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보르헤스 읽기] 『불한당들의 세계사』 같이 읽어요

D-29
뒷 문단에 깊은 공감을 보냅니다. 삶은 일화로 이루어져있다고 믿는 편입니다. 매일 매일의 반복적인 행동들은 몸에 남고 머리에서는 휘발되고, 특정한 이야깃거리들로 과거가 압축되어 현재나 미래의 선택에 그런 기억들이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경험하지 않은 이야기들도 한 자리씩 머릿 속에 자리 잡으며 행동의 의회를 열겠죠. 새로운 이야기들을 탐하는 저로서는 숙지해야할 경고 문구네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무례한 예절 선생 고수께 노 수께~] 이야기 자체는 크게 특별할 것이 없어 보입니다. 다만 일본 특유의 예의 범절과 그 형식성이 이야기 내내 도드라지는데요. 아코 성의 성주는 천황의 사신을 맞이하게 됩니다. 황실에서는 "사신은 천황과 마찬가지"이므로 동경에서 사신을 보내기 이전에 예식을 지도하는 예절 선생 고수께 노 수께를 아코 성에 먼저 파견합니다. 천황의 권위를 등에 업은 예절 선생은 무례하게 행동하고, 아코 성의 성주는 예절 선생을 죽이려 하지만 고수께 노 수께는 가까스로 도망칩니다. 그리고 성주를 군사 재판에 회부하면서 성주가 처형당하게 됩니다. 사신을 보내기 전에 황실에서 성주에게 예절 선생을 파견한다는 설정 자체도 웃긴 것 같아요. 굉장히 일본스러운 예식 문화와 그 엄숙성을 보여줍니다. 이 엄숙함이 제게는 코메디처럼 다가왔습니다.
천황의 사신은 천황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물론 하나의 표식 또는 상징으로서 말이다. 그런데 그것은 천황의 위엄을 감소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가중시키는, 되려 더욱 부적절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불한당들의 세계사 69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무례한 예절 선생 고수께 노 수께] 시간이 흘러서 아사노 타쿠미 노 카미의 장로가 오욕과 치욕을 감수하면서까지 후일 복수를 위해 스스로 타락했음을 연기합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장로는 고수께 노 수께의 경계심이 허물어진 때를 틈타서 47인의 사무라이를 이끌고 복수하기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죽은 주군에게 예를 다했다는 의미로 전원 할복합니다. 이 이야기는 여러 가지로 읽을 수 있습니다. 저는 엄격한 형식성을 지키는 일본 특유의 문화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황제의 사신을 파견하기 전에 예식을 가르칠 예절 선생을 파견한다는 자체도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경직된 형식성과 그 엄숙성을 보여줍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 엄숙성이 사람을 헤치고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예절 선생이라는 엄격한 형식성이 참극을 불러왔고, 그런 예절 선생에 다시 복수하면서 장로와 47인의 사무라이들이 '할복'이라는 자기 형식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할복은 죽음을 자기 형식으로 끌어안은 것이고, '고상하게 뜻을 관철시키는' 일본 특유의 자살법이자 어떤 형식의 극점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양쪽 진영의 형식들이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습니다. 저들(황실과 예절 선생) 예절이 이쪽(아코 성의 성주와 장로와 47인의 사무라이들)에서 무례로 받아들여지고, 저들의 무례(황실의 예식)를 이쪽의 예절(할복)으로 대체하는 과정이라고도 보여집니다. 그렇다면 이후로도 할복은 이 이야기의 결말처럼 충직한 예절이 되었는가, 우리는 물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후일 이차세계대전에 '할복'은 비겁한 위정자들이 청년들을 전쟁으로 내모는 명분이 되어주었습니다. 이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수뇌부들은 할복하지 않았습니다. 저 우스꽝스러운 형식과 그 엄숙함이 얼마나 허황한 말로를 맞이했던가요. 이렇게 형식은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사카구치 안고는 ⟪타락론⟫에서 엄격한 자기 형식과 예식에 갇힌 일본인들에게 차라리 타락할 것을 권하면서 이렇게 비판했습니다.
특공대 용사라는 것 또한 한낱 환영에 지나지 않고, 진정한 인간의 역사는 암거래상이 되는 일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미망인이 사도와 같은 여생을 사는 것도 허망한 환영에 불과하며, 가슴에 새 임의 얼굴을 품는 것에서부터 인간의 역사는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어쩌면 천황도 그저 또 다른 하나의 환영에 지나지 않으며, 평범한 인간이 되는 일에서 비로소 진실한 천황의 역사가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역사라고 하는 생명체의 거대함과 마찬가지로 인간 자체도 놀라우리만큼 거대하다. 산다는 일은 실로 유일무이한 불가사의다. 예순일곱 살의 장군들이 할복도 하지 않고 똑같은 형색으로 줄지어 법정에 끌려나오는 장면 등은 종전(終戰)에 의해 새로이 발견된 인간의 진실을 말해주는 장관이라 하겠다. 일본은 패했고 무사도는 망했지만, 타락이라고 하는 진실의 모태에 의해 비로소 처음으로 인간이 탄생한 것이다. 살아 남아라, 타락하라. 그 정당한 절차를 따르는 것 외에 진실로 인간을 구원할 만큼 편리한 첩경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할복을 좋아하지 않는다.
