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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맥주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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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미래의 풍경 #3 인공자궁


STS SF 초단편 3회는 인공자궁을 소재로 썼습니다. 전문 링크는 제일 아래 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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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이 인간의 삶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STS(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과학기술과 사회 연구) SF’라는 이름으로 소설을 써온 장강명 작가가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리가 보게 될지도 모를 기묘한 풍경을 픽션으로 전달합니다.


<근미래의 풍경 3회 #인공자궁>


“대한민국에서 제일 핫한 뮤지션이랑 제일 핫한 배우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 거 같았는데, 아니네요. 지지고 볶는 건 모든 부부가 똑같네요.”


사회자가 말했다. 뮤지션과 배우는 웃으며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내 맘대로 행동하지는 않는다, 사랑에 빠지면 나도 내 맘대로 행동하지 않더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두 분, 축하드릴 소식이 있다면서요?”


사회자가 다음 화제를 꺼냈다. 카메라 옆에서 조연출이 손가락으로 OK 사인을 보냈다.


“예, 그간 발표를 미뤄왔는데요, 저희가 다음 달에 세 아이의 엄마 아빠가 됩니다.”


뮤지션이 아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세 아이라고요? 이야, 축하드립니다. 아니, 그런데 다음 달 출산인데 예비 엄마가 어떻게 이렇게 날씬해요?”


이유를 알면서도 사회자가 물었다. 배우가 대답했다.


“제가 ‘사랑과 안전’을 이용하고 있어요.”


“사랑과 안전? 아, 인공자궁 말씀이시죠?”


사회자가 놀란 표정을 연기했다.


“네, 그렇게 부르는 분들도 계시죠. 혐오 표현을 쓰는 분도 있고. 이해는 해요. 뭔가 부자연스럽다고 보시는 거죠. 그런데 시험관 아기도 처음엔 엄청난 논란거리였답니다.”


“많은 예비 부모를 돕는 고마운 기술인데, 이름을 제대로 불러야죠. 사랑과 안전으로 부르겠습니다.”


사회자가 준비한 멘트를 말했다.


“제 누님이 자연 출산으로 첫째를 낳고, 사랑과 안전으로 둘째를 낳으셨거든요. 누님이 저희를 설득하셨어요. 이거 너무 좋다, 배우는 체중 조절도 해야 하는데 왜 엄마나 아이나 쓸데없이 부담을 감수하느냐면서요.”


뮤지션도 준비한 멘트를 말했다.


“처음엔 저도 썩 내키진 않았는데 산부인과 상담을 받고 생각이 바뀌었어요. 사랑과 안전이 엄마는 물론이고 아이 건강에도 더 좋아요. 사실 당연한 건데, 예비 엄마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외부 자극이나 충격을 다 차단할 수는 없잖아요. 길에서 간접흡연을 할 수도 있고, 타고 있던 차가 급정거를 할 수도 있고요. 제 입에 들어가는 것 중에도 독이 많겠죠. 그러니까 입덧을 하는 거잖아요. 반면에 사랑과 안전에서는 아기들이 청정한 환경에서 24시간 모니터링을 받아요.”


배우는 자신이 이용하는 ‘클리닉’을 ‘산부인과’로 바꿔 말했다.


“저는 처음부터 대찬성이었습니다. 출산이 원래 되게 위험한 행위예요. 100년 전만 해도 아이를 낳다가 숨지는 여성이 드물지 않았죠. 지금도 있습니다.”


대본에는 최신 통계도 적혀 있었지만 뮤지션은 그냥 ‘지금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 세 쌍둥이를 가지신 건가요?”


“아뇨. 임신을 세 번 했고, 그때마다 수정란을 사랑과 안전으로 옮겼어요. 수정란 두 개를 냉동 보관하다가 세 번째 수정란이랑 시기를 맞춰서 해동했죠. 그러니까 세 아이가 수태 시기는 다르고 출산 예정일은 같아요.”


배우가 말했다.


“아내랑 대화를 오래 했어요. 아이는 몇 명이 좋을까, 몇 살 터울이 좋을까. 저희가 딸 둘, 아들 하나를 얻을 예정인데, 얘들이 서로 오빠, 동생 하지 않고 친구처럼 함께 자라면 좋겠어요. 육아 선배들도 그러데요. 한 번에 끝내라고. 사랑과 안전 덕분에 이런 계획도 세울 수 있게 됐어요.”


“태교 걱정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게 과학적인 근거는 별로 없다고 하더라고요. 또 제가 원할 때면 언제든 아기들에게 음성 편지를 보낼 수 있어요.”


“평소엔 아내 심장 박동 소리가 아이들에게 실시간으로 전해져요. 그걸 제 심장 소리로 바꿀 수도 있고, 애기들 심장 소리를 저희가 들을 수도 있죠. 애들에게 들려주는 음악은 저희가 함께 골라요.”


뮤지션이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앱을 켰다. 화면에 세 태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시청자 여러분, 두 분이 아이들에게 보내는 음성 편지를 들어보시겠습니다.”

사회자가 말했다. 뮤지션과 배우가 품에서 편지를 꺼내더니 손을 잡고 한 문장씩 번갈아 읽었다. 심장 박동 소리가 배경음으로 작게 흘렀다.


“사랑하는 우리 산이, 별이, 바람이. 잘 크고 있지? 다음 달이면 드디어 얼굴을 보겠구나. 엄마 아빠는 너희 만날 생각에 떨리고 설레서 잠도 제대로 못 잔단다. 엄마는 너희들이 쓸 아기 용품들 고르느라 하루에도 몇 시간씩…….”


같은 시각 방송국 앞에서는 ‘인공자궁에 반대하는 종교인 모임’이 시위를 열고 있었다. 한 사람이 들고 있는 피켓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수정란 하나가 인공자궁에서 임신 30주 차까지 건강하게 자랄 확률은 20%대에 불과합니다. 인공자궁 기업은 제공받은 수정란을 초기에 12개로 복제해 배양하면서 문제가 발생한 태아를 살해하는 방법으로 최종 성공률을 높입니다.’


다른 피켓에는 이런 문구들이 적혀 있었다.


‘지난해 인공자궁에서 숨진 태아 4700명!’


‘인공자궁=살인 도구, 사랑과 안전=살인 공장.’


‘인공자궁이 저출생 대책이라는 정부와 방송사는 반성하라!’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4/09/03/LNYJTG2ZHRGPHAHHAT4PASG6AM/

최근 1년 동안 눈부신 활약을 보인 이 차세대 작가님들의 공통점은

지난해 여름부터 올해 여름까지 1년 동안 이 소설가 분들의 활약이 눈부셨습니다. 주목해야 할 차세대 SF 작가님들입니다.


강흰 작가님: 대산창작기금 공모 선정

서윤빈 작가님: 장편 『영원한 저녁의 연인들』 출간, 『SF 보다―Vol. 3 빛』에 단편 수록

오동궁 작가님: 대한민국 과학소재 단편소설 공모전 대상 수상

이연지 작가님: 《릿터》, 『소설 보다 봄 2024』에 단편 수록, 단행본 출간 예정(민음사)

임지호 작가님: 경희대 문예공모전에서 소설 부문 최우수상 수상

조서월 작가님: 알라딘-네오픽션 연재, 단행본 출간 예정(자음과모음)


주목 받는 차세대 작가라는 점 외에도 이 분들께는 공통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지난해 서울대 라이터스쿨 1기를 다니며 저와 함께 STS SF 워크숍에 참여했던 작가님들이라는 사실!

지난해 제가 한 일 중 제일 잘한 일이 서울대 라이터스쿨 리더 작가를 맡았던 겁니다. 재능과 열정 있는 작가님들과 시간 보내면서 즐거웠고, 저도 많이 배웠습니다.


축하할 일 있는 분들 모셔서 1년 만에 만나 맥주 마시며 이야기 나눴어요. 즐거웠습니다. 모두 건필하세요.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


#강흰작가님 #서윤빈작가님 #오동궁작가님 #이연지작가님 #임지호작가님 #조서월작가님 #서울대라이터스쿨 #STSSF #건필하세요 #응원합니다 #사실한분이막판에안오셨지만며칠뒤에만날예정 #꽤힙한곳에서마셨는데사진을제가찍어서구림

알고 보니 제가 교과서에 열 번 이상 글이 실린 저자였는데...

