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보르헤스 읽기] 『불한당들의 세계사』 같이 읽어요

D-29
우리는 그가 한 푸줏간집 주인의 아들이었고, 어린시절 런던의 빈민가에서 무력한 가난을 경험했고, 바다에 대한 유혹을 느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었다. 바다로 도망하는 것(run away to sea)은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전통적인 영국식 결별, 즉 영웅적 출발을 의미한다.
불한당들의 세계사 29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황당무계한 사기꾼 톰 카스트로]까지 읽었습니다. 일자를 보니 기타 등등 이후 수록된 것들 읽을 시간이 따로 없어보여, 작가 연보와 대담, 옮긴이의 말도 읽었습니다. 대담에서는 히피에 관한 질문과 대답이 길게 나오는데 시대상이 느껴졌고, 눈이 안 보여져가는데 국립 도서관장을 맡게 된 아이러니도 들었습니다. 50세 이후에는 눈이 안보여 저술을 어머니 및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런 글쓰기는 어떤 것인지. (머릿속에 굴릴 수 있는 글의 부피에 맞춰 단편을 써왔다고 하는데...)
나중에 한번 다시 다룰 생각이었습니다만 한번씩 남는 시간에 들춰봐도 좋을 듯합니다. 일단 해설 같은 경우는··· 개인적인 소견입니다만, 글을 쓴 사람의 의도와 별개로 작품의 답안지처럼 읽혀지는 점이 있어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읽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뭐라 드릴 말이 없네요. 대담은 확실히 재밌어보입니다. 다만 소설가의 인터뷰 또한 소설의 한 부분처럼 읽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기 때문에, 개별적인 사실 관계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하기가 어렵네요. 이유야 뭐 늘 나중에 달라붙는 게 아닐까 합니다.
아, 반갑습니다. 저도 작품 해설은 거의 안 읽는 편입니다. 제가 읽었다고 언급한 목록에도 작품 해설은 없답니다 :P 제가 알기로 왜인지 한국 문학에서만 뒤에 작품해설이 붙는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고, 금방 책을 읽었는데 다른 감상이 제 여운에 침투하는걸 싫어하는 편이기 때문에 피하는 편입니다. 인터뷰도 소설의 한 부분이라... 흥미롭네요. 저는 소설을 더 알게 만드는 인터뷰보단 모르게 만드는 인터뷰 쪽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작품 해설은 잘 써도 욕먹고 잘 못 써도 욕먹는 분야라고 들었습니다. 고충이 많을 듯합니다. 저도 아예 안 읽는 것은 아니고 조금 읽어보고 흥미가 가는 글은 읽기는 합니다. 다만 기존에 많이 보이는 것처럼 작품의 가장 뒤쪽에 해설을 소개하는 편집 방향 자체가 이제는 조금 식상하고 마치 답안지처럼(?) 오해받을 여지가 다분한 듯합니다. 해설이라고 제목은 붙이지만 책의 마지막에 붙는 만큼 형식이 어느 정도 정해지는 것도 한계입니다. 조금이라도 비판적인 논조를 섞으면 자칫 남의 잔칫집 가서 훼방놓는 꼴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톰 카스트로를 과연 사기꾼으로 봐야 하나 싶을 정도로 말 잘 듣는 인간으로 다가옵니다. 제가 제목을 지었다면 '황당무계한 사기꾼 보글'이라고 짓지 않았을지 싶은 내용이었어요. 저는 지금까지 이 책의 사건들이 보르헤스가 만들어낸 소설이라고 생각했는데 기타 등등 뒤에 참고 문헌이 있더군요! 그 중 The History of Piracy를 많이 인용했는데 검색해보니 실제 있는 책이었습니다.
저는 보글이 있었기 때문에 이 이야기가 특별해질 수 있었다고 봐요. 보글은 오턴이 가지고 있는 현실에 대한 무구한 시선을 파악하고, 그를 활용해서 걸맞은 사실을 조합해서 사람들이 보고자 하는 거짓말을 현실에 대어주고 있습니다. 죽은 티치본의 어머니는 아들이 명백히 죽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14년째 광고면에 아들을 찾는 기사를 냈고, 보글은 그것을 보고 나서야 오턴을 아들로 둔갑시키기에 이르니까요. 어찌보면 이미 어느 정도 거짓을 요구하고 있던 현실을 보글이 간파하고 거짓을 제공한 것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합니다. 보글과 오턴의 관계는 마치 소설가와 현실의 관계와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소설가와 현실의 관계라고 하니 재미있습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14년째 사람을 찾고 있었다면, 그 사이에 얼마나 수많은 사기꾼들이 있었는데 다들 실패하고 이들은 성공했나를 상상하게 되더군요. 저는 제게 딱 맞는 어떤 책이 어디엔가 있을거라고 생각하고 도서관에서 책들을 빌리거든요. 그래서 책을 열 때마다 빨려들어갈 기대를 하는데 대부분 그만큼은 아닌 실망을 얻습니다. 그런데 이상적인 책의 내용이 무엇일지는 저도 모르고, 제가 상상하는 형태와는 상상할 수 없으리만큼 다를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말씀하신대로 보글이 그 기사를 보고, 티치본과 정말 닮은 누군가를 찾아 나서지 않은게 이야기를 특별하게 만들고 있네요.
