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책이 읽으니까 일본에 대해 많은 호기심이 생긴다. 사무라이, 게이샤, 엔카 등. 그리고 일본은 외침을 별로 안 받고 데모도 별로 안 하고 경찰이 총을 쏠 일이 별로 없고 하니 한 번 총격전이 벌어져도 큰 사건이 된다. 그리고 내란이나 외침을 적게 받아 여자들이 전쟁은 안 하고 그럴 필요가 없어 여권 신장이 더딘 건지도 모른다.
1Q84
D-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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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내세우는 여주의 남자에 대한 생각은 바로 자신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자신이 나이가 적으면 적고, 많으면 많은 것을 그 여주가 대개는 생각한다. 그리고 여자에 대한 이상형도 주인공의 생각이지만 주로 작가의 이상형을 주인공이 같이 그릴 때가 있는 것이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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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슬프면 다른 사람은 기쁠 수도 있다. 여자는 이러는 걸 좋아한다, 사랑하는 남자가. 자기가 기쁠 때는 남자가 피곤해도 같이 기뻐해야 한다. 그런데 자기가 슬플 때는 남자가 괜히 히죽거리면 죽여버리고 싶은 것이다. 어떻게 사람의 마음이 같을 수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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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나 석가처럼 인간 세상을 지배하려면 종교를 만들라는 말이 있다. 종교가 생겨났다가 흐지부지 사라지는 경우는 너무 인간에게 엄격하기 때문이다. 힌두교에서 소를 안 먹고 이슴람교에서 돼지를 안 먹는 것은 무슨 그 동물이 신격화되어 그런 건 아니고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그곳은 소가 귀하고 돼지가 귀했던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다분히 현실적이다. 자기 위주란 말이다. 그들이 떠받드는 종교도 다 자길 위한 것이고 나무 사는데 힘들게 하면 그 종교는 씨가 말라 인간세상에서 기를 펴지 못하고 사라진다. 인간을 너무 불편하게 하는 종교는 믿는 삶들이 한정되어 있다. 널리 포교가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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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생각이 비슷하면 기쁘다. 내가 주장하는 게 자기에게 타고난 것을 실현하는 게 이 세상에서 가장 잘하는 거라고 설파하고 다닌다. 설파하면 시끄러우니까 그냥 혼자 중얼거린다. 공산주의처럼 머릴 세뇌하고 가스라이팅하고 사이비종교나 원리주의, 그리고 유일신 같은 종교가 사람의 생각을 막는 행위를 나는 배격하고 혐오한다. 틀에 박힌 걸 혐오한다. 자유로운 영혼을 이상으로 품고 산다. 이게 작가가 가져야 하는 중요한 생각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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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바뀌지 않고 보수적이고 그것만 알고 하는 섬 같이 외따로 있거나 너무 내륙이라 외침이 적거나 하는 곳이 더 미신을 믿고 사이비종교에 더 쉽게 물드는 것 같다. 너무 자기 주장이 강하고 한 가지만 알고 이런 게 아니고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고 아예 기대를 하지 않으면 그런 것에서 더 자유로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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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과 협업하거나 다른 사람과 협상하고 조율 같은 걸 잘못하는 사람은 그러면서 글이 좋으면 작가가 딱 맞는 사람이다. 그는 남에게 아쉬운 소릴 할 필요가 없다. 그런 걸 잘못하니 작가가 아주 딱이다. 작가는 오히려 협업을 하면 안 된다. 대개는 가능하지 않다. 글은 혼자 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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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검사 버릇을 못 고쳐서 정치를 못 하는 것이다. 정치는 명령을 내리면 밑에서 따르는 게 아니다. 서로 조율하고 대화하며 타협하는 것이다. 그걸 못하고 열등감에 사로잡혀 자기 밑에 있는 것들을 다 자기 뜻대로만 하려 하니 생각대로 안 되는 것이다. 핵심만, 인사만 신경 쓰고 나머진 그냥 굴러가게 두는 것이다. 물 흐르듯해야 만사가 잘 돌아간다. 인위적으로 그 방향을 틀려고 하니 힘만 들고 제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 것이다. 자기가 무슨 조물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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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 수출 같은 것도 떠벌리면서 할 일이 아니다. 뭐가 좋은 거라고 떠벌리냐? 하여간 머리 돌아가는 것이 왜 그렇게 둔하냐? 무기 수출은 사람 죽이는 것을 찬양하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국가적으로 좋을 게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런 것은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하고 그냥 실속만 차리면 되는 것이다. 하여간 대가리가 너무 나쁘다. 국격도 하루가 다르게 추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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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현은 혁신을 못 한다. 자기도 안다. 자기 힘으로 당대표가 된 게 아니란 것을. 그러니 운신의 폭이 좁다. 인간은 누구가 자 기가 손수 이룬 것에 대해 애정이 깊은 법이다. 남이 해준 것엔 애정이 거의 가지 않는다. 그래서 책임감도 결여된다. 자기를 믿고 자기가 어려움을 겪고 이룬 게 최고인 것이다. 글쓰기로 누가 뭐래도 묵묵히 내 힘으로 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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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으로 끝을 맺는 여자
불행 속으로 일부러 뛰어드는 여자가 있다.
