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인생책이 궁금합니다

D-29
저에게 인생책이란 제 세계관과 사고방식을 뒤흔든 책일 텐데요. 딱 세 권만 꼽자면 <파이 이야기>, <당신 인생의 이야기>, <사랑의 기술> 입니다. 기회가 되면 풀어볼게요!
세계관과 사고방식을 흔드는 책이 있는 걸까요, 아니면 사람마다 흔들리는 부분이 다른 걸까요. 그게 궁금합니다. 어쨌든 굉장히 파괴적이고 새로운 생각이 담겼어야 독자가 흔들리는 것 같긴 한데요. 저는 파이 이야기를 읽고 그다지 감명을 받은 것 같지는 않아서요. 어떤 부분에서 세계관과 사고방식이 흔들리셨는지 궁금합니다.
위에 @장맥주 님이 '악령'을 읽고 무신론자가 되었다고 써주셨는데, 저는 반대로 '파이 이야기'를 읽고 믿기 힘든 것들을 믿어봐야겠다 Believe the unbelievable 그런 생각을 조금씩 갖게 됐어요. 그전엔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것들, 수학과 과학을 신봉하던 사람이었고, 성당을 다니긴 했지만 증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믿는다는게 영 불편했었거든요. 저쪽(유신론)으로 기어코 확 넘어가진 않을 거야 그런 마음? 그런데 '파이 이야기'를 읽고 균열이 가고 틈이 생겼어요. 믿음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구나 싶었죠. 종교와 과학이 같은 얘기를 다른 관점에서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갖게 됐달까요. 양자역학과 동양철학처럼? "세상은 있는 모습 그대로가 아니에요. 우리가 이해하는 대로죠. 뭔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뭔가를 덧붙이는 거예요. 그게 인생을 이야기로 만드는 것 아닌가요?" - 얀 마텔 '파이 이야기' 중
'당신 인생의 이야기'도 관련이 있는데 이 세상을 시간순으로 인식하지 않으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설정 자체도 충격적이었지만 (장작가님의 그믐처럼) 그 책을 읽고 인간의 몸을 가진 저의 인식 수준으로 이 우주를 제대로 이해할 순 없겠구나, 제가 인식하는 무지보다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무지한 무지가 수천억배 이상은 되겠구나 그런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그리고 헵타포드가 삶을 observe(관찰하고 준수)하듯이 인간에겐 자유의지라고 할만한 것이 거의 없다는 생각도 점차 갖게 됐죠. 지금 제가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것도 제 자아가 이끄는대로 하고 있을 뿐 ㅎㅎ "결국 우리는 나이를 정확하게 계산할 수도 없고, 거리를 알 수 없는 곳에 있는 별들에 둘러싸여서, 우리가 확인도 할 수 없는 물질로 가득 채워진 채로, 우리가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는 물리 법칙에 따라서 움직이는 우주에 살고 있는 셈이다." 빌 브라이슨 <거의 모든 것의 역사>
공감이 많이 갑니다. 저도 고전역학 이후의.. 물리학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 게 절대 아닌 것 같았어요. 어찌 보면 과학도 '믿음'이라는 것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증명할 수 없는 수많은 가설들이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데, 뭐가 맞고 뭐가 틀린지를 제대로 알 수는 있을까 하더라고요. 그걸 파이 이야기를 읽고 생각하셨다니.. 제가 너무 수동적으로 모든 텍스트를 받아들였던 걸까요
파이 이야기를 읽을 당시에 그런 주제에 관심이 있다보니 그렇게 연결이 됐던 것 같습니다. 개구리님이 가장 많이 읽은 책은 무엇인지 여쭤도 될까요? 남들한테는 별 내용 아닌데 나에겐 특별한 책도 인생책 아닐까 싶은 생각도 문득 듭니다.
