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작가의 <저만치 혼자서>

D-29
<대장 내시경 검사> 삼 년마다 대장 내시경 검사를 받는 화자는, 수면 내시경으로 인한 회복과 후유증으로 인한 사고 방지를 위해 검사 당일 보호자를 대동해야 합니다만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며 직장 생활을 하는 자식이나 퇴직한 회사 동료 혹은 친구에게 부탁하기가 참 난감합니다. 이혼한 전처는 더욱 그러합니다. 결국 집안 청소를 해주는 도우미에게 일당을 주고 보호자로 함께 병원에 가줄 것은 요청하고는 마취가 끝나자 도우미에게 일당을 계산해 주고는 혼자 집으로 돌아옵니다. 칠십이 넘은 노령자에게, 삼 년 마다 대장 내시경 검사를 받는 일은 어쩌면 삼 년마다 죽음과의 거리를 확인하는 일이라는 작가의 설명을 듣는 기분입니다. 1948년에 태어난 작가가 한창 자랄 때인 1960년대 한국의 평균 수명은 53.7세로 채 60세를 넘기지 못하는 노인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환경과 시대에서 성장한 세대가 과연 2022년 평균 수명인 85세까지 살아갈 계획을 세울 수 있었을까요. 그저 열심히 살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제 저절로 살아지는 삶을 살고 있는 셈입니다. 현재 살고 있는 집을 처분해 은행빚을 갚고 작은 평수로 옮기기 위해 부동산에 내놓은 집값도, 사십 년만에 연락 온 첫사랑의 아들 취업 부탁도 사흘 후에 있을 대장 내시경 검사 후에 방향을 정하려던 화자는 검사 결과를 근거로 다시 삼 년의 유예기간을 통보받습니다. '삼 년 전엔 용종 세 개를 제거하고 이번엔 다섯 개를 제거했다고 하니 삼 년 후엔 또 몇 개의 용종을 발견하고 제거할까. 그때까지 아무 일 없이 살아 있을까....' 화자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과연, 기대 수명 85세가 모두에게 행복한 일인가 생각해 봅니다. 1. 나은희의 편지를 받고 나니까, 구석기 지층에서 돌연장이 나오듯이 자니간 것들의 부스러기들이 내 마음에 떠올랐다. 나은희와 마지막 밤을 보낸 여관의 이름은 남북여관이었다. 현관에 노란 백열등이 켜져 있었고 골목에서 지린내가 났고 불씨가 덜 꺼진 연탄재가 쌓여 있었다. 나은희의 머리카락 냄새와 함께 먹던 우동의 조미료 냄새, 대화의 토막들, 과거의 바탕해서는 살길이 없다는 막막함과 그 막막함의 다급함 같은 것들이 떠올랐다. >> 이토록 너무도 생생한 삶을 살았던 화자의 한 순간을 보게 되어 뭉클합니다. 2. 결혼은 물적 토대 위에서 가능하다. 신랑 신부가 안정된 수입의 바탕을 확보하는 일에 힘쓰기를 바란다. 사랑이 아니라, 연민의 힘으로 살아야 오래 살 수 있다. >> 화자의 결혼식에서 주례를 섰던 S교수의 말입니다. '사랑이 아니라, 연민의 힘'이라니요. 오 년전 이혼을 한 화자는 S교수의 주례가 틀린 말이 아니었다고 고백합니다. 3. 딸은 제 남편이 부장에서 이사로 승진했다면서 어쩌면 뉴욕 지사로 발령이 나서 남편과 함께 삼 년쯤 뉴욕에 가서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전했다. 딸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고 아마도 확정된 것을 통고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 떠날 생각을 하면 아빠가 걱정돼요. -걱정 마라. 난 혼자서 잘 살아. 가볍고 홀가분해. '걱정 마라. 난 혼자서 잘 살아. 가볍고 홀가분해.' 이 말이 이 소설의 가장 핵심 대목이지 않나 싶습니다. 한국의 가장 평범한 칠십 대 남자의 일상을 그린 소설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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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자> 9급 공무원이 되기 위해 서너 평의 오피스텔과 길거리 컵밥으로 숙식을 해결하며 이 학원 저 학원으로 몰려다니던 고시생들이 그득하던 노량진에서의 일상을 보여주는 소설로 제목 '영자'는 화자의 동거인 이름입니다. 80년대 노량진을 다만 지나가는 풍경으로만 간직한 제게 어렴풋한 기억을 떠올리게 합니다.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화자는 노량진에서 영자와의 동거를 끝내고 마장면 면사무소로 발령을 받아 업무를 시작합니다. 