. 1987년 이후 한국 경제가 글로벌 자본주의에 급속히 편입되면서, 국내의 가부장 문화보다 글로벌 스탠더드가 문화의 헤게모니를 쥐었다. 신자유주의는 매우 억압적인 통치 체제지만, 일부여성이나 소수자에게 작은 틈새를 허용했다. 자본은 성별이나 학력과 무관하게 개인의 능력을 먼저 고려하기 시작했고, 오랜 세월 재능을 억압당한 한국 여성들의 '한'은 폭발적인 사회 진출을 가져왔다.
개인이 속한 정체성 범주(성별, 장애, 지역, 인종...)보다 개인의 자원에 더 매력을 느끼는 신자유주의의 속성을 한국 여성들은 최대한 활용하고 넓혀 놓았다. 1980년대 초반까지 작동한 남성의 '병역-시민권-평생 고용'의 연속선이 끊어지면서, 병역은 차츰 젠더 문제에서 남성 간 계급 문제로 변하고 있다. 군대에 (끌려)가는 남성과 가지 않아도 되는 남성 사이의 계급 문제가 젠더 문제로 오해된 것이다.
성차별은 여전하다. 남녀 간 임금 격차는 여전한다(100대 60). 다만 변화하는 상오항에 남녀가 다르게 대응함으로써, 특히 하층 계급 남성들이 자기만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김중배와 심순애'스토리로 대변되는 남성 심리, 여자는 돈 많은 남자를 좋아한다는 생각은 통념-이데올로기-자격지심의 삼중 합작품이다. 여성들은 남편이 돈벌이가 시원찮아도, 가사나 육아에 적극적이고 여성을 인격적으로 대하면 얼마든지 자신이 생계를 책임질 수 있다고 말한다.
문제는 사회적 자원과 경제력이 없을 수록 열등감 때문에 시간 많은 남성이 더 가사노동을 안한다는 것이다. 남성의 이런 상태는 여성이 결혼을 기피하는 가장 결정적 이유이자 성차별 현실을 요약한다. ...남성 문화는 가사 노동을 루저의 상징으로 삼는다. 여성들은 이 구조를 간파했다. 더욱이 '외모와 능력'을 모두 갖춘 여성들이 많아졌지만, 남성의 의식은 그대로이고 남성의 입장에서는 배우자 구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성정치학의 쟁점들』 34-35, 정희진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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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우
“ 결혼의 본질은 사랑, 친밀감, 신뢰 같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한 사회의 정치 경제학을 형성하는 핵심적 사회 제도라는 사실이다. 결혼과 결혼 제도는 다르다. 결혼 제도는 가정을 도구화한다. 이를 풀어 쓰면 '가정은 사회의 기본 단위'다.
이동 중심의 수렵 사회에서 농경 정착 사회로 넘어가면서 재산(잉여 곡식)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를 빼앗거나 후대에 물려주려는 계급이 생기고, 가족은 난혼에서 일부일처제로 변한다. 재산 상속을 하려면 자녀가 자기 자식으로 증명돼야 하는데 이는 생물학적으로 여성만 안다. 이 때부터 남편이 여성의 성을 통제했고, 여성의 순결은 계급 재생산의 도구가 됐다. 결혼 제도는 계급 사회의 토대이자 산물이고, 자본주의는 성 역할 이데올로기를 확고히 추가했다.
비혼 여성의 증가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의미 있는 파생이다. 여성의 경제적 독립은 말할 것도 없이 남성과의 관계를 재고하는 기회가 되었다. '서구 선진국'에서는 이미 저출산과 함께 1970년대부터 시작되니 현상이다. 어느 사회나 일부일처제 결혼의 가장 큰 동기는, 남성은 가사 노동자를 구하는 것이고, 여성은 원가정에서 독립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가사 노동이 자기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남성에게 여전히 결혼은 필요하다. 게다가 남성에게 결혼 여부는 능력 문제로 간주된다. '미모의 중산층'여성과의 결혼은 남성에게 계층적 지위를 상징한다. 반대로 여성은 고학력, 고소득층일수록 싱글이 많다.