그녀는 행복하면 오히려 불안하고
불행해야 마음이 놓인다.
그래 겉으론 안 그렇다고 하지만
그녀의 행동은 불행 속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마치 불행을 즐기는 것 같은 인상이다.
배신당하고 상처받으면서도 자기의 이런
불행을 지속시켜줄 사람을 찾고
그런 폭력 남자와 결국 결혼해, 온통
몸에 난 상처뿐인 결혼생활을 이어나간다.
결국에는 불행의 종결인 자살로 생을 마친다.
왜, 이들은 이런 삶을 스스로 택하는 것일까.
자기 속에 깊은 상처가 있고 아니면 태초부터 불행의
씨앗을 잉태하고 태어난 것일까.
그것은 어떤 방법으로도 치우가 안 되어
결국 그 상처를 갖고
저세상으로까지 같이 끌어안고 가는 것이다.
그녀는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도
불행한 사랑했던 사람이다.
자기 불행만을 깊이 신뢰했던 것이다.
오직 불행을 겪기 위해 산 사람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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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끝까지 남아야
주인공이 여자건 남자건, 그는
계속 살아 있어야 한다.
너무 극단적인 성격이어서 중간에 자살하거나
죽으면 안 되기 때문에 극단적이어도
뭔가 자기 생명을 유지하는 힘이나 이유를 갖고
계속 소설이 끝날 때까지 그게 지켜져야 한다.
그래야만 그들이 나머지 인물을 지켜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왜 살아남는 것일까?
그들을 그렇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작가가 그들에게 집어넣은 게 뭐길래.
그들을 죽이지 않고 살려두는 이유, 아니
그들 스스로 살아남은 까닭은 무엇일까.
다른 사람 같으면 그런 불우하고 상처 깊은 환경에서
살아왔으면 그만 생을 마감할 수도 있는데,
그들은 거기서 살아남아 오늘도 살아간다.
그건,
아마도, 그들이 지닌 어떤 기질적인 것도 있을 것이고,
자기들만의-남은 눈치 못 채는-그걸 갖고 있어 그걸
향해 가다 보니 생의 의미를 찾아 그렇게 오늘도
생의 길을 밟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분명 안 보이는,
어떤 사명이나 과제가 있을 터이다.
(그건 이 지상(地上)에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가 주인공에게 심어 넣었거나
스스로 얻었다.)
그걸 갖고 가는 사람은 계속 살아남아
다른 인간들의 삶을 끝까지 지켜본다.
그걸 알고, 기억하고, 기록해야 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지만,
작가도 그걸 알아 개연성 없게
그들을 인위적으로 꾸미면 독자가 외면한다는 것도 알아
그들에게 뭔가를 준다.
아니, 뭔가를 알고 그들에게 부여한다.
계속 살아가게 하는 뭔가를.
독자를 납득시키면서 이야기 흐름 상에서도
자연스러운 것을.
독자는 작가가 쓰는 글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수가 있다.
그러나 작가는 말로 다 표현하기가 힘들어도 자기가 하는 말의
논리를 놓쳐서는 안 된다.
