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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맥주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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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4. 분신, 가난한 사람들 (도스토옙스키)

「가난한 사람들」은 도스토옙스키의 데뷔작인데, 아주 징글징글하게 가난한 이들이 나온다. 마까르 제부쉬낀은 하도 지질해서 연민의 감정이 별로 들지 않을 지경. 도스토옙스키의 두 번째 발표작인 〈분신〉은 꽤나 혼란스러운 심리 스릴러다.

분신 가난한 사람들
분신 가난한 사람들
403. 마음의 지배자 (김현중)

이런 재미있는 소설집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이 너무 안타까울 정도. 초월적 존재들을 영웅 서사나 소수자에 대한 비유로 이용하지 않고 서늘하게 그린다. 결과는 불가해함과 막막함. 접근방식 자체가 신선한 데다 무척 성공적이기까지 해서 놀랍다. 스토리텔러로서도 발군. 이런 재능 있는 소설가가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정도다.

마음의 지배자(온우주 단편선 6)
마음의 지배자(온우주 단편선 6)
39. 부에나베자 솔트 앤드 라임 라거와 여행 준비

끝내 HJ는 사표를 냈다. 인원이 더 필요하다는 말에 사장은 “일을 완벽하게 할 필요는 없다”고 대꾸했다고 한다. 양편의 현실 인식이 너무 간극이 크고 상대가 설득도 안 될 것 같았다. 계속 다닌다고 뭐가 바뀔까? HJ가 사표를 내려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전화를 걸어 왔고 나는 찬성한다고 대답했다. 8년 전 내가 사표를 내던 날과 상황이 비슷했다.

HJ의 전화를 받을 때 나는 부모님 댁에 있었다. 사표를 내겠다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HJ는 제주도로 여행을 가자고 했다. 3일 뒤에 나는 온라인으로 대학 강연을 하게 되어 있었다. 그 강연을 마친 다음날 비행기를 타자고 얘기했다. 3월 말에 개인 약속이 있기는 했는데 양해를 구하고 미룰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4월 초로 예정된 다음 강연까지 최대 18일을 제주에 머물 수 있었다. 귀경할 때 공항 사정이 어떨지 모르니 16일간 머물 계획이었다. 제주보다는 해외로 가고 싶었지만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해외 국가 중에서 관광객에게 자가 격리를 요구하지 않는 나라는 몇 곳 있다. 그러나 한국은 모든 입국자가 2주간 격리돼야 한다. 박원순 아들처럼 예외를 적용받지 않는 한.

20년 동안 사귀면서 HJ와 내가 일주일 이상 함께 여행을 떠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회사를 다니면서 두 사람 모두 바빠서 같은 기간에 길게 휴가를 내기 어려웠다. 나는 마지막으로 일주일 넘게 출장이나 여행을 가본 게 2008년이다. 샌프란시스코로 보름간 단기 연수를 갔었다. HJ는 2017년이 마지막이다. 처제가 스위스 남자와 결혼할 때 프랑스와 스위스에 다녀왔다.