단풍이 고와도 외지 방문객 하나 찾아오지 않는 구석진 시골에서의 생활은 그에게 큰 희망은 없지만 늘 북적거리고 생동감있던 노량진 풍경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삼수를 하고 있을 영자와의 동거 시절도 그렇습니다. 아르바이트 서너 개를 하며 관리비를 내고 값싼 음식으로 끼니를 잇는 영자의 고달픔이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겠지만, 어선까지 팔아버린 아버지의 등골을 빼내 노량진 고시원 생활을 하고 있던 화자는 헤어지고 나서야 그녀의 위축된 모습을 잔잔히 살펴 봅니다. 영자.... 그녀는 그 나이 또래의 수 많은 젊은이들이 매달리던, 어쩌면 별스럽지 않은 9급 공무원 준비생이라는 입장을 부러워했지 싶습니다. 작은 공간이라도 하찮은 한 끼라도 부모라는 언덕에 기대어 지내는 그들 속에 머물면서 자신을 옥죄이는 현실에서 조금은 떨어져 지내고 싶었을까요. 변기 속의 단풍잎..... 이 기억에 남습니다. 1. - 어땠어? 라고 어둠 속에서 물으면 영자는 - 말해줘도 넌 몰라. 넌 니 꺼만 알게 되어 있잖아. 라고 대답했다. 나는 더이상 할말이 없었다. 나는 무참해서 겨우 중얼거렸다. - 그래. 그렇겠구나. 그렇겠어. 내가 생각해도, 껌 씹는 소리만도 못한 말이었다. 영자가 돌아누우면서 말했다. - 후반이 답답했어. 뭐가 얹힌 것처럼, 팍 터지지가 않았어. 후반이 답답했다는 말은 축구 경기 해설자들이 월드컵 때 TV에서 하는 말인데, 영자의 그 말이 어떤 느낌을 말하려는 것인지를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말해줘도 넌 몰라, 라던 영자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2. - 내년부터는 다달이 돈을 보내줄 수가 없으니 9급인지 10급인지 빨리 붙어서 너의 두 발로 서는 꼴을 보여다오, 네 아비 등뼈 휘는 꼴이 네 눈에는 안 뵈냐? 3. 나는 동거녀를 구할 때 추접스런 조건을 제시하지 않았다. 여자의 고향이나 가족관계, 장래희망, 취미, 월수입, 체중, 몸 사이즈, 무슨 대학을 나왔는지, 성형을 했는지, 무슨 직종 지망인인지, 몇 수인지를 묻지 않았다...... 지하철 전조등이 어둠을 훑고 지나가는 밤에 몇 마디 말을 나눌 수 있고 몸을 잘 대주기만 한다면 동거녀가 지잡대건 지잡퇴건 나는 상관없었다...... 되어가는 대로 되어지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 관리비를 책임지는 대신 오피스텔 공간을 공유할 동거인을 찾으며 연애 혹은 결혼 상대로서의 조건을 내민다는 건 참으로 거추장스럽습니다. 하지만, 별스럽지 않은 일에 그보다 더 거추장스럽고 거부감이 드는 조건들이 많이 제시가 됩니다. 이를 테면, 내국인보다 외국인 고객이 많은 호텔에서 프런트 직원을 모집하면서 토익점수 700을 필수조건으로 기입해놓고도 면접 때 담당자나 책임자가 영어 한 마디 못해 면접자의 실질적 영어 소통 능력은 전혀 확인할 수 없는 상황 말입니다. 토익 점수 800으로 취업에 성공한 직원이 간단한 영어 소통조차 할 수 없어 고객을 앞에 두고 허둥댄다면, 우리 주변의 그 많은 '스팩'들이 과연 취업 혹은 구인의 기본 조건으로 합리적이고 효율적인가 생각이 듭니다. 4. 저녁 여섯시 무렵에 노량진에서 시간은 시들었다. 시간은 메말라서 푸석거렸고 반죽되지 않은 가루로 흩어졌다. 저녁이 흐르고 또 익어서 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말라죽은 자리를 어둠이 차지했다. >> 제가 한국에서 느끼던 저녁과 작가의 저녁에 대한 표현이 너무 달라 밑줄을 친 문장입니다. 제가 느끼는 저녁은 밀도가 높아 갑갑하고 미끄덩거리거나 살짝 끈적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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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GOP> '이런 일이 있다고? 이럴 수가 있다고?'할, 군대의 생활과 상황을 알려주는 소설입니다. 한국전쟁 전사자 유해를 찾는 작업을 시작한 육군과 오십 년전 전사자로 알려진 할아버지 유해를 찾지 말라는 임하사의 할머니가 품으신 바람의 이유와 의미를 생각하게 합니다. 각자의 삶에서 무게를 달리하는 행위와 사물에 대한 의미에 대해... 1. 새벽의 최저기온은 영하 십오 도였다. 달이 밝았고, 별이 가득했다. 시야가 넓어서 추위는 끝이 없었다. 초소에서 적은 추위와 시간이었다. 추위는 가늠쇠 구멍에 잡히지 않았고 시간은 조준되지 않았다. >> 군대에서의 겨울을 아주 명확히 설명하는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2. 