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맥주의 블로그
제 독서 메모는 마음대로 퍼 가셔도 괜찮습니다. 상업적으로 이용하셔도 됩니다.노인의학의 필요성과 현 주소에서부터 시작해 병원뿐 아니라 사회 전체를 어떻게 더 노인친화적으로 만들 것인지 이야기한다. 좋은 질문과 고민거리를 무수히 던지는 책.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였다는 청소년 SF. 간결한 문장과 경제적인 묘사가 속도감을 주지만 무성의한 느낌도 든다. 그래도 기본 아이디어가 좋고, 결말은 감정선을 건드린다.
한 챕터에 걸쳐 한국의 대기업 모델을 분석하는데, 출간 2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일본식 재벌관계망을 둔 중국식 가족기업. ‘역사의 종언’은 막판에 짧게 언급만 한다.
전자책으로 읽다가 길이가 너무 짧아서 놀람. 국제무역이라든가 폐쇄형 시스템에서의 의사결정과 같은 주제들을 담백하고 간결하게 다룬다.
HJ와 함께 이웃 동네의 구립도서관에 갔다. 걸어서 편도 40분이 넘게 걸리는 거리다. 우리는 그 구(區)에 살지도 않는다. 집에서 그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 있는 도서관이 두 곳 있는데도 이곳에 가보기로 한 이유는, 가는 길이 무척 편하고 주변 경치가 아름답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도상으로는 그래 보였다.
공원 안에 있는 보행 전용로를 따라 자동차 걱정 없이 나무와 개천을 바라보며 갈 수 있다. 3킬로미터 가까이 걸어야 하지만 집에서 도서관까지 신호등이 있는 교차로는 두 번만 지나면 된다. 자전거를 타고 가기에도 좋다. 주변에 분위기 좋은 카페와 식당도 많다.
여기를 우리가 주로 이용하는 도서관으로 삼을까? HJ가 제안했고 가는 길이 정말 괜찮을지, 왕복 한 시간 반을 산책하는 일이 부담스럽지는 않을지 직접 가보면서 알아보기로 했다. 마침 날씨가 포근한 토요일이었다.
아침에 헬스장에 가서 달리기를 하고 돌아온 뒤 곧장 집을 나섰다. 책을 빌리게 될지 아닐지 몰랐지만 일단 가방은 챙겼다. 점심은 걷다가 내키는 곳에서 먹기로 했다. HJ는 우리가 가려는 구립도서관 주변에 유명한 우동 소바 전문점과 청국장 가게가 있다고 했다.
공기는 온화함을 넘어서 약간 덥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나는 점퍼를 벗어서 가방과 등 사이에 끼워 넣었다. 설렁설렁 산책로를 걷고 있는데 웬 동상이 하나 나왔다. 18세기 유럽 복장과 헤어스타일을 한 남자가 책을 들고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가까이 가 보니 칸트라고 적혀 있었다. 양 옆에 칸트의 명언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금속판도 있었다.
그 중 하나에 적힌 문구는 이랬다. ‘행복의 원칙은 첫째, 어떤 일을 할 것, 둘째, 어떤 사람을 사랑할 것, 셋째, 어떤 일에 희망을 가질 것이다.’ HJ는 그 말이 너무 마음에 든다고 했다. 나는 행복해지려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건강과 돈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칸트가 정말 저런 말을 했을까? HJ도 나도 고개를 갸웃했다. 『순수이성비판』이나 『실천이성비판』 중간에 들어가 있기에는 꽤 뜬금없는 말 아닌가?