알고 보니 제가 교과서에 열 번 이상 글이 실린 저자였네요. 정말 큰 영광입니다. 제 글을 읽고 공부하는 학생들을 상상하면 뿌듯하기도 하고 아찔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기 글이 교과서에 실렸다는 걸 저자가 이렇게 늦게 아는 상황이 이상하기는 합니다. 저자가 신청하지 않으면 저작권료를 지불하지 않는 관례는 부조리하고요.


교과서를 발간하는 출판사나 한국문학예술저작권협회에서 저자나 저자의 글을 처음 실었던 출판사에 연락을 해주시는 게 맞지 않을까요? 다른 작가님들도 한국문학예술저작권협회 사이트에 가셔서 자기 작품이 교과서에 실리지 않았는지 한번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 다 나오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만.


#교과서 #한국문학예술저작권협회 #창비 #지학사 #대구광역시교육청 #해냄에듀 #이문영작가님감사합니다 #박종대님감사합니다



고등학교 ‘공통국어 2’ 교과서에도 제 글이 실렸습니다.


뒤늦게 알았는데, 제 에세이 『책, 이게 뭐라고』의 한 꼭지도 교과서에 실렸네요. 이번에는 무려 국어 교과서입니다. ‘책이 중심이 되는 사회’에 대한 산문이 해냄에듀에서 나온 『2022개정 고등학교 공통국어 2』에 실렸습니다. 제 글 뒤에 독서 동아리 활동이나 온라인 독서 토론 플랫폼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져서 더더욱 감동입니다.


단편 「알바생 자르기」와 「모두, 친절하다」도 둘 다 교과서에 실렸던 거 같습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교과서에 글이 여러 편 실린 작가가 되었습니다. 정말 영광입니다. 선생님들께 감사드려요. ^^

 

#책이게뭐라고 #책이중심이되는세상 #고등학교공통국어2 #해냄에듀 #교과서에글실림 #선생님들감사합니다

 

고등학교 ‘독서와 작문’ 교과서에 제 글이 실렸습니다.

내년부터 시행되는 고등학교 새 교육과정 ‘독서와 작문’ 교과서에 제 글이 실렸습니다. 『책 한번 써봅시다』에서 퇴고를 다룬 부분이에요.

제 글이 교과서에 실리는 건 두 번째인데(「알바생 자르기」였는지 「모두, 친절하다」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학생들이 제 글을 읽고 공부할 걸 생각하니 아찔하게 좋습니다(그냥 아찔하기도 하고요). 여러 학교에서 채택되기를!

 

#책한번써봅시다 #퇴고 #교과서 #해냄에듀 #한창호선생님감사합니다

 


1066. 미래를 먼저 경험했습니다 (김영화)

난민보다 난민을 거부했던 한국인들 이야기가 흥미로웠고 시사하는 바가 컸다. 그런 이를 섭외해서 취재한 게 기자 저자의 장점. 교육청과 교육감의 역할이 무엇인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알게 됐다. 중앙정부가 TF팀을 만들어서 울산시와 아프간 난민들을 도와줬어야 하지 않았나, 시스템이 해야 할 일을 개인에게 떠맡긴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조금 든다. 불법은 아닌 이슬람 관습이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통념과 충돌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미래를 먼저 경험했습니다 - 아프간 난민과 함께한 울산의 1년
미래를 먼저 경험했습니다 - 아프간 난민과 함께한 울산의 1년
1065. 세상이라는 나의 고향 (아마르티아 센)

나도 세상 전체를 고향으로 여기고 싶고, 센처럼 따뜻한 마음씨와 반듯한 품성을 지닌 사람이 되고 싶다. 그의 지성은 따라잡기 어려울 것 같고. 인도라는 나라에 대해서도 새삼 생각해보게 됐다. 현대 인도에 딱히 엄청난 호감을 품고 있지는 않은데, 그럼에도 이 나라의 사상적, 문화적 유산과 전통은 엄청나구나 하고 실감했다. 13장은 여태까지 내가 읽은 노동가치설을 옹호하는 글 중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고, 덕분에 노동가치설에 대해 품고 있던 복잡한 감정도 조금 수그러들었다. 가격 이론으로서는 쓸 만하지 않고, 도덕 규범적 이론으로서는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는 것.

세상이라는 나의 고향
세상이라는 나의 고향
‘월급사실주의 2025’ 내년 5월에 나옵니다. ^^

‘월급사실주의 2025’도 내년 5월에 나옵니다. 이번에도 새로 일곱 분의 작가님을 모실 예정입니다.

월급사실주의 소설가들을 응원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월급사실주의 #월급사실주의2025 #우리시대노동소설 #감사합니다

 


인성에 비해 잘 풀린 사람 - 월급사실주의 2024
인성에 비해 잘 풀린 사람 - 월급사실주의 2024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했습니다.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 바둑계가 알파고 충격 이후 어떻게 변했는지를 취재했고, 논픽션으로 쓰고 있어요. 이제 원고 작업은 거의 마무리 단계이고, 동아시아 출판사에서 출간 예정입니다. 책 홍보에 도움이 될 거 같아서 ‘AI 시대의 소설가’ 같은 주제로 인터뷰 요청이 오면 열심히 응하고 있네요. 교통사고의 시대에 대해서 자동차공학자만 발언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요. 미디어오늘과도 인터뷰했습니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6/0000125567?sid=102


장례식장, 미디어비평, 그리고 홍기빈 씨

 

(아주 길고 재미없는 글입니다. 약속을 지키려 올립니다.)

 

0.

같은 회사에 다녔던 기자 동기 한 명이 세상을 떠났고, 나는 장례식장에서 구두를 잃어버렸다. 누가 내 구두를 신고 간 것 같다. 한참 망설이다 내 구두와 가장 비슷해 보이는, 하지만 아주 낡은 구두를 신고 장례식장을 나섰다. 추적추적 비가 오는 날이었는데 결국 길거리에서 구두 밑창이 터졌다.

빈소에서, 또 병원 근처에서 기자 선후배들을 많이 만났다. 누군가 내게 3년 전 홍기빈 씨의 글을 제대로 반박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 글을 처음 알려준 것도 기자 후배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어떤 하나의 글이 아니라 그런 글들을 쓴 몇몇 사람에 대해 제대로 반박해 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내가 그 중에서 홍기빈 씨를 골랐다. 홍기빈 씨를 택한 이유는 뒤에서 설명하겠다. 기실 다 똑같은 유형의 인물들이라 누구라도 상관없다. 홍기빈 씨는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라는 농담 같은 이름의 연구소 소장으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어떻게 될 건지 토론하다가, 인구 감소라든가 영어 문해력 강화 방법에 대해 강연하고, 라디오에 출연해 금리와 물가도 걱정하는 분이다.

나는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 홍기빈 씨가 글로벌, 정치, 경제 분야에 얼마나 전문성과 통찰력이 있는지 모른다. 그가 언론에 대해 한 이야기만 따져보려 한다. 그가 나를 장강명 씨라고 부르니, 나도 그를 홍기빈 씨라고 부르겠다.

 

1-1.

인터넷에서 저격도 많이 당했고(홍기빈 씨한테 저격당한 것도 한 번은 아니었다), 조리돌림도 몇 차례 겪었다. 일일이 대꾸하지는 않았다. 수준미달인 글에 신경 쓰는 게 시간낭비라고 생각해서. 그리고 언론 문제에 관한 한, 내가 읽은 홍기빈 씨의 SNS 글들은 전부 수준미달이었다. 특이한 점조차 없다. 내가 볼 때 홍기빈 씨는 흔한 유형의 인물이고, 그가 쓰는 글도 흔한 유형이다. 그런 면에서 대표성은 있다.

자신이 똑똑하다 여기고, 뭔가를 지적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유형. 그런 유형에게 언론 기사는 만만한 공격 대상이다. 흘끗 보고 자기 생각에 비판할 거리가 있다 싶으면 비꼬고 조롱한다. 그는 언론에 무지하기 때문에 자신의 비판이 얼토당토않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반박하는 글이 안 올라오면 이번에도 정곡을 찔렀다고 뿌듯해 하며 우쭐해한다.

