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맥주의 블로그
제 독서 메모는 마음대로 퍼 가셔도 괜찮습니다. 상업적으로 이용하셔도 됩니다.전혀 환멸을 느끼지 않았고, 작가가 자본주의의 화신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외려 존경심이 들었다. 수입이 아니라, 태도 때문에. 마루야마 겐지보다 약간 더 위악적인 느낌?
그야말로 소소한 유머. 지금은 부모님 댁에 새롱이가 있지만, 이 책을 읽을 때에는 개를 키우고 싶다는 마음을 이런 독서로 달랬다. 그런데 이 녀석들, 의외로 앙큼하구나. 주인 말이라고 무조건 따르는 것도 아니고.
전자책 단편이다. 도입부는 멋진데 결말은 뭐… 러브크래프트 분위기가 난다 싶었는데 작 가가 러브크래프트와 클라크 애슈턴 스미스의 친구였고 크툴루 신화 소설도 썼다고 한다.
외모라는 요소가 성·인종과 얽혀 거대하고 복잡한 차별 지형을 만들고, 이걸 어느 정도 법으로 시정해야 한다는 핵심 주장은 분명 생각해볼 가치가 있다. 나처럼 이 주장에 설득되는 사람이 많아지고 기술이 발전하면 테드 창의 단편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다큐멘터리」 같은 미래가 진짜 나타날지도 모르겠다.
밤은 조용했고, HJ도 나도 푹 잤다. 호텔이 만실은 아니었어도 다른 손님이 없지는 않았는데 소란을 피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인스턴트커피를 마시며 쉬다가 밖으로 나섰다. 숙소 앞 도로의 인도가 제주올레길 코스였다. 일단 서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서쪽 바닷가의 이름은 황우지해안, 해안가의 작은 들판 이름은 벌러진밧이었다. 조금 걷다 보니 갈림길이 나왔는데 바닷가를 따라가는 길이 아니라 산으로 올라가는 오르막길을 즉흥적으로 선택했다.
그곳은 한라산의 기생화산인 삼매봉 산책로의 입구였다. 길은 잘 포장되어 샌들을 신은 발로도 걷기 편했고 좌우로 나무가 빽빽한 데다 가끔 시야가 트이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전망도 훌륭했다. 그리고 온갖 새소리가 시끄러울 정도로 끊임없이 들렸다.
다른 등산객은 거의 없었다. 꼭 정상까지 올라야겠다는 마음 없이 쉬엄쉬엄 가볍게 걸었는데 어느덧 꼭대기였다. 그 즈음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우산을 썼다.
낮에는 숙소 근처에 있는 삼매봉도서관에 갔다. 지은 지 35년이 된 작은 공공도서관인데, 구내식당이 잘 되어 있어 근처 주민들이 여기서 식사를 한다고 한다. 도서관을 구경하는 걸 HJ가 좋아한다. 나는 ‘여행지에서까지 도서관에 갈 필요가 있나, 어차피 책을 빌리지도 못하는데’ 하는 편이고.
삼매봉도서관은 낡았지만 깔끔했다. 2층과 3층 일부를 터서 만든 아트리움을 HJ가 좋아했다. 일없이 서가를 한참 둘러봤는데 자료실보다는 열람실 위주로 운영되는 도서관인 듯했다. 제주 출신 소설가의 전집이 문학 서가에 꽂혀 있었는데 내용이 하도 자세해서 웃음이 나기도 하고 조금 서글퍼지기도 했다. 초등학교 강연 현장의 사진까지 수록해 놨다.
구내식당은 도서관 본관 조금 아래에 별도의 건물로 있었고, ‘삼매봉 153’이라는 멋진 이름도 따로 있었다. 무인 키오스크에서 주문을 하고 주방에서 식사를 받아 자리로 가져와 먹는 시스템이었는데, 빈 테이블이 딱 하나 남아 있었다. 우리 다음 팀은 대기 좌석에서 기다려야 했다.
탕수육과 함박스테이크를 주문했는데, 과연 듣던 대로 훌륭한 가성비의 음식이 나왔다. 임대료가 쌀 테고 서버가 없다지만 이 가격에 어떻게 이런 구성이 가능할까 싶었다. 함박스테이크 위에 소스를 뿌리는 방식까지 정성스러웠다. 매우 감탄해서, 한 번 더 찾아오자고 다짐하며 식당을 나왔다. 그러나 이후 이곳에 다시 찾아가지는 못했다.