이제 여성은 보호자가 덜 필요하거나, 가정폭력에서 보듯 보호자가 바로 폭력자라고 깨닫고 있다. 남성의 '박력'이 실상은 폭력이고 남성의 '과묵'은 무식의 포장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나는 국가보다 남성 개인의 인식과 태도가 육아에서 훨씬 중요하다고 본다. 국가는 남성을 '따라갈' 뿐이다. 육아가 여성 운동의 의제인 것 자체가 문제적이다. 육아는 남성의 성 역할이 되어야 한다. 남성도 육아와 모성으로 인한 죄의식, 스트레스, 자기 분열, 커리어 포기 경험을 겪어야 한다.
"여성은 남성보다(취업 여부에 상관없이) 더 오래 집안일을 한다. 세계 어디서나 마찬가지다. OECD 회원국 전체의 평균을 냈을 때, 남자는 141분 집안일을 하고 여자는 273분을 일한다. 거의 두 배에 달하는 시간이다." 대한민국은 여섯 배 이상이다. 여성이 아이를 낳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남성이 가사 노동을 절대로, 죽어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성정치학의 쟁점들』 36-40, 정희진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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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우
“ 미소지니는 여성 개인을 혐오하는 행위가 아니다. 여성은 여성이기 이전에 인간이다. 당연히 여성이라고 해서 모두 착하지 않다. 미소지니는 한 인간을 동일한 성격을 지닌 집단성으로 조작하는 행위를 뜻한다. 내가 미소지니를 번역하지 않고 사용하는 이유는 혐오라는 단어가 주는 피로감, 남성 혐오라는 황당한 대칭어의 생산, 그리고 이 문제가 여성에 국한되지 않는 사회적 약자 전반을 지배하는 전략이기 때문이다.
미소지니의 논리는 여자는 모두, 그저 여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여성을 어머니와 창녀로 이분화하고 그 스펙트럼 안에서 평가하는 방식이다. 미소지니는 상대를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마음대로 규정하는 사고방식이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사고인 가부장주의와 동양에 대한 서구의 상상(망상)인 오리엔탈리즘, 이 두가지가 문명의 두 축이다.
대상과 대상화는 다르다. 누구나 대상일 수 있다.. 대상화는 '나'를 설명하기 위해 타인을 동원한다. 이성애의 정상성은 동성애에 대한 낙인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고, 결혼 제도의 정상성은 이혼과 저출산이 문제라는 사고방식이 없다면 작동할 수 없다. 흰 피부의 우월성은 흑인의 존재를 전재한다. 이것이 사고방식으로서 '미소지니'다.
여성주의는 여성성과 남성성이 모두 자원이 되지 않는 사회를 추구하고 지향하는 사상이다. ”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성정치학의 쟁점들』 45-50, 정희진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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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우
“ 이처럼 성희롱은 '발생한 그대로 자명한 사건'이 되지 못한다. 성희롱이 사회적 권력관계에 따라 경합하는 개념임을 인식하는 것이 여성주의요, 피해자의 인권을 존중하는 태도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바로 여성주의로 대표되는 사회적 약자의 비가시화된 경험, 그들의 목소리, 그리고 해석이다. ”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성정치학의 쟁점들』 정희진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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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우
“ 여성 살해를 정신 질환 환자의 우발적 일탈로 믿고 싶은 남성 문화는 인류의 반인 여성이 자신의 성별 때문에 평생을 공포 상태에서 살아가야 하는 구조의 핵심이다. 남성 문화는 성폭력이나 여성 살해를 일부 '미친' 남성의 발작으로 여김으로써 성차별 구조를 은폐한다.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 그들의 존재로 인해 '나'는 가만히 앉아서 '괜찮은 남자'가 되는 것이다.
'미친 여자'라는 낙인은 '창녀'와 함께 여성 환자는 물론 전체 여성을 통제하는 강력한 남성 권력이다.