백치·타락론 외 146쪽, 사카구치 안고 지음, 최정아 옮김
백치·타락론 외전후 일본의 대표 작가 중 한 명인 사카구치 안고의 단편 선집. 안고는 다자이 오사무, 이시카와 준 등과 ‘무뢰파(無賴派)’라 불리면서 전후 일본사회의 혼란과 퇴폐를 반영한 독자적인 작풍을 선보였으며, 전쟁 후 일본의 새로운 출발점을 통찰했다.
아아, 이런 인용을 해주셨군요. 사카구치 안고에 깊게 통감합니다. 패배하고도 계속 살기, 무례하고도 계속 살기가 현대적 인간으로서의 한 발이지 않나 싶기도 하네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위장한 염색업자 하킴 데 메르브~] 본격적으로 보르헤스적이라고 할 만한 스타일이 드러나는 글입니다. 픽션의 구조를 띠는데 현실에 그 참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특이하게도 시작과 동시에 알 모카나('알 무칸나'가 더 널리 통용되는 쓰기 같습니다)라는 인물에 관한 네 권의 참고자료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하킴 데 메르브는 실존 인물인 알 무칸나(Al-Muqanna)에서 따왔습니다. 흥미롭게도 알 무칸나는 실존 인물로서 이 이야기의 '원전' 격인데, 이 또한 엄밀한 의미로 원전이라고 하기는 애매합니다. 왜냐면 알 무칸나라는 인물 자체가 현실에서 무수한 신화와 전기와 설화로 얼기설기 이뤄진 패치워크로 구성돼 있으니까요. 이를테면 이 이야기는 원본이 소실되어 그 진위를 구체적으로 판명하기 힘들어진 (노골적인) 위작이기도 합니다.
이 동전들에는 ⟪장미의 폐멸⟫에 대한 요약, 또는 몇몇 부분을 정정하고 있는 페르시아의 대구시(對句詩)가 담겨져 있다. ⟪장미의 폐멸⟫의 원본들은 소실되어 버렸다. 왜냐하면 1899년에 발견되어 모르겐란디쉬스 아르치브 출판사가 충실히 출간한 원고는 혼과, 그 후 퍼시 사이크스에 의해 위작으로 선포되었기 때문이다.
불한당들의 세계사 77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russist 박상순 시인의 표지 디자인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미쳤나보네요;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바다로 도망하는 것 run away to sea 은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전통적인 영국식 결별, 즉 영웅적 출발을 의미한다.
불한당들의 세계사 P29,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그 역시도 다른 주검들에서 엿보이는 그런 지친 표정을 하고 있더군요. 그는 그 당시 바떼리아 지방으로부터 시작해 남쪽 지역에 이르기까지 가장 드센 자였지요. 그가 죽은 것을 알게 되자 나는 그에 대한 증오심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지요.
불한당들의 세계사 p98,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그 마법사는 환영들과 고요함을 이용해 방문객들을 속였다. 방문자들이 떠나자마자 가난과 회벽이, 이따금은 그들이 떠나기도 전에 조금 먼저 나타나곤 했다.
