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파인먼의 삶 들여다보기

D-29
우주론자들이 생각하는 공간은 아인슈타인 시대 이전의 과학자들이 가졌던 직관적인 생각과는 이미 달랐다. 공간은 평평하고 밋밋한 대상이 아니라, 시간과 중력을 모두 품고 있는 불가사의하고 가소성이 뛰어난 매질이었다. 일부 우주론자들은 100역-150억 년 전에 일어난 대폭발을 근거로 내세우며 '공간이 고속으로 팽창하면서 그 안의 물질들이 점점 더 멀리 떨어져 간다'고 믿었다. 우주는 어디를 가나 똑같고 무한하고 정적이고 유클리드적이고 늙지 않고 균일하다는 가정, 즉 세상은 끝이 없기를 기원하던 가정은 흘들리고 있었다. 우주팽창설을 지지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는 1929년 에드윈 허블의 발견이다.
파인먼 평전 - 괴짜 물리학자가 남긴 현대 물리학의 위대한 이정표 207p, [프린스턴]중, 'Mr.X와 시간의 본질'중에서, 제임스 글릭 지음, 양병찬 외 옮김
위에서 언급한 <우리 우주의 첫 순간>에 언급되는 우주급팽창 이론의 창시자 앨런 구스(Alan Guth)의 아이디어에 따르면, 기존의 빅뱅 이론이 해결하지 못했던 우주의 '평탄성 문제'와 '지평선 문제'를 잘 설명해줄 수 있다고 합니다. 위의 인용문에서 언급된 초기 우주론자들의 생각과 달리, 우주는 평평하다고 해석되고, 이를 위한 여러 조건들을 우주급팽창 이론이 잘 설명해주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했습니다.
앞선 파동과 뒤처진 파동을 절반씩 고려하여 과감하게 시간대칭이론을 세웠던 것처럼, 휠러와 파인먼은 이번에도 과감한 우주론적 주장을 펼쳤다. 수식들의 균형을 적절히 맞추려면 '모든 복사가 결과적으로는 어딘가에 흡수된다'고 수학적으로 가정해야 했다. 광선이 흡수물질과 만나지 않고 끝없는 미래로 영원히 날아간다면 이 같은 가정에 어긋나므로, 두 사람의 이론이 성립하려면 특정한 종류의 우주가 전제되어야 했다.
파인먼 평전 - 괴짜 물리학자가 남긴 현대 물리학의 위대한 이정표 208p, [프린스턴]중, 'Mr.X와 시간의 본질'중에서, 제임스 글릭 지음, 양병찬 외 옮김
1940년대에 파인먼과 휠러, 스승과 제자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문제가 우주의 기원과 관련한 연구에도 닿았다는 점이 흥미롭네요. 두 사람이 상정한 '흡수체'라는 대상을 우주론에 적용하면 우주의 절반 가까이 차지한다고 예상되는'암흑물질'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궁금하네요.
파인먼은 다음과 같은 말로 발표를 마무리했다. "물리법칙은 우리에게 '허용 가능한 우주가 여럿 존재한다'고 알려주는데 우리는 단 하나의 우주만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거 정말 흥미롭지 않습니까?
파인먼 평전 - 괴짜 물리학자가 남긴 현대 물리학의 위대한 이정표 209p, [프린스턴]중, 'Mr.X와 시간의 본질'중에서, 제임스 글릭 지음, 양병찬 외 옮김
이 발언은 '다중우주'에 대한 언급으로 보입니다. 이 부분이 놀라웠던 것은, 댄 후퍼의 책 <우리 우주의 첫 순간>에서 1987년에 물리학자 스티븐 와인버그가 제안한 가설을 언급하는 대목 때문입니다. 이 논문에서 와인버그는 "우주의 진공에너지 밀도는 우리가 그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293)고 합니다. '현대의 다중우주 아이디어는 이렇게 탄생했다'라고요. 하지만 파인먼의 일화를 보면 이미 1940년대에 휠러와 파인먼이 다중우주가 존재해야할 가능성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와인버그와 같은 정교한 이론으로 다듬어지지 않았을지라도, 그 아이디어는 이미 20세기 초반에 정상급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논의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 우주의 첫 순간 - 빅뱅의 발견부터 암흑물질까지 현대 우주론의 중요한 문제들우주의 비밀을 밝혀온 역사의 중요한 순간들과 그 의미, 그리고 오늘날 베일에 가려진 빅뱅 직후의 순간을 설명하려는 과학자들의 분투기를 담은 현대 우주론 안내서다. 새롭게 등장하는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을 찾는 여정을 따라가면서 현대 우주론의 맥락을 쉬운 언어로 풀어냈다.