절대다수의 기자들은 그런 인물, 그런 글에 반응하지 않는다. 첫째로 바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 너무 많아서 하나하나 응대할 수도 없다. 둘째로 대응해봤자 길고 무익한 감정싸움만 벌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인물들은 절대로 자신이 언론에 무지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말문 막히면 “그러면 너희는 왜 일제시대 때 그런 기사 썼냐, 왜 전두환 때 그렇게 행동했냐” 하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꺼낸다.

 

1-2.

그리고 기자가 아닌 사람들은 잘 모르는 세 번째 이유가 있다. 부끄럽기 때문이다.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한국 언론사들 문제 많고 현재진행형인 치부도 있다. 그런데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더 근본적인 문제다. 자신들이 쓰는 기사의 부족함을 기자들 자신들이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논픽션 『당선, 합격, 계급』과 『팔과 다리의 가격』을 펴냈을 때 기자들이 물었다. 논픽션 작가의 취재와 기자의 취재는 어떤 점이 다르던가요? 나는 “논픽션 작가로 취재하는 게 훨씬 더 즐겁고 편했다”고 대답했다. 이유는 “궁금한 게 풀릴 때까지 취재할 수 있어서.” 『당선, 합격, 계급』을 쓰기 위해 나 혼자서 70여 명을 인터뷰하고 1332명에게 설문조사 답변을 받았다. 그랬더니 더 궁금한 게 없어졌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글을 쓸 수 있었다.

나를 인터뷰하던 기자들에게 물었다. “기자님은 완벽하게 취재하고 기사 쓰신 적이 있으세요? 전 11년 동안 기자 생활을 하면서 단 한 번도 그래 본 적이 없어요. 취재 다 하고 기사 쓰면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아십니까.” 내 질문을 들은 기자들은 멋쩍게 웃거나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이 무슨 뜻이냐고 되묻는 기자는 아무도 없었다.

수습기자 시절 받은 기자 매뉴얼 북에는 “궁금한 게 사라질 때까지 취재하고 그 다음에 기사를 쓰라”고 적혀 있었다. 그런데 내가 아는 한 나를 포함해서 그렇게 기사를 쓰는 기자는 아무도 없다. 저 매뉴얼 북을 쓴 기자도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좋다는 게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부끄럽다. 괴롭다. 매일 마감시간이 되면 편집국에서는 아비규환이 벌어진다. 데스크들이 전화통을 붙잡고 “야, 인마, 그냥 보내! 지금까지 쓴 거 더 고치지 말고 그냥 보내라고!” 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욕을 처먹던 취재 기자는 ‘아, 이거 이렇게 내보내면 안 되는데’ 하고 버티고 버티다가 눈을 질끈 감고 기사 송고 버튼을 누른다.

데스크도 바보가 아니다. 기사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는 걸 안다. 더 취재해야 한다는 걸 안다. 그러나 언론사에서 마감시간을 이기는 존재는 아무 것도 없다. 그들도 눈을 질끈 감고 기사 송고 버튼을 누른다. 그렇게 전쟁 같은 시간을 보내고 난 뒤 대장을 보면서 “인쇄해 놓고 나면 기사처럼 보인다니까” 따위 말을 하고, 그런 말을 한 자신이 환멸스러워져 술을 마시러 나간다.

같은 시간에 취재기자도 술을 마시고 있다. 마감시간이 지나고 나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으니까. 그런데 환멸과 자기혐오는 남으니까. (나는 딱 한번 윤전기를 세우고 돌판을 해서 기사를 고친 적이 있다. 그리고 엄청나게 혼났다.)

 

1-3.

그런데 애초에 그 매뉴얼을 지키는 게 가능한가?

어떤 정보가 신속하면서 동시에 정확할 수 있는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기사를 비판하기란 아주 쉽다. 신속하지만 부정확한 기사에 대해서는 “무책임한 보도로 혼란을 가중시켰다”고 지적하면 된다. 정확하지만 느린 기사에 대해서는 “이제 인터넷 깔았냐?”고 조롱하면 된다. 신속하면서도 정확한 기적 같은 기사가 있다면 “심층적인 분석이 없다”고 공격하면 된다.

살면서 신속하고 정확하고 깊이 있는 분석까지 담아낸 언론 보도를 볼 일은 없을 테지만, 그런 외계문명의 오버 테크놀로지 같은 기사를 맞닥뜨려도 당황하지 말자.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며 따끔하게 혼내주자. 인간이 완벽한 대안을 낼 수 있는 사안이라면 애초에 기사거리가 되지도 않았을 거라는 사실은 무시하자. 혹시 어느 초인 기자가 하느님으로부터 대안을 들어 왔다면? 그때는 ‘따옴표 저널리즘’이라고 비판하면 된다.

얼마나 쉬운가. 초등학생도 할 수 있는 이런 일을 많은 사람들이 진지하게 미디어비평이라고 믿는다. 초등학생도 할 수 있는 이런 일을 하고서 자기가 진지하게 미디어비평을 했다고 믿는 사람도 많다.

 

1-4.

당위와 현장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그리고 그 당위는 이해하기 쉬우며 실행하기는 불가능하기에, 당위에 기대 현장을 비판하는 일이 너무 쉽다. 그런 만큼 그 비판 내용은 공허하다. 자주 듣는 결론은 ‘구조를 바꿔야 한다’다. 뭘 어디서 어떻게 바꾸자는 말은 없어서 아무 효과도 내지 못하는, 하나마나한 소리다. 현장 기자들이 미디어비평을 우습게 여기는 이유는 그래서다.

당위로 현실을 비판하면 되니까 어떤 언론이든 흠잡기 쉽고 그러다 보니 공정한 척 하며 편들기도 쉽다. 나는 한국의 미디어비평들이 대체로 편파적이라고 생각한다. 조국 일가 수사 때 피의사실공표 문제를 거론하며 언론을 비판한 이들 중 최순실 일가 수사 때에도 같은 문제를 지적한 사람이 몇이나 되나.

초등학생과 미디어비평가들이 모르는 일이 한 가지 더 있다. 글자가 아닌 것을 글자로 만드는 행위가 얼마나 무거운가 하는 것. 어지간한 사람은 그 무게에 짓눌려 천천히 신경이 망가진다. 책으로 세상을 배운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른다. 그들은 세상이 책처럼 정돈되어 있는 줄 안다.

자신들이 읽은 것이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거리낌이 없다. 텍스트로 재구성된 현실을(이번에 정부가 어쩐다는 기사를 봤는데…) 텍스트로 구성된 이론을 근거로 해서(테어도르 아도르노에 따르면…) 비판하는 텍스트를 쓴다(참담하기 그지없다…) 난 솔직히 이게 지적으로 그리 어려운 작업 같지 않다. 침대에 누워 뒹굴면서도 할 수 있는 논증 아닌가? 기자들이 현장에서 맞닥뜨리는 문제는 그런 차원이 아니다.

 

1-5.

세상에 흰색이 존재하는가? 구(球)라는 형체가 있는가? 없다. 다 확대해서 보면 조금씩 얼룩이 져 있고 어딘가 찌그러져 있다. 언어로 현실의 대상을 정확히 포착할 길은 없다. 그래서 흰색이 아닌 것도 대강 흰색 같으면 흰색이라고, 구가 아닌 것도 대충 구 같으면 구라고 적는다. 글자가 아닌 것을 글자로 적는 사람들은 다 그렇게 현실을 왜곡한다. 어떤 선의를 품었더라도, 어떤 노력을 기울이더라도, 글자가 없는 곳에서 처음으로 글자를 적는 사람들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나는 그것이 두렵고 괴로웠다. 내가 ‘야마’를 잡으면 사람들이 그걸 믿는구나. 그런데 ‘야마’를 잡기 위해서는 소음들을 많이 걷어내야 하는데… 내 주제에 그래도 되는 걸까. 그 소음 안에 현실의 중요한 성분이 있으면 어떻게 하지. 그 와중에 데스크는 “야, 인마! 빨리 기사 넘겨” 하고 소리치고 있고… 나뿐 아니라 많은 현장 기자들이 이 문제로 고민한다.

1, 2년차 때에는 내가 쓴 기사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염려되어 강판 즈음에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선배들이 “네 기사가 세상을 바꿀 거라는 망상을 버려”라든가 “이런 기사를 누가 읽겠냐”라고 놀리며 술을 사주었다. 실은 그들은 나보다 먼저 신경이 망가졌을 뿐이었다.