보르헤스가 낸 첫 번째 소설집인데, 어째서 이런 악당들에게 관심이 끌려 이런 글을 쓰게 되었나 궁금해지는 두 번째 소설이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두 가지 정도, 하나는 전혀 진짜처럼 꾸미지 않았기 때문에 진짜라고 받아들여지는 진정성에 대한 이야기와 미래로부터 닥쳐올 불행을 과거에 미리 인지해서 생겨나는 습관이었습니다. 책 날개에서는 [픽션들]과 [알렙]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획득했다고 써져 있는데 그렇다면 [불한당들의 세계사]는 그리 인기가 없었고 나중에 발굴된 것인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저는 불한당의 세계사가 인기가 없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오늘날 보르헤스적인 스타일이 더 돋보이는 것은 두 번째와 세 번째 소설집인 '픽션들'과 '알레프'인 것 같습니다. 특별히 어느 책이 인기가 없었다기보다는 '픽션들'과 '알레프 쪽이 좀더 원숙한 스타일을 보여주기 때문에 유명한 게 아닌가 합니다. '불한당의 세계사'에서 얼핏얼핏 드러나는 소재와 공통적으로 천착하는 주제가 뒤에 나오는 단편집에서 좀더 명료하게 드러나긴 합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황당무계한 사기꾼 톰 카스트로] 이 소설은 가본이 진본을 대체하는 과정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오턴과 보글 일당이 죽은 티치본을 굳이 따라하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 그리하여 죽은 티치본과 전혀 닮지 않았다는 점이 오히려 티치본의 증거로 활용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지속됩니다. 한 발 더 나아가, 보글은 꾀를 내어 당시 영국인들의 반카톨릭적인 정서를 활용합니다. 카톨릭 인사들로 하여금 오턴이 티치본을 흉내내고 있으며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공표하게 함으로써 역으로 영국인들이 오턴의 말을 믿게끔 만든 것입니다. 이를 보면, 현실에서 진실을 다투는 일이 얼마나 복잡다단하게 얽혀 있는 주변 상황과 정치로써 결정되는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여러 이해관계가 얽히고 소송이 오가는 와중에 죽어버린 진짜 로처 찰스 티치본은 이름만 남은 상징이 되어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는 것도 재밌는 점 중 하나입니다. 어쩌면 진짜 거짓말쟁이는 모두가 자신의 입에서 거짓이 나오리라고 예상되는 상황에서 진실을 말함으로써 진실마저 모종의 거짓으로 만들어버리고, 진실과 거짓의 구도를 의도적으로 흩뜨리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이런 우여곡절의 끝에 보글을 잃은 톰 카스트로의 거짓이 탄로나고, 감옥을 나와서 자기 인생을 진솔하게 고백하는 강연을 하면서 오래도록 살았다는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그렇게 190일이 지났다. 약 100여 명의 증인들이 피고가 티치본에 틀림없다는 서약을 했다. 그 중에는 티치본이 소속해 있던 제6용병 연대에서 함께 근무했던 네 명의 동료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의 지지자들은 만일 그가 사기꾼이라면 위장의 모델로서 티치본의 젊은 시절 초상화를 흉내내려고 했을 터인데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그는 사기꾼이 아니라고 되풀이해 말했다. 게다가 티치본 부인이 그를 알아보았고, 어머니가 실수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불한당들의 세계사 36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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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적 과부 칭~] 이번에는 독살당한 남편을 대신해서 해적들을 규합해서 동맹을 형성하고, 남부 바다를 13년 간 노략했던 과부 칭이 등장합니다. 해적두목인 칭이 독살되는 과정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아서 여러 번 읽었는데 제대로 읽은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황제가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세를 불린 해적 두목에게 관직을 하사하면서 포섭하려고 들자, 그것을 미리 간파한 해적들이 그들의 두목을 독살했고, 남겨진 과부 칭이 해적들을 규합하여 다시 해적질을 일삼았다는 내용으로 이해하기는 했습니다.
태양은 서두르지 않고 흔들거리는 갈대밭 위에 떴다가 지곤 했다. 사람들과 병장기들은 잠을 자지 못하고 밤을 세우곤 했다. 그러나 정오는 밤보다 강대했다. 사람들과 병장기들은 끝없는 낮잠에 빠져들었다.