“일을 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희망을 가져도 치질이 너무 심하면 행복할 수 없다고” 같은 말을 하며 설렁설렁 걷는 사이 도서관에 도착했다. ‘어라, 벌써?’ 하는 정도의 거리감이었다. 도서관 앞마당에는 여러 가지 모양의 의자와 테이블이 놓여 있었는데, 날이 풀리면 거기서 차나 맥주를 마시며 책을 읽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건물 정문에는 우주선 도킹 시스템마냥 한 사람씩 들어가 체온을 측정하고 온 몸에 소독약을 뿌려야 하는 작은 밀폐 구역이 있었다. 그곳을 지나 도서관 현관에 들어서면 책상이 있고 거기서 개인정보를 담은 QR 코드를 찍거나 사는 동네와 전화번호를 적어야 했다. 책상 너머에 사서가 한 사람 앉아 있었다.
나부터 밀폐 구역을 통과해 로비에 들어섰는데 자리에 앉아 있던 사서가 나를 보자마자 “혹시 장강명 작가님 아니세요?” 하고 물었다. 내가 유명한 사람도 아니고, 비니와 마스크를 쓰고 있었는데 어떻게 눈만 보고 사람을 알아볼 수 있지 하고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 놀라긴 했지만 그렇게 나를 알아보고 반겨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반갑기도 했다.
사서가 도서관을 안내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사양하고 HJ와 둘이서 건물을 구경했다. 유능한 건축가가 신경 써서 지은 건물 같았다. 구조가 독특했고,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 때문에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열람실이나 카페, 야외 테라스가 정말 근사했다. 2, 3층 바깥은 바닥부터 천장까지 HJ가 좋아하는 통유리창으로 되어 있어 개방감이 뛰어났다. 어린이 책들이 있는 서가에는 아이들이 신을 벗고 들어가 뛰어놀 수 있는 메자닌 구역도 있었다.
“태어나서 가 본 도서관 중에 제일 예뻐” 하고 HJ가 말했고 나도 동감이었다. 강연을 하느라 전국 여러 도서관을 다녔지만 이곳이 최고였다. 장서가 많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서가가 널찍하고 재미있게 배치되어 있었다. 책장 곳곳에 도서를 검색할 수 있는 터치스크린이 걸려 있었다.
모든 곳이 너무 깨끗하고 새 것 느낌이 났다. “이 도서관은 새로 지은 거야?” 내가 묻자 HJ는 “아닐 텐데, 지금 우리가 사는 집으로 이사 왔을 때에도 분명히 이 건물이 있었거든”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나중에 집에 와서 확인해보니 이 도서관은 우리가 이 동네로 이사 온 바로 그 달에 문을 열었다. 개관한 지 이제 겨우 15개월째였다.
도서관에서는 책을 세 권 빌렸다. HJ는 미국 주식 투자에 대한 책을 빌렸다. 그녀는 “소설가의 아내가 빌리는 책이 주식 투자 서적”이라며 겸연쩍게 웃었다. 소설가인 내가 빌린 책 중 한 권은 모든 페이지마다 그림과 말풍선이 있는 어린이용 콩트집이었다. 제목은 『5초 후 의외의 결말 1』이었다.
유명하다는 소바 전문점 앞에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우리는 도서관 옆의 커피점에 들어가 앉아 쉬면서 그 책들을 읽었다. 이곳 역시 벽 전체가 HJ가 좋아하는 통유리였다. 내부 인테리어나 나오는 음악도 고급스러웠고 커피 맛도 수준급이었다.
옆 자리 손님이 데려 온 개가 너무 귀여워서 나는 계속해서 곁눈질을 했다. 심지어 밖에서 지나가던 행인들조차 지나가다 걸음을 멈추고 카페 안의 개를 쳐다보았다. 그러면 주인은 친절하게 개에게 인사를 시켰다. 개는 그런 일에 무관심해 보였지만.
한 시간 남짓 커피를 마시며 『5초 후 의외의 결말 1』을 다 읽었다. 재미있었고 은근히 시니컬했다. HJ도 주식 투자 서적을 다 읽었다고 했다. 도서관에 가서 그 두 권을 바로 반납했다. 도서관 정문 옆에 수시로 책을 반납할 수 있는 무인 반납기가 설치돼 있었는데, 그런 설계도 마음에 들었다.