그 안에서 자기 논리는 논리가 있어야 한다.
그는 주인공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독자에게도
현실에서 비록 흔들리고 바뀌더라도 상상이나
자기 마음속 깊은 곳엔 모든 마음과 행동이 그리로
향하는 것을 만들고 그들에게도 심어주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런 자세로 글에 임해야 한다.
좀 납득이 간다.
나는 왜 이렇게 되었나.
왜 현실에 기반을 둔 생각은 별로 없고,
허망한 생각뿐일까.
머리는 지상에 있으면서 가슴은 하늘을 향하는.
그리고는 별로 살아갈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
죽을 생각은 한 적이 없는가.
아니 없는 게 아니라, 성공 못 하고 거듭 실패하는가.
콕 집어서 말하기도 어렵다.
하여간 뭔가 있고,
왜 이런 짓을 거듭하는 걸까.
그건 글을 좋아하는 조부가 그렇고, 작은 마을에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다가 만주로 무관이 아닌
문관(文官)으로,
(전장에서 싸우지는 않고 문서만 만지작거리는 군인, 행정병.
그에게 그런 걸 하라고 했어도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중에 독립해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대종교의 독실한
신자라-또 선비라-나무도 못 하지만 누가 해주는
것도 아니어서 나뭇짐을 지게에 지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개미가 길 한복판을 지나는 것을 보고
다 지나간 다음에 왔다는, 동네 어른들의 증언도 있었으니)
광막한 이역만리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그가 쓴 일기와 글이 아직도 남아 있다.
나는 이렇게 태어났고 그런 기질대로 살아가는 것뿐이다.
그게 체화되어 계속 뭔가 앞의 빛을 보며 나아가니
지금도 살아서 뭔가를 하고 있는 중이다.
운이 좋다고도 할 수 있다.
참, 고마운 일이다.
우연히 자연발생적으로 이런 걸 갖게 되었고,
그래서 살아간다.
받은 것에 대해 불평해봐야 아무 소용없다.
그냥 받아들이고 팔자려니 하고 살아가야 한다.
차라리 그걸로 뭘 할지를 궁리하고,
그걸 위해 노력하고 그 속에서 행복하면 그만이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뭔가를 벗어나려고 하고,
그걸 벗어날 희망을 품고,
오늘도 죽지 않고 살아간다.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 맘껏
가능성의 나래를 편다.
상상에서 그런 것처럼 현실에서도
자기를 옭아매는 한계를 벗어나는
자기를 발견한다.
현실의 숨막힘을 점점 걷어내는 것이다.
이런 할 일이 자꾸 생겨난다.
현실의 문제를, 상상의 세계로 진입해
뭔가 해결책을 가져와 할 일이 자꾸
내 앞에 놓여지는 것이다.
현실에서 할 일이 생겨나고, 나는 필요한 인간이 된다.
나는 오늘도 살아 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의 삶을 살펴본다.
이건 행운이다.
현실에서 한계를 벗어나 뭔가에 도달하려고 할,
그것이 저기에 아직 있다.
그 문제를 내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또 가보면 또 다른 뭔가가 있다.
그건 나의 과제이고, 화두(話頭, Subject)로 계속 남는다.
완전히-할 일이 없게-해결이 안 된다.
나는 그걸 또 해야 한다.
난 할 일이 있다.
작가는 주인공에게 이런 어떤 것을 주고 주인공을
끝까지 살게 만든다.
그는 죽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 있지만,
그는 살아남는다.
그가 죽어야 하는 것보다 그게(살아가는 게) 물론 더 힘이
세기 때문에 살아갈 것이다.
그런 경험을 하지 않은 독자라면 이해하기 힘들지라도
더 경험이 쌓인 나중에 다시 보면
납득이 비로소 가는 글이다.
이런 게 진정한 마스터피스 아닐까.
작가는 주인공에게 끝까지 살아남아,
나머지 인물들을 지켜보게 하는 뭔가를 그에게
넣는 작업을 계속한다.
주인공을 살려둔다.
주인공이 쓰러지려고 하면 그에게
어떤 임무를 맡겨 그를 다시 일어나게 한다.
