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세대에도 읽힐 작품을 찾는 [이 계절의 소설] 세 번째 계절 #2

D-29
저는 최근 문학 담론에서 많이 입에 오르내리는 '당사자성'이라는 용어와 개념이 실제로 소설작법에 적용되는 방식에 있어서 약간의 우려가 있는데요. 아무리 픽션이라고 할지라도, 아무리 작가의 자의적인 상상력과 표현이라고 할지라도, 인물과 사건은 실제 현실을 고려하고 고민되어야 한다는 이 바람직한 철학과 사유가 혹 글쓰기를 위축시킬수도 있을 것 같아요. 더 잘 쓰고 더 나은 것으로 만들어야 할 고민이 자칫 당사자가 아니면 쓸 수 없거나(자격이 없거나) 함부로 쓰면 안된다는 걱정과 우려로 쓰기 자체를 포기하거나 주저하면 곤란하지 않을까, 생각해봤습니다. 그렇게 되면 조금만 민감한 사건이나 인물들(특히 소수자나 장애인들)은 소설 서사에서 등장하지 않거나 표현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죠. '쓰지 않음으로 잘 못 씀을 예방'하는 이상한 윤리의식이 발동될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헌치백>은 당사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과감하게 써주었기에 흥미롭고 의미가 있었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당사자가 아니면 이런 이야기를 쓰는 것은 쉽지 않다는 시그널로도 느껴졌어요.
<헌치백>에서 흥미로웠던 부분은 종이책에 관한 인식이었는데요. 종이책을 이토록 현실적으로 어려워하는 것은 듣지도 보지도 못해서 굉장히 새로웠습니다. 생각해보면 너무도 당연한 것인데 제 인식속에서 까맣게 없었다는 것에 약간의 반성과 함께 소설이 전해주는 앎과 지식에 새삼 즐거움을 느꼈습니다. '종이책'에 관한 새로운 인식의 자리가 제게 생긴 것 같아요.
<V섬의 검은 짐승>(이하 V섬)은 지금 열심히 읽고 있어요. 제게는 굉장히 흥미롭고 재미있는 부분이 많아서 이야기해볼 지점이 조금 있습니다. 작가의 마음. 소설의 마음. 영화의 마음. 대중서사의 마음. 작가주의의 마음. 등등이 이렇게 저렇게 떠오르면서 제 안에서 이 말 저 말 섞이고 있는 것 같아요. 웃픈 장면도 많고 하이개그(지금도 이런 표현을 쓰는지는 모르겠지만)도 종종 나와서 꽤 재미가 있습니다. 이 부분도 나중에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선발대 분들의 다양한 의견들 이런저런 의견들 저 역시 기다리고 있습니다. 많이 참여해주세요!
< V섬의 검은 짐승>은 그야말로 추상화처럼 읽게 되는 소설이네요. 모종의 핵심은 공유되지만 구체적인 이해는 제각각 다르다는 점에서요. 일상의 대부분을 관습적으로 사고하며 살아가는 생활인으로서, 저 역시 비선형적인 구조로 전개(어떤 면에서는 전개되지 않는)되는 소설은 읽기가 힘들더라고요. 그런데 쉽게 몰입되지 않는 까다로운 독서를 하게 되면 그만큼 얻게 되는 게 있고, 그 득실의 비중이 저한테는 소설을 평가하는 한 기준이 되기도 해요. 이 소설 같은 경우엔 V섬을 촬영해 영화로 만들려는 감독과 그 감독의 페르소나로 낙점돼 배우로 출연하게 된 소설가의 관계에 대해 자유롭게 상상하고 해석하는 재미가 컸어요. 소설가로서는 영화에 대해 자세히 알지도 못하고 또 알고 싶은 생각도 별로 지만 돈 때문에 일단 섬으로 들어가고, 막상 이 판을 짠 감독은 섬에 들어오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고, 섬에서는 다양한 존재들을 다양한 국면에서 만나게 되고, 여전히 이 섬에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알 수가 없고..