숙소에서 잠시 쉬다가 저녁에 서귀항 근처에 있는 새섬에 찾아갔다. 숙소 앞바다에 섬이 네 개가 있는데, 동쪽부터 차례대로 섶섬, 새섬, 문섬, 범섬이다. 그 중 육지에서 가장 가까운 새섬과 서귀항 사이에는 연륙교인 새연교가 놓여 있다. 이곳도 작은 관광 포인트로, 원래는 유람선과 잠수함이 운행했는데 지금은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중단되었다.
새연교까지 급경사 언덕을 내려가는 지그재그 길도, 새연교에서 내려다보는 바다 전망도 모두 근사했다. 새연교 입구의 스피커에서는 파헬벨의 〈캐논〉과 혜은이의 〈감수광〉이 아무렇지도 않게 연이어 흘러 나왔다. 새연교는 한 바퀴를 도는데 20분 정도가 걸렸는데, 다양한 식물 군락이 있었고 그 아래 자세한 설명이 적혀 있었다. 새섬의 ‘새’도 새롭다거나 조류와 관련된 게 아니라 억새류를 가리키는 뜻이라고 한다.
돌아오는 길에 호텔 앞 카페에 들렀다. 딱히 내키는 곳은 아니었고 숙소 바로 앞에 있으니 한번 구경이나 해보자 하는 마음이었는데 들어가 보니 경치가 너무 좋아서 깜짝 놀랐다. 밖에서는 예상치도 못한 전망이었다. 계산대에는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태평스럽게 앉아 있었는데 사장님은 그 고양이가 길고양이 주제에 이 카페를 제 집인 줄 안다며 투덜거렸다.
카페에 손님은 우리밖에 없었고 어느 테이블이 제일 전망이 좋은지 한참 고민하다 겨우 자리를 잡았다. 2일차 저녁까지 제주 여행은 기분 좋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는데 애초에 우리가 기대치가 낮았던 탓도 있고 비용 걱정 없이 이것저것 시도할 수 있어서이기 때문인 것도 같았다. 바삐 돌아다니지 않고 숙소에서 틈틈이 쉬면서 주변 마실만 다녀서 몸과 마음이 덜 피곤한 덕분이기도 했다.
제주 여행 3일차 아침에는 방에서 근력 운동을 하면서 탄력밴드를 처음 사용해 보았다. 사용법은 알겠는데 밴드 장력이 약해서 운동 효과가 어느 정도나 있는지 모르겠다. 오전에는 전날 저녁에 갔던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씩 마시고 숙소로 돌아와 또 쉬었다. 그리고 올레길 서쪽 방향으로 다시 산책을 떠났다.
이번에는 오르막길이 아닌 바닷가 도로를 따라 걸었다. 그 방향에 선녀탕과 외돌개가 있는 걸 알고 있었는데 조금 걸으니 금방 도착했다. 관광객들이 원하는 요소도 시대마다 변하는 것 같다. 1980년대에는 사람들이 기암괴석을 보고 싶어 했다면 요즘은 탁 트인 전망을 선호하는 것 아닐까. 오래된 관광지인 선녀탕과 외돌개에는 큰 감흥이 없었는데 해안 절벽인 서너븐덕과 동너븐덕이 좋았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가 자살공격용 어뢰를 숨기기 위해 만들었다는 황우지 12동굴이나 1960년대의 무장간첩 섬멸 전적비를 보고는 만감이 교차했다. 우리는 참으로 축복 받은 시대를 살고 있구나. 숙소에 돌아와서 또 쉬고, 근처 식당에 가서 흑돼지로 만들었다는 돈가스를 먹었다. 맛은 평범했다.
오후에는 내가 가이드가 되어 HJ에게 천지연폭포를 안내했다. 나는 초등학생 때 부모님을 따라 천지연폭포를 구경한 적이 있고, HJ는 이번에 처음 보는 것이었다. 천지연폭포에 대해 나는 ‘작고 북적거리고 실망스러웠다’는 점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다시 찾아가보니 내 기억 속 모습보다는 훨씬 나았다.