책을 아직 많이 읽지 않은 상태에서 어떤 내용일 것이라고 상상하세요? 혹은 어떤 내용을 접하기를 기대하세요?
한 사람의 일대기를 다룬 평전이고, 파인먼에 대한 몇 가지 일화를 알고 있어서 보다 익숙한 느낌입니다. 저자 제임스 글릭이 문학과 언어학을 전공한 저널리스트라서 그런지 과학사적인 이해와 조사도 대단하지만, 여러 가지 사회 문화적 배경과 시대상을 종합적으로 담아내기에 적격이란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20세기 미국 사회의 단면을 한 과학자의 삶을 따라가며 살펴볼 수도 있을 것 같아 기대 하며 읽고 있습니다. 또 현대 물리학의 두 기둥인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구축한 장본인들과 젊은 물리학자로서 직접 교류하고 상호작용한 인물의 에피소드가 흥미진진하네요. 다만 분량이 상당해서 서둘러야 겠습니다.
파인먼은 아직 대학원 2년차여서 기본 문헌에 무지했을 뿐 아니라, 디랙이나 보어의 논문을 독파하는 것을 썩 내켜하지 않았다. 사실 그건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대학원생이라면 누구나 거쳐야 하는 논문제출자격 구술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파인먼은 '이미 다 아는 물리학 지식'을 요약하며 달달 외우는 공부 따위는 하지 않기로 했다.
파인먼 평전 - 괴짜 물리학자가 남긴 현대 물리학의 위대한 이정표 215p, [프린스턴] '아우라'중에서, 제임스 글릭 지음, 양병찬 외 옮김
그 대신 호젓한 MIT도서관을 찾아가 새 노트를 펴고 맨 앞장에 "내가 모르는 것들"이라고 적었다. 그러고는 난생 처음으로 자신의 물리학 지식을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공부법은 나중에 파인먼의 전매특허가 되었다. 몇 주 동안에 걸쳐 물리학을 갈래별로 분해하여 윤활유를 바른 다음 다시 조립하면서 어설픈 부분이나 불일치하는 곳이 없는지 낱낱이 점검했고, 주제별로 핵심사항을 골라내려고 애썼다.
파인먼 평전 - 괴짜 물리학자가 남긴 현대 물리학의 위대한 이정표 207p, [프린스턴] '아우라'중에서, 제임스 글릭 지음, 양병찬 외 옮김
파인먼의 공부 방법에 대한 설명이 인상적입니다. 자신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분명히 구분하여 점검해보는 일, 기존의 지식을 의심하고 직접 의미와 본질을 파악해보는 일 등으로 요약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이 작업이 사실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상상이 갑니다.
전쟁은 어느새 물리학자들 간의 전쟁으로 비화하고 있었다.
파인먼 평전 - 괴짜 물리학자가 남긴 현대 물리학의 위대한 이정표 224p, [프린스턴], '전쟁준비'중에서, 제임스 글릭 지음, 양병찬 외 옮김
1941년 12월,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약 7,000명의 미국 물리학자 중 4분의 1이 군사연구시설에 들어갔다. 이런 연구시설들은 미국 전역에 산발적으로 설립되었지만 신속히 자리를 잡았다. '과학은 진보를 의미하며 지식을 활용하고 인류의 능력을 고양하는 것이 과학자의 의무'라고 교육받은 세대가 마침내 거국적인 목표를 확인한 셈이었다.
파인먼 평전 - 괴짜 물리학자가 남긴 현대 물리학의 위대한 이정표 227 p, [프린스턴], '전쟁준비'중에서, 제임스 글릭 지음, 양병찬 외 옮김
역사적인 과점에서 2차 대전이 1차 대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과학기술이 국가주도의 R&D사업에 통합되고 전장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한 점이라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시에 맨해튼 프로젝트와 같은 국가주도의 거대 프로젝트를 통해 원자력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레이더와 각종 무기, 비행기 등의 기술 개발에 국내외의 인재들이 모여 총력전을 이룬 것이 큰 특징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20세기의 역사를 고려할 때 과학기술의 역사를 배제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할 것 같습니다. 또 달리 보면, 제2차대전 이후로 국가주도의 사업에 과학자의 영향력이 (특히 미국에서) 크게 부상했던 시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과학이라는 지식의 형태가 갖는 잠재력과 영향력에 대해, 그리고 진보라는 신념에 힘을 실어주고 이에 잘 부합했던 분야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이제 '맨해튼 프로젝트' 부분을 읽고 있습니다만, 전쟁에 대비하여 건국 이후 사상 최대규모의 민간-군 조직이 형성되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지금 이름만 들어도 잘 알고 있는 기업들, 이를테면 제너럴일렉트릭(GE), 웨스팅하우스, 듀퐁, 앨리스-차머스(Allis-Chalmers), 크라이슬러, 유니언카바이드 같은 기업들과 수십 개의 중소기업이 참여(232p)하여 거대한 생산단지를 건설한 것이네요.