그는 자기 눈앞에 있는 그것을
움켜쥐려고 다시 일어난다.
그 주인공은 작가의 모습일 수도 있고,
그걸 바라는 독자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다.
그래 주인공도, 작가도, 독자도 자신에게 살아갈
뭔가를 넣는 작업을 멈추지 않는다.
이런 게, 걸작(傑作)의 미덕(美德) 아닐까.
작가에게, 주인공에게, 독자에게
현실을 살아갈 힘을 주는 것.
지상(紙上, 허구의 세계)에서 만난 이들은 마침내
현실에서도 진정한 깐부(동패)가 된다.
서로가 서로를 돕는.
이게, 작가가 주인공을 끝까지 살려두는 이유다.
자기도, 독자도 살리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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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딸을 질투하는 건 들어봤지만 아버지가 자기 자식을 질투한다는 말은 들어본 기억이 없다. 딸바보는 들어보았지만. 그런데 왜 여자는 자식조차 질투하는 것일까. 이건 좀 같은 인간으로서 이해가 안 간다. 또 자기 아들을 사랑하는 며느리를 들들볶고 괜히 괴롭히며 해코지하기도 한다. 어쩌려고? 그러는지? 하여간 복잡한 여자들이다. 아니, 자기가 그렇게 사랑하는 아들을 좋아하고 사랑해서 자기 아들이 행복하면 좋은 거 아닌가? 사랑하는 아들을 자기만 혼자 독차지하려고, 이런 것에서 여성 혐오가 일어나고, 그래 여자를 질투의 화신이라고 하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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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는 잘 나가다 갑자기 여자와 성욕 같은 얘기를 불쑥 꺼낸다. 글이 심심하지 않아 좋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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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가 강하게 주장하는 것은 이런 것 같다. 현실에 발을 담그고 살지만 우리의 정신은 하늘을 보며 살아야 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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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아름다움을 모른다
아름다운 여자가 있다.
여자들은 그녀가 자기의 아름다움을
모르기 때문에 질투보단
용서를 택한다.
양아치가 그녀에게 접근한다.
그녀를 이용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거의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지금까지 친절하게 대해주었기 때문에
그 양아치도 그럴 거라고 속단한다.
(아름다운 여자가 더 현실을 모른다.
앵커를 비롯해 겉으로 똑똑해 보이는
여자들이 사기꾼에게 당한다.
그들의 사탕발림을 그대로 믿는다.
세상이 자기 아름다움처럼 마냥 아름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왜냐면 거의 모든 사람이 예쁘면 다 용서되듯이
조심스럽게 잘 대해주기 때문인데,
(이들은 왜 이럴까?
우리는 지저분한 곳을 골라가며
쓰레기를 버린다.
주변이 너무 깨끗하면 그냥 쓰레기를 갖고 간다.
그러다가 지저분한 곳을 발견하면 거기에
슬그머니 버린다.
나쁜 짓을 하는 몇 안 되는 사람에
자신이 포함되긴 싫은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많으면 그래도 좀 낫다.
어린아이에겐 가능하면 좋은 것만을 보여주려는
심리하고 같다고나 할까.
지켜주고 싶고, 훼손하면 뭔가 죄를 지은 것 같기 때문이다.
그걸 망가뜨리면 자신은 나쁜 인간이 된다.
그렇게 되면 자신감이 사라지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화려한 백화점이나 고급
레스토랑에 갈 때 한껏 멋을 부리고 간다.
거기 격에 맞추려는 것도 있고, 괜히 주눅 들기 싫은 것도 있고
하지만,
외모로만 나를 대하지 못 하게 하려고,
그들이 나를 더럽히지 않게 하려고,
뭔가 지켜진 것은 함부로 하지 못하고 존중하려고 하니까)
그러나 가끔 뭣도 모르는 양아치들이
이들을 훼손하려고 덤빈다.
그렇게 훼손될 그녀들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그녀를 잘 아는 착한 남자가
그런 늑대 같은 남자들을 막아준다.
그녀는 그 남자 안에서 안전하다.
이제 그들은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서 둘만 남은 것처럼
서로를 돕고 산다.