불한당들의 세계사 p103,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위장한 염색업자 하킴 데 메르브] 사실관계를 정정합니다. 알 무칸나는 '하킴 데 메르브'와 동일인물입니다. 한국어판 제목에는 '하킴 데 메르브'가 인명인 것처럼 옮겨졌지만, 영어판 제목을 보면 그게 아님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영어판 제목은 "The Masked Dyer, Hakim of Merv"이며, 굳이 옮겨보자면 '복면을 쓴 염색업자, 메르브의 하킴'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메르브(Merv)는 중앙아시아 지역에 있는 과거 투르크메니스탄의 한 도시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온라인상에서는 알 무칸나에 관한 자료가 혼재되고 있어서 많이 헷갈립니다. 심지어 알 무칸나라는 스펠링도 어느 곳에서는 Al-Moqanna라고 돼 있고 또 어느 곳에서는 Al-Muqanna라고 돼 있습니다. 그나마 신뢰할만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따르면, 알 무칸나는 아랍어로 '베일에 가려진 자'라는 뜻의 별명이며 그의 본명은 하심 이븐 하킴(Hāshim ibn Ḥākim)입니다. 그는 8세기 옛 이란에서 활동한 종교 지도자, 군사가로 당시 아바스 왕조에 맞선 반란군을 이끌었습니다. 옛 이란의 북동부에 위치한 광대한 지역인 호라산(Khorasan)의 메르브 출신으로서, 원래 직업은 축융공(fuller, 縮絨工) 그러니까 천을 바래고 다듬는 직공이었다고 합니다. 헷갈리는 게 또 다른 자료에 보면 직공인 것은 동일하나, 주름공(clothes pleater)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심지어 소설에서는 염색업자라고 하고 있으니, 이쯤되면 뭐가 사실인지 모르겠습니다. 뭐가 됐든 알 무칸나는 직물(textile)을 가공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부분에서 착안해서 이 소설이 시작되고 있다고 볼 여지도 있습니다. 시간이 흘러, 직공이었던 하킴은 이후 '아부 무슬림 알 코사라니'라는 장군의 지휘관으로 합류했습니다. 훗날 아부 무슬림이 정쟁에 휘말려서 죽자, 그의 지위를 이어받아 이슬람과 조로아스터교를 결합한 교리를 설파하며 반란군을 이끌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본문에서 보여지는 여러 마술을 행하며 자신이 신의 현현이라고 주장하고 다닙니다. 이때부터 하킴은 알 무칸나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는 것 같은데, 항상 얼굴을 가리고 다닌 때문입니다. 여기서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금색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녹색 비단을 드리우고 다녔다고 합니다. 추종자들은 알 무칸나의 얼굴이 너무 빛나서 볼 수 없기 때문에 베일로 가리고 다녔다고 했지만,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가 대머리에 외눈박이이고 추악한 외형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베일로 가렸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또 재밌는 게, 혹자는 그의 얼굴에서 광휘가 뿜어져 나오는 마술이 속임수라고 말합니다. 그가 거울을 얼굴 가까이에 대어 태양빛을 반사시켜서 신의 광휘를 연기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알 무칸나 얘기로 돌아가자면, 추종자들은 아바스 왕조의 검은색 의상에 저항한다는 의미로 흰 옷을 입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알 무칸나는 사남(Sanām)의 요새에 거점을 두고 2년간 전쟁을 이어가다가 패배하고 자살했다고 알려집니다. 훗날 시인인 토머스 무어가 〈랄라 루크 Lalla Rookh〉라는 서사시에서 등장시키기도 했다고 합니다. 참고 자료입니다. 1. https://www.iranicaonline.org/articles/moqanna 2. https://baheyeldin.com/history/veiled-prophet-of-khorasan.html 3. https://medium.com/@amirmj/the-veiled-prophet-contrasting-tales-of-mystery-and-symbolism-in-history-cfa1354e47f7 4.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al-Muqanna
좀더 언급하자면, 보르헤스가 초반에 언급한 참고 도서 중 알 무칸나의 예언서인 『장미의 폐멸』은 실존하는 책인지 확인이 어렵습니다(제가 살펴본 바로는 확인이 안 되네요!). 보르헤스는 이 책에 쓰여진 내용을 인용하기도 합니다만, 원본이 소실되었다고 미리 언급해두었던 터라 그 내용의 진위를 보증할 수 있는 사람은 서술자인 보르헤스 외에는 없습니다. 과거 기사도 소설의 작가들도 비슷한 수법을 사용했다고 어디서 읽은 기억이 납니다. 작품을 다 써놓고 그 작품이 우연히 입수한 책의 불완전한 필사본이나 번역본이라고 하면서 원본이 소실되었다고 말하는 식입니다. 그로써 작품은 가본임을 가장하고, 원본의 진의와 씨름하지 않고 그 독자적인 작품으로 인정받으면서도, 작가는 책의 내용에 뒤따를 위험이나 파급 효과를 어느 정도 경감할 수 있었습니다. 마치 거울상이 실재 모습과 달리 좌우가 반전돼 있고 거울의 미세한 곡면으로 인해 왜곡돼 있지만 현실에서는 실용적으로 쓰여지는 것과 같습니다. 거울은 원본과 가본이 교차하는 공간이며, 그 거울상은 원본과 가본 그 사이 즈음에 놓인 독특한 이미지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거울이라는 물건 자체로만 보면 원본이지만 그 앞에 선 대상을 왜곡시켜서 되비춘다는 점에서는 가본인데, 그 앞에 서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는 반드시 어떤 시선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초반에 언급되는 동전에 새겨져 있는 페르시아의 시가 대구(對句) 형식으로 돼 있다는 점도 의미심장합니다. 거울은 참 독특한 물건입니다. 많은 문학 작품에서 거울이 등장한 것도 위와 비슷한 맥락이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봅니다. 다음 책인 『픽션들』에 나오는 단편 '바벨의 도서관'에도 유사한 대목이 나오니 참고하셔도 좋겠습니다😀
