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맥주의 블로그
제 독서 메모는 마음대로 퍼 가셔도 괜찮습니다. 상업적으로 이용하셔도 됩니다.문학이 ‘항상 악의 문제를 다루고 자주 악을 포용하면서 그 유혹과 충동을 그려왔기 때문’에 ‘오도와 미혹 그리고 감정을 자극한다는 비난을 자주 받아왔다’는 문장에 밑줄.
오디오북을 무단 발행한 출판사의 편집장은 내 말이 다 옳다며, 자신들이 매번 그때만 넘기려 임기응변으로 대처했다고 시인했다. 내가 납득할 수 있게 정리해서 사과하고 관련 절차도 바로잡겠다고 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러겠다는 내용은 답신에 없었다. 한 달 기다려볼 생각이다.
설 연휴가 지나자 연락이 우르르 몰려 왔다. 안부를 물으며 자기 소식을 전하는 지인들, 뒤늦게 새해 인사를 하며 시간 날 때 전화해 달라든가 한번 얼굴 보자는 이들. 편집자나 기획자도 있고, 언론계 선후배도 있고, 기자 일을 하며 알게 된 사람도 있고, 그 전부터 알았던 사람도 있다. 나는 낮에 전화를 꺼두므로 그런 연락을 메일이나 문자메시지로 받게 된다.
친한 동아일보 출신 선배와는 만날 약속을 잡았다. 몇몇 사람들에게는 의례적으로 적당한 답장을 보냈다. 연락을 받고 며칠 뒤에야 간단한 답장을 보내기도 했다. 몇몇 사람들에게는 아직 답하지 않았고 어쩌면 영영 답을 안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렇게 답장을 하지 않는다고 내 마음이 편한 것도 아니고 속으로 소심하게 계속 신경을 쓴다.
왜 이렇게 다른 사람 만나는 걸 싫어하고 부담을 느끼는 걸까. 만나면 뭔가 부탁을 받을 것 같고 결국엔 내 시간을 뺏기게 되리라 걱정해서인가? 그런 면도 조금 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내가 애매하게 친한 관계인 사람을 만나는 데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 때문이다.
긴장을 풀고 만나는 타인도 몇 있다. 주로 대학 동기와 동아일보 선후배들이다.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을 업무 목적으로 만날 때에도 심하게 긴장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별로 친하지 않거나 잘 모르는 사람을 친목을 목적으로 만나면 나는 매우 서툴고 어쩔 줄 몰라 한다. 에너지도 많이 뺏기고 실수도 많이 하고 자책도 많이 한다.
그러면서 그런 만남 자체를 피하게 되었다. 그 결과 나이가 들어서 사귄 이른바 ‘사회 친구’는 한 명도 없다시피 하다. 아마 앞으로도 특별한 사건이 없는 한 못 사귀지 않을까 예상한다. 사실 동아일보 선후배들과도 같은 부서에서 일하며 폭탄주 마시면서 부대끼다가 겨우 친해졌다. 한 팀에서 일하지 않은 사람과는 데면데면하다.
에드워드 불모어의 『염증에 걸린 마음』을 읽었다. 우울증이 몸의 염증 때문에 일어날 수 있다는 최근 이론에 대한 책이다. 신경면역학이라는 학문 이름도 처음 알게 됐다. 모든 우울증의 원인이 다 염증이라는 얘기는 아니었다. 암이 한 종류가 아니듯 우울증도 여러 종류인 듯하며, 그 중에 염증성 우울증도 있는 것 같다는 주장이었다.
내게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내용은 많지 않았다. 다른 질병과 달리 우울증에 대해서는 프로작 개발 이후 뚜렷한 연구 성과가 없다거나, 프로작을 포함한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들의 근거가 매우 불완전하다는 대목이 조금 눈길을 끌었다. ‘의사들도 잘 모르면서 약을 처방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울증에 대한 책은 이제 더 찾아 읽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앤드루 솔로몬의 『한낮의 우울』만 더 읽어볼 계획이다.
『염증에 걸린 마음』을 읽은 날 저녁에는 상트벤델러 필스를 마셨다. 마트에서 파는 독일산 저가 맥주다. 포도향이 희미하게 나는 것 외에 큰 풍미는 없다. 대신 식도가 살짝 따끔한 느낌이 들 정도로 탄산이 강하다. 나는 ‘목넘김’이라는 표현을 단순히 한국 맥주회사들의 마케팅 용어라고 여기지는 않고, 사실 그 감각을 꽤 즐기는 편이기 때문에 이 맥주도 싫진 않다. 소폭, 맥막을 만드는 데 사용하거나 도수가 높은 술을 마신 뒤 체이서로 삼으면 좋을 듯하다. 비아냥거리는 게 아니다.