글쎄요, 마음에 들었던 책, 재미있었던 책은 기본적으로 5번은 넘게 읽는 편이라.. 다시 읽는 걸 좋아합니다. 무슨 내용인지 이미 아니까 걱정할 필요도 없고, 놓쳤던 걸 발견하는 재미도 있고.. 그래서 편하게 다시 찾을 수 있는 책을 많이 읽습니다. 뭐 아무튼 시리즈도 반복해서 읽고요. 오히려 깊은 인상을 남겼던 책들은 너무 무겁고 마음을 흔들기 때문에 다시 찾기 어려운 것 같아요. 가볍게 다시 읽을 만한 에세이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또 읽고 싶은 책'으로 인생책을 고르는 건 개인적으로 저에게는 맞지 않는 것 같네요.
저는 사실 『파이 이야기』를 책은 안 읽고 영화만 봤거든요. 책이 처음 나왔을 때 출판사가 엄청 광고를 했고, 저는 파울로 코엘료의 책들 같은 내용인가 보다... 하고 여겼습니다. 사실은 그런 마음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 책장을 펼치지는 않았네요. 영화는 좋았지만 이안 감독의 실력 덕분이라고 생각했고, 그나마 주제나 줄거리보다는 영상미가 인상적이었고요. 우람님의 인생 책이라고 하니 한번 읽어봐야겠다 싶네요.
저는 제 세계관 깊숙한 곳에 ‘믿지 않는 자’(혹은 ‘믿지 않으려는 자’)라는 기반이 있다고 보거든요. 원래부터 그런 기질이 있었겠지만 『악령』을 그 나이에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제가 아닌 다른 모습으로 살았을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해요. 한편으로는 ‘믿으려는 자’와 ‘믿지 않으려는 자’ 사이에 공통점도 있다고 봅니다. ‘믿으려는 자’이건 ‘믿지 않으려는 자’이건 양쪽 모두 그렇게 되려면 큰 결단과 용기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양쪽 모두 자기 태도에 반대되는 의심을 억누르면서 살아야 하지 않나 싶은데 이건 ‘믿지 않으려는 자’ 쪽의 추측이라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가능성을 열어두고 사는 삶은 보다 편안하고 자유로운가요? 그런데 그걸 분별하려면 한 정신이 두 태도를 다 지녀야 할 텐데, 그 역시 쉽지 않겠네요.
경향신문에서 ‘내 인생의 책’이라는 코너를 2007년부터 2022년까지 15년 동안 운영했어요. 각계 명사들이 ‘내 인생의 책’을 5권씩 5회에 걸쳐 소개하는 코너였는데 짧은 글이었지만 그걸 1면에 실었습니다(가끔 2면에 실은 적도 있던 걸로 기억합니다). 서평이 1면에 실린다는 것, 신문 1면에 늘 책을 말하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 참신했죠. 굉장히 좋은 기획이라고 생각했는데 2022년 그 코너가 사라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좀 슬펐습니다.
저도 2018년에 ‘내 인생의 책’으로 책 5권에 대한 짧은 서평을 썼는데, 순서대로 『악령』, 『블랙 달리아』,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나는 왜 쓰는가』, 『끝없는 이야기』를 골랐습니다. 지금 그믐 프로필에도 인생 책으로 그 다섯 권을 그대로 올렸습니다. 거기에 6번째 책으로 『인생의 모든 의미』를 추가했고요.
제 경우에는 경향신문 원고를 쓸 때에는 ‘인생 책’이라는 말의 의미를 ‘내 인생에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친 책’으로 받아들였어요. 그래서 가장 첫 번째로 『악령』을 선택했습니다. 저는 이 작품을 읽고 무신론자가 되었거든요. 지금 제 가치관의 가장 밑바닥을 결정한 소설인 셈입니다. 아마 죽을 때까지 인생 책으로 『악령』을 이야기할 것 같아요.
그나저나 경향신문 ‘내 인생의 책’ 코너는 다른 매체에서라도 다시 부활시키면 좋겠습니다. 그믐을 구상하기 전에 김혜정 그믐 대표와 잠깐 술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어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인생 책이 뭔지 묻고 촬영해서 그걸 올리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면 어떨까. 사람들의 인생 책 이야기 재미있지 않나. 그런데 저희가 영상 편집을 할 줄도 모르고, 책 이야기를 유튜브로 한다는 게 좀 이상해서 더 이어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때 생각이 돌고 돌아서, 그믐에서 회원들이 자기 소개를 출신 학교나 MBTI로 하지 않고 인생 책으로 하게끔 유도하자는 아이디어가 되었습니다.