둘 중 하나라도 없으면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장면은 급변해,
실제 그런 환경
(무인도나 광활한 우주공간에 그들만이 존재하는)이
그들을 에워싼다.
범위가 없는 이 광활한 공간에 둘밖에 없다.
슬프지만 존재한다.
이런 상황을,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곧잘 볼 수 있다.
<은하철도 999>의 메텔(글썽이는 커다란 눈을 하고
웃음이 없고, 검정 옷만 입고, 수직으로 떨어지는
긴 머리칼을 하고 지나치게 슬렌더한 몸매)처럼 신비하고
성에 눈뜨지 않아-아니면 어떤 이유로 그걸 잃어버려-
이성에 관심이 없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여인이
아무런 의심도 사심도 없이
자신의 파트너인 남자, 철이
(남자의 외모는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다)와 함께
우주공간에서 뭔가를 추구한다.
그건 그들에게 해야만 하는 임무이고 사명이다.
남자는 그래도 가끔 두근거리지만, 그녀는 다만 그 남자에게
그런 걸 전혀 느끼지 못하고,
순연(純然)하게 그들의 공동 사업을 수행할 뿐이다.
그 사업이란 것도 끝도 없고 이룰 수도 없으며,
공허만이 존재할 뿐이다.
무한 허무의 세계.
절대 고독의 스페이스.
그들의 세계는 시작도 끝도 없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궤도를 달린다.
그러나 그들은 은하철도를 타고 오늘도 앞으로 나아간다.
이유도 모른 채.
알아도 도착하면 허무뿐.
끝은 또 다른 시작이다.
목적지를 향하는 건지,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는 건지
그저 앞으로 갈 뿐이다.
연기를 내뿜으면 기적 소리와 함께.
멀어지는 열차의 꽁무니는 고독으로 슬프다.
무한의 우주공간을 끝도 시작도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영원히 유영(遊泳)한다.
슬프고도 아름답다.
인간 세계에선 분명 축복받고 환영받을 일이지만,
그들이 지금 있는 곳은 미추(美醜)의 구분이 없다.
(더 가엾고 슬픈 것은 그가 광활한 우주가 아닌
인간 세계에 있다면, 아니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저세상으로 가면 몸도 영혼도 우주 속으로
흩어진다고 믿기 때문에)
남들의 축복을 받고 그들에게 큰 도움을 줄 거라는
기대 때문이다.)
아름다워도 소용없고 미워도 소용없다.
자신의 미모를 알더라도 다 부질없는 짓이다.
나는 남을 통해 아는 건데, 그 남이 없다.
이제 자신의 미모를 알지 못하게 되었다.
아름다움을 잊어버렸다.
그저 그들의 사명을 위해 앞으로만 갈 뿐이다.
숭고하다.
신비에 쌓인,
그러나 자신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여자는,
현실에서 로맨스를 꿈꾼다.
감히 훼손하면 안 될 대우를 받아왔다.
그래 자신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순간의, 그런 자신감과 희망을 응원한다.
그 순수한 아름다움에 따르는 영광도.
그걸 힘껏 지켜주고 싶다.
그 이상향(理想鄕)을.
신비롭고 슬픈 향수(Nostalgia)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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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장수 마을이 사라졌다고 한다. 생선과 야채와 발효 식품인 된장국 같은 것만 먹다가 서양의 고기를 먹기 시작하면서 그것도 시작되었다고 한다. 자극성 있고 맛은 좋지만 몸에 안 좋은 것은 장수에 방해가 된다. 금욕과 절제, 소량의 음식 섭취가 장수의 비결이다. 일본인은 상다리가 브러지게 차리지 않는다. 접시에 모기 음식처럼 작게 담겨져 나온다. 전골 같은 것도 통째로 먹지 않고 앞접시에 적당량만 덜어 먹는다. 이런 게 장수에 도움이 되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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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많은 자들이 인격이 고매한 것도 아닌데 아마 있다면 그것도 돈이 풍복해 그리 된 것이지 그의 바탕이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의 시중을 들며 존경하는 듯이 집사들이 거드는 것을 보면 역겁다. 하지만 그 집사도 속으론 그냥 돈 때문에 그짓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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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는 아이들을 상대로 한 성은 절대 안 되지만 이들이 크면 도덕과 어긋나도 좋으니 유부녀와 불륜을 저지르는 등 자유 섹스를 하라는 말처럼 들린다. 원래 일본이 이런 곳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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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한 조각
구렁이를 바위틈에서 나오게 하려면
꼬챙이로 그 틈을 쑤셔선 안 된다.