파인먼은 실무위원회에 계속 참석하면서, I.I. 라비, 리처드 톨먼Richard Tolman, 그리고 J. 로버트 오펜하이머와 처음으로 인사를 나눴다. 오펜하이머는 파인먼과 닮았다면 아주 닮았고 다르다면 아주 다른 물리학자로, 향후 3년 동안 파인먼의 운명을 좌우할 인물이었다.
파인먼 평전 - 괴짜 물리학자가 남긴 현대 물리학의 위대한 이정표 237p, [프린스턴], '전쟁준비'중에서, 제임스 글릭 지음, 양병찬 외 옮김
1942년 말, 드디어 영화 <오펜하이머>의 주인공이었던 오펜하이머와 리처드 파인먼이 처음 만나던 시기를 언급한 대목에 이르렀네요. 제 기억이 맞다면, I.I. 라비 역시 영화에서 자주 나왔던 과학자입니다. 얼굴이 동그랗고 통통한 과학자로요. 핵무기 개발에 참여했지만, 훗날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핵무기가 사용되고 나서 자신이 무슨 일을 한 것인지 멈춰서고 회의하는 과학자로 나왔던 것 같습니다. 다시 영화를 봐야겠네요.
영화 <오펜하이머>와 관련한 과학사 도서를 찾다가 발견한 도서라 추가해봅니다. 2018년에 출간되었다가 다시 올해(2023년) 개정판이 나왔네요. 아마도 <오펜하이머> 개봉에 맞추어 다시 소프트커버 버전으로 나온 것 같습니다. 양장본으로만 있던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가 영화 개봉에 맞추어 보급판(소프트커버)으로도 나온 것 처럼요. 특히 <천 개의 태양보다 밝은>은 나치 독일이 활개를 치던 30-40년대에 작가이자 저널리스트로 활동했고, 다큐멘터리 영화도 만들었다고 하네요. 원자폭탄이 투하되기 전과 후를 모두 목격했던 저널리스트가 기록한 미국과 독일의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어서 흥미롭습니다. 추후 독서 목록에 올려두고자 수집합니다.
천 개의 태양보다 밝은 - 우리가 몰랐던 원자과학자들의 개인적 역사미국과 독일의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를 다룬 전 세계 최초의 간행물로 인류의 급변기를 담아낸 전 세기 최고의 과학·논픽션이다. 영화 <오펜하이머> 개봉을 계기로 원자폭탄의 탄생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하는 독자들을 위해 재출간되었다.
막스 플랑크의 양자역학을 빛과 전자기장 문제에 적용하며, 파인먼은 "중대한 난점을 만족스럽게 해결하지 못했다"라고 적었다. 아울러 다른 상호작용에 대해서도 최근에 새로운 입자들이 발견되면서 비슷한 난점들이 제기되고 있다고 지적하며 이렇게 썼다. "중간자장론meson field theory은 전자기장론에서 유추하여 수립한 이론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유추가 너무 완벽해서 무한대 답이 너무 자주 나오고 의미도 헷갈린다."
파인먼 평전 - 괴짜 물리학자가 남긴 현대 물리학의 위대한 이정표 241p, [프린스턴], '논문 마무리'중에서, 제임스 글릭 지음, 양병찬 외 옮김
파인먼은 맨해튼 계획이 사실상 시작된 직후인 1942년 6월에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하네요. 지도교수 휠러의 요구로 당시까지 학위논문에 충분한 결과가 있다면서, 본격적으로 국가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전에 학위를 받도록 신경을 써주었네요. 그러므로 '맨해튼 프로젝트'는 파인먼이 학위를 받던 시절, 그리고 직후의 가장 중요한 커리어였던 셈입니다. 학위논문의 주제만 가지고 짐작해보면, 곧 이어 등장할 양자전기역학(QED)의 아이디어가 이미 마련되어 있었네요. 또 파인먼의 학위 과정의 의미는 막스 플랑크로부터 시작된 양자역학의 창시자들 이후 양자역학을 다음 세대로 이어주며 보다 정교하게 다듬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해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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