제겐 이 과정이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상상처럼 읽혔어요. 내가 주인공일 뿐만 아니라 나만이 주인공일 수 있는 곳에 초대받았지만 이곳으로부터 환대받는다는 느낌은 없고 어쩐지 소외된 채 화자로서의 역할을 이어 나가야 한다는 사실이 제 삶의 실존을 감각으로 옮겨 놓은 것 같았거든요. 저는 이런 제 해석과 의미 부여가 작가의 의도에 썩 부합할 거라는 생각은 안 하지만, 의도라는 것이 이미 너무 선형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그런 의도에 맞춘 해석에 대해서도 얼마간은 자유롭게 생각하는 중이에요. 어쩌면 이런 것이 '문학'에 대한 실존을 체험하는 과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면서요. 이렇게 생각하면서 읽어가다 보면 '검은짐승'이란 말로 상상할 수 있는 존재의 범위가 달라지고 V섬이라는 공간에 대한 개념도 달라지면서 이 소설은 그냥 저의 소설이 되는 거죠. 조금 이상한 말일 수도 있지만 작가가 쓴 특정한 소설을 그림 구매하듯 내가 소유하는 느낌과도 비슷한 것 같아요. 그림 사 본 적은 없지만..
하지만 주관적 감상으로만 이 소설을 읽고 있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이런 구체적인 일화들이 '미디어'에 대한 낯선 이해로 수렴된다는 점에서 이 소설을 사회적 언어로 표현하고 싶은 욕구도 느껴요. 보원 평론가님이 이야기한 것처럼 소설이나 영화를 만들지만 그들이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데 그렇듯 모르는 상태를 적극적으로 부정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상태로 계속해 나가는 데서 드러나는 창작의 역설이 있더라고요. 그 과정에서 두드러지는 건 V 섬을 기록하는 도구의 변화였는데, 상공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카메라, V섬을 활공하는 원격 나그네새를 조정하는 개구리복 남자들 앞의 모니터는 죽은 느낌의 V 섬을 묘사하는 데 비해 검은짐승에 마을의 기억으로 재구성되는 V섬은 살아 있는 느낌이었어요. '검은 짐승'을 기억하는 건 역시 소설에 대한 하나의 비유일 거라고 생각하는 중이에요.
작가가 재현하고 있는 현실을 당연이 알게 되는 소설에서 '속도와 몰입'이 미덕이라면 작가가 재현하고 싶은 현실이 뭘지 상상해야 되는 소설에서는 '느림과 불연속'이 미덕일 수 있겠단 생각이 드네요. 그럼에도 유머러스하고 시니컬한 문장이나 종교적 표현들을 재치 있게 적용한 표현들이 재밌어서 딴청 부리다가도 얼른 다시 복귀해 읽기를 반복했더랬습니다.
보원 선생님의 V섬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흥미로워서, 빨리 댓글 달고 싶어서 허겁지겁 읽었습니다. ㅎㅎ 일단 1회독을 마친 상태의 첫 감상은, 속수무책의 독자가 되는 일은 얼마나 즐거운가,이네요. 개인적으로 독자로서 소설에 가장 쉽게 흥미를 잃게 되는 지점은 다음 전개가 예상될 때, 기시감을 느낄 때인 것 같아요. <v섬의 검은 짐승>을 읽으면서는 독자로서 제가 쌓아온 이야기 장악력이 무력해지는 것을 느꼈고, 예측불허의 이야기 속에서 완전히 휘둘리는 경험을 한 것 같아요. 물론 혜진 선생님이 언급해주셨듯, 이런 ‘비선형적 구조로 전개되는 소설’은 필연적으로 몰입을 방해하고, 독자들로 하여금 까다로운 독서를 하게 만드는 탓에 ‘난해하다’는 독해 이상으로 쉽게 나아가지 못하는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런(?) 책일수록 복잡한 독해에 보다 익숙한 일종의 가이드 독자들의 역할이 중요할텐데, 그래서 보원선생님과 혜진선생님이 나눠주신 독해가 저에게는 책만큼이나 흥미롭게 여겨졌어요! 보원 선생님이 읽어내주신 ‘글쓰기와 관련된 조건들에 대한 탐구’를 계속하는 메타적 소설로서의 해석이나, 혜진 선생님이 말씀해주신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상상”은 제가 읽으면서는 발견하지 못한 부분들이라, 이런 해석들과 함께 소설을 다시 읽으면 훨씬 풍부하게 읽을 수 있겠다 싶었어요. ㅎㅎ