 

2-1.

한국 대학의 언론 관련 학과 교수들 중에 취재 현장을 체험해 본 사람은 얼마나 될까? (언론사 입사 준비생들을 위한 프로그램인 몇몇 대학의 저널리즘스쿨 교수를 제외하면) 놀랍도록 적다. 대다수는 언론을 글자로 배운 사람들이다. 분야를 콕 집어서, 법조나 정당(국회) 취재 경험이 있는 언론학과 전임교수는 몇이나 될까? 거의 없는 것 같다.

법조와 정당 출입 경험을 따지는 이유가 있다. 미디어비평의 소재가 되는 기사들 상당수가 법조 혹은 정당 기사이기 때문이다. 기자들에게는 가장 험한 출입처이며, 기자 출신이라 해도 두 출입처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그 현장을 잘 모른다. (법조와 정당 출입 경험이 있는 기자 자체가 그리 많지 않다. 2002년 동아일보에 나와 함께 입사한 기자 동기 10여 명 중에 저 두 출입처에서 일해 본 사람은 나뿐이다. 나는 그 두 출입처에서 다 일했다.)

애초에 취재 부서마다 취재 문법이 어마어마하게 다르다. 평생 사회부에서만 일한 고참 기자가 문화부장이 되어서 “방탄소년단 인터뷰 따 와” 하고 후배를 쪼았다는 식의 우스개들이 회사마다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기자들은 자신이 경험해보지 않은 출입처 기사에 대한 언급을 조심스러워한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은 알고 있으니까.

그조차 모르는 언론학자나 시민단체 운동가들이 우악스럽게 법조와 정당 기사를 비판할 때, 나는 외과의사의 수술을 비판하는 생물학자의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자기 분야에서 아무리 뛰어난 생물학자라도 수술실의 노하우나 디테일을 꿰뚫지는 못한다. 언론학자의 연구실과 취재 현장 사이의 거리도 그 정도는 된다.

 

2-2.

언론 수용자들이 제대로 언론을 수용하기 위해 미디어비평이 필요하다면, 마찬가지로 미디어비평 수용자들을 위해 ‘미디어비평에 대한 비평’도 필요하다. 언론에게 사회를 제대로 비판해야 할 의무가 있다면 미디어비평에게도 언론을 제대로 비판해야 할 의무가 있다. 미디어비평 역시 언론이므로 그들이 들이대는 잣대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한국 미디어비평 수준은 어떨까? 한국 언론 수준보다 높을까? 어떤 사람들이 미디어에 나와서 미디어비평을 하고 있는지부터 살펴볼까?

최근에 영상매체에 출연해 미디어비평가로 유명해진 인물들이 학계나 언론계에서 얼마나 실력을 인정받는 사람들인지 한번 검색해보시기를. 스스로를 언론학자, 교수로 소개하는 이는 박사 학위가 없고, 전임교원이 아닌 겸임교수다. 저널리즘 권위자인 것처럼 말하는 다른 이는 아예 학문적 배경이 없는 영화평론가다. 두 분 다 현장 경험은 전무하다.

친분 있는 기자들로부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기야 할 테고, 옴부즈만 활동이나 심사 등으로 편집국 혹은 보도국에 들어가 본 적이야 있겠지. 그래봤자 자기 이름을 걸고 책임지는 기사를 취재해서 쓴 적이 없다면, 다 견학에 불과하다. 그런 이들이 신속하지도 정확하지도 않고 깊이도 대안도 없는 미디어비평을 한다. 쉽게. 쉬우니까.

내가 보기에 자신이 전문가인 양 언론 비판을 하는 이들 중 몇몇은 자기 이름을 알리는데, 혹은 공천을 받는데, 혹은 ‘좋아요’ 개수에 관심이 있고, 사람들의 미디어 문해력을 높이기보다는 그저 언론 혐오를 부추기는 것 같다. 자극적인 단어를 많이 쓰는 인물일수록 더 그렇다. 홍기빈 씨는 그 중에서도 수준이 낮은 축인데, 뒤에서 몇 가지 사례를 들어 보겠다.

 

2-3.

기자 출신만 미디어비평을 할 수 있는 건 당연히 아니다. 그러나 현장을 모른 채 미디어비평을 하는 분들은 (학자건 아니건) 자신들이 현장을 잘 모른다는 사실 정도는 자각했으면 좋겠다. 자신들의 비평이 당위를 반복하고, 한국 언론이 그 당위와 얼마나 다른지 논증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더욱. 취재 현장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편집국 혹은 보도국이 얼마나 난장판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서는 그런 분들보다 신문사 사환이 더 잘 안다. 그 사실만 염두에 둬도 비평의 내용과 톤이 바뀔 것이다.

 

3-1.

대형 참사가 발생하면 편집국 전체가 비상이 걸린다. 사건팀 기자들은 최소한 보름 정도 잠을 제대로 못잘 각오를 한다. 사안에 따라 특별취재팀을 꾸릴 때도 있다. 사건 발생 직후 신문사 편집국에서 마련할 지면 계획 초안은 대강 이럴 것 같다.

 

▽1면 ST(스트레이트 기사)=어디서 어떤 사건이 언제 발생했다

▽3면 메인 박스(상보)=사고 상황+사고 원인

▽3면 보조 박스=정부 대책 어떻게+국회 계류 중인 법안 있으면 함께

▽4면 메인 박스(분석)=비슷한 과거 사고들+왜 반복되나+해외 사례+전문가 분석

▽4면 보조 박스=피해자 보상 어떻게

▽사회면 메인 박스=사고 현장 르포+유족 분위기

▽사회면 보조 박스=정치권 반응+각계 반응+SNS 반응

 

물론 이것은 유동적인 계획안이다. 취재를 하다 의미 있는 팩트를 발견하면 얼마든지 지면계획이 바뀔 수 있다. 취재를 하다 보면 뭐가 나올지 모른다. 정부 대책을 취재하다가 실은 누가 이런 사고를 주의하라고 한 달 전에 경고했는데 다른 누가 무시했음을 알게 될 수도 있다. 유족들을 취재하다가 그들 대부분이 한국 국적을 취득한지 얼마 안 되는 난민 출신임을 알게 될 수도 있다. 그러면 지면 방향이 전체적으로 바뀐다. 저 지면계획 초안에도 ‘모든 취재 기자들은 출입처에서 이 사고와 관련된 일이 없는지 알아보고 추가 발제할 것’이라는 지시사항이 붙을 것이다.

이렇게 지면 계획을 짜는 이유는 그게 바로 취재 계획이기 때문이다. 분업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건팀에 있는 이영희는 사고 현장을 르포하고, 행정안전부를 출입하는 김철수가 안전 담당 전문가들에게 전화를 돌리고, 국회를 맡은 박혜정이 국회 계류 중인 법안과 정치권 반응을 살피게 해야 한다. 이영희와 김철수와 박혜정은 취재를 하는 대로 집배신 시스템에 취재 내용을 올리고, 기사도 최대한 빨리 써야 한다. 그래야 어느 기자가 현재 손이 비었는지, 어느 기자가 도움이 필요한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방식은 2010년대에 중대한 도전을 맞이한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그 문제를 풀지 못했다.

 

3-2.

저 지면 계획이자 취재 계획은 다음날 아침 독자가 종이 신문으로 뉴스들을 접한다는 전제로 만들어진 거다. 독자들이 1면을 보고 사건 개요를 파악한 뒤 3면에서 자세한 내용을 접하고, 4면에서 사건을 보다 큰 맥락에서 바라보고, 사회면에서 사건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게 하자는 의도였다.

네이버가 뉴스 서비스를 시작한 게 2000년, 오마이뉴스가 창간한 것도 같은 해인 2000년이다. 종이 신문은 10년쯤 버틴 것 같다. 2010년대에 이르러 뉴스 시장의 주도권은 완전히 포털로 넘어갔다. 2011년에는 아이폰이 한국에 상륙했고, 몇 년 뒤 뉴스 시장은 ‘신문사에서 작성해서 포털이 공급하는 뉴스를 모바일로 보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소비자들의 뉴스 소비 패턴뿐 아니다. 신문사의 수입도, 영향력도, 모두 종이 지면이 아니라 포털에서, 그리고 모바일에서 발생하게 되었다.

