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맥주의 블로그
제 독서 메모는 마음대로 퍼 가셔도 괜찮습니다. 상업적으로 이용하셔도 됩니다.칼럼을 연재하는 신문사에서 매년 설 연휴를 앞두고 활전복을 보내온다. 칼럼 필자들 전부에게 보내는 것 같다. 감사하긴 하지만 솔직히 반갑다기보다는 골치 아픈데, 나도 HJ도 집에서 요리 자체를 거의 안 하는데다가 전복을 손질하는 법도 모르기 때문이다.
스티로폼 상자 안에 비닐 팩과 아이스팩이 들어 있고, 비닐 팩 안에 바닷물과 살아 숨 쉬는 전복이 스무 마리쯤 있다. 여태까지는 비닐 팩을 통째로 냉장고에 넣었다가 처가에 HJ가 가져다주곤 했다. 그러면 장모님이 그걸 손질해서 전복버터구이를 만들어주셨다. HJ가 그 요리를 아주 좋아한다. 나는 유당불내증 때문에 먹지 못하지만.
그런데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비닐 팩이 찢겨서 물이 새고 있었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전복은 바닷물에 넣어두지 않으면 금방 죽고, 죽으면 쉽게 상해서 먹기 어렵다고 나와 있었다. 수돗물에 넣어도 죽기는 마찬가지란다. 길게든 짧게든 냉동보관을 하려면 랩으로 전복을 하나하나 개별 포장한 뒤에 얼리라나.
그러느니 그냥 우리가 직접 손질해 조리해보자 싶었다. 원래는 내가 요리를 해서 HJ에게 대접하고 싶었는데 그녀가 나를 놔두지 않고 끼어들었다. 회, 버터구이, 소금구이를 만들 계획이었다.
인터넷에 나온 전복 손질법은 이러하다. ① 흐르는 물로 씻어주며 솔로 이물질을 제거한다. ② 숟가락으로 껍데기와 육질을 분리한다. ③ 내장을 가위나 손으로 떼어낸다. ④ 이빨을 손으로 짜거나 가위로 제거한다. ⑤ 내장에서 모래집을 제거한다.
시험 삼아 두세 개를 손질하면서 먹어보니 ①은 대충 해도 됐고, ④와 ⑤번 과정도 생략해도 괜찮았다. 그리고 어느 블로거의 조언대로 살짝 데쳤더니 ②와 ③이 쉬워졌다. 그리고 회보다는 버터구이와 소금구이가 우리 입맛에 더 맞는 것 같았다.
주방이 엉망이 되었고 사소한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무사히 전복 요리를 만들었다. HJ는 자기가 만든 버터구이가 어머니가 만든 것 못지않다는 사실에 놀랐다. “우리 어머니가 요리를 엄청 잘해서 맛있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버터구이를, 나는 소금구이를 먹었다.
나는 남은 내장을 버릴까 나중에 라면에 넣을까 하다가 전복내장볶음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레시피 없이 그냥 감으로 만들었다. 대강 삶고, 끓는 물에서 건져내어 식용유에 대강 볶고. 맛이 어떨까 싶었는데 이 역시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을 메뉴였다. 우리의 요리 실력에 우리가 놀랐다.
“이거 완전히 술안주네. 맥주 한 잔 해.” HJ가 말했다. 맥주를 일주일에 두 번만 먹기로 한 다짐이 무색하게 연사흘째 마시게 되는 셈이었지만, 사양 않고 냉장고에서 한 캔 꺼냈다. 프랑스의 브루어리인 브라세리 드 생 오마르에서 만드는 벨기에식 밀맥주인 1866 블랑쉬다. 해산물 요리와 어울리지 않을까 싶어 골랐다.
나는 이 맥주 이름이 매번 헷갈린다. 1866이었는지 1886이었는지 1688이었는지 1668이었는지(병인박해와 병인양요가 일어난 해에 프랑스에서 설립된 양조장에서 만든 맥주라고 외우면 되려나?). 맛도 좀 헷갈린다. 어떤 때에는 부드럽고 상큼하다고 좋아하는데 어떤 때에는 오렌지향이 너무 인공적으로 느껴져 거부감이 든다. HJ는 “버드와이저는 상남자, 1866 블랑쉬는 화장 진하게 한 어린 소녀”라고 평가한 적이 있는데 내 의견도 비슷하다.