두 사람이 겨우 일정을 맞출 수 있게 됐는데 왜 하필 그 해에 전염병이 대유행하는 건지. 그런데 한편으로는 우리가 제주에 간다면 3월 말, 4월 초인 이때가 가장 적기이기는 하다. 내가 이렇게 외부 일정이 없는 기간도 흔치 않다. HJ는 제주도 자전거 종주를 제안했고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제주도 해안을 자전거로 한 바퀴 도는데 보통 2박 3일에서 3박 4일 정도 걸리고 대여 시설도 잘 갖춰져 있다고 했다. 그러나 자전거도로 상태는 턱없이 좁거나 인도와 합쳐지거나 승용차 운전자들이 주차장으로 쓰고 있는 곳들이 있어 아주 쾌적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다음날에는 점심에 베트남 음식점에 가서 월남쌈을 먹고 공원을 걷고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마셨다. 카페에 있을 때 HJ에게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사직을 말리는 사장의 전화가 아니라 그냥 다른 팀장이 업무와 관련해 질문하는 내용이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구두방에 들러 밑창이 떨어져 나간 샌들 수선을 맡기려 했는데, 수선비가 너무 비싸서 그냥 다이소에 가서 접착제를 샀다. 근력운동용 탄력밴드도 샀다. 제주도에 가면 헬스장에 다닐 수 없을 테니. 휴대폰과 연결되는 적당한 크기의 스피커도 있으면 사려고 했는데 보이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내가 4월 초에 강연을 하기로 되어 있는 서울 시내 대학에서 연락이 왔다. 강연을 오프라인으로 열려던 계획을 변경하고 화상회의 방식으로 할 테니, 내가 강연일에 자신들이 있는 곳으로 올 필요 없이 인터넷이 잘 되는 장소에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 강연은 5월 초에 있었다. 갑자기 제주도에 머물 수 있는 기간이 한 달 이상으로 늘어났다. 우리는 그냥 돌아오는 날짜를 정하지 않고 제주도에 가기로 했다. 자전거 종주를 할지 말지도 제주도에서 머물다 결정하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본의 아니게 사귄지 만 20년 되는 해의 기념 여행이 됐다. HJ가 이걸 소재로 에세이를 한 권 써보면 어떻겠느냐고 해서 잠시 그럴까 고민도 했다. 그런데 생활에 지친 40대 부부의 제주 힐링 여행이라는 소재 자체가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너무 뻔하게 들렸다.

그날 저녁에는 집에서 부에나베자 솔트 앤드 라임 라거와 수퍼 스윙 라거, 덕덕구스, 버드와이저, 아사히 수퍼드라이를 마셨다. 사실 술을 마시면 안 되는 날이었다. 칼럼 마감들이 몰려서 닥쳐온 때였기 때문이다. 신문 두 곳의 칼럼과 출판사에 보내야 하는 원고를 써야 했다.

부에나베자 솔트 앤드 라임 라거는 탠저린 익스프레스 헤이지 IPA를 만든 스톤 브루잉의 파일럿 맥주다. 이름에도 나온 것처럼 소금과 라임을 첨가했는데, 습한 여름날 땀 흘리고 기운 없을 때 마시면 좋을 듯한 맛이었다. 멕시칸 스타일 라거라고 한다. 소금에서는 데킬라가, 라임에서는 코로나가 연상된다.

 

선물 같은 여행

빛을 찾아서, 봄을 꿈꾸며

더 따뜻한 섬으로

 

신문 칼럼 원고 한 편은 제때 보냈으나 다른 한 편은 마감일 당일에 담당 기자의 독촉을 받으며 겨우 썼다. 간만에 마감 압박으로 가슴이 죄는 느낌이었다. 기자 시절 이런 날이 많았는데. 스트레스를 받을 때 기침하던 버릇도 고스란히 돌아왔다. 원고를 보낸 뒤 동네 블루클럽에 가서 머리를 자르고 부모님 댁에 갔다.

큰 조카와 함께 동물병원에 가서 새롱이 5차 예방접종을 받았다. 이제 새롱이는 드디어 산책을 해도 된다. 부모님 댁에서는 저녁에 치킨을 주문해 먹었다. 새로 설치한 간편결제 앱으로 계산하는데 성공했다. 치킨을 먹으며 버드와이저와 칼스버그 대니쉬 필스너를 마셨다. 하루 묵고 오려 했는데 조카들이 거기서 잔다고 해서 잠자리가 모자라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제주로 떠나기 전날은 엄청나게 바빴다. 오전에는 내 소설의 판권을 구입한 영화감독을 만났다. 3월 중에 만나자고만 약속을 한 상태였는데 제주 여행을 앞두고 내가 날짜를 급히 정했다. 한 시간 남짓 커피를 마시면서 현재 영화 제작 상황에 대해 들었다. 코로나19 사태로 영화계는 투자도 제작도 상영도 모두 중단된 상태라고 했다.

영화계와 영화감독들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었다. 안 풀리는 젊은 영화감독들이 괴로워하는 일화나 배우들의 간택을 받으려 애쓰는 사연들이 애처로웠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소설가가 연출자보다 편한 직업인 것 같다. 투자를 받으려 돌아다니지 않아도 되고, 배우 눈치를 살피지 않아도 되고, 작업 기간도 짧고.