하지만 신문사에서는 여전히 옛날 방식으로 취재 계획을 세웠다. 대형 사고가 발생하면 저런 지면 계획을 짠다.

사건의 원인을 파악하거나 혼란스러운 사고 현장의 모습을 취재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피해자 보상을 취재하는 기자가 더 빠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4면 보조 박스기사 ‘피해자 보상은 어떻게’를 맡은 최수영 기자(앞의 이영희, 김철수, 박혜정처럼 가상의 인물이다)가 먼저 취재를 해서 기사를 써서 올린다. 사망자들에게 보험금이 1억 원씩 지급될 예정이라고.

그런데 최수영 기자가 그렇게 먼저 올린 기사를 인터넷뉴스 자회사에서 포털에 판매한다. 어차피 다른 언론사가 작성한 비슷한 내용의 기사가 포털에 올라올 예정이므로, 먼저 등록된 기사가 조회수가 높을 가능성이 높다. 조회수는 곧 돈이다. 기사를 빨리 포털로 넘겨야 할 충분한 동기가 된다.

그 시점에서 포털 이용자들에게는 최수영 기자의 기사가 그나마 사고와 관련해 뭔가를 분석한 기사이므로, 눈길을 끈다. 한번 눈길을 끈 기사는 포털의 알고리즘 덕분에 더 많은 주목을 받는다. 기사를 본 사람들은 다들 경악한다. ‘이 언론사는 사고 관련 기껏 분석했다는 게 유가족이 돈을 얼마 받게 되느냐는 거야? 이 시점에서 돈 생각밖에 안 하냐, 너희는?’

이 경우 최수영 기자의 기사 제목이 자극적이라면 사람들은 더 분노한다. 최 기자를 ‘기레기’로 규정하고 마음껏 난도질한다. 최수영 기자의 기사 제목을 최수영 기자가 붙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편집기자라는 존재가 따로 있음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심지어 그 편집기자도 종이 신문의 제목만 맡을 뿐, 인터넷 기사의 제목은 담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더 없다.

급기야 홍기빈 씨 같은 이는 언론을 향해 ‘인간으로서 모욕감과 분노를 느낀다’며 ‘희생자들에게는 물론 국민에게도 사과하라’는 준엄한 명령을 내리게 된다.

 

3-3.

사고에 대한 정보를 더 알고 싶어 포털 사이트에 접속한 사람들이 보험금 얘기를 먼저 보게 되는 뉴스 경험은 분명 기괴하고 불쾌하다. 그러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고 싶다면 원인을 제대로 분석해야 한다. 상대를 무조건 악마화하고, 그 상대가 무릎 꿇고 빌면 해결된다는 식의 사고방식―다시 말해 지적 게으름―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세상에 거의 없다. 이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보기에는 2010년대 이후 이런 일들이 계속 발생한 이유는 언론사가 기사를 생산하는 방식과 사람들이 기사를 소비하는 방식 사이에 괴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신문사는 자신들의 지면 계획을, 방송사는 리포트 순서를 짜지만 사람들은 그런 기사들 간의 맥락을 보지 못하게 됐다. 포털 사이트건 언론사의 자체 사이트건, 기사들이 온라인에 올라가는 순간 뿔뿔이 흩어져 파편화됐다. 바꿔 말하자면 언론사가 온라인 시대에 맞게 취재 방식을 업데이트하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뉴스 경험을 책임질 주체가 여전히 언론사인지도 따져봐야 한다. 한 신문사나 방송사가 아무리 애를 써도 언론 수용자들이 과거처럼 하루에 정해진 시간대에 신문을 펼치거나 TV를 틀고 언론사가 정한 순서대로 그날의 뉴스를 보는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뉴스 소비자들은 포털 사이트와 인터넷 게시판, 소셜미디어에 뿔뿔이 흩어진 뉴스를 단편적으로, 그러나 쉬지 않고 접할 것이다.

적어도 포털 사이트에 한정해서 말한다면, 뉴스 소매업체가 된 포털이 뉴스 편집 책임을 져야 하지 않을까? 하다못해 사이트 첫 페이지에 기사를 노출시키는 알고리즘이라도 다시 짜야 하지 않을까? 현재 포털은 편집권에서 최대한 멀어지려 한다. 그 권한을 갖는 순간 엄청난 책임을 짊어져야 하니까. 그런데 어느 식당에서 메인 요리로 단무지를 내놓는다면 그걸 바로 잡을 의무는 단무지 공급업자에게 있을까, 식당에 있을까?

잠시만 생각해도 이것이 신기술로 인해 비롯된 굉장히 복잡한 문제이며, 문제를 해결할 주체조차 모호함을 깨닫게 된다. 가상의 인물인 최수영 기자가 다니는 언론사를 무작정 옹호할 생각은 없다. 취재 현장을 모르면 기사를 비판하지 말라는 이야기도 아니다. 다만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분야의 논의에 대해서는 단죄를 부르짖는 형태가 아닌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문제제기를 해줬으면 좋겠다. 여러 주제로 칼럼을 쓰면서 나는 그런 태도만큼은 지키려 애썼다. 사실 내가 존중하는 지식인들은 대부분 그렇게 한다.

세상에는 자기가 잘 알지 못하는 주제에 대해 말할 때 조심스러워하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용감해지는 사람이 있다. 홍기빈 씨는 후자다. 기실 그는 모든 주제에 대해 용감하게 발언한다. 글로벌, 정치, 경제 분야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그렇게 용감하게 말할까 궁금하기는 하다. 한 사람이 그 세 분야에 다 정통하기는 물리적으로 쉽지 않을 텐데. 언젠가 페이스북에 디테일은 중요하지 않다는 글까지 썼더라. 그렇다면 글로벌, 정치, 경제 분야에서도 이 분 말씀은 좀 걸러듣는 게 좋지 않을까? 아무리 용감하게 말하더라도 말이다.

 

3-4.

대형 참사가 발생했을 때 유가족 취재를 해야 할까? 내 대답은 강한 ‘예’이다. 당연히 해야 한다.

유가족은 참사의 원인에 대해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 수 있으며, 관계기관들이 얼마나 대책을 성실하게 수립하고 실행하는지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무엇보다 그들이 세상에 대해 주장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을 수 있다. 언론이 그걸 듣고, 전해야 한다. 기실 나는 유가족 취재는 언론의 권리가 아니라 의무라고 믿는다.

기자도 사람이다. 유가족 취재만큼 힘든 일이 없다. 사고 희생자의 장례식장 앞에서 차마 들어갈 수가 없어서 다른 기자들과 제자리에서 몸을 뱅뱅 돌던 적이 나도 여러 번이었다. 의무라고 생각하고 취재했다. 물어야 하는 질문이 있었다. 한겨레신문 송경화 기자의 장편소설 『고도일보 송가을인데요』와 시사인 김영화 기자의 논픽션 『미래를 먼저 경험했습니다』에 그런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두 책 모두 매우 추천한다).

김영화 기자는 “매번 ‘기록한다’와 ‘괴롭힌다’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게 된다”고 썼다.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해도 취재 행위는 ‘민폐’를 동반한다고, 숱한 거절에는 익숙해져도 그런 민폐에는 익숙해질 수 없다고. 『고도일보 송가을인데요』에서 눈물이 많은 송가을 기자에게 사회부장은 “유족들 보고 눈물 날 수 있는데, 거기서 같이 우는 게 좋은 기자는 아니야”라며 “우느라 눈 흐리지 말고 똑똑히 봐”라고 말한다(그런데도 송가을 기자는 몇 페이지 뒤에서 냉동창고 화재 사고를 오열하며 취재하고 까무러친다). 같은 말을 나도 선배들에게 들었고, 후배들에게 같은 말을 해줬다.

