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의 소설]이 벌써 세 번째 계절, 두 번째 달을 시작합니다.
23년이 마무리되는 12월을 보내며 우리는 2권의 책과 한편의 단편소설을 골라냈습니다.
첫 번째 책은 이치카와 사오의 화제작 <헌치백>입니다. 23년 아쿠타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작품은, 전형적이지 않은 소재, 주인공과 당사자성이라는 주제까지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이 충분하여 많은 분들의 관심을 받았습니다.
두 번째 책은 양선형 작가의 <V섬의 검은 짐승>입니다. 독창적인 스타일과 문장으로 주목받는 작가의 신작을 같이 읽어보며 작가가 확장시켜온 소설의 경계를 더듬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더불어, 이번에는 모두의 관심을 이끌었던 단편소설도 같이 이야기해봅니다. 많은 추천을 받았던 안담 작가의 <소녀는 따로 자란다>입니다. 작품으로서도, 새로운 출판형태로서도 논의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보이네요.
앞으로 또 다양한 이야기가 펼쳐지길 기대합니다.
**
6명의 평론가/편집자/기자/작가 등 다양하게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3개월마다 두 차례씩, 여기 그믐에서 독서모임을 열고 29일간 좌담을 벌입니다. 그 과정에서 좋은 작품에 대한 발견과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길 희망합니다.
첫 번째 모임은 지난 3개월간 출간된 장편소설 중 다루고자하는 십여권의 소설을 정하고, 짧은 인상평과 전반적인 기대, 요즘의 트렌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두 번째 모임에서 깊게 읽고 토론하고 싶은 2-3권의 책을 고릅니다.
두 번째 모임은 선정된 2-3권의 책을 같이 읽고, 그 소설에 대하여 6명의 평론가들이 깊은 비평과 논의를 진행합니다.
세 번째 모임은 앞선 두번의 모임에서 논의된 내용들을 독자들과 소통하는 오프라인 대담으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
소전문화재단은 2016년 12월 설립 이래 다양한 독서 장려 활동과 작가 지원 사업을 벌여 왔습니다. 특히 시대를 넘어서는 장편소설을 바라는 마음으로 장편을 쓰려는 작가들에게 창작지원금과 취재비, 특별 고료를 후원하는 〈문학과 친구들〉, 집필 공간을 제공하는 상주작가 프로그램 등을 운영해 왔으며, 문학 레지던시도 설립 준비 중입니다.
다음 세대에도 읽힐 작품을 찾는 [이 계절의 소설] 세 번째 계절 #2
D-29
소전문화재단모임지기의 말
김지운0
헌치백 - 2023 아쿠타가와상 수상작2023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중증 척추 장애인 샤카가 남성 간병인에게 “내가 임신하고 중절하는 걸 도와주면 1억 엔을 줄게요”라고 제안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심사위원 일부가 난색을 표할 만큼 위악적인 상상력을 숨김없이 표출하는 작품이다.