제가 이 소설에 가장 사로잡혔던 부분은 개별 일화들의 강렬한 이미지였어요. 환상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그로테스크하고 기이한 이미지들이 책장을 덮고 난 뒤에도 한동안 일렁이더라고요. 짐승의 사체를 약재로 이용하는 할머니의 한약방, 십자가에 매달린 암퇘지 수아, 우명수 군의 실종과 개들의 왕, 노루 보혈을 마시는 사이비 목사 등등…이런 이미지들이 하나하나 모여 v섬이라는 기이한 공간의 이미지를 완성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이런 환상성이 실현될 수 있었던 데는 단연 작가가 구사하는 한국어 문장들이 바탕이 됐을텐데, 그냥 장광설인가하면 전혀 그렇지 않고, 실은 무척 촘촘하고 세밀하게 직조된 언어들이 v섬을 떠받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가령, “중앙 통로 끝의 십자가 위에 못 박힌 짐승은 수아였다. 고준경 씨의 불행한 암퇘지, 재생산 노동에 실패하고 완공 기념식의 고기가 되는 일에도 실패한 수아. 수아는 옅은 분홍색 미소를 띠고 있었다(...) 십자가는 인간의 육체에 알맞게 규격화된 장치였기 때문에 이는 수아에게 어울리거나 수아가 감당해야 할 형벌도 아니었다. 십자가야말로 인간만이 탑승할 자격이 주어지는 고문 도구인데, 그곳에서 비천함과 거룩함을 획득해 예배당에 내걸려야만 하는 존재란 깡마른 구세주여야 마땅했다. 그러므로 수아는 사체를 십자가에 억지로 결합시키는 인위적인 조작과 부조리한 재봉질에 의해 끔찍하게 승화된 채, 신성모독적인 정육점으로 뒤바뀐 예배당 한가운데로 솟아오른 십자가 모양의, 단지 십자가 모양일 뿐인 불결한 나무 도마 위에서 절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146~148p) 이런 장면은, v섬에서 예배당이 얼마나 부조리한 공간인지를 알려주는 서사적 기능을 하는 동시에 이 자체만으로도 언어적 유희를 충족시켜줬던 것 같아요. 유희적이면서도 동시에 선언적인 문장들이 끊임없이 이어져서 정말 한없이 밑줄을 그을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양선형 작가의 『V섬의 검은 짐승』의 경우, 저는 무엇보다 작가가 구사하는 일종의 ‘각진 언어’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고 그만큼 기억에 깊이 남았습니다. 바로 위에서 소범 기자님께서도 “무척 꼼꼼하고 세밀하게 직조된 언어”에 관해 말씀해주셨는데요. 한자 관념어의 사용 빈도가 동시대 한국어 소설 중에서도 유독 높게 느껴졌는데, 그럼에도 문장의 구문이 무척 조직적이고 명료해 유려하게 읽혔던 것 같아요. 이 또한 용준 작가님께서 지난 시즌에 말씀하신 ‘소설의 목소리’의 차원에서 얘기해볼 법한 지점이라고 느껴졌고요. 그리고 다른 분들께서도 말씀해주셨다시피 환상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이 초반부터 다층적으로 펼쳐지는데, 여기에 작품 내의 영화와 소설(웹소설이나 기타 서브컬처에서 흔히 ‘작중작’이라고 지칭된다고 하는)에 대한 서술이 중첩되면서 현실과 환상, 허구에 대한 구분이 한결 혼란스러워지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또 V섬이라는 고립된 공간 설정, 그리고 이 지역이 겪어온 평탄치 못한 역사 등이 추가로 얽혀서 더 음산한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하고요. 특히 소설 속 소설이 거론되는 대목에서는 작중 현실과 혼동한 채로 일단 작품을 읽어나갔는데, 나중에서야 그것이 작중 소설의 내용이었음을 알아차리게 되는 순간들이 더러 생기더라고요. 같은 맥락에서 이 작품의 서술자가 주인공인지, 작중작의 서술자인지, 양선형 작가 본인인지를 두고 종종 착란한 상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식의 서술과 혼동은 물론 어느 정도 의도된 것일 테고 이 소설이 독자에게 선사하는 체험적 요소의 일종이라고 생각되지만, 더 주의를 기울여 이 작품을 재독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양선형 작가의 소설에 대한 감상을 읽다 보니 '모호함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야말로 문학의 밀도를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다양성과는 또 다른 모호함 속에서 소설을 읽는 와중에도 공통된 분위기와 바탕을 공유하는 건 작가가 재현하려고 하는 실체가 언어이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해요. 통상적인 장편보다 짧았는데도 길이감이 전혀 체감되지 않았던 것도, 서사보다는 언어를 읽었기 때문인 것 같고요.