(그러면 더 깊숙이 들어갈 뿐이다.)
그냥 짚을 태워 연기를 넣으면 불에 자기 몸이
타면서도 밖으로 기어 나온다.
그러면 느긋하게
가죽을 벗겨 구워 먹으면 된다.
한겨울 밤, 눈이 수북한 시골에서,
보이는 눈(雪)은 하얗다 못해
눈(目)이 시릴 정도로 짙푸르다.
(벌렁거리는 게, 꼭 살아서
숨이라도 쉬고 있는 것 같다.)
달빛을 받은 눈의 반짝임이 별의 반짝임을 닮았다.
육각형 눈 조각들이 보석처럼 제각기 빛난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의 소금을 뿌린 듯한
하얀 세상보다도 더 황홀하고 신비롭다.
휘영청 밝은 보름달의 빛이 짙푸른 눈에 내리꽂히면
그것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눈이 솜이불 같아 거기에 그대로 드러눕는다.
하늘의 별과 눈 속의 별과 나는 하나가 된다.
내가 그들을 이어준다.
벌집을 튀길 때 벌에 쏘여가며 튀겨
(이때 왕팅이나 땡삐에 정수리가 쏘이면
그야말로 정신은 혼미하고 몸은 흐물거린다.)
벌과의 사투(死鬪)에 이겨 벌을 몰아낸
다음 그 벌집을 보면 안에 꿀이
잔뜩 들어있다.
벌집 자체가 꿀로 만들어졌다.
벌집에서 꿀만 빨아 먹는 게 성에 안 차,
벌집을 통째로 씹어먹으면 얼마나 진한지
머리가 다 띵할 정도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애벌레를 굵은 소금만 뿌려
평평하고 넓적한 돌 위에 탁탁 털어
구우면 노랗게 익는다.
그걸, 꿀이 범벅인 벌집과 같이 씹으면
그야말로 천국과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우리 고을은 추석날 밤에
거북이 놀이를 하며 지냈다.
수수로 아프리카 토인처럼 꾸미고
키(오줌싸개가 머리에 쓰고 이웃에 가서 소금을
얻어올 때 쓰던)나 짚으로 엮은 이엉
(제일 나중에 꼭대기에 얹는),
소쿠리를 뒤집어쓰고 거북이 흉내를 내며
가가호호 방문해 각설이 타령을 하고 음식을 추렴하는 것이다.
집집마다 마당을 돌려 질펀하게 놀다가
갑자기 마당에 푹 쓰러진다.
그러면 추장(논바닥 흙으로 얼굴을 검게 칠하고,
수수의 술과 장끼(수꿩) 꼬리털로 머리에
장식하면 진짜 위엄 있는 아프리카 추장처럼 보인다)이
봉당에 올라서서(호롱불에 비친 그의 모습은 늠름하다 못해
말이면 다 따라야 할 것처럼 오금이 저린다.)
주인에게(주인은 자동으로 그에게 꾸벅꾸벅 절을 한다.)
“우리 각설이들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여기까지 당도했으나 이제 힘이 빠지고 배가 고파
더 이상 놀지 못하고 저렇게
드러누웠으니 한 푼만 보태줍쇼?” 하면 주인은
떡이며 과일, 고기, 각종 지짐이 등
추석 음식을 내주는 것이었다.
(음식의 양이 적거나 고기나 술이 아닌 장떡이나 깨떡같이
질이 낮으면 거북이들은 일어날 생각을 안 한다.
추장이 오케이 사인을 보낼 때까지 꼼작 않고 있다.
그러면 주인은 추장의 비위를 맞추느라
일단 추장 앞에 주안상을 봐오고,
부엌으로 가서 갖은 음식을 바가지에 수북이 담아온다.)
