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파인먼의 삶 들여다보기

D-29
그 대신 호젓한 MIT도서관을 찾아가 새 노트를 펴고 맨 앞장에 "내가 모르는 것들"이라고 적었다. 그러고는 난생 처음으로 자신의 물리학 지식을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공부법은 나중에 파인먼의 전매특허가 되었다. 몇 주 동안에 걸쳐 물리학을 갈래별로 분해하여 윤활유를 바른 다음 다시 조립하면서 어설픈 부분이나 불일치하는 곳이 없는지 낱낱이 점검했고, 주제별로 핵심사항을 골라내려고 애썼다.
파인먼 평전 - 괴짜 물리학자가 남긴 현대 물리학의 위대한 이정표 207p, [프린스턴] '아우라'중에서, 제임스 글릭 지음, 양병찬 외 옮김
파인먼의 공부 방법에 대한 설명이 인상적입니다. 자신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분명히 구분하여 점검해보는 일, 기존의 지식을 의심하고 직접 의미와 본질을 파악해보는 일 등으로 요약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이 작업이 사실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상상이 갑니다.
전쟁은 어느새 물리학자들 간의 전쟁으로 비화하고 있었다.
파인먼 평전 - 괴짜 물리학자가 남긴 현대 물리학의 위대한 이정표 224p, [프린스턴], '전쟁준비'중에서, 제임스 글릭 지음, 양병찬 외 옮김
1941년 12월,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약 7,000명의 미국 물리학자 중 4분의 1이 군사연구시설에 들어갔다. 이런 연구시설들은 미국 전역에 산발적으로 설립되었지만 신속히 자리를 잡았다. '과학은 진보를 의미하며 지식을 활용하고 인류의 능력을 고양하는 것이 과학자의 의무'라고 교육받은 세대가 마침내 거국적인 목표를 확인한 셈이었다.
파인먼 평전 - 괴짜 물리학자가 남긴 현대 물리학의 위대한 이정표 227 p, [프린스턴], '전쟁준비'중에서, 제임스 글릭 지음, 양병찬 외 옮김
역사적인 과점에서 2차 대전이 1차 대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과학기술이 국가주도의 R&D사업에 통합되고 전장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한 점이라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시에 맨해튼 프로젝트와 같은 국가주도의 거대 프로젝트를 통해 원자력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레이더와 각종 무기, 비행기 등의 기술 개발에 국내외의 인재들이 모여 총력전을 이룬 것이 큰 특징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20세기의 역사를 고려할 때 과학기술의 역사를 배제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할 것 같습니다. 또 달리 보면, 제2차대전 이후로 국가주도의 사업에 과학자의 영향력이 (특히 미국에서) 크게 부상했던 시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과학이라는 지식의 형태가 갖는 잠재력과 영향력에 대해, 그리고 진보라는 신념에 힘을 실어주고 이에 잘 부합했던 분야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이제 '맨해튼 프로젝트' 부분을 읽고 있습니다만, 전쟁에 대비하여 건국 이후 사상 최대규모의 민간-군 조직이 형성되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지금 이름만 들어도 잘 알고 있는 기업들, 이를테면 제너럴일렉트릭(GE), 웨스팅하우스, 듀퐁, 앨리스-차머스(Allis-Chalmers), 크라이슬러, 유니언카바이드 같은 기업들과 수십 개의 중소기업이 참여(232p)하여 거대한 생산단지를 건설한 것이네요.
파인먼은 실무위원회에 계속 참석하면서, I.I. 라비, 리처드 톨먼Richard Tolman, 그리고 J. 로버트 오펜하이머와 처음으로 인사를 나눴다. 오펜하이머는 파인먼과 닮았다면 아주 닮았고 다르다면 아주 다른 물리학자로, 향후 3년 동안 파인먼의 운명을 좌우할 인물이었다.
파인먼 평전 - 괴짜 물리학자가 남긴 현대 물리학의 위대한 이정표 237p, [프린스턴], '전쟁준비'중에서, 제임스 글릭 지음, 양병찬 외 옮김
1942년 말, 드디어 영화 <오펜하이머>의 주인공이었던 오펜하이머와 리처드 파인먼이 처음 만나던 시기를 언급한 대목에 이르렀네요. 제 기억이 맞다면, I.I. 라비 역시 영화에서 자주 나왔던 과학자입니다. 얼굴이 동그랗고 통통한 과학자로요. 핵무기 개발에 참여했지만, 훗날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핵무기가 사용되고 나서 자신이 무슨 일을 한 것인지 멈춰서고 회의하는 과학자로 나왔던 것 같습니다. 다시 영화를 봐야겠네요.
영화 <오펜하이머>와 관련한 과학사 도서를 찾다가 발견한 도서라 추가해봅니다. 2018년에 출간되었다가 다시 올해(2023년) 개정판이 나왔네요. 아마도 <오펜하이머> 개봉에 맞추어 다시 소프트커버 버전으로 나온 것 같습니다. 양장본으로만 있던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가 영화 개봉에 맞추어 보급판(소프트커버)으로도 나온 것 처럼요. 특히 <천 개의 태양보다 밝은>은 나치 독일이 활개를 치던 30-40년대에 작가이자 저널리스트로 활동했고, 다큐멘터리 영화도 만들었다고 하네요. 원자폭탄이 투하되기 전과 후를 모두 목격했던 저널리스트가 기록한 미국과 독일의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어서 흥미롭습니다. 추후 독서 목록에 올려두고자 수집합니다.