V섬의 검은 짐승“인간의 편이 아닌 소설의 편에 선 소설가”(금정연)로 평가받으며 그간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실험적 소설을 선보여왔던 양선형의 첫 중편소설이 나왔다. 서해 접경지의 실제 공간으로도 유추가 가능한 V섬에 이뤄지는 하루 동안의 이야기를 양선형만의 독특한 글쓰기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소녀는 따로 자란다위즈덤하우스 단편소설 시리즈 위픽 역대 조회 수 1위, 공개와 동시에 화제에 올라 “섬뜩할 정도의 묘사에 교실 마룻바닥 위에 터진 우유 냄새가 떠올랐다” “마치 초등학생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모든 대사가 내 마음 같았다”는 독자 평을 받은 안담의 첫 소설 《소녀는 따로 자란다》가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책장 바로가기
박혜진
지운 편집자님 감사합니다! 이번 달에는 '소설'과 '문학'과 '책'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아요. 워낙 개성이 강한 책들이라서요. 저는 우선, 지난 달에 가장 많은 분들이 이미 읽었거나 관련 소식을 알고 있었던 <헌치백>에 대한 감상들이 궁금해요. 저는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정말 이례적이라 할 만큼 호불호가 일지 않았어요. 끌어당기는 힘도, 밀어내는 힘도 없는 상태에서 끝까지 읽었다고 해야 할 텐데, 그런 와중에도 끝까지 봤던 건 모종의 호감도보다 앎에 대한 의무감이었던 것 같아요. 이 책을 읽은 분들의 리뷰 중에는, 그래서 공감하기 힘들었다거나, 극단적 위악에 대한 냉소적 평가들도 있던데요, 일정 부분 동의가 되면서도 결국엔 이런 생각 쪽으로 기울더라고요. 개인적 호감과 취향이 거의 절대 기준인 시대에 알기 위해 무엇인가를 읽게 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힘든가.. 사회적 언어로서의 소설, 공적 감각을 재구성하는 매개로서의 소설은 어느 시대에나 있기 마련인데 지금 일본에서 호명된 소설은 헌치백이구나. 큰 틀에서의 제 감상은 이런데, 다른 분들은 어떻게 읽으셨을지 궁금해요.
정용준
이번 달에도 의미있는 대화 기대됩니다. 특히 이번에 선정된 소설이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할 거리가 많은 것 같아 특히 기대되는 것도 있어요. <헌치백> 읽고 좋았다 안좋았다를 떠나 저 역시 소설을 통해 인물에 관해 '알게' 되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앎'이 그 자체로 소설의 가장 큰 의미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인물의 특수한 상황을 정보로 혹은 상식으로서 모르지 않았지만 소설을 통해 특별히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숨김없이 남김없이 보게 되어(보여줘서) 1차적으로는 상당히 흥미로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흥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 소설을 복잡한 마음으로 고민할 수 밖에 없는 지점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사자가 당사자에 대해 말하는 것은 (당연하게) 허용되는가? 말하기의 형식과 한계는 당사자가 결정하면 되는 것인가(그래도 되는가)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해봤습니다.
강보원
앗 저는 헌치백 말고 나머지 두 편을 먼저 읽어서, 금방 읽고 <헌치백> 이야기 같이 나누겠습니다 ㅎㅎ 두 분의 짧은 감상을 읽으니 더 궁금하고 기대가 되는 느낌이네요...!
김지운0
저는 「헌치백」에서 중증 척추 장애인인 주인공의 삶이 생생하게 그려지면서도 그 주인공이 장애 유무로 인해 극중 권력 관계에서 늘 최하층의 위치에 놓이지만은 않는다는 역학 구도가 입체적이고도 흥미롭게 느껴졌습니다. 장애 여성이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부자유와 곤경들이 1인칭 시점에서 제시돼 비장애인 독자들에게 충격을 선사하지만, 상속 재산의 규모를 비롯해 여타 요인들을 두루 고려해보면 주인공의 지위를 무작정 약자로 전제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주인공이 명시적으로 ‘갑’의 위치에 서는 상황이 작품에 꽤 직접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우위마저 그야말로 명시적일 뿐 주인공이 실질 차원의 약자성을 탈피할 만큼은 아니지 않은가 고민이 들기도 했습니다. 대충 상호교차성이나 강약 구도의 유동성 같은 개념/표현으로 지칭해볼 수 있을 텐데, 이런 측면에서 미묘하게 곱씹어볼 만한 지점들이 있었습니다.