그는 자신이 작업 중인 시나리오를 내가 봐줄 수 있느냐고 물었는데 거절했다. 애초에 그 요청 때문에 나를 찾은 건지 잘 모르겠다. 내 승인을 받고 싶었는지, 아니면 조언을 구하려 한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낮에는 시내로 나가 오랜 친구 W를 만났다. W는 전날 내게 갑자기 문자메시지를 보내 잘 지내느냐고, ‘멘탈이 걸레가 됐다’고 했다. 우리가 다들 40대를 통과하는 중이라 이런 건가 싶었다. 놀라울 정도로 맛없는 순댓국을 먹고, 커피점에 가서 차를 마셨다. 그는 내게 정신과 진료와 항우울제에 대해 물었다.

W는 쿠팡의 초창기 멤버였고, 마켓컬리의 초창기 멤버가 될 뻔했고, 그 외에 여러 스타트업을 만드는 데 간여했다. 가장 최근의 큰 프로젝트는 SK의 지원을 받아 반품 전문 온라인 커머스 회사를 세우는 일이었다. 그런데 쿠팡에서는 스톡옵션을 받지 못하고 나왔고, 그가 세운 스타트업들은 다 이리저리 일이 꼬였다.

W가 최근 몇 년간 겪은 일을 듣고 나니 상대가 아직까지 제정신인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무엇보다도 그가 잘못한 일이 없었다. 내가 그의 처지에 있었더라도 그렇게 선택하고 행동했을 터였다. 앞으로 어떤 기회가 남아 있는지 확신이 안 선다는 우울감도 이해가 갔다. 마음이 무거워진 채로 헤어졌다.

중년 위기의 본질이 이것일까? 내 인생 꼬인 것 같다는 불안감. 그리고 자기 자신과 미래에 대한 기대를 거두면서 점차 인생과 화해하게 되는 걸까? W는 다른 분석을 내놨다. 20대에는 주변에 부잣집 자식은 있어도 진심으로 시기하고 부러워할 만한 성취를 거둔 또래가 없다. 그런데 40대가 되면 그런 동년배가 생긴다.

오후에는 음악학원에 가서 기타 레슨을 받았다. 코드 기초 이론에 대해 들었다. 이제 화성학을 조금 배워야 하는 시기인가 보다. 제주도에 기타를 들고 가지는 못한다. 한 달이면 그동안 배운 걸 다 잊지 않을까 걱정이다.

저녁에는 부엌에서 줌으로 포항에 있는 학생과 주민을 대상으로 강연을 했다. 도서관에서 사서들과 함께 줌으로 강연을 한 적도 있고, 집에서 온라인으로 다른 작가들과 함께 독자와의 만남을 연 적도 있지만 강연 수업을 집에서 혼자 해보기는 처음이다. 청중의 반응을 확인하지 못한 채로 한 시간 반 동안 이야기를 하려니 적잖이 힘들었다.

짐은 대충 꾸렸다. 바퀴 달린 캐리어와 더플백 하나에 그냥 집에서 평소에 쓰던 물건을 다 집어넣었다. 약간이라도 무게를 줄이겠다고 낑낑대며 고민하는 것보다 그 편이 시간도 절약할 수 있고 마음도 편하다. 그래봐야 짐의 대부분은 일주일치 옷가지여서 그다지 거추장스럽지 않았다.

 

402. 19호실로 가다 (도리스 레싱)

불쾌한 남자들과 불안해 하는 여자들. 표제작을 읽으면서는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떠올렸다. 남자건 여자건 글을 쓰건 아니건 우린 모두 각자의 방이 꼭 필요하다.

19호실로 가다 - 도리스 레싱 단편선
19호실로 가다 - 도리스 레싱 단편선
401. 단델라이언 (가와이 간지)

이번 수수께끼는 ‘하늘을 나는 사람’. 재미있고 여운도 상당히 남았다. 가부라기 특별수사반 시리즈는 특이하게 1편 『데드맨』보다 2편 『드래곤플라이』가 낫고, 그보다 3편인 『단델라이언』이 더 좋다. 이상한 필명을 쓰는 작가가 무척 궁금하다.