책을 말하는 공간이 1면에 있었다는 게 정말 지금 생각하면 엄청난 일이네요. 한국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내가 그걸 사라진 후에야 알게 되었다는 게 아쉽기도 하고... 인생책 이야기를 할 때의 인간은 굉장히 신이 나 보여서 보는 사람도 즐겁게 만드는 것 같아요. 그믐 들어올 때, 자기 소개 칸에 인생책이 있길래 그냥 그렇구나, 역시 책 나누는 곳 맞네. 이렇게만 생각했어요. 당연하게 여겼는데.. 사실 그런 비하인드가 있었군요..
대단하지요? 그걸 그렇게 1면으로 배치해서 10년 넘게 끌고 갔다는 게 참 좋았는데... 사라져서 많이 아쉬워요. 달리 생각하면 뭐 신문 1면을 매일 그렇게 꼭 정치 경제 뉴스 같은 걸로 꽉꽉 채워야 하나 싶기도 한데요. 지금은 아무 아이디어가 없지만 나중에 그믐에서 ‘인생을 바꾼 책’이나 ‘살면서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 같은 키워드로 이벤트를 기획해보겠습니다. (제가 하지는 않고 김혜정 그믐 대표가...) 지금 이 ‘당신의 인생책이 궁금합니다’ 모임도 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독서클럽에서도 '인생의 책'을 주제로 회원들을 소개한 적이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매우 다양했어요. 전 아인랜드의 마천루(The Fountainhead)를 대학 4학년에 도서관에서 읽고 푹 빠졌는데, 그 책을 생각하면, 다들 입사시험 공부하던 시기에, 이미 너무 놀아서 지금부터 입시공부를 해도 희망이 없으니 책이나 읽어야지 하면서 불안한 마음에 고른 책이 너무 재밌고, 프랑크 로이드 라이트를 발견하고 건축에 대한 관심이 생기게 만든 책이어서 오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인랜드의 정치적인 이력때문에 인생의 책이라고 말하기가 약간 망설여지기도 합니다.
저는 아인 랜드를 욕하는 글은 많이 읽었는데 정작 아인 랜드 본인의 책은 읽어본 적이 없었어요. 그리고 얼마 전까지 『다시 찾은 브라이즈헤드』의 저자를 아인 랜드로 알고 있었습니다. 올리신 글 보고 아인 랜드 검색해보면서 관심이 생겨서 한번 읽어볼 참입니다. 추천 감사합니다!
인생책 이야기 나오면 저는 의외로 당당합니다. 왜냐하면 제 인생책은 단편소설이기 때문이지요. 음하하핫! 짧습니다. 여러분. 금방 읽습니다. 비/교/불/가 바로 마쓰모토 세이초의 <어느 고쿠라 일기 전>입니다.
인생이란 저에게 참 이해할 수 없는 무엇입니다. 착하면 살면 복을 받는다를 마지막으로 믿은 건 초등학교 5학년 때였구요. 그렇다고 사회적 금기나 도그마를 깨면서까지 하고 싶은 무언가도 딱히 없었고 그럴 배짱도 없습니다.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고 살면 그만인걸까요? 안분지족? 그래도 저는 우리가 어디서 흘러와서 어디로 가는가가 항상 궁금했습니다. 인생이란 무얼까, 인간이란 무엇일까 존재론적 질문들을 던지다 보면 최종적으로 흘러가는 곳은 종교의 영역이더군요. 혹은 어떤 의미의 영성. 하지만 저는 한편으로 아주 확고한 유물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쪽으로는 웬만하면 발길을 돌리지 않으려고 하는 편입니다. (이 부분에서는 예전의 우람님과 굉장히 비슷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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