프랑스 신부를 죽이고
그 나라 함대의 침공을 받은 해
얄궂은 맥주 이름
다음날 오전에는 J 소설가와 문자메시지로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올해 7, 8월에 원주의 토지문화관에서 작가 레지던시 생활을 하려고 지원서를 냈다고 하니 그가 거기에 에어컨이 없는 걸 아느냐고 물어왔다. 전혀 예상 못했던 터라 깜짝 놀랐다. 맘껏 에어컨 바람 쐬려고 가는 거였는데.
J 작가는 자신이 지난해 5월에 그곳에 머물렀는데 그때도 무척 더웠다며 나를 말렸다. 그냥 덥기만 한 게 아니라 시설이 낡았고 벌레도 많이 나온다며. 더위를 많이 타는 데다 곤충을 무서워하는 나로서는 심각한 사안이었다. J 소설가는 지금 담양과 이천의 레지던시에서도 올해 입주 작가를 모집 중이라는 팁까지 주었다.
J 작가와 대화를 마치고 토지문화관에 전화를 걸어 문의했다. 토지문화관 간사는 작가들의 집필실에는 에어컨이 없지만 공동으로 쓰는 세미나실과 도서관에 에어컨이 있고, 낮에 거기서 작업을 하면 괜찮다고 했다. 통화를 마치고 원주 기후를 알아보니 여름에 딱히 서울보다 시원한 곳도 아니어서 고민이 되었다.
지금이라도 원주에는 못 가겠다고 이야기하고 담양이나 이천의 문학관에 지원해? 그런데 거기에는 에어컨이 있나? 인터넷 검색 결과에는 딱히 두 곳에 에어컨이 있다는 얘기는 안 나왔다. 특히 담양 문학관은 무척 낙후된 재래식 주택으로 보였고, 토지문화관이 아무리 낡았다지만 그보다 더 낡았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면 여름이 아니라 가을에 가겠다고 입주 희망기간을 조정할까? 그런데 가을이면 서울에 있어도 충분히 좋은데. 아니지, 봄가을이야말로 서울에 있어야지. 놀러갈 곳이 얼마나 많은데. 자전거도 타야하고. 강연 요청도 봄가을에 많이 들어온다. 그리고 토지문화관은 산 한가운데 있는 것 같던데, 도심보다는 1, 2도라도 기온이 낮지 않을까?
한참 망설이다가 토지문화관의 입주 작가 선정위원회에서 지원을 받아준다면 예정대로 7, 8월에 원주에 가기로 결심했다. 앞으로 여름마다 전국의 문학 레지던스에 머물 생각인데 언제가 됐든 토지문화관도 결국엔 가게 될 것 같아서였다. 어떻게든 되겠지…?
밀레니얼세대의 세계관을 분석하고 있으되, 책이 말하는 것은 세대론이 아니라 ‘시대론’이다. 2010년대는 어떤 시기였나. 새천년의 희망은 어떻게 2020년대의 혼미로 변했나. 페이지를 넘기다 저절로 허리를 똑바로 세우고 정자세로 읽게 됐다. 한국 힙합에 대한 분석처럼 나로서는 완전히 몰랐던 내용을 알게 되기도 했고, ‘한국정치는 언제나 축제: 망상공장’처럼 여러 번 무릎을 친 대목도 있다. 젊고 탁월한 사회평론가가 등장했다.
선물 받아 읽었고, ‘선물 받아 읽은 책 중 가장 좋았던 책’이 되었다. 기묘하고, 따뜻하고, 기묘하게 따뜻하고, 뭔가 저자가 말하려는 것을 알 것 같지만 그게 무엇인지 명료하게 말하기는 어려운 이야기들. 단편적인 것들이라고 하지만, ‘이야기는 살아 있기 때문에 잘라 내면 피가 난다.’(60쪽) 그래서 어쩌면 이 책의 모든 페이지에서는 아픈 피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다.