불한당들의 세계사 45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휴, 저만 이해가 안 간 게 아니었군요. 그렇게 생각하니 딱딱 맞아 떨어지네요. 보르헤스는 중국에서도 여성이 남성의 성을 가져다 쓴다고 생각한 걸까요? 라고 생각하고 찾아보니 정을의 아내 정일수였군요. 기사도 있고 위키피디아도 있네요. 한국어 기사들에는 보르헤스의 글에 나온다는 말이 없다는게 흥미롭습니다. 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46 https://zh.wikipedia.org/wiki/鄭一嫂 야사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여해적 과부 칭'이 남편이 사망하자 아들과 결혼해서 선단을 장악했다고 나오는데 그 이야기가 쏙 빠져있군요. 다른 하나는 선단의 사람들이 동성애자였다는 이야기가 외국 책에 실려 있었는데 그것도 빠졌네요. (말년에 <진정한 가르침의 빛>이란 사람과 결혼했다는 것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들의 이름은 張保仔인데 그런 뜻은 아닌 것 같고요.) 이 쪽은 실제 내려오는 야사가 보르헤스 버전보다 더 흥미롭네요. (딱히 이렇게 읽을 생각은 없었는데...)
스페인어에 조예가 없어서 원문은 어떨지 가늠이 잘 안 되긴합니다. 하지만 번역의 질을 논하고 싶지는 않아요. 사실 이 책도 몇 가지 맞춤법이 현재 용례와 다르기도 하고, 특유의 번역투나 비문이 의심되는 문장이 종종 보이긴 합니다만 저에게는 특별히 거슬리는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여담이지만 현존하는 번역서의 질을 논하는 사람은 늘 있고, 이 책도 예외는 아닌 걸로 압니다. 노파심에 먼저 말씀드리자면 저는 스페인어를 모르고, 감히 번역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실력이 없습니다. 다만 보르헤스를 읽는 일이 보르헤스를 오해한 번역가의 글을 한 번 더 오해하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에 가치가 없으리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한편 야사는 정말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특별히 야사를 모르더라도 책의 내용은 현실과 무관하게 한 편의 이야기로 보아도 재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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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적 과부 칭] 해적 칭은 황제가 파병한 2차 원정대와 전투를 앞두고 황국 선단에서 쏘아보낸 용 모양의 연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용과 여우에 관한 오래된 이야기를 떠올리는데, 그 내용이란 "여우가 계속해서 배은망덕한 행위를 하고 끝없이 나쁜 짓만 하고 돌아다녔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여우를 보호했던 용에 대한 재미없고 아리송한 전설"입니다. 그 전설을 곱씹은 해적 칭은 결국 항복하기에 이릅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사면초가도 떠올랐습니다. 초나라의 패왕 항우가 한나라의 유방과 싸우다가 한나라와 휴전협정을 하고 돌아가는 길에 협정을 위반한 명장 한신의 군사들에게 포위당합니다. 한신은 군사들을 동원하여 포위당한 초나라 군사들에게 초나라 고향의 애가를 불러서 그들의 사기를 크게 꺾고, 항우를 패퇴시키기에 이릅니다. 결국 그 노래에 담겨 있던 것도 어떤 이야기이며, 그 안에 담겨 있는 상징입니다. 앞서 다룬 이야기에도 적용되는 말인데 이야기는 객관적 사실이라기보다는 우리가 믿고자 하는 것이나 붙들고자 하는 신념 따위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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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한 상인 몽크 이스트맨~] 이번에는 뉴욕 갱단의 우두머리였던 몽크 이스트맨의 삶과 그 최후를 다룹니다. 보르헤스는 갱의 삶을 다룬 연극으로 시작해서, 이스트맨을 설명하는 중간중간 헐리웃 영화도 언급합니다. 헐리웃 영화의 주인공이 몽크 이스트맨의 모방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그 가게에 혈통이 좋은 백 마리의 고양이와 사백 마리가 넘는 비둘기들을 들여놓았다. 그러나 그것들은 팔려고 들여놓은 것이 아니었다. 단지 개인적으로 그 동물들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팔에 행복하게 안겨 있는 고양이 한 마리와,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뒤를 따르는 다른 고양이 한 마리와,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뒤를 따르는 다른 고양이들을 거느린 채 동네를 거닐곤 했다. 그는 황폐한 유적지나 기념탑 같은 사람이었다. 그의 목은 마치 황소의 목처럼 짧았고, 가슴은 마치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단단했다. 그는 길고 싸움을 고대하는 듯한 팔과 부러진 코를 가지고 있었다. 비록 몸에 난 상처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얼굴 또한 상처 투성이로 얽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마치 옛 기사나 선원들처럼 안짱다리의 소유자였다.
불한당들의 세계사 51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읽고나서 보니 저랑 동일한 부분을 줄 그으셔서 반가웠습니다. 저는 고양이 부분까지만. 이 챕터의 마지막 구절도 이 구절과 연결되며 마음에 남더군요. '죽음에 대해 무지하고 무심한, 평범한 고양이 한 마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딴 생각이지만 400마리의 비둘기는 닭장이나 그게 아니더라도 새장 같은 것에 갖혀 모여 있을 것 같은데, 도무지 고양이 100마리는 어떤 식으로 관리되고 있었을지 상상이 안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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