망원경을 대지 않고 육안으로 관찰한 기록도 있었다. >> 망원경을 통한 관찰기록은 대부분 북한군의 수와 총기등으로 한정되어 있지만 육안으로 관찰하고 기록한 글은 겨울 두루미에 대해, 모포를 터는 북한군들의 행위에 대해, 북한군의 체형과 소변을 누는 모습에 대해서 입니다. 긴장과 압력 외에는 아무 의미없이 시간을 보내는 군인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대한 상상력과 추측으로 하루를 채우고 메웁니다. 3. 임하사의 고향은 반농반어하는 서해안의 작은 포구마을이었다. 고향이라기보다는 태어나서 결박된 자리였다. 반농반어라지만, 농업에도 어업에도 생활을 의탁할 수 없었다....... 임하사의 아버지 임창수는 배도 농토도 없었고 읍내 버스터미널 옆에서 잡화상을 했다. 임창수는 잡화상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한평생을 가게에 매달려 살았다. >> 번지르한 어휘로 포장된 잔혹한 현실입니다. 출생과 성장 과정이 사슬이 되고 철창이 되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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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소설집에 29일이라는 긴 기간이 주어진 까닭에 실컷 게으름을 부리며 읽었습니다. 이제 새로 읽을 책을 찾아 책장을 둘러봐야겠습니다.
<저만치 혼자서> 이 소설집의 제목이 왜 '저만치 혼자서'인지 깨닫게 되는, 잔잔하고 은은한 향을 지닌 소설입니다. 종교에는 영 관심이 없는 편이라 별 흥미를 갖지 않고 시작한 소설입니다만 한 장 한 장을 넘기며 마음이 편안해지고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어쩌면 작가는 내용의 순서를 두고 고민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결정은 너무도 매끄럽고 아름답고 자연스럽습니다. 성당마다 김요한 주교님들과 김루시아 수녀님들이 계신다면 천주교는 너무도 아름다운 종교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1. - 김루시아 수녀님의 빨래를 수거하지 마십시오. 누구에게나 그에게 맞는 고유하고 개별적인 방식으로 대하는 것이 인간의 예절이며 하느님의 뜻일 것입니다. 죄를 짓는 것도 죄를 고백하는 것도 죄의 사함을 받는 것도 개별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로 수녀님의 결벽과 수줍음을 존중해야 합니다. 성녀 마가레트의 뜻을 기억하십시오. 김요한 주교는 김루시아 수녀와 손안나 수녀가 쓰는 방을 목욕실 가까이로 옮겨줄 것과 그 방을 자주 문안할 것을 간호 수녀들에게 지시했다. 2. 김루시아 수녀의 사물함 서랍에서 은박지에 싼 약봉지가 발견되었다. 봉지 안에는 수면제 몇 알과 도라지 씨앗 몇 개가 들어 있었다. 김루시아 수녀는 수면제를 반 일씩 먹었는지 한 알 반씩 먹었는지 세 개는 온전했고 나머지는 반쪽이었다. 수녀원 직원이 수면제와 씨앗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방안을 소독했다. >> '성녀 마가레트 수녀원'이 도라지수녀원이라고 불리게 된 이유가 밝혀지며 동시에 그녀의 작은 소망이 사라지는 안타까운 장면입니다. 도라지 씨앗은 김루시아 수녀의 무덤 한 귀퉁이에 뿌려져야 했고 오래 오래 뿌리를 내리며 아름답고 수줍게 피어나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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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 29. 소리 산책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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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누워서 쓰는 서평
무라카미 하루키 -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앨리슨 벡델 - 펀 홈시무라 타카코 - 방랑소년 1저메이카 킨케이드 - 루시
🎁 여러분의 활발한 독서 생활을 응원하며 그믐이 선물을 드려요.
[인생책 5문 5답] , [싱글 챌린지] 완수자에게 선물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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