나 역시 슬픔에 쌓인 유가족에게 여러 기자들이 몸싸움을 벌이며 마이크를 들이대는 취재 행태에 분노한다. 그런 식으로 취재해서는 절대 안 된다. 이 또한 많은 사람들이 모를 텐데, 원래 기자들은 그런 식으로 취재하지 않았다. 사고 현장에서 기자단을 꾸려 기자단 간사가 유족 대표와 인터뷰 형식을 조율하고 취재 현장에서 최소한의 질서를 지키려 했다(나도 2003년 대구지하철참사 때 그렇게 취재했다). 언론의 수가 그렇게 많지 않았고, 같은 출입처의 기자들끼리 안면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기자단 제도에 좋은 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런 순기능이 있었다. 언론 개혁을 주장하던 분들의 단골 메뉴가 기자단 해체였고, 아직도 그런 주장을 하는 분들이 있다. 그 분들 덕에 기자단이 악의 소굴처럼 인식이 된 데다 현실적으로 언론사가 너무 많아져서 기자단을 꾸리기도 거의 불가능해졌다. 언론사가 더 많이 생기면 언론이 개혁될 거라는 주장 역시 2000년대 초반 언론 개혁을 주장하는 논객들의 레퍼토리 중 하나였다.

언론에 책임을 요구하는 이유는 언론이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논리로 나는 미디어비평에 책임을 요구한다. 미디어비평은 언론에 영향을 미친다. 기자실 해체와 더 많은 언론을 외쳤던 20년 전 미디어비평가들이 지금 어떤 책임감을 느끼고 있을지 궁금하다. 지금 미디어비평을 하시는 분들은 얼마나 책임감을 지니고 말씀을 하시는지도.

 

3-5.

대형 참사가 벌어졌을 때 유가족이 받을 보상금이 얼마인지 취재해야 할까? 이번에도 내 대답은 강한 ‘예’이다. 당연히 해야 한다. 이것 역시 권리가 아닌 의무다.

정부나 기업의 잘못으로 사고가 발생했는데 어떤 부조리 때문에 유가족이 보상을 받지 못하게 된다면 안 되지 않은가? 그런지 아닌지 확인을 해야 할 것 아닌가. 그래서 그런 부조리가 있으면 있다고, 없으면 없다고 독자들에게 알려야 할 것 아닌가.

취재나 기사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어떤 맥락 속에서 전해져야 할 기사가 그렇게 전해지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4-1.

경기도지사 당선인을 MBC가 인터뷰한다. 당선자는 ‘모 여배우의 이름이나 스캔들 내용을 묻지 말아달라’고 미리 요구하고, MBC는 이 조건을 받아들인다. 생방송 인터뷰에서 앵커가 질문을 던진다. “선거 과정에서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으셨어요. 앞으로 도지사가 되시면….” 이후에 앵커가 준비했던 멘트는 ‘비판자들을 어떻게 설득하고 포용할 건가요’였다.

그런데 당선인은 질문을 거기까지 듣고 인터뷰를 중단했다. “네, 감사합니다. 저희가 잘 안 들리는데요. 네, 네, 열심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네”라고 말하고는 방송용 이어폰을 귀에서 뺐다.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던 게 아니고, 자신이 내건 조건을 MBC 측이 지키지 않았다고 판단해서였다. 얼마 뒤에 당선인 본인이 페이스북 라이브에서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제 부족함이다” 하고 후회했다.

며칠 뒤 미디어오늘 기자가 당선인의 언론관이 변해야 한다는 칼럼을 썼다. 이 칼럼을 두고 홍기빈 씨는 ‘박근혜 앞에서 설설 기던 언론인들이 2년 후 사자후를 토하는 모습이란 ㅋㅋㅋ’라고 조롱했다. 그리고 ‘정치인은 불공평하다 싶은 언론과 인터뷰나 취재를 거부하는 자유가 있다’고 주장했다. ‘방송에서 화를 내면 정치인 자격이 없다는 건 누가 정한 법이냐’, ‘남유럽 남미 쪽엔 그런 이들 투성이인데’, ‘선거 내내 다른 쟁점은 제쳐두고 여배우 스캔들만 주구장창 읊어댄 매체는 대체 언론 자격이 있는가’라고도 썼다.

 

4-2.

나는 경기도지사 당선인은 단순한 정치인이 아니라고 본다. 2018년 경기도 한 해 예산은 22조 원이 넘었다. 7회 지방선거 경기지사 당선인은 4년 동안 80조 원이 넘는 돈을 집행할 책임을 질 사람이었다. 그는 경기도의 기본도시계획과 주택관련 기본 정책을 세우며 21층 이상, 10만 제곱미터 이상인 건축물의 건축 허가권도 가진다(어떤 면에서는 이게 예산권보다 훨씬 더 큰 힘이다). 1만 명이 넘는 경기도 직원에 대한 인사권과 징계권 등등 다른 권한도 많다.

그렇게 커다란 권한을 갖고 있기에 법률도 지방자치단체장과 국회의원을 구분한다. 둘 다 정치인이자 공무원이지만 국회의원은 선거 중립 의무가 없고 면책 특권을 갖는 반면 지자체장은 그렇지 않다. 다시 말해 경기도지사는 단순한 정치인이 아니라 막강한 권력자이며, 세금을 80조 원 넘게 쓰는 공직자다. 나는 그런 사람에게 언론이 ‘비판자들을 어떻게 설득하고 포용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홍기빈 씨는 일종의 게임적 세계관을 지닌 듯하다(유치한 세계관이다). 그 세계관에서 정치인과 언론은 서로 승부를 겨루는 플레이어들이며, 선악이 분명한 그 게임에서 악을 혼내주는 이는 선의 편에 있다. 유튜브에서는 먹힐 소리인지도 모르겠다(홍기빈 씨는 유튜버이기도 하다).

보다 성숙한 시민의 세계관에서는 정치인을 국민에게 의무를 진 사람으로, 언론도 국민에게 의무를 진 기관으로 본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인, 공직자, 언론의 권한은 모두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 권한을 국민이 부여한 바에 맞게 제대로 쓰는지가 비판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나는 MBC는 해야 할 의무를 했으며, 경기도지사 당선인은 국민을 대리해 언론이 던진 (별반 곤란할 것도 없는) 질문을 회피했다고 본다.

 

4-3.

물론 방송에서 화를 내면 정치인 자격이 없다는 법은 없다. 그런데 홍기빈 씨는 갑자기 왜 법 얘기를 하는 걸까? 설마 불법만 비판할 수 있다는 얘기일까? 그러면 표절도 비판할 수 없고 불륜도 비판할 수 없으며 불효도 비판할 수 없고 자살도 비판할 수 없다. 무엇보다 홍기빈 씨 본인도 MBC나 미디어오늘을 비판할 수 없다.

‘남유럽과 남미 쪽엔 취재 거부를 하는 정치인이 많다’는 이야기는, 진지하게 그게 자기 말의 근거가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한국 정치와 언론이 남유럽과 남미를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는 건가?

홍기빈 씨는 강한 주장을 버럭 질러놓고는 이런 어이없는 소리를 근거라고 대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는데, 나는 그냥 지적 불성실이 습관화된 거라 본다. 글로벌, 정치, 경제 부문 논평을 할 때는 과연 그런 습관을 억누를까?

 

4-4.

‘선거 내내 다른 쟁점은 제쳐두고 여배우 스캔들만 주구장창 읊어댄 매체는 대체 언론 자격이 있는가’라는 말도 그렇다. 대체 MBC 이야기를 하는 걸까, 미디어오늘 이야기를 하는 걸까?

2018년 당시 선거보도를 지휘하며 당선인 측으로부터 인터뷰 조건을 받아 동의하고 질문을 만들었던 MBC 취재센터장은 2012년 파업을 주도했다고 해고되었다가 해고무효소송을 내서 복직한 박성제 전 MBC 사장이다. 당시 MBC 사장도 해고되었다가 복직한 최승호 전 뉴스타파 앵커였다. 최승호 사장-박성제 취재센터장이 이끌던 MBC나 미디어오늘은 어떤 기준을 적용해도 보수 언론이 아니며, 여배우 스캔들을 주구장창 읊지도 않았다.

혹은 어떤 언론이 여배우 스캔들을 주구장창 읊어댔는데 MBC와 미디어오늘도 언론이니까 경기도지사 당선인에게 곤란한 질문을 던지거나 그를 비판하면 안 된다는 얘기일까? 이쯤 되면 홍기빈 씨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정말 이해하기가 어렵다. 한국인 관광객이 중국에서 폭행당했으니 중국인 관광객도 한국에서 폭행당해야 한다는 식의 막무가내 논리인가?

박근혜 탄핵이야말로 언론 보도에서 비롯됐음은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5-1.