사실 나는 천지연폭포 관람보다 그 이후의 일정에 더 관심이 많았다. 서귀포 시내로 들어가 수제 맥주를 즐기는 것. 내가 점찍어둔 식당은 제주약수터 본점이었다. 제주도에 있는 여러 수제 맥주 브루어리의 제품을 한 곳에서 파는 매장인데 천지연폭포 매표소에서 걸어서 15분 남짓 거리라고 했다.
그런데 내가 좀 헤매기도 했고 차들이 옆에서 끊임없이 지나가는, 낯선 시내 도로를 걷는 것은 퍽 피곤한 일이었다. HJ가 눈에 띄게 지쳐 보여 눈치가 보였다. 다행히 제주약수터는 맥주도, 안주도, 직원들의 서비스와 분위기까지 모든 게 만점이었다.
제공하는 맥주의 종류가 자주 바뀌기 때문에 술 메뉴는 커다란 전광판에 따로 적혀 있었고, 처음 온 손님은 그 중 몇 종류를 골라 작은 잔으로 시음을 해볼 수 있었다. 달콤한 라들러인 ‘올레길’, 서귀포의 로컬 브루어리인 탐라에일에서 만드는 탐라밀맥주와 곶자왈 IPA, 고부루비어컴퍼니의 스타우트인 메모리즈를 맛봤다. 그리고 천지연, 탐라밀맥주, 서귀다원을 주문해서 마셨다.
서귀다원은 제주약수터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포터다. 전광판의 짧은 해시태그 설명으로 봐서는 유기농으로 키워서 숙성한 찻잎을 제조 과정 어느 단계에 첨가한 것 같은데 녹차 향은 미묘하다. 초콜릿 향은 확실히 알겠고 맛이 부드럽다. 알코올 도수는 5.4퍼센트.
안주보다는 술에 공을 들이는 가게인데 안주도 근사했다. 대만식 마늘쫑 파스타라는 메뉴를 시켰는데 제주에서 그때까지 먹은 음식 중 가장 맛있었다. 즐거운 기분으로 숙소에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제스피 맥주를 판매하는 제주 올레 여행자센터에 들렀다. 제스피는 삼다수를 만드는 제주 지방 공기업인 제주특별자치도개발공사에서 개발한 맥주 브랜드인데, 제주 암반수와 제주 보리를 사용한다. 제스피 맥주는 제주에 머무는 동안 마실 기회가 다시 있을 것 같아 구경만 하고 나왔다.
맥주 약수터
다람쥐처럼 목축이고 가요
언제 또 오려나
석영중의 『매핑 도스토옙스키』를 읽었다. 도스토옙스키가 머물렀던 공간을 쫓아가며 그의 인생 역정과 작품 세계를 설명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삶 자체가 참 드라마틱했고 저자의 해설도 유쾌하고 깊이가 있어서 무척 재미있고 즐거운 독서였다.
도스토옙스키의 지질한 행동들은 웃기기도 하고 ‘대문호도 별 수 없었구나’ 싶어 위안도 되었다. 도스토옙스키 문학 기행이라면 나중에 나도 한번 떠나보고 싶다.
제임스 맥닐 휘슬러와 존 러스킨의 소송전이 재미있었다. 평론이 소송 대상이 될 수 있느냐는 문제와는 별도로, 러스킨의 비판은 지금 기준으로는 매우 한심한 소리로 들린다.
만화 《백귀야행》에서 길고 어두운 에피소드 두 편을 글로 풀어내면 이 정도 되지 않을까? 무섭다기보다 서글픈. 이야기와 문장은 난폭운전이다. 덜컹거리지만 빠르긴 하다.
음악을 다룬 부분이 특히 재미있다. 저자는 마음 자체가 하나의 음악 아니냐고 주장한다. 악기가 노래를 만들어내듯이 뇌라는 기계가 작동한 결과가 마음이라는 것.
도입부와 몇몇 장면 묘사가 매우 근사하지만, 명성에 비해서는 살짝 실망스럽다. 끝까지 이름이 나오지 않는 화자가 아주 답답한 성격인데, 그게 레베카를 부각시키기 위한 장치일까. 뮤지컬에서는 주인공 성격이 좀 다르다고 한다.
흐뭇하거나 익살스럽거나 우아하거나 따뜻하거나 슬픈, 원대하거나 낭만적이거나 기묘하거나 사라졌거나 때로는 존재한 적조차 없었던 도서관들의 마법 같은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