천 개의 태양보다 밝은 - 우리가 몰랐던 원자과학자들의 개인적 역사미국과 독일의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를 다룬 전 세계 최초의 간행물로 인류의 급변기를 담아낸 전 세기 최고의 과학·논픽션이다. 영화 <오펜하이머> 개봉을 계기로 원자폭탄의 탄생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하는 독자들을 위해 재출간되었다.
막스 플랑크의 양자역학을 빛과 전자기장 문제에 적용하며, 파인먼은 "중대한 난점을 만족스럽게 해결하지 못했다"라고 적었다. 아울러 다른 상호작용에 대해서도 최근에 새로운 입자들이 발견되면서 비슷한 난점들이 제기되고 있다고 지적하며 이렇게 썼다. "중간자장론meson field theory은 전자기장론에서 유추하여 수립한 이론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유추가 너무 완벽해서 무한대 답이 너무 자주 나오고 의미도 헷갈린다."
파인먼 평전 - 괴짜 물리학자가 남긴 현대 물리학의 위대한 이정표 241p, [프린스턴], '논문 마무리'중에서, 제임스 글릭 지음, 양병찬 외 옮김
파인먼은 맨해튼 계획이 사실상 시작된 직후인 1942년 6월에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하네요. 지도교수 휠러의 요구로 당시까지 학위논문에 충분한 결과가 있다면서, 본격적으로 국가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전에 학위를 받도록 신경을 써주었네요. 그러므로 '맨해튼 프로젝트'는 파인먼이 학위를 받던 시절, 그리고 직후의 가장 중요한 커리어였던 셈입니다. 학위논문의 주제만 가지고 짐작해보면, 곧 이어 등장할 양자전기역학(QED)의 아이디어가 이미 마련되어 있었네요. 또 파인먼의 학위 과정의 의미는 막스 플랑크로부터 시작된 양자역학의 창시자들 이후 양자역학을 다음 세대로 이어주며 보다 정교하게 다듬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해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파인먼은 장의 개념에서 적어도 '파동을 실어나르는 자유매질'이라는 낡은 관념만큼은 제거해 버렸다. 파인먼은 장을 파생개념으로 규정하며 이렇게 적었다. "실제로 장은 입자에 의해 전적으로 규정된다. 장은 단지 수학적 구성물일 뿐이다."
파인먼 평전 - 괴짜 물리학자가 남긴 현대 물리학의 위대한 이정표 241p, [프린스턴], '논문 마무리'중에서, 제임스 글릭 지음, 양병찬 외 옮김
진동자로 연결된 두 역학계가 사라지고 나니, 그 자리에 진동하는 장을 매개로 상호작용하는 두 입자가 나타났다. 진동하는 장은 이번에도 제거되었고 마침내 빈 서판blank slate상태의 새로운 양자전기역학이 탄생했다.
파인먼 평전 - 괴짜 물리학자가 남긴 현대 물리학의 위대한 이정표 242p. [프린스턴], '논문 마무리'중에서, 제임스 글릭 지음, 양병찬 외 옮김
오늘까지 읽은 부분에서 인상적인 내용을 알려 주세요.
특히 이론학자들은 추상적인 칠판과학 blackboard science의 타당성을 궁극적으로 검증한 셈이었다. 처음에는 아이디어를, 이제는 불을 얻었다. 결국 그것은 일종의 연금술, 즉 금보다 더 희귀한 금속을 납보다 더 유해한 원소로 바꾸는 연금술이었다.
파인먼 평전 - 괴짜 물리학자가 남긴 현대 물리학의 위대한 이정표 254p, [로스앨러모스] 중에서, 제임스 글릭 지음, 양병찬 외 옮김
이 부분은 로스앨러모스에서 인류 최초의 원폭실험인 트리니티 테스트 이후, 이 실험의 역사적인 의의를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특히 실용학문으로서 과학의 힘을 압도적인 주목거리로 과시한 사건이 아닐까 싶은데요, 냉전 시대의 본격적인 서막을 예고하는 사건이기도 할 것 같습니다. 이후에 이데올로기와 접목되며 기획되는 '거대과학'의 예고편이기도 하겠지요. 인간이 환경을 이용하고 경관을 바꾼 최초의 도구이자 원리로서 '불'을 꼽을 수 있다면, 원자폭탄은 인류에게 또 다른 종류의 '불'을 가져다준 셈이겠네요.
오늘은 어디에서 이 책을 읽었나요?
<파인먼 평전>은 무겁다보니 항상 집에서 읽게 됩니다. 다른 일에 온 신경을 쓰다보니 며칠이 휙 가버렸네요. 어서 ‘로스 앨러모스’의 풍경 속으로 들어가봐야 겠습니다. ^^
마음에 드는 문장을 수집해 주세요.
1945년 7월 16일 오전 5시 29분 45초, 이미 오래전부터 호르나다 델 무에르토 Jornada del Muerto, 즉 '죽음에 이르는 길'이라고 불려 온 이 지역에 동이 트기 직전, 한 줄기 아침햇살 대신 원자폭탄의 섬광이 번쩍였다.
파인먼 평전 - 괴짜 물리학자가 남긴 현대 물리학의 위대한 이정표 252p, [로스앨러모스], 제임스 글릭 지음, 양병찬 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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