매 학년 초 남자 고등학교 교실에 이런 유형의 아이들이 한두 명씩 있다. 지나가면서 다른 아이의 의자나 팔꿈치를 툭 치고 건드리는 타입. 상대가 덤벼들지 않으면 슬슬 남의 의자나 팔꿈치를 치는 강도를 높인다. 그래도 상대가 덤벼들지 않으면 기고만장해져서 상대를 찐따라고 여기고 괴롭힌다. 그렇게 일진이 된다.

홍기빈 씨도 그런 상태가 된 것 같다. 기자들이 바빠서 반박을 하지 않으니까 자기 논리가 완벽해서 기자들을 다 이겼다고 믿나 보다. 그가 한국일보 이희정 기자(현 미디어오늘 대표)의 칼럼을 공격한 글을 보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은 반박을 제대로 받아봐야 한다. 안 그러면 계속 이런 글 쓴다. 그래서 반박할 상대로 홍기빈 씨를 골랐다.

 

5-2.

며칠 전 한 일간지의 젊은 기자와 술을 마셨다. 그는 요즘 젊은 기자들 사이에서는 정치부(정확히는 정당팀)가 다시 인기라고 말했다. 이유는 힘들어도 효능감을 느낄 수 있어서. 기사를 보는 사람도 없는 것 같고, 기사가 세상을 바꾸는 것 같지도 않고, 기자를 찾는 사람도 없는 것 같다고 했다. 그나마 정치 기사는 사람들이 보고 반응하는 것 같다는 설명이었다.

그런 무력감과 좌절감이 요즘 기자들 사이의 일반적인 분위기다. 젊은 기자들일수록 더 막막해하는 것 같다. 이희정 대표는 한국일보 미디어전략실장 시절 ‘기자들이 열정을 잃고 울면서 떠나게 만드는 언론계 현실’에 대해, 후배 기자들에게 마음을 담은 글을 썼다. 그는 후배들의 존경을 받는 한국일보 최고참 여성 기자였고, 한국 언론을 비판하거나 반성하는 글을 꾸준히 써왔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희정 대표의 글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지금 언론과 언론 환경의 문제는 편집국 안에서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해결되지 않을 거라고 본다. 그래도 트래픽 지상주의와 낡은 취재 관행을 버리고,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을 생각하며, 편집국을 더 소란스럽게 만들자는 그의 주장에 반대하지는 않는다. 최소한 그게 기자들이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라고 본다. 그러지 않을 거라면 기자를 할 이유가 없다(사실 돈 벌거나 출세하겠다고 기자를 지원하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다).

그런데 이희정 대표의 글에 대해 홍기빈 씨는 ‘반성하는 듯 반성을 회피하는 글’이라고 비난했다. 이게 그런 비난을 받을 글인가? 이희정 대표가 어떤 반성을 회피하고 있나? 앞에서 대형사고 보도에 대한 빗나간 비판에서 봤듯이 홍기빈 씨는 취재 현장이나 기사 생산 과정을 전혀 모른다. 그럼에도 이번에도 용감하게 원인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기레기 담론’ 어쩌고 하는 말까지 쓰면서. 하지만 내용은 텅 비었다.

 

5-3.

나는 지적 게으름, 지적 불성실이라는 키워드로 홍기빈 씨를 파악하려 하고 있다(솔직히 인품 이야기도 하고 싶긴 하다). 제대로 된 근거를 제출하지 않으면서 강한 주장만 공론장에 쏟아내는 것은 지적 게으름이다. 내용 없는 텅 빈 말이 근거가 된다고 믿는다면 지적 불성실이다.

기실 ‘이게 다 언론 탓이다’라고 하는 말들이 다 그렇다. 그 주장을 한 층만 파고 들어가면 기묘한 모순을 맞닥뜨리게 된다. 모든 나쁜 일은 언론이 세상에 잘못된 지식을 퍼뜨린 탓이라고 하는데, 이상하게도 좋은 일을 하자고 벌이는 언론사들의 수많은 캠페인은 도무지 영향력이 없다. 도대체 언론은 영향력이 있는 건가, 없는 건가?

사람들이 좋은 기사를 안 보고 저질스러운 기사만 봐서 그렇다면, 저질스러운 기사만 클릭하는 이들 자신이나 그런 기사가 좋은 기사보다 널리 퍼지게 되는 구조가 문제인 것 아닌가? 그런 사실을 간과한 채 ‘이게 다 언론 탓이고 기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게으르고 불성실한 일인가.

 

6-1.

아마도 ‘이게 다 언론 탓’이라는 생각의 배후에는 전적으로 잘못된 세계관이 하나 있는 듯하다. ‘언론이 제대로 된 정보를 주면 나는 언제나 정확한 판단을 내린다, 내가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언론이 부정확한 정보를 주기 때문이다’라는 생각이다.

정말 그럴까? 그렇지 않다. 어떤 사람이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잘못된 정보가 입력되어서일 수도 있지만, 그 사람 머릿속에 있는 세상에 대한 모델 자체가 잘못되어서일 수도 있다. 잘못된 모델에는 정확한 정보를 입력해도 잘못된 결과가 출력된다.

흔히들 언론을 통해 세상을 본다고 말하는데, 나는 싫어하는 비유다. 세상 전체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세상은 사람 눈으로 보기에는 너무 크고 복잡하다. 그보다는 차라리 우리가 머릿속에 세상의 모델을 하나씩 갖고 산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우리는 외부에서 정보를 받으면 머릿속 모델에 입력하고 결과를 낸다. 적은 정보로도 비교적 정확한 결과를 빨리 내는 모델을 가진 사람을 통찰력 있다고 하고, 자신이 수행한 모델링의 허점과 한계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을 지혜롭다고 평가한다. 때로는 외부에서 받은 정보로 그 모델 자체를 수정하기도 한다. 사실 그 모델은 죽을 때까지 수정해야 한다. 수정을 멈추는 순간 낡은 관념에 사로잡힌 구닥다리, 세상 변화에 적응 못하는 늙은이가 된다.

세상에 대한 모델을 만들어주는 것은 언론이 아니다. 기초 교육과 교양 공부다. 언론 기사는 이미 모델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에게 새 소식을 업데이트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뉴스를 뉴(new)스라고 부르고, 신문을 신(新)문이라고 부른다.

 

6-2.

하루 종일 정치 뉴스를 보고 자신이 정치 전문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정작 머릿속에 들어 있는 모델은 빈약하기 그지없어서, 정당 정치의 기초 메커니즘조차 모르는 경우도 있다. 그런 사람에게 정치 분석을 해보라고 하면 엉뚱한 소리를 하고, 정치 전망을 해보라고 하면 다 틀린다. 이것은 그에게 잘못된 정보가 입력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가진 모델이 잘못되어서다.

마찬가지로 경제 기사만 하루 종일 본다고 경제를 제대로 알게 되지는 않는다. 제대로 알고 싶다면 경제학 개론서를 먼저 읽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머릿속 모델을 갖추고 나서 경제 기사를 봐야 한다.

신문활용교육(NIE)은 신문을 교육에 활용한다는 것이지, 신문 그 자체가 교육을 대체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모델을 배우는데 시간을 쏟는 학생들이 실제로 현실 세계의 정보를 그 모델과 연결하는 법을 익히는 데 신문을 도구로 이용할 수 있다는 거다.

 

6-3.

언론은 머릿속에 세상에 대해 그럭저럭 작동하는 모델을 가진 사람들을 독자로 간주하고 기사를 쓴다. 그렇기 때문에 편집국에서는 ‘개가 사람을 문 사건’보다 ‘사람이 개를 문 사건’이 기사 가치가 높다고 판단한다.

기자들이 변태라서가 아니다. 독자들의 머릿속에 어떤 사건이 더 희박하게 일어나는지에 대한 사전 지식이, 세계에 대한 모델이 있으리라고 예상하기 때문이다. 희박한 사건은 해프닝일 수도 있지만 중대한 변화의 예고일 수도 있다. 그래서 기사 가치가 높다. 사람이 개를 문 사건이 두 번 벌어지면 특이한 전염병이 출현한 게 아닌지 의심해야 한다.