근처 공원에 정자가 있는데, 동네 할머니들의 사랑방이다. HJ는 그 자리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하는데 할머니들 때문에 그 지붕 아래 들어가 본 적은 아직 없다. 그녀는 여름이 되면 비 오는 날 꼭 거기에 막걸리 병을 들고 가서 마시겠다고 한다. 그때 나는 상트벤델러 필스를 가져가서 막걸리와 섞어 마시려 한다.
작은 계획을 꾸며요
그 일을 벌일 장소를 상상하죠
그때 마실 맥주도 같이
『염증에 걸린 마음』을 읽은 다음날에는 파주출판단지 소식지에 실을 칼럼을 썼고, 근력 운동을 했고, 부모님 댁에 가서 강아지와 놀았다. 토머스 캐스카트의 『누구를 구할 것인가?』와 미하엘 마리의 『양의 탈을 쓴 가치』를 읽었다. 가치의 문제를 다룬 책들을 읽고 싶었다.
『누구를 구할 것인가?』는 트롤리 딜레마에 관한 얇은 교양서다. 그런 사건이 현실에서 진짜로 벌어졌다고 가정하고 검사와 변호사, 배심원 등의 입을 통해 여러 방향에서 사안을 검토하고, 그러면서 관련 철학자들의 사상을 짧게 소개한다. 나쁘지 않지만, ‘트롤리학(學)’에 관심이 있다면 데이비드 에드먼즈의 『저 뚱뚱한 남자를 죽이겠습니까?』를 읽는 편이 더 낫다.
『양의 탈을 쓴 가치』는 가치가 어떻게 조작되고 조종되는지에 대한 내용이라고 해서 관심을 갖고 펼쳤는데, 실망스러웠다. 물론 많은 가치가 다른 가치와 충돌하고, 때로 악행의 명분이 되고, 그걸 입에 올리는 사람들 중 제대로 실천하는 이는 드물다. 하지만 그게 가치의 무가치함을 말하지는 않는다.
인간미 있고 유머러스한 물리학자가 생활 속 사례를 들어 말하는 통계물리학 이야기. 특히 내게는 출판 시장 분석이 눈길을 끌었다. 본문보다 조금 목소리 톤을 높여 쓴 듯한 부록의 ‘직언’들도 무척 좋았다.
도발적인 상상력으로 풀어낸 신라의 풍경. 작가의 패기가 느껴진다. 불교가 전파되면서 토착 문화가 점점 사라져가는 가운데 열정적으로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교합했던 사람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린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소련군이 베를린을 점령했을 때 그곳 여성들에게 벌어졌던 일들. 참혹하고 기괴하다. 자신의 이름을 숨긴 채 일기를 쓴 저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지금 우리는 성폭력을 집단 경험으로 여긴다. 성폭력은 이제 사방천지에서 일어나며 심지어 협상의 대상이 되어버렸다.’(181쪽) 인간, 혐오스럽고 가엾고 슬프고 강한 존재.
거침없이 쭉쭉 뻗어나가는 서사와 탄탄한 취재에 바탕을 둔 사실적인 묘사. 저마다 이기적인 욕망을 품고 제각각 끝 모를 지옥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다양한 인물들. 붕괴를 예감하지만 그것이 언제, 누군가에 의해, 어떤 식으로 일어날지 예상할 수 없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긴장감을 잃지 않는다. 그러면서 한 회사, 한 도시, 결국에는 한국 사회를 뒤덮은 부조리를 정밀하게 고발한다.
문제의식에는 물론 동감한다. 그런데 몰라서 실천을 못하는 내용은 아닌 것 같다. 원서가 나온 건 2013년이고, 그 사이 우리의 집중력은 더 떨어졌고.
내용이 어렵고 문장은 더 어렵다. 그래도 인간 존엄성을 둘러싼 네 가지 상반되는 해석을 소개하는 5장을 접한 것만으로도 참고 읽을 가치가 있었다.
지난해 가을에 촬영한 온라인 강연의 강연비가 들어오지 않아 중개업체에 돈이 왜 안 들어오느냐고 문의했다. 강연 중개업체에서는 회계 착오가 있었다며 이달 말까지 입금해주겠다고 답장해왔다.
“참 이상하단 말이야. 착오로 돈을 안 보내오는 곳은 많은데 착오로 돈을 더 보내오거나 중복 입금하는 곳은 없거든.”
HJ가 말했다.
출판사나 강연업체, 언론사로부터 돈을 떼어먹히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게 4년 전이었다. 그 뒤로 장부를 만들어 관리하는데 그런 사고가 발생하지 않은 해는 한 해도 없었다. 이 주제로 칼럼을 쓴 적도 있다.