강보원
저도 이 부분이 재밌게 느껴졌어요. 좀 생뚱맞을 수 있는데 김유정의 <동백꽃>이 생각나기도 했어요. 거기서도 소설에 입체성을 확 부여하는 게 '나'-점순이가 갖는 남성-여성의 구도가 계급적 위계에 의해 반전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물론 <헌치백>에서는 그보다는 더 복잡하게 이 구도를 설정하고 있지만요... 김지운 선생님 말씀처럼 주인공이 명시적으로 갑의 위치에 서는 상황에서도 그걸 그렇게 곧이 곧대로 볼 수만은 없는 부분들이 있고요. 다만 '다나카' 씨에게 공격성을 표출하는 부분이... 자체로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것 같아요. 사실 임신 중절을 위해 관계를 갖는 행위 자체는 주인공의 욕망이기도 하지만 그 욕망은 스스로를 상처입히고자 하는 욕망에도 가깝다고 생각하는데, 이 공격성 속에서 그 행위가 사실 다나카 씨를 상처입히려는 욕망과도 겹쳐지는 것 같았거든요. 이 미묘한 긴장이 저에게는 소설을 확 풍부하게 느끼게 만들어줬던 것 같아요.
범한소
헌치백을 함께 읽자고 발의한 사람으로 이렇게 얘기할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ㅎㅎ 저는 이 소설만큼이나 소설을 둘러싼 여러 역학에 더 관심이 가더라고요. 저는 이 책을 다룬 한겨레의 리뷰 기사를 읽고 <헌치백>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요. 기사의 제목이 <나의 꿈은 고급 창부다, 임신 중절이다>였어요. 저 역시 리뷰 기사 제목으로 낚시(?)를 제법 해 본 사람으로서, 분명 어그로일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충격적인 제목에 도저히 기사를 클릭해보지 않을 수 없더라고요. 물론 책을 다 읽고 나면 말씀해주신 것처럼 ‘극단적 위악'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맥락에 납득, 수긍할 수밖에 없게 되구요.
이런 극단적 위악에 수긍하게 되는 데는 당연히 작가인 치카와 사오의 당사자성이 자리하고 있을텐데, 당사자 소설의 복잡한 점이 독자가 개입할 여지가 무척 적어진다는 점 같아요. 실제로 미오튜블러 미오퍼시 장애를 앓고 있는 작가가 그렇다는데, 그 고통과 소망에 공감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는 독자로서 뭐라고 말을 더 보태기가 어려우니까요. “살기 위해 파괴되고 살아낸 시간의 증거로서 파괴되어”간다고 말하는 문장이 작가의 경험에서 비롯했으리란 걸 떠올리면 그 어떤 자학과 도발 앞에서도 숙연해질 수밖에 없고요. “당사자가 당사자에 대해 말하는 것은 (당연하게) 허용되는가” 라는 정용준 선생님의 질문이 작가 입장에서의 질문이라면, 저는 독자로서 “당사자가 아닌 독자가 당사자 소설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 허용되는가” 묻게 되더라고요. 그렇기 때문에 이런 당사자 소설은 소설의 이야기성 자체만큼이나 독해의 방식에 더 민감해지는 것 같아요.