그러면 추장이 비로소 큰 소리로
“주인께서 우리에게 동냥을 주셨으니
자, 한바탕 신명나게 놀아보자꾸나!” 외치면
쓰러졌던 각설이들이 일제히 일어나 마당을 다시 빙빙 돌려
“얼~씨구 씨구 들어간다. 절~ 씨구 씨구 들어간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고 않고 또 왔네.
잘난 사람 잘난 대로 살고, 못난 사람 못난 대로 산다.
세상은 요지경, 요지경 속이다.
얼~씨구 씨구...”하며
품바 타령을 배를 두드리며 구성지게 늘어놓고
다음 집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지금도 이곳에선 ‘품바 축제’가 지역 행사로
해마다 열리고 있다.
오웅진 신부가 이런 거지(품바, 각설이)들을 모아
재워 주고 입혀 주고 먹여 준 곳이 바로
이곳 ‘꽃동네’로 탈바꿈한 것이었던 것이었다.
(원래 이 지역의 거북이 놀이는 키와 이엉, 지게 소쿠리를
뒤집어쓰고 거북이 흉내를 내는 놀이였으나, 그 당시에 타잔이
유행해서(그땐 우리 동네는 가난해서 TV가 없어 다른
부락까지 원정 가서 토요일(그 당시 토요일도
반 공휴일이라고 오전 수업을 했다.)에 하는 타잔을 보았는데,
주인이 문지방에 걸터앉아 20원씩 받고 입장시켰고, 발을
안 씻고 온 사람은 발을 씻고 다시 오라고 돌려보냈다.),
그 타잔에 나오는 아프리카 토인과 추장을 보고
응용한 것이 수숫잎을 엮어 허리에 두르고 어깨에 걸쳐
(도롱이(옛날에 비 오면 쓰는 우비)를 쓴 것과 비슷하다)
거북이 놀이와 섞였다.
그래서 동네 마당에선 전통적 거북이와
타잔의 아프리카 토인들이 섞여 함께 놀았던 것이다.)
개구리밥에 침을 발라 논 뒤의 개구리가
많이 서식하는 곳에 대고 있으면
개구리가 그걸 덥석 문다.
그걸 낚시하듯 낚아채면 개구리가 딸려오고
(어느 때는 두 마리나 세 마리가 한꺼번에)
땅에 패대기치면 찍소리도 못하고 뻗는다.
그걸 물오른 버드나무(껍질은 벗겨 호드기를 만들어 불고)
꼬챙이에 줄줄이 꼬여 (꼬치를 만들어)
담배 찌는 건조실의 불이 이글거리는 시퍼런 화덕에 집어넣고
구우면 금방 익어, 없는 살림에
또 한 끼가 해결되는 것이었다.
(이 시절은 배에 찬 것, 밥 내려간다고, 배 꺼진다고
뛰지도 못하게 했다. 너무 심하게 뛰어놀면
진짜로 엄마가 부지깽이를, 아버지가 지게 작대기를 들고
뛰어왔다. 이러니 한 끼를 개구리로 채우고
밥 달라는 소리를 안 하면,
그게 부모에 대한 진정한 효도였던 것이다.
한국은 참으로,
눈부시게 변한 것이다. 이게 불과
50년 전의 일이다.)
TV도 없던 긴긴 겨울밤, 아이들이 몰려나와
동네 공터에서 말똥구리와 도망구리를 하며 놀았다.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놀이는 멈추지 않는다.
전기도 안 들어오던 때라 가로등도 없어,
별빛과 달빛을 친구 삼아 아이들은 놀이에 여념이 없다.
밤하늘의 서늘한 별빛이 아이들의 머리 위에서
선명하고 맑게 빛났다.
(아이들은 이런 식으로 뛰어놀며 커야 하는데,
요즘 애들은 불쌍하다. 한편 나는 좋은 시절을
보냈다고 본다. 참 행운이었던 것 같다.
왜냐면 사람은 이런 ‘추억의 한 조각’을 가슴 한쪽에
묻고, 그걸 밑천 삼아 살아가기 때문이다.)
60년대 시골은 먹을 게 풍족하지 않았다.