우리들이 기거하고 있는 지상은 하나의 실수, 덧없는 패러디이다. 거울들과 아버지는 저주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그러한 패러디를 증식시키고, 확인해 주기 때문이다. 혐오감은 본질적인 미덕이다. (···) 하킴의 천당과 지옥은 마찬가지로 절망적인 것이었다. 그의 말을 부정하는 사람들, “보석달린 베일”과 “얼굴”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는 “경이로운 지옥이 약속된다. 왜냐하면 그 각 지옥은 999개의 불의 제국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각 제국에는 999개의 불의 산들이, 각 산에는 999개의 불의 성들이, 각 성에는 999개의 층들이, 그리고 각 층에는 999개의 불의 방들이, 그리고 각 방에는 그 사람들 하나하나가 들어갈 것이고, (얼굴과 목소리를 가진) 999종류의 불들이 그를 영원히 고문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불한당들의 세계사 84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장미의 폐멸이 존재하는지 궁금해져서 저도 찾아보았는데 아무래도 찾기가 어렵네요. 다만 또 흥미로운 이야기를 보게 되었는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Le Masque Prophète라는 이름으로 하킴에 대한 소설을 썼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 소설에서는 하킴에게 질병이 찾아와서 얼굴을 훼손시켰다는 설정까지 들어가 있습니다. 참조글을 쓴 저자는 보르헤스가 아무래도 나폴레옹의 글을 읽고 이 내용을 여기에 쓴 것 같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나폴레옹이 소설을 썼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서 이런 추정들이 굉장히 기묘하네요. https://www.cubaencuentro.com/cultura/articulos/como-jorge-luis-borges-intertextualizo-una-narracion-de-napoleon-284949
나폴레옹이 쓴 소설이라니.. 너무 궁금하네요. 지금이야 보르헤스의 명성과 업적을 아는 상태에서 읽으니 괜찮습니다만 당시였다면 표절 논란이 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보르헤스의 스타일에 대한 연구도 지금처럼 진척되지는(?) 않았을테니 오해도 있었을 테고요.
[냉혹한 살인자 빌 해리건]을 읽었습니다. 읽으면서 [플라워 킬링 문]이 생각나더군요. 서부시대를 백인들의 개척 시대가 아닌 토착민들이 느끼는 침입 시대로 그렸기 때문에. '빌리 더 키드'라는 이름이 나오자, 아 이름은 한 번 들어본 적 있는 사람이었구나와 함께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 어째서 이 사람 (이름조차 아닌) 별명만 알게 된 걸까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심지어 지금까지 '빌리 더 키드' 인물 자체보다는 그를 차용하거나 모델로 삼은 다른 캐릭터들을 통해 이름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멕시코 인들의 분통에 더 관심을 가져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무례한 예절선생 고수께 노 수께]를 읽었습니다. 아무래도 일본 이름이니 고스케 노스케가 아닐까 하고 잠깐 찾아보니 기라 고즈케노즈케吉良上野介로 불리나 봅니다. 이름을 음차하는 방식에 따라 글맛이라는게 정말 달라져서, 가까운 일본 이야기가 아니라 끊임없이 뭔가 들어본 적 없는 어떤 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리면서도 익숙한 일본 배경이 자꾸 다시 그 일본을 덧씌우는 기묘한 경험을 했습니다. 어렸을 때 이 부분을 읽었다면, 잘 모르는 나라의 익숙하지 않은 이름의 사람이 나오는 특이한 옛날 이야기로 읽었다면 더 재미있지 않았을까하고 아쉽기도 하군요.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문화가 사람을 자살하게 할 정도의 위력을 낸다는 것에 소름끼침을 꾸준히 느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예절선생이 다른 이야기들의 불한당들에 비해 악당으로 이야기 될 정도의 사람인가 싶은 악당성에 의문이 생기는 동시에, 남이 처형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이 자발적으로 자기 목숨을 끊도록 하는 끔찍한 자발성을 계속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마치 차라리 직접 처벌하는 부모가 자발적으로 아이 자신에게 죄책감을 들도록 하는 부모보다 낫다는 육아론도 떠오르며.) 심지어 마지막에 복수자를 의심했다는 이유로 자기를 죽이는 제3자도 나옵니다. 세상에 명예살인 습속은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명예자살은 한술 더 뜨는 것 같습니다. 현대 일본의 몇몇 컨텐츠들에서도 인간의 목숨을 에너지삼아, 혹은 자발적으로 자신들을 바쳐 동력을 구성하는 이야기들이 흔히 보이는 이유는 이런 기반에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닐지. 꽤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화적 상대성으로 덮히지 않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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