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보르헤스 읽기] 『불한당들의 세계사』 같이 읽어요

D-29
어떤 노예들은 병에 걸리거나 죽는 배은망덕한 죄를 저지르곤 했다. 그들은 이 불확실한 재산으로부터 최대한의 이윤을 뽑아내야 했다.
불한당들의 세계사 잔혹한 구세주 자라루스 모렐, 19p,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노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적나라하고도 간결한 설명이었습니다. 죽는 것마저 죄로 이해되는 상황에서, 한술 더 떠 착취하는 라자루스.
한국인들은 아마도 이런 악당의 어처구니 없는 결말에 익숙할 겁니다. 한국의 근현대사적 불한당들도 보통 이런 식으로 생을 마감하곤 했으니까요. 다른 묘사들보다 이 자가 죽이기로 결정한 사내의 마지막 기도조차 들어주지 않았다는게 그 악랄함을 배가 시킵니다. 라자루스는 아마 나사로의 다른 쓰기 같은데, 그가 예수에 의해 되살려졌다는 아이러니가 함께 담긴게 아닌가 싶네요.
별 신경 안 쓰고 읽었는데, 라자루스 모렐의 스펠링이 Lazarus Morell이군요. 하나 배워갑니다. 그렇게 보면 나사로가 되살아온 이야기와 흑인들이 자유와 속박을 왕복하는 이야기가 겹쳐보이기도 합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각주 6에서 비센떼 로시Vicente Rossi의 생몰년도가 (?)로 되어 있는데, 영어 스펠링으로 검색해봐도 간단히 (1871-1945)임을 알 수 있네요. 그간 세계가 얼마나 변했는지 곱씹게 됩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잔혹한 구세주 자라루스 모렐] 모렐의 사진이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은 모든 것이 기록되는 오늘, 영상매체와 고화질 사진에 익숙한 현재와 비교하면 무한한 상상력을 열어줍니다. 조금 다른 얘기같지만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도 거기 있지 않을까 합니다. 구체적인 영상이나 사진 이미지로 특정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상상을 자극하니까요. 이런 것을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자유와 권한이 아니라 속박과 한계에서 상상력이 나온다는 생각이 듭니다. 라자루스 모렐은 자신의 언급만큼이나 주변 사람의 풍문으로 완성되는 인물입니다. 그는 불완전한 모자이크 조각의 집합처럼 얼기설기 이뤄져 있고, 서술 방식도 그를 닮아 있습니다. 한편 모렐은 흑인 노예들에게 '자유'를 주겠다는 말로 꾀어서 노예를 다른 농장에 팔아먹기를 반복합니다. 그런데 이런 약탈꾼이 어떤 국면에서 구세주의 행위처럼 묘사됩니다. "범죄적인 것이 구원과 역사로까지 칭송받게 되는 그런 반란." 요약하자면, 자유를 원하는 흑인들에게 잠시간의 자유를 맛보게 하고 오래도록 속박함으로써 종내에는 흑인 전체가 해방을 열망하게 이끌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라자루스 모렐은 흑인을 꾀어 이득을 취했다는 점에서 잔혹한 수탈자였지만, 결과적으로는 흑인들을 더 큰 혁명으로 이끌었다는 점에서는 구세주입니다. 이런 구절도 떠오릅니다.
요컨대, 자유롭게 생각한다고 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는 것은 아니다. '이성의 공적 사용'을 통해 기존 질서의 약점과 불의를 목격하게 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통치자에게 개혁을 호소하는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 G.K. 체스터턴처럼 능동적으로 생각하거나 의심할 수 있는 추상적 자유가 실질적 자유를 제한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우리는 대체로 자유사상이라야말로 자유를 막아내는 최고의 안전장치라고 말할 수 있다.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노예의 정신의 해방이 노예의 해방을 막는 최고의 방책이다. 노예에게 그가 자유로워지고 싶은지 아닌지 고민하라고 가르쳐보라. 그러면 그는 스스로를 해방하지 않을 것이다."
멈춰라, 생각하라 - 지금 여기, 내용 없는 민주주의 실패한 자본주의 25쪽, 슬라보예 지젝 지음, 주성우 옮김, 이현우 감수
멈춰라, 생각하라 - 지금 여기, 내용 없는 민주주의 실패한 자본주의지구의 종말을 상상하긴 쉽지만 여전히 자본주의의 종말은 상상하기 어렵다. <멈춰라, 생각하라>는 잠시 행동을 멈추고 현 체제의 본질과 유지 원리를 곰곰이 생각하고 고민해야 할 시기라고 제안한다.