1990년대 초반 미국을 휩쓸었던 거짓기억증후군에 대한 책. 수많은 여성들이 ‘패스트푸드식 가짜 심리치료’를 받다가 어린 시절의 가짜 성폭행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마녀사냥이 시작되었다. 기억에 관한 책이자 과학자의 용기에 대한 책이고, 돌팔이 의료행위에 대한 고발서이자 맹신과 회의주의에 대한 우화이기도 하다.
가끔 위화가 소설가가 아니라 마법사 아닐까 생각한다. 어떻게 그렇게 쉬우면서도 심오하고, 웃기면서도 슬픈 작품들을 쓸 수 있을까. 나 혼자 ‘위화적인 순간’이라고 부르는 시간들이 있다. 너무 재미있고 뒤가 궁금한데, 갑작스럽게 가슴이 미어져서 책장을 잠시 덮고 마음을 추슬러야 하는 시간. 그의 책을 읽고 나면 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저절로 다짐하게 된다. 주변 사람들에게 잘하자. 불행을 담담히 받아들이자. 잔인해지지 말자. 전쟁을 막자. 『원청』에는 위화적인 순간이 무척 많았다. 책장을 덮고 눈을 감았다가, 인물들의 운명을 알고 싶어 다시 펼치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정보집약적인 산업, 확장불가능한 게이트키퍼가 있는 산업, 고도로 분화된 산업이 플랫폼 혁명으로 타격을 입을 거라고 한다. 출판이 여기에 해당하고 교육과 의료는 더 그렇다. 규제가 많고 실패 비용이 높으며 자원집약적인 산업은 플랫폼 혁명에도 크게 흔들리 지 않을 거라고 한다. 플랫폼에 적합한 새로운 규제 방식―예컨대 ‘규제 2.0’―을 도입해야 한다고 제안하는데, 분명 논의해야 할 일이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읽기 재미있다. 다음 세상을 만들려면 먼저 그걸 상상해야 한다. 16세기 인문주의자의 소망 중에는 21세기에도 절실한 제도가 있는가 하면 황당무계하게 들리는 내용도 있다. 결혼하기 전에 남녀가 서로 옷을 벗고 신체에 하자(?)가 없는지 확인한다든가. 전쟁에 대한 유토피아의 태도는 매우 마키아벨리스러우면서 설득력 있다. 유토피아에는 노예도 있다.
HJ는 연봉 협상 중에 연락이 끊겼던 회사에 마침내 먼저 문의를 했는데, 그네들은 자신이 다른 후보자와 계약을 했다고 답변했다. 그런데 며칠 전 그 회사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자신들이 채용한 신입 팀장이 일주일 만에 개인 사정으로 그만뒀다며 HJ더러 이제라도 출근해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HJ가 제시한 연봉에서는 200만 원을 깎았다.
여러 가지 수상한 구석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연락을 해오는 방식만 봐도 깔끔하거나 프로페셔널해보이지 않았고, 신입 팀장이 일주일 만에 그만둔 이유도 궁금했다. 그 전임자 역시 오래 버티지 못하고 회사를 도망치듯 나간 것 같았다. 잡플래닛의 평점도 매우 안 좋았다(HJ는 이유를 확인하려고 잡플래닛에 유료 회원으로 가입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HJ는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에 치를 떨고 있었으므로 크게 망설이지 않고 제안을 수락했다.
그녀는 지금 다니는 회사의 전무에게 먼저 구두로 퇴사하겠다고 알리고, 다음날 사직서를 썼다. 그 이틀 동안 그녀는 신이 나서 저녁마다 자신이 얼마나 기분이 가벼워졌는지, 원래 얼마나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는지 재잘거렸다. 내가 문학상을 처음 받았을 때도 그보다 더 기뻐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HJ의 지금 회사는 좀 이상한 곳이다. 내가 비록 한 사람으로부터만 이야기를 듣기는 하지만 HJ도 15년 넘게 여러 기업을 경험한 데다, 평소 시각도 꽤 공정하고 객관적인 편이다. 내가 옆에서 목격한 그 회사에 관한 몇 가지 팩트와 근무 양태도 참으로 이상하다. 이미 그만둔 전 상사와 스트레스로 사표를 냈다가 계속 다니고 있는 HJ의 친한 후배 얘기를 전해들은 바로도 확실히 그러하다.