안녕하세요. 제가 마지막 멘트를 남기는 것 같네요. 그동안 올려주신 정성어린 독후감을 읽으면서 독서는 혼자 하는 것도 좋지만 역시 함께 읽고 독후감을 주고 받는 것이 정말 좋다는 생각을 했어요. 동감했던 평도 있고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시선과 생각도 있어서 새롭기도 했습니다. 선생님들이 <v섬>에 관해 다양한 의견 주셨으니 저는 제게 인상적이었던 부분만 말해보려고 합니다. 우선 고무적이었던 것은 소설을 읽는 방식이 무척 풍요롭고 다채로워 소설을 쓰는 입장에서 무척 좋았습니다. 특히 소설의 이야기를 독자가 읽고 이해하는 '이야기'라고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의도 속에서 작가도 하나의 인물로서, 나아가 소설의 일부로서(어쩌면 독자까지 소설의 일부로서) 소설을 읽어나가는 것이 흥미롭고 즐거웠습니다. 가끔 작가 입장에서 '소설'을 생각해볼 때가 있습니다. 작가는 도대체 왜 소설을 쓰는 걸까요. 작가는 도대체 소설을 왜 그렇게 쓰는걸까요. 소설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되었고(돈키호테를 현대적인 소설 작법의 시작이라고 보면 거의 400년이 되었습니다) 소설 형식이 아닌 그저 이야기로만 놓고 본다면 인간의 역사와 함께 할 정도로 유구합니다. 그런데 현대적 의미의 소설 독자의 출현은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오래전부터 작가들은 소설을 써왔는데 자기의 소설이 독자가 읽을 것이라는 것을 모르고 쓴 것이죠. 하물며 독자가 잘 읽어줬으면 하는 기대심을 갖고 독자의 독법을 고려하며 그에 발맞춰 소설을 쓴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v섬>을 읽으면서 또한 양선형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서 원형적 의미의 '작가'를 생각해봤습니다. 작가의 소설을 읽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엿보는 것. 지켜보는 것. 소설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 그래서 다다르는 것. 작가의 구상속에 참여하고 때로는 구성의 일부가 되는 독자의 경험을 하곤 합니다. 내용보다 표현에, 의미보다 리듬에, 기승전결의 흐름보다 서술자의, 작가의, 주인공의, 언어적 컨디션을 지켜보고 경우에 따라 그 흐름에 휩쓸리는 것. 그것이 좋았습니다. 언어적이다. 비선형적이다. 비서사적이다, 이런 식으로 단순하게 인상비평하는 것을 참고 소설을 그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로 바라보고 따라간다면 엄청나게 다층적이고 비약적으로 상승하고 변주되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어나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소설의 주인공은 인물입니다. 아니, 화자입니다. 생각해보니 작가인 것 같습니다. 때로는 소설가인 것도 같고 배우 같기도 하고 감독인 것도 같습니다. 어쩌면 그냥 v섬을 떠도는 환상적인 언어로 만들어진 사람일 수도 있겠죠. 이것을 난해함과 불가해함이 아닌 그 자체로 이야기로 생각해보면 이야기는 정말 입체적이고 방사형이고 엄청 소설적이면서 종종 시적이기도 합니다. 웃기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한 소설이었습니다. 소설이 무엇이냐 물어볼 때 단순하게 답할 수 없게 하는 한 마디로 정의 내릴 수 없게 하는 그래서 소설의 외연을 넓히고 지금 이 순간도 소설의 형식과 양식의 숫자를 늘리는 이 같은 소설을 읽는 재미가 저는 참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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