단델라이언
단델라이언
400. 드래곤플라이 (가와이 간지)

가부라기 특별수사반 시리즈 2편. 이번에도 도무지 답이 있을까 싶은 수수께끼를 던지고, 흡인력 있게 이야기를 끌어간다. 1편인 『데드맨』보다 더 편안해지고 능숙해졌다.

드래곤플라이
드래곤플라이
399. 데드맨 (가와이 간지)

책장이 바삐 넘어간다. 초반에는 아이고, 이걸 어떻게 수습하려나, 싶었는데 소설 안에서는 그럭저럭 말이 되게 마무리한다. 사실성은 봐주세요, 하는 분위기라 불만은 없다.

데드맨
데드맨
398. 레이디 맥도날드 (한은형)

품위와 자존심을 지키며 살고 싶다. 외부의 시선과 상관없이 그렇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언제 가치 있는 투쟁이 되고, 어떤 때 우스꽝스러운 정신승리가 되는지는 모르겠다. 결국 타인의 인정이 중요한 요소일까? 아니면 객관적인 기준이 있는 걸까? 객관적인 기준이 없다면 많은 사람이 인정하기만 하면 우스꽝스러운 정신승리도 가치 있는 투쟁이 되는 것일까?

레이디 맥도날드
레이디 맥도날드
397.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룰루 밀러)

심오하다기보다는 예쁜 책이라고 느꼈는데, 베스트셀러라고 해서 흰 눈으로 봤던 걸지도 모르겠다. 대중 영화나 베스트셀러 도서에서 혼돈과 질서, 의미를 향한 추구 같은 주제를 다룰 때 이제 실존 위기가 (적어도 선진국에서) 모든 사람의 문제가 되었구나 하고 생각한다. 신의 빈 자리를 감흥이 대신할 수 있을까?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고 비극을 즐길 수 있을까?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38. 망고 비어와 봄까지꽃

일요일에는 HJ가 또 노트북을 켜고 일할까봐 걱정이 되었다. 아침에 그녀에게 나가서 브런치를 먹고 오자고 꾀었다. 그녀 역시 자신이 그날 또 일에 매달리게 될까봐 걱정하고 있었기에, 내 제안을 선뜻 받아들였다.

오전 10시경이었는데 처음 찾아간 팬케이크 가게에는 빈자리가 없었고, 밖에서 입장을 기다리는 팀이 11팀이나 있었다. 엄청나게 인기가 많은 곳이구나, 감탄하며 다른 블록으로 갔다. 그런데 두 번째로 찾아간 브런치 카페에도 자리가 없었고 밖에서 대기 중인 사람이 여섯 팀이었다.

사람들이 이렇게 주말에 브런치 먹기를 좋아하나? 우리가 게으른 건가? 그냥 요즘 우리는 뭘 시도해도 잘 안 풀리는 불운의 시기에 접어든 건가? 고개를 갸웃하며 다른 블록으로 걸어갔다. 다행히 세 번째로 찾아간 베이커리 겸 브런치 카페에는 빈 테이블이 있었다. 게다가 분위기도, 맛도 훌륭했다.

나는 오믈렛을, HJ는 루꼴라 샌드위치를 먹고 각자 가져 온 책을 읽었다. HJ는 요조의 『실패를 사랑하는 직업』을 읽었는데 많이 위로가 된다고 했다. 그 책에는 내 이야기가 두 페이지 정도 언급되기도 해서 HJ가 그 부분을 내게 보여주었다.

브런치 카페에 두 시간가량 앉아 있다가 공원을 거쳐 집에 돌아왔다. 길섶에는 선명한 파란색 꽃잎을 지닌 작은 풀꽃들이 피었고 벌들이 거기서 꿀을 따고 있었다. 민들레도 조금 피었고, 개나리와 벚나무에는 꽃망울이 맺혀 있었다.

집에 돌아와 벌들이 좋아하던 꽃 이름을 찾아보니 큰개불알풀의 꽃이라고 했다. 이름이 민망해서 ‘봄까지꽃’으로 바꿔 부르려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봄이 올 때까지 피는 꽃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이걸 사람들이 오해해 ‘봄까치꽃’이라고 잘못 쓴다고 한다.