소바 전문점 앞에는 여전히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심지어 브레이크 타임이었는데도. 도대체 얼마나 맛있는 가게인 걸까? 조금 떨어진 청국장 가게에 찾아갔는데, 토요일에는 영업을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길가에 양과 대창이 전문이라는 고깃집 간판을 보고 들어가 양밥 2인분을 주문했다. 맛은 그저 그랬다.
집에 돌아와서 HJ는 샌드위치와 스콘을 먹었고, 나는 냉동만두를 네 점 전자레인지로 데워서 먹었다. HJ가 공포 영화를 한 편 같이 보자고 했다. 주변 사람 여럿에게서 추천을 받았는데, 혼자 보기 무섭다면서. 나는 제목을 처음 듣는 영화였다.
빔 프로젝터를 설치하고 영화를 틀었다. 줄거리를 전혀 모르고 봤는데 의외로 불쾌한 고어 장면도 없고 관객을 깜짝 놀라게 하지도 않으면서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준수한 작품이었다. 그래도 HJ는 영화를 보다가 중간에 한번 크게 비명을 질렀다.
일요일 낮에는 HJ와 세 시간 가까이 인터넷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우리가 사는 아파트의 전세 가격도 1년 새 미친 듯이 올랐다. HJ의 회사와 가까운 주거지를 찾다가 오게 된 동네인데, 이제 주변 아파트 중에 우리가 전세로 들어갈 수 있는 집은 거의 없다. 임대차보호법 덕분에 올해 말 재계약은 넘긴다 하더라도 2년 뒤에는 어찌될지 모른다. 그때까지 서울 아파트 가격이 이 수준으로 오른다면 쫓겨나든지, 월세를 살아야 한다.
서울 각 지역 아파트 매매가와 전세가를 비교해 보기도 하고, 우리 동네의 괜찮은 오피스텔을 검색해 보기도 했다. 그래도 뾰족한 해결책은 안 나왔다. 사실 HJ가 최근 몇 달간 혼자 몇 번이나 한 일이었다. 그녀는 마포나 신도림에 살 때 대출을 받아 집을 구매할 생각을 하지 못한 게 뼈저리게 후회된다고 했다.
“이제 노동으로 부자가 되기는 틀린 시대인 거 같아.”
HJ가 말했다.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그게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의 사고방식에도 분명히 심오한 영향을 끼치리라 생각했다. 저녁에 그녀는 친정에 갔다. 다음날 오전에 반차를 내고 장모님과 함께 친정에서 쓰는 청소기를 수리점에 맡기러 간다고 했다.
차도 없고 아이도 없고 수입도 건강한 우리가 이 모양인데 요즘 청년들은 얼마나 좌절감이 심할까. 그래서 비트코인을 사나. 그런 이야기를 하며 HJ를 지하철역까지 바래다주었다. 15년 전에 우리가 얼마나 궁핍했던가, 그때는 여차하면 고시원에서 살 각오도 했는데 이제 그런 걱정은 안 하잖나, 그런 얘기도 했다.
지하철역에서 HJ를 보낸 뒤 나는 헬스장으로 갔다. 저녁 풍경을 즐기고 싶어 일부러 길을 돌아 공원을 통과해서 갔다. 전셋값 상승분을 마련하지 못하면 멀어질지도 모르는 풍경이었다. 그때는 예쁜 구립도서관과도 멀어지겠지. ‘집과 직장의 거리가 가까워야 한다’든가 ‘주택 임대료를 걱정하지 말아야 한다’도 행복의 조건에 포함돼야 할 것 같은데.