외국계 기업 특유의 고인 물 문제, 대기업의 관료주의, 요령 없이 근면하고 이기적인 부서장이 합심해서 조금이라도 똑똑하고 의욕이 있는 직원들이 직장을 증오하도록 만드는 곳이랄까. 그런 조직에 어떤 책임감도 비전도 없이 철저히 수동적인 자세로 적응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내 아내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문자 그대로 울면서 회사를 다녔다.
그런 상태가 갈수록 심해졌고, 옆에서 보기에는 거의 한계에 이른 듯했다. 나는 걱정이 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해서 얼마 전부터 그냥 HJ에게 무조건 퇴사하라고 권하고 있었고, HJ는 그런 권유를 무시하고 고집을 부렸다. 직장을 다니는 상태에서 이직하지 않고 쉬다가 재취업하게 되면 몸값이 크게 떨어진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다. 두 번째 이유는, 지금 다니는 회사에 굴복한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었다. 그녀에게 그 회사는 이미 인생의 적이 되어버렸다.
HJ는 새 회사에 다음 달부터 출근하게 된다. 새 회사는 안양에 있어서, 가는데 버스를 타고 1시간이 넘게 걸린다. 하루에 2시간 이상을 출퇴근에 써야 한다. 그나마 교통편을 갈아타지는 않아도 된다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그녀는 괜찮다고 하고, 내가 오히려 더 걱정이 많다.
나는 그녀가 새 회사에 석 달 정도 다녀보고 계속 일할 만 하다 싶으면 안양으로 이사 가자고 주장한다. 그녀는 회사가 괜찮더라도 전세계약이 끝날 때까지는 지금 사는 집에서 계속 살겠다고 한다. 나보다 그녀가 더 이 동네를 좋아하기도 하고. 그녀는 이 동네에 있는 다른 외국계 회사에도 입사지원서를 냈다.
HJ가 사직서를 내고 나서 첫 토요일 저녁에 ‘무케의 순한 IPA’와 다른 맥주들을 마셨다. 충북 증평과 중국에 양조장이 있는 한국 수제맥주 회사인 플래티넘크래프트맥주의 제품이다. 편의점업계 최초로 나온 ‘웹툰 콜라보 맥주’란다. 맥주 캔에 아기 호랑이가 그려져 있고, 그 캐릭터 이름이 무케다.
네이버웹툰 《호랑이형님》의 등장인물, 아니 등장 호랑이인데, 나는 그런 작품이 있다는 것만 안다. 업계 최초 웹툰 맥주의 라벨을 장식할 정도면 굉장히 인기가 많은 캐릭터인가 보지? 정작 맥주 맛은 밍밍해서 다시 마실 것 같지는 않았다.
HJ가 추천 받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같이 보자고 해서 맥주를 홀짝이며 빔 프로젝터를 설치했다. 《나의 문어 선생님》이라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작품이었는데, 초반에는 영상이 아름답고 바다 속 풍경이 신기해서 그런대로 재미있게 보았으나 점점 지루해져서 끝까지 보지는 못했다.
내가 문어나 호랑이보다 훨씬 더 좋아하는 동물, 공룡이 나오는 영화가 보고 싶어졌고 HJ에게 《쥬라기 공원》 1편을 함께 볼 생각 없느냐고 물었다. HJ는 그 영화를 여태껏 보지 않았다. 그녀는 내 제안을 가볍게 묵살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고, 나는 삐친 상태에서 혼자 《쥬라기 공원》 1편을 보려 했다. 그런데 그 영화는 넷플릭스에 없었다. 뭐여.
아기 호랑이가 웃네
귀엽고 재밌어야 팔린다고요
나는 어쩌나
초반에는 살짝 템포가 느리고 배경 설명이 많은 것 아닌가 싶었는데 40%쯤 되는 지점에서 확 불이 붙었다. 옛 소련은 정말 이랬을까. 하도 암담해서 버겁기까지 했다.
20여년 만에 새 번역으로 다시 읽는데, ‘이게 이렇게 잘 쓴 작품이었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낡은 느낌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놀람. 함께 실린 사강의 에세이도 무척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