오후에 헬스장에 가서 근력 운동을 하고 와서 다시 HJ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내가 힘들었을 때에는 HJ가 꼭 그렇게 나를 돌봐줬는데 불과 며칠 사이에 역할이 바뀌었다. 부부란 이런 건가. 남들은 우리 부부 보면서 부러울 것 없는 처지라고 여길 텐데, 10년 전, 아니 5년 전과 비교해 봐도 우리가 분명 형편이 나아졌는데, 왜 이렇게 사는 게 힘들까.

복국을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다는 HJ의 말을 듣고 동네 복국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문이 닫혀 있어서 그 옆의 미역국 전문점에 들어갔다. 아무 기대 없이 가자미미역국과 멍게비빔밥을 먹었는데 둘 다 너무 맛있었다. 가자미, 미역국, 멍게가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었구나. 그래, 아까 브런치 카페도 그렇고 지금 미역국도 그렇고, 인생 계획대로 풀리지 않는다고 실망할 것 없어! 그런 얘기를 나눴다.

저녁을 먹고 나서는 우리가 종종 찾아가는 동네 LP 바에 갔다. 술을 마시고 싶지는 않아서 HJ는 오렌지 주스를, 나는 메뉴판의 논알코올 음료 카테고리에 있는 망고 비어를 주문했다. 이름에 ‘비어’가 들어가니까 여기에도 써본다.

대만의 망고맥주는 아니고, 인터넷을 뒤져도 그 이름으로는 어느 호프 프랜차이즈만 나온다. 그 LP 바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칵테일인 것 같다. 주황색 탄산음료 위에 생크림을 올린 칵테일인데, 생김새는 루트비어 플로트와 비슷하다. 그런데 루트비어가 아니라 진저비어로 만들고 설탕을 엄청 넣은 것 같다.

1990년 이후로는 신곡이 나오지 않았다는 태도로 늘 영미 올드팝만 틀던 바였기 때문에 스피커에서 K-팝이 나왔을 때 좀 놀랐다. 사장이 출근을 안 하고 아르바이트생으로 보이던 직원이 바를 맡고 있어서 그런가? K-팝이 두서도 없이 연달아 흘러 나왔다. 알고 보니 우리 뒤 테이블의 한 중국인 청년이 계속해서 리퀘스트를 신청하고 있었다. 대단한 K-팝 애호가였다.

운영자 입장에서는 뭐라 불만을 드러낼 상황이 아니었다. 중국인 청년과 그의 한국인 동행인 젊은 여성 한 사람이 우리 부부보다 가게 매상을 스무 배쯤 더 올려주고 있었다. 중국인 청년은 위스키를 한 병 다 비우더니 보드카 한 병을 새로 주문했다. 엄청난 주량이었다.

그런데도 청년은 얼굴이 조금 풀린 것 외에는 별로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고 목소리도 크지 않았다. 노래를 신청할 때에는 매우 정중하고 살짝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있어서 귀여웠다. 무엇보다 그가 K-팝을 들으며 너무 행복해 하고 감격스러운 표정이어서 나중에는 옆에 있던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리버풀에서 비틀즈 음악을 듣는 심정이었나 보다.

 

고맙습니다

행복을 퍼뜨리는 능력

슈퍼 히어로

 

중국인 청년 일행도, 우리도, 오후 10시까지 있다가 바가 문을 닫을 때 나왔다.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에 수도권의 다중이용시설들은 아직도 오후 10시까지만 영업을 할 수 있었다. 나가기 전에 스피커에서 앤 마리의 〈2002〉가 흘러 나왔다. 나는 스매싱 펌킨스의 〈1979〉를 떠올렸고 그 사이에 20여 년이 흘렀다는 데 새삼 놀랐다.

〈2002〉에는 ‘우리가 사랑에 빠졌던 날’이라는 후렴구가 있다. HJ와 나는 그보다도 더 일찍 사랑에 빠졌다. 집에 천천히 걸어왔다. 나는 반바지를 입고 있었지만 별로 춥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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