이러한 견딜 수 없는 문화에 기진맥진하고, 극심하게 구타당한 땅은 몇 년 가지 않아 황폐해지고 말았다.
불한당들의 세계사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황당무계한 사기꾼 톰 카스트로~] 이상한 얘기 같지만, '내가 나임을 증명해주는 것은 무엇인지'에 관한 웃긴 일화로도 읽힙니다. 난파된 증기선에 타고 있었던 영국인 로저 찰스 티치본은 명백히 죽었지만, 어쩐 일인지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14년 째 신문기사에 아들을 찾는 광고를 내고, 그러한 부름에 응답해서 오턴과 보글 일당은 죽은 티치본 행세를 하며, 오턴의 채권자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 오턴이 티치본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한 푸줏간집 주인의 아들이었고, 어린시절 런던의 빈민가에서 무력한 가난을 경험했고, 바다에 대한 유혹을 느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었다. 바다로 도망하는 것(run away to sea)은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전통적인 영국식 결별, 즉 영웅적 출발을 의미한다.
불한당들의 세계사 29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황당무계한 사기꾼 톰 카스트로]까지 읽었습니다. 일자를 보니 기타 등등 이후 수록된 것들 읽을 시간이 따로 없어보여, 작가 연보와 대담, 옮긴이의 말도 읽었습니다. 대담에서는 히피에 관한 질문과 대답이 길게 나오는데 시대상이 느껴졌고, 눈이 안 보여져가는데 국립 도서관장을 맡게 된 아이러니도 들었습니다. 50세 이후에는 눈이 안보여 저술을 어머니 및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런 글쓰기는 어떤 것인지. (머릿속에 굴릴 수 있는 글의 부피에 맞춰 단편을 써왔다고 하는데...)
나중에 한번 다시 다룰 생각이었습니다만 한번씩 남는 시간에 들춰봐도 좋을 듯합니다. 일단 해설 같은 경우는··· 개인적인 소견입니다만, 글을 쓴 사람의 의도와 별개로 작품의 답안지처럼 읽혀지는 점이 있어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읽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뭐라 드릴 말이 없네요. 대담은 확실히 재밌어보입니다. 다만 소설가의 인터뷰 또한 소설의 한 부분처럼 읽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기 때문에, 개별적인 사실 관계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하기가 어렵네요. 이유야 뭐 늘 나중에 달라붙는 게 아닐까 합니다.
아, 반갑습니다. 저도 작품 해설은 거의 안 읽는 편입니다. 제가 읽었다고 언급한 목록에도 작품 해설은 없답니다 :P 제가 알기로 왜인지 한국 문학에서만 뒤에 작품해설이 붙는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고, 금방 책을 읽었는데 다른 감상이 제 여운에 침투하는걸 싫어하는 편이기 때문에 피하는 편입니다. 인터뷰도 소설의 한 부분이라... 흥미롭네요. 저는 소설을 더 알게 만드는 인터뷰보단 모르게 만드는 인터뷰 쪽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작품 해설은 잘 써도 욕먹고 잘 못 써도 욕먹는 분야라고 들었습니다. 고충이 많을 듯합니다. 저도 아예 안 읽는 것은 아니고 조금 읽어보고 흥미가 가는 글은 읽기는 합니다. 다만 기존에 많이 보이는 것처럼 작품의 가장 뒤쪽에 해설을 소개하는 편집 방향 자체가 이제는 조금 식상하고 마치 답안지처럼(?) 오해받을 여지가 다분한 듯합니다. 해설이라고 제목은 붙이지만 책의 마지막에 붙는 만큼 형식이 어느 정도 정해지는 것도 한계입니다. 조금이라도 비판적인 논조를 섞으면 자칫 남의 잔칫집 가서 훼방놓는 꼴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톰 카스트로를 과연 사기꾼으로 봐야 하나 싶을 정도로 말 잘 듣는 인간으로 다가옵니다. 제가 제목을 지었다면 '황당무계한 사기꾼 보글'이라고 짓지 않았을지 싶은 내용이었어요. 저는 지금까지 이 책의 사건들이 보르헤스가 만들어낸 소설이라고 생각했는데 기타 등등 뒤에 참고 문헌이 있더군요! 그 중 The History of Piracy를 많이 인용했는데 검색해보니 실제 있는 책이었습니다.