운동을 하고 집에 돌아와 혼자 블루스를 들으며 부데요비츠키 부드바르를 마셨다. 안주 없이 마셨다. 버드와이저의 모태라고도 하고, 버드와이저와 상표권 분쟁으로도 유명한 체코의 필스너 맥주다. 회사가 있는 체코의 소도시 이름이 체스케부데요비체인데, 부데요비체를 독일어로 하면 부드바이스, 이를 영어로 읽으면 버드와이저가 된다.
맛이 과연 얼마나 다른가 문득 궁금해져서 버드와이저도 한 캔 땄다. 확연히 다른 맛이었다. 눈 감고 마셔도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버드와이저는 구수한 맛이 났다.
체스케부데요비체
가 보지도 않았는데 좋아하는 동네
거기도 집값 비싸려나
건축가에게는 도시가 커다란 책과 같겠구나 싶다. 한국 학교 디자인, 초고층 빌딩, 상가 교회에 대한 분석도 신선하고, 서울숲과 로데오거리를 잇는 보행교는 진심으로 생기면 좋겠다. 11장 ‘포켓몬고와 도시의 미래’에 나온 여러 가지 아이디어들도 흥미로웠다. ‘건축 리모델링은 재즈와 같다’는 문장에 밑줄.
유현준 교수의 책을 좋아한다. 크고 작은 공간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삶에 이렇게 깊이 영향을 미치고 있었구나 하고 놀란다. 건축이나 공간에 관한 게 아닌 내용도 다 재미있게 잘 쓰신다. 골목이 많은 거리는 ‘이벤트 밀도’가 높고, 그만큼 보행자는 다양한 가능성과 주도권을 누리게 된다는 이야기가 흥미롭다. 한국인의 주거 환경이 바뀐 만큼 부엌을 창가로 옮겨야 한다거나 아파트 동과 동 사이를 띄우는 건축 규제를 손봐서 발코니가 많이 들어서게 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끄덕끄덕.
만세전(萬歲傳)이 아니라 만세전(萬歲前). 조선에 만세가 일어나기 1년 전인 1918년이 배경이다. 나약하고 감상적이면서 차가운 주인공 이인화는 놀랍도록 현대적인 인물이어서 낯설지가 않다. 그 주인공의 무기력함을 한심하다고 욕하기에는 주변 풍경이 아주 징글징글하게 암담하다. 그렇다 해도 아내에 대한 주인공의 태도는 이해가 안 가고. 냉담한 수준을 넘어 사람이 이래도 되나 싶은 정도다.
28년 만에 다시 읽었고, 28년 전보다 더 슬펐다. 이번에도 28년 전과 마찬가지로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책으로 읽었다. 28년 전보다 더 좋았다. 28년 전에 이상하게 여긴 부분은 이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해설이 낯설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 작품이 써진 시절과 지금의 한국 사회가 달라진 게 없다는 식의 관성적인 독법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분명히 달라졌다. 나아진 부분이 있고 악화된 면도 있다. 그 다른 점, 우리 시대의 특징을 찾아야 한다. ‘값싼 기계 취급을 받았어, 인간이’라는 문장에 눈이 오래 머물렀다.
‘쇠망치를 든 사나이들은 다음 집으로 건너가기 전에 꼽추네 식구들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아무도 덤벼들지 않았고, 아무도 울지 않았다. 이것이 그들에게 무서움을 주었다.’
‘사람들은 집단 행동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내가 무서워하는 것은 자네의 마음야.’
‘우리의 생활은 전쟁과 같았다. 우리는 그 전쟁에서 날마다 지기만 했다.’
‘그들 옆엔 법이 있다.’
HJ와 한 달간 제주 여행을 하다 묵은 게스트하우스에서 발견하고 함께 읽은 책. 음식도 맛 깔나게 소개하지만 함께 곁들이는 제주 생활 이야기도 재미있다. 정우열 작가를 좋아한다. 이후에 이 책에 나온 음식들을 찾아 읽었는데 덕분에 각재깃국과 빙떡을 알게 됐다. 우리 부부가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감탄한 제주 요리는 몸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