그러면서 보다 근본적인 의문이 생겼다. 과연 출판사에서 팔렸다고 보고하는 책의 부수 자체는 애초에 믿을 만한가? 과거처럼 인지를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검증 수단이 없는 작가 입장에서는 무조건 출판사를 믿는 수밖에 없다.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이 있는 영화업계와 달리 출판계에는 전국적인 도서 판매 통계 자체가 없다.
친한 편집자에게 물었더니 별로 불편해 하는 기색도 없이 이렇게 답해주었다.
“속이려면 속이기 너무 쉬운 업종인 건 맞죠. 대표와 경리가 가족인 경우도 많고요. 그래서 작은 출판사와 일하지 않으려는 작가들이 꽤 있어요. 큰 출판사라고 해도 개인 대표일 경우 성실하지 않은 회사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출판사들은 규모도 작고 국가에서도 일종의 보호업종으로 보고 있어서 국세청이 세무조사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했다. 그 편집자가 다니는 회사도 수십 년 동안 세무조사를 한 번도 받지 않았다고 했다. 이런 푸념을 다른 소설가에게 했더니 그는 “출판사의 투명성 문제는 반만 믿는다. 작은 곳, 가족 껴있는 곳, 1인 출판사와는 절대 일 못하겠다”고 말했다.
루이즈 애런슨의 두툼한 벽돌책 『나이듦에 관하여』를 다 읽었고 토요일에 이웃 동네 도서관에 가서 반납했다. 집을 나설 때 가방에 수퍼 스윙 라거를 한 캔 넣고 나가서 가는 길에 마셨다.
지난번에 대기 줄이 길어서 가지 않았던 일본식 우동․소바 전문점에 이번에는 가보았다. 이번에도 입장하기까지 10분 이상 기다려야 했다. 우리 앞에 대기하고 있는 팀이 한 팀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세 팀이었다. ‘그렇게 대단한 가게야?’ 하고 내심 툴툴거리며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어라? 분위기가 괜찮았고 무엇보다 음식 맛이 훌륭했다. 가격도 그만하면 합리적이었다. 시금치 소바 샐러드, 쌀 대신 소바를 넣은 초밥, 그리고 카쯔동을 주문했는데 다 맛있었다. 이만하면 기다려서 먹을 만한데,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메뉴판에는 자신들의 소바는 매장 내 제면실에서 100퍼센트 메밀로 만들고, 간장과 가츠오부시 등을 전부 일본 현지에서 가져온다고 적혀 있었다. 반일 감정이나 방사능 때문에 일본산 식재료를 피한다는 사람도 많은 시절인데, 대단한 자부심이었다.
식당에서는 프리미엄 에비스 생맥주를 마셨다. 역시 맛있었다. 일본에서 19세기부터 인기가 있었다는 유서 깊은 맥주이고, 도쿄에는 이 맥주 이름에서 따온 지명과 지하철역도 있지만, 역시 에비스 하면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떠오른다. 극중 인물인 카츠라기 미사토가 집에서 식사할 때마다 괴성에 가까운 탄성을 질러가며 마시는 맥주다.
미사토는 연상 미녀에 대한 십대 소년의 환상을 겨냥해 만든 캐릭터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보는 동안 이미 미사토보다 나이가 많았던 나는 이 인물 설정에 자주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에비스 맥주는 궁금해서 찾아 마셨다. 에반게리온 오타쿠가 주인공인 내 소설 『열광 금지, 에바로드』에도 에비스 맥주가 한번 언급된다.
멋진 도서관 옆에서
소년 애니메이션에 나오던 맥주
메밀면 먹으며 마셨네
이날 저녁에는 집에서 HJ와 닭가슴살 샌드위치를 함께 만들어 먹었다. 맥주도 또 마셨다. 다음날인 일요일에는 낮에 부모님 댁에 갔다. 동생의 생일이라 간단히 가족이 간단히 파티를 하는 동안 강아지는 신이 나서 뛰어다녔다. 매제와 나는 부모님 댁 거실에 반려견용 안전 울타리를 설치했다. 부모님이 주무시거나 외출을 할 때 새롱이가 집 안에서 위험한 상황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부모님은 침실에서, 나는 손님방에서, 강아지는 울타리 안에서 밤을 맞았다. 강아지는 한참 낑낑대며 앞발로 울타리를 긁고, 길고 구슬프게 울었다. 나는 자다가 몇 번이나 거실로 나와서 울타리 안에 손을 넣어 개를 쓰다듬었고 그 옆에서 누워 자기도 했다. 개가 울타리 안에서 잠이 든 걸 확인하고 나서 방으로 돌아왔다.
줄다리기라는 표현이 절묘하네. 모든 이가 ‘돈까쓰’라고 발음해도 옳은 표기법은 ‘돈가스’인 모순을 지적하는데, 듣고 보니 과연 그렇다. 이것도 짜장면-자장면의 전례를 따라 복수표준어로 만들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