범한소
나아가서 흥미롭다고 여겼던 건 작가의 이력과 아쿠타가와상을 타게 된 계기였는데요. 이치카와 사오는 이미 20년 동안 연애, 판타지, SF같은 소설 공모에 응모해왔고 고타스 기사와 성인 소설을 오래 써왔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다 "문화 쪽에서는 아쿠타가와상의 인지도가 가장 높고 뉴스 속보로 보도되는 건 아쿠타가와상과 나오키상 뿐"이라 “아쿠타가와상 후보장들을 연구했고 지금까지 쓰여지지 않은 것을 써야겠다고 생각"하며 쓴 게 이 <헌치백>이라고 하더라고요. 아쿠타가와상이 일본 순수문학계에서는 최고 권위의 신인상으로 여겨진다는 걸 생각하면 <헌치백>은 결국 ‘문학상에서 선호되는 소설의 경향과 주제'라는 게 분명히 존재한다는 방증일 것이고, 그게 이른바 ‘문학성'이라고 불리는 요소일텐데, 그게 아마도 박혜진 선생님이 언급해주신 것 같은 “사회적 언어로서의 소설, 공적 감각을 재구성하는 매개로서의 소설" 혹은 정용준 선생님이 언급해주신 “‘앎 자체로서의 의미”가 아닐까 싶어요. 이전까지 일본 문학계 나아가 한국 문학계에서는 한번도 ‘공적 감각'이 된 적 없었던 여성 장애인의 성적 욕망을 담론 한가운데로 소환했다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의 소설로서의 역할은 다한 셈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김지운0
일본 현지에서 아쿠타가와상 발표 직전에 서평가 좌담이 라이브로 방송됐는데, 그때도 이 작품의 당사자성을 두고 몇 마디 논의가 오간 모양이더라고요. 패널 한 명이 이 작품이 당사자의 오토픽션이 아니라 허구적 장치를 둔 점이 좋았다면서 이치카오 사오가 아니라 다른 사람(비장애인)이 썼다면 이 작품의 문장이 모두 무가치한 것이 되느냐며 의문을 제기했다고 해요. 당사자성을 옹호하던 다른 패널은 이 물음 앞에서 곤란함을 고백하기도 했고요. 개인적으로는 소수자 서사를 논하며 무작정 당사자성으로 환원하는 것이 소수자 서사의 다양한 맥락을 경시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나 생각되기도 합니다.
작중 인물의 위악적 태도를 불편하게 여기는 감상이 있다는 건 말씀을 듣고 새롭게 알았습니다. 정확히 어떤 리뷰가 얼마나 있는지 알지 못해 함부로 말할 수는 없겠지만... 단순히 작중 인물의 성정이 착하지 않고 모난 구석이 있다는 데서 불호의 감정을 발산하는 것이라면, 적어도 이보다는 이 작품을 깊게 읽는 방식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ㅎㅎ
JSP
작품에 대한 불편한 감상은 이곳저곳 리뷰를 찾아보니 개인의 욕망을 위해서 "낙태"를 하고싶다니! 어린 생명을 죽이는 "낙태"는 무조건 나쁜 것인데! 이런 감상을 본 적이 있어서 크게 공감은 못하고 지나갔습니다...
소유정
오! 선생님들 덕분에 <헌치백>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되어 기쁘네요. 저 역시 이 소설을 흥미롭게 읽었는데요. 저는 이 소설에 상세하게 붙어 있는 주석들에 관심이 많이 가더라고요. 이렇게 공적으로 가시화된 적 없던 장애 여성의 성적 욕망이 어떤 사회적, 문화적 맥락 아래 은밀하게 표출되고 있었나를 알 수 있어서 꽤 즐거운 독서를 했던 것 같아요. 일본의 서브 컬쳐에 대해 궁금증이 더 생기기도 했고요.
여러 화두를 던질 수 있는 소설이기에 소설을 둘러싼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해 볼 수 있지만,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의 작품성에 대한 논의는 상대적으로 적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어요. 소범 기자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당사자가 아닌 독자가 당사자 소설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 허용되는가"라는 물음 앞에서 입을 떼기 힘든 까닭도 있을 것이고, 문학상 수상작이니만큼 '훌륭하니까 뽑았겠지...' 하는, 조금은 무심하고도 안일한 생각 때문에 소설로서의 작품의 완성도 등에 대한 이야기는 논의의 중심에 서지 않게 되는 것 같아요.
저희의 대화들이 최근 나온 장편소설을 살피고 집중된 논의를 나누는 것도 있지만, 처음의 목적은 미래의 고전이 될 수 있는 작품을 발굴해보자! 라는 의미도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이 소설은 그에 부합하는 책이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어요ㅎㅎ 용준 작가님 말씀처럼 "앎"이 이 소설의 의미라는 점에 저도 동의를 하는데요. 어떤 미래에서도 독자를 '앎'으로 이끌 수 있는 소설 중 하나가 아닐까 싶었어요.
참여 제한 모임입니다
참여
게시판
글타래
화제 모음
지정된 화제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