저는 보글이 있었기 때문에 이 이야기가 특별해질 수 있었다고 봐요. 보글은 오턴이 가지고 있는 현실에 대한 무구한 시선을 파악하고, 그를 활용해서 걸맞은 사실을 조합해서 사람들이 보고자 하는 거짓말을 현실에 대어주고 있습니다. 죽은 티치본의 어머니는 아들이 명백히 죽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14년째 광고면에 아들을 찾는 기사를 냈고, 보글은 그것을 보고 나서야 오턴을 아들로 둔갑시키기에 이르니까요. 어찌보면 이미 어느 정도 거짓을 요구하고 있던 현실을 보글이 간파하고 거짓을 제공한 것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합니다. 보글과 오턴의 관계는 마치 소설가와 현실의 관계와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소설가와 현실의 관계라고 하니 재미있습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14년째 사람을 찾고 있었다면, 그 사이에 얼마나 수많은 사기꾼들이 있었는데 다들 실패하고 이들은 성공했나를 상상하게 되더군요. 저는 제게 딱 맞는 어떤 책이 어디엔가 있을거라고 생각하고 도서관에서 책들을 빌리거든요. 그래서 책을 열 때마다 빨려들어갈 기대를 하는데 대부분 그만큼은 아닌 실망을 얻습니다. 그런데 이상적인 책의 내용이 무엇일지는 저도 모르고, 제가 상상하는 형태와는 상상할 수 없으리만큼 다를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말씀하신대로 보글이 그 기사를 보고, 티치본과 정말 닮은 누군가를 찾아 나서지 않은게 이야기를 특별하게 만들고 있네요.
보르헤스가 낸 첫 번째 소설집인데, 어째서 이런 악당들에게 관심이 끌려 이런 글을 쓰게 되었나 궁금해지는 두 번째 소설이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두 가지 정도, 하나는 전혀 진짜처럼 꾸미지 않았기 때문에 진짜라고 받아들여지는 진정성에 대한 이야기와 미래로부터 닥쳐올 불행을 과거에 미리 인지해서 생겨나는 습관이었습니다. 책 날개에서는 [픽션들]과 [알렙]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획득했다고 써져 있는데 그렇다면 [불한당들의 세계사]는 그리 인기가 없었고 나중에 발굴된 것인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저는 불한당의 세계사가 인기가 없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오늘날 보르헤스적인 스타일이 더 돋보이는 것은 두 번째와 세 번째 소설집인 '픽션들'과 '알레프'인 것 같습니다. 특별히 어느 책이 인기가 없었다기보다는 '픽션들'과 '알레프 쪽이 좀더 원숙한 스타일을 보여주기 때문에 유명한 게 아닌가 합니다. '불한당의 세계사'에서 얼핏얼핏 드러나는 소재와 공통적으로 천착하는 주제가 뒤에 나오는 단편집에서 좀더 명료하게 드러나긴 합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황당무계한 사기꾼 톰 카스트로] 이 소설은 가본이 진본을 대체하는 과정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오턴과 보글 일당이 죽은 티치본을 굳이 따라하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 그리하여 죽은 티치본과 전혀 닮지 않았다는 점이 오히려 티치본의 증거로 활용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지속됩니다. 한 발 더 나아가, 보글은 꾀를 내어 당시 영국인들의 반카톨릭적인 정서를 활용합니다. 카톨릭 인사들로 하여금 오턴이 티치본을 흉내내고 있으며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공표하게 함으로써 역으로 영국인들이 오턴의 말을 믿게끔 만든 것입니다. 이를 보면, 현실에서 진실을 다투는 일이 얼마나 복잡다단하게 얽혀 있는 주변 상황과 정치로써 결정되는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여러 이해관계가 얽히고 소송이 오가는 와중에 죽어버린 진짜 로처 찰스 티치본은 이름만 남은 상징이 되어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는 것도 재밌는 점 중 하나입니다. 어쩌면 진짜 거짓말쟁이는 모두가 자신의 입에서 거짓이 나오리라고 예상되는 상황에서 진실을 말함으로써 진실마저 모종의 거짓으로 만들어버리고, 진실과 거짓의 구도를 의도적으로 흩뜨리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이런 우여곡절의 끝에 보글을 잃은 톰 카스트로의 거짓이 탄로나고, 감옥을 나와서 자기 인생을 진솔하게 고백하는 강연을 하면서 오래도록 살았다는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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