성폭력이 지속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남성 문화에서 가해자는 처벌받ㄷ지 않거나 약한 처벌을 받는 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성정치학의 쟁점들』 정희진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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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우
“ 난민 이슈가 중요한 이유는 수용 여부 자체'보다' 한국 사회 내부의 차별과 순혈주의 망상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난민 반대'는 자본주의의 절대 지배 속에서 누가 더 약자이고 더 고통받는가를 경쟁하는 비극의 정치일 뿐이다. ...1970년대부터 날식민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서구가 비서구 사회의 야만성을 부각하기 위해 아시아와 아프리카 여성의 '열악한'인권 인권 이미지를 활용해 왔다고 강력하게 비판해 왔다. '서구 선진국'에도 여성에 대한 폭력은 넘쳐난다. 양상이 다를 뿐이다.
물론 모든 남성이 가해자도 아니고 모든 여성이 피해자도 아니다. 문제는 젠더가 다른 사회 구조와 결합하여 성폭력 공포가 조성되는 방식이다. 권력은 무엇이 가해이고 아닌지를 결정하는 시스템이지, 페니스가 아니다.
흑인, 난민, 노숙인은 쉽게 가해자로 간주된다. 현실은 다르다. 미투 운동에서 보았듯이 예술, 학문, 종교계의 성폭력이 더 교묘하고 만연해 있다. 조직적으로 행해지기 때문이다. 남성 주도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한국 여성 보호=난민 반대'와 '난민이 못된 한국 여성을 강간해야 한ㄷ=난민 찬성'입장이 싸우기도 했다. 왜 '난민은 남성'으로, '한국인은 여성'으로 대표되는가. 한국 남성은 한국인도 아니고 남성도 아닌가? 집단의 성별적 재현. 이는 난민을 위협 세력, 침략자로 만드는 전형적인 수법이다. 이런 사고방식에서는 한국 남성이 이주 여성에게 자행해 온 폭력이 드러나지 않는다. ”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성정치학의 쟁점들』 정희진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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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우
“ 여성의 경험을 대변하는 언어가 없는 사회에서, 여성주의 언어는 여성의 삶을 갱신하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물론 이는 여성 뿐만 아니라 자기 언어를 갖지 못한 식민 상황에 놓인 모든 이들도 마찬가지다. 금지된 말, 나를 억압하는 말, 늘 누군가를 설득해야 하지만 그런 말의 부재 속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투명한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어디까지가 나의 언어고 어디까지가 지배의 언어일까. 사회적 약자에게 이것은 생존의 화두다. 나를 적대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말할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성정치학의 쟁점들』 정희진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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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우
“ 1949년 출간된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에서부터 주디스 버틀러의 '정체성이 아닌 수행성으로서 젠더'에 이르기까지 사상가들의 입장을 거칠게 요약하면 젠더는 다음 세 차원에서 작동한다. 물론 이 세 가지는 서로 의존하며 연결된다.
첫째는 우리에게 익숙한 남성다움/여성다움, 남성성/여성성, 성별, 성별 분업, 성차별이다. (차이가 차별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만들어낸 차이로서 젠더다.
둘째는 계급, 인종과 함께 사회적 분석 범주로 서 젠더, 즉 사회 구성 요소이다. 커피 자판기의 종이컵이 사회라고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뜨거운 물일 것이다. 이 뜨거운 물이 젠더이다. 물을 얼마나 붓는가, 몇 도의 물을 붓느냐에 따라 커피 맛이 달라질 것이다. 프로이트는 젠더를 인간의 무의식으로부터 드러냈다. 젠더를 고려하지 않으면 인간과 사회, 자연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우리 모두 젠더화된 세상에서 살고 있다. 가부장제는 내외부가 없다. 다시 말해 젠더 인식이 없는 지식은 존재할 수 없다 셋째는 메타 젠더로서 '다른 목소리', 새로운 인식론이다. 젠더에 기반하되 젠더를 넘어서는 '대안'으로서 사유를 말한다. 젠더는 '여성 문제'가 아니라 에피스테메, 새로운 인식론이다. ”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성정치학의 쟁점들』 정희진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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