그런데 이 기사를 보고 세상에 사람을 무는 개는 없고, 개를 무는 사람만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세계의 진짜 모습과 다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언론 기사=세상 모습’이 아니다. ‘언론 기사=이미 세상의 모습을 어느 정도 아는 독자가 업데이트해야 할 사안’이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출근했다가 산업재해로 사망하는 일도 비정규직 노동자가 출근했다가 무사히 퇴근하는 일보다 훨씬 희박하게 일어난다. 그래도 언론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사망하는 일을 써야 한다. 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렇게 믿고 있고, 그런 기준으로 기사를 썼다. 지금은 월급사실주의 동인을 만들어 우리 시대의 노동 소설을 쓰고 있다.

언론은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 아니기에, 언론 기사를 보고 그게 세상 모습이라고 믿으면 안 된다. 세계의 진짜 모습은 따로 공부해야 한다. 하루 종일 정치 뉴스나 경제 기사를 보지 말고, 그 시간에 그 분야 교양서를 읽었으면 좋겠다. 한스 로슬링의 『팩트풀니스』를 나는 예나 지금이나 매우 추천한다.

 

6-4.

『팩트풀니스』, 그리고 그 책을 추천한 나에 대한 홍기빈 씨의 비판은 무슨 말인지 알아먹기가 힘들다. 일단 홍기빈 씨는 tvN 프로그램에서 나를 비롯해 누구도 하지 않은 말을 지어내서 누군가 “노동자가 일터에서 비참하게 죽었다는 게 언론에 기사화되는 게 문제다”라고 말한 것처럼 황당하게 옮겼다. 이건 지적 게으름이나 지적 불성실로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기만이고 왜곡이고 부도덕이다.

그 뒤로도 홍기빈 씨의 글은 도무지 앞뒤가 안 맞게 이어진다. 평소의 지적 게으름과 지적 불성실을 감안하더라도 심한 편이다. 타인을 지적해서 기쁨을 느끼고 싶은 욕망이 이때 특히 과했던 것 같다.

일단 ‘이 책의 소식을 듣고서 전혀 읽을 생각이 나질 않았다’고 고백하며 시작하는 걸 보니 그는 『팩트풀니스』 자체를 안 읽은 것 같다. 이후에도 책 이야기는 안 하고 구글 검색 이야기만 한다. 용감한 사람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1차 데이터와 씨름하는 진지한 연구자들이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이는 한 마디로 개소리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은 그런 연구자와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한다. ‘나는 1차 데이터 연구와 거리가 먼 사람인데 1차 데이터 연구자라면 누구나 아는 이야기’라는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옆집 김씨가 그러더라’ 하는 수준의 전언인 건가?

구글에 ‘factfulness/rosling/criticim’이라고 치면 나오는 결과물이 뭘 의미한다는 걸까? 조금 유명한 도서는 무슨 책이든 저렇게 치면 당연히 결과가 많이 나온다. 홍기빈 씨는 니얼 퍼거슨의 책을 두어 권 한국에 번역했는데, 퍼거슨은 한스 로슬링과는 비교도 안 되게 논란이 심한 저자다. 구글에 ‘Niall Ferguson criticism’은 검색해봤나? 제일 위에 나오는 문서 제목이 ‘Just How Stupid is Niall Ferguson? Very Stupid.’다. 로슬링의 책이 비판을 많이 받는다며 소개해서는 안 된다는 당신은 퍼거슨의 책은 왜 소개하나? (홍기빈 씨의 일관성 없음을 지적하기 위해 쓴 말이다. 나는 퍼거슨의 책도 공론장에 나와야 한다고 본다.)

 

6-5.

『팩트풀니스』가 기만적인 책이라고 주장하면서 홍기빈 씨 본인이 기만적인 서술을 한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홍기빈 씨는 『팩트풀니스』가 좋은 데이터만 취사선택했다고 비난한다. 그러면서 본인은 『팩트풀니스』에 대한 나쁜 평가만 취사선택한다.

홍기빈 씨는 『팩트풀니스』가 ‘알량하게 통계 수치 몇 개’, ‘숫자 몇 개 차트 몇 개’로 큰 문제를 이야기하는 책이라고 비난한다. 『팩트풀니스』에 나오는 통계 수치가 진짜 몇 개이고, 숫자가 몇 개밖에 안 나오고, 차트도 몇 개뿐인가? 정말로 책을 안 읽은 건가, 숫자를 셀 줄 모르는 건가, 아니면 ‘몇’이라는 말의 뜻을 모르는 건가.

 

6-6.

홍기빈 씨의 글을 읽으면서 여러 번 웃었지만 제일 크게 웃은 대목은 한스 로슬링과 스티븐 핑커를 비판하는 부분이었다. 홍기빈 씨는 로슬링과 핑커를 ‘전공을 알 수 없는 오지라퍼, 전문 분야를 훌쩍 넘어서 오지랖 부리는 사람,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한다.

음……. 홍기빈 씨, 지금 여기서 제일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 당신인 걸 모르시겠어요? 당신 전문 분야는 글로벌, 정치, 경제니까 그 분야를 다 이야기해도 괜찮다는 거예요? 그런데 당신은 적어도 언론 전공은 아니잖아요? 언론에 대해 뭘 아세요? 페이스북에 올린 글들만 봐도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던데. 다른 사람을 ‘전문 분야를 훌쩍 넘어선 오지라퍼’라고 비난하려면 하다못해 당신 연구소 이름이라도 글로벌정치경제미디어연구소로 바꾸는 게 어때요? 정체는 더 알 수 없어지겠지만.

그러는 홍기빈 씨가 언론의 역할을 오해한다며 비판하는 나는 적어도 현장 전문가 정도는 자처해도 되는 사람이다. 나는 관훈언론상, 이달의기자상, 씨티대한민국언론인상 대상, 동아일보 대특종상,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감사장을 비롯해 각종 언론상을 10회 이상 수상했다(매년 언론상을 하나 이상 받은 셈이다. 내가 받은 언론상이 문학상보다 더 많다). 동아일보에서 편집국장과 맞짱을 떠서 몇 년 동안 발행되지 않았던 편집국 사내보를 부활시킨 장본인이고, 지금도 여러 언론사와 언론 관련 기관에서 강연과 자문 요청을 꾸준히 받고 있다. 이달 말에는 한 언론 관련 사단법인에서 비공개 강연을 할 예정이고, 다음달 초에는 미디어 컨퍼런스에서 키노트 발표를 한다.

지금 전문 분야를 훌쩍 넘어 오지랖을 부리고 있는 사람이 대체 누군가?

 

6-7.

홍기빈 씨는 『팩트풀니스』가 ‘사실상 기후위기 및 각종 생태 위기의 심각성을 부인하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책 어디에 그런 부분이 있나? ‘내 나라도 사랑하지만 내 가족을 더 사랑한다’고 말한 사람을 반역자로 몰아가는 괴벨스 식 논리인가?

『팩트풀니스』를 추천한 사람은 생태위기가 심각하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도 이해불가다. 그러면 당신은 니얼 퍼거슨 책 번역했으니 앞으로 진보적인 주장은 일절 하지 마라.

『팩트풀니스』 추천자들이 생태위기 관련 발언을 하면 망신을 주겠다고 경고하는 문장에서는 그의 자아비대증을 염려하게 된다. 자기가 인터넷 세상의 배트맨쯤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인터넷 일진놀이가 반박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 이렇게 무서운 결과를 낳는다.

 

7.

홍기빈 씨, 당신은 언론이 뭐고 언론의 역할이 뭔지, 기자들이 어떻게 취재하고 기사가 어떻게 생산되는지 모르는 사람이다. 모르는 분야에 대해 당신 상식에 의거해서 의견을 낼 수도 있다. 그런데 당신이 이 분야를 모른다는 사실 자체는 잊지 말고 의견을 내라. 함부로 상대를 악마화하지 말고, 같잖은 상식으로 사람을 단죄하려 들지 마라.

의견을 낼 때에는 사실과 의견을 구분하고, 사실은 왜곡하지 마라. 머릿속으로 당신 의견에 대해 반론을 여러 개 내보고 의견을 다듬어라. 그래야 지적 불성실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기레기’라는 말 자주 쓰던데, 당신 같은 사람이 입에 올릴 말은 아니다. 남이 쓴 걸 인용하려고 저 단어를 써야겠거든 앞뒤로 작은따옴표를 꼭 붙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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