추수도 끝나고 밤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가을날 밤,
(몸도 마음도 덩달아 여유로워진다.)
배가 고파 잔칫집으로 밥 훔치기를 하러 가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한가해지면 딴생각을 하게 되어 있다.
딴생각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인생의 과정에서 꼭 필요할
수도 있다. 그래야 자기 삶을 한번 돌아보게 된다.
농번기에는 일만 한다. 여유가 없다. 오직 그것만 한다.
그것만이 진리인 양.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이 딴생각이 인간을 진화시켰고,
문명과 문화를 탄생시켰다고 본다.
운동도 보면 몸에서 힘을 빼라고 한다.
복싱도 수영도 골프도 하나 못해
운전도 몸에서 힘을 빼라고 한다.
사실 힘이 몸에서 빠지는 순간,
이제 어떤 경지에 올라선 것이다.
젊을 때도 몸에 힘만 잔뜩 들어가 뭔가 마구 덤빈다.
그 시절도 나름 좋은 것인데도, 이제 그럴 필요까진 없었다고
깨닫는 순간인 중년과 노년이 다가온다.
몸에서 힘을 뺀 시기이다. 그리고는 자기의
삶을 뒤돌아본다.
이제 ‘추억의 한 페이지’를 펼쳐본다.)
부엌문을 열고,
(이때 끼이익 소리가 얼마나 큰지,
주인이 깰까 간담이 서늘했다.
그땐 TV나 인터넷 등이 없어 이웃 할머니가 마실 와서
무서운 옛날얘기를 들려주어 늦게까지 안 자고
눈을 말똥거리기도 했다. 그런 불 켜진 집은 그냥 지나쳤다.)
가마솥에 있는 밥과 고기를 훔칠 때,
저학년 애들은 어두워서 주변의 식기들을 발로 차거나
무거워서 솥뚜껑을 쾅 하고 놓치거나,
그때 한 놈이 킥킥거리며 웃으면 전체로 전염되어
한바탕 웃음이 터져 나와, 그 소리에 드디어 주인이 깬다.
그러면 “걸음아, 나 살려라!”하고 냅다 도망치는 것이다.
바께쓰에 쓸어 담은 온갖 기름떡과 삶은 고기, 술을 뒷동산에
둘러앉아 실컷 포식하는 것이다.
그때 막걸리에 취해 몸이 핑핑 도는 가운데
(술에만 취하는 게 아니라 밤의 정취에 취하고
동무와의 우정에 취하고 사는 맛에 취한다.)
일어나 보면 지난여름 장마 때 산소 여기저기가 파여
죽은 사람의 뼈가 보이는(이때 겉으로 드러난 인(燐)이
반짝거려 사람들은 이를 도깨비불이라고 불렀다)
공동묘지(추적추적하고 비만 오면,
처녀 귀신의 한 맺힌 곡소리가 마을까지 들리는 곳이라
낮에도 혼자 가기를 꺼리는 곳이다. 누군, 공동묘지
밭에서 어둑해질 때까지 일하다 집으로 돌아올 때
뭐에 씌었는지 그 귀신과 얘기를 하며 왔다고 하고,
누군, 한밤중에 사람 기척이 있어 깨어보니
자기 옆에서 자다가 슬그머니 나가는데 바로
그 처녀 귀신이었더라, 라는 말도 전부터 전해오고 있다.)에서
술에 취해 뻗어 자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순간, 술이 확 깨면서 혼비백산
그곳을, 절대 돌아보지 않고 탈출에 성공하는 것이다.
한겨울밤,
초가집 처마 밑에 손을 넣으면 굴뚝새가 잠을 잔다.
(이때, 온기가 있고 뭔가 뭉클하면 거기에 새가 있는 것이다.
가끔 뱀이 손에 잡히기도 한다.)
그걸 잡아 낮에 서리해 놓은 닭과 함께
(서리한 닭은 아무도 모르게 상여를 두는, 곳집의
오동나무 관에 미리 쟁여놨다.)
사랑방에 마련한 화롯불에 구워 먹거나 삶아 먹으면서
-새끼 꼬고 멍석을 뜨며-
길고 지루한 겨울밤을 온통 지새우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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