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맥주의 블로그
제 독서 메모는 마음대로 퍼 가셔도 괜찮습니다. 상업적으로 이용하셔도 됩니다.부제는 ‘문학이 공감을 주는 과학적 이유’이며, 그걸 뇌과학자가 아니라 러시아문학 전문가가 썼다는 게 포인트. 신경과학과 문학이 여기서 상대를 새로이 발견한다고는 못하겠지만 이어져야 할 의미 있는 시도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그 작업의 끝에서 뇌과학이 문학을 해명하기를 나는 바라는 걸까, 바라지 않는 걸까.
도스토옙스키 애호가라면 저자와 함께 “아이고, 이 양반아”를 연발하게 됨. 투르게네프는 도스토옙스키를 환자 취급했다고. 돈을 키워드로 한 작품 분석이 깊이 있고 친절하다.
도스토옙스키의 초기 중단편집으로, 수록작의 수준은 들쭉날쭉하다. 「남의 아내와 침대 밑 남편」이 엄청 웃긴다. 「백야」는 아름다운 결말이 인상적인, 서정적이고 따뜻한 짝사랑 이야기.
‘도스토옙스키 5대 장편소설’로 묶이기에 저평가되는 작품이라고 생각. 다른 네 편과는 작가의 의도 자체가 다른 것 같다. 주제가 아니라 정서에 초점을 맞췄다고 본다.
『죄와 벌』, 『악령』,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이 무신론자의 실패를 말한다면 『백치』는 그리스도의 실패를 다룬다. 『악령』이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보다는 막장성이 덜한가. 그래도 정념이 지나쳐서 미치기 직전인 것 같은 미모의 젊은 여성 두 사람이 너무 착해서 미친 것처럼 보이는 남자 하나를 두고 미칠 듯한 구애 경쟁을 벌이는데 재미없을 리가 없다.
내 인생의 책은 『악령』이지만, 도스토옙스키의 대표작을 꼽으라면 역시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이다. 『죄와 벌』보다 스케일이 크고 재미있으며, 『악령』보다 정돈되어 있고 소설적 완성도가 높다. 앞부분에서 이반 까라마조프가 말하는 ‘입장권’ 이야기에 대해 오래 생각했고 그에 관한 글도 썼다. 뒷부분에서 알료샤가 리즈를 달래는 대목도 좋아한다. 도스토옙스키가 쓰지 못한 2부의 내용을 가끔 상상하기도 한다. 이반은 스비드리가일로프와 끼릴로프, 스따브로긴의 후예이고 알료샤는 미쉬낀의 후예다. 2부에는 이반과 알료샤가 나올 예정이었다. 도스토옙스키가 구상했던 건 알료샤가 이반을 구하는 이야기였을까. 그 반대였을까.
처음에는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으로 읽었다. 거기에는 끼릴로프의 대사가 이렇게 번역되어 있다. “인간은 자살하지 않고 살기 위해 신을 생각해낸 것이다. 이때까지의 세계사는 바로 이것에 불과한 거야.” 나중에 나온 열린책들 번역본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인간이 한 일이라고는 자살하지 않고 살기 위해 신을 고안해 낸 것뿐이지. 지금까지 전 세계 역사가 그랬어.” 이 두 문장 때문에 장편소설을 두 편 썼고, 이 두 문장에 관한 장편소설을 앞으로도 최소한 한 편, 어쩌면 몇 편 더 쓸지도 모른다. 이 책은 내 마음속에서 호오의 영역을 아득히 벗어난 곳에 있으며, 이 책을 읽고 나는 문자 그대로 인생이 바뀌었다. 단단한 지면이라고 믿었던 발판에서 미끄러져 어둡고 스산한 세계로 떨어졌고, 영혼의 어느 부분은 지금도 그 진창에서 허우적거린다.
제주도에 11년 만에 황사 경보가 발령된 날 배를 타고 가파도에 갔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계획에 없던 일정이었다. 뭐, 사실 우리의 제주 여행은 내내 거의 계획이 없긴 하다.
나는 마라도에 가보자고 제안하자 HJ는 얼마 뒤 가파도를 주장했다. 그녀는 『하멜 표류기』를 감명 깊게 읽었는데, 헨드릭 하멜이 표착한 곳이 가파도라는 설이 있다. 하멜이 그곳을 ‘케파트’라고 불렀다는 이유에서다. 내 입장에서는 가파도나 마라도나 아무 차이가 없었고, 예약 없이 운진항에서 당일 가파도행 표를 샀다.
기실 하멜 일행의 배가 난파되어 표착한 곳이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 모양이다. 기념비와 상선 모형은 용머리해안에 있는데, 보다 서쪽인 신도리 주민들은 당시 제주 목사의 일지를 근거로 자기 동네가 맞는다고 주장한다.
여객선 표는 왕복편으로 한 사람당 두 장을 묶어 팔았는데, 승객들이 섬에서 두 시간만 머물 수 있는 일정이었다. 그런데 섬이 작아서 두 시간이면 한 바퀴를 둘러볼 수 있었다. HJ는 뱃멀미를 걱정했으나 바다는 그야말로 고요하기 이를 데 없었고, 승선한지 10분 정도 만에 섬에 도착했다.
황사로 하늘이 뿌옇긴 했지만 가파도의 자랑은 청보리밭이었고, 그 풍경을 즐기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가파도 청보리는 3월 말부터 4월 중순까지가 절정이라고 한다. 최고봉이 해발 20미터밖에 안 되는 낮은 섬 면적의 3분의 2가량이 청보리밭이었다. 희뿌연 하늘 아래 선명한 녹색 청보리밭이 펼쳐졌고, 눈에 달리 걸리는 높은 건물이나 산이 없었다.
우리는 천천히 걸었다. 가파도를 가로지르는 작은 중앙 도로를 먼저 걷고, 해안 도로를 조금 걷고, 그 다음에 보리밭 사이를 걸었다. 중앙 도로에서는 한동안 우리 앞에 두 남녀가 걸어갔는데 카메라를 든 무리들이 그들을 쫓아가며 모든 움직임을 촬영했다. 방송사에서 나온 건지 브이로그를 만드는 유튜버인지 알 수 없었다.
길고양이가 많은 섬이었다. HJ는 가파초등학교를 보고 귀엽다며 좋아했다. 매년 졸업생이 한 명씩 나온다고 한다. 학교 옆에는 가파도에서 나온 독립운동가이자 국회의원을 기리는 비석이 있었다. 우리가 찾아가지는 않았지만 섬 동쪽에는 아티스트 레지던스가 있다. 김금희 소설가가 거기 머물렀다고 전해 들었는데, 어떻게 신청하면 되는지 궁금했다.
제주도로 돌아가는 배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 동안 가파도에 딱 하나뿐이라는 편의점에 들어갔다. 말이 편의점이지 작은 구멍가게였다. HJ는 청보리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는데, 관광객 지갑을 노리는 뻔한 음식 같지 않고 제법 맛있다고 했다. 그녀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동안 나는 냉장고를 둘러보다가 맥파이 IPA와 쾰쉬 캔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서울에서 몇 번 맛있게 마셨는데 좀처럼 이 맥주를 파는 매장을 볼 수 없었다.
맥파이는 이태원에서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지방 양조장에 레시피를 주고 위탁 생산하는 방식으로 맥주를 만들다 제주의 감귤 선별 공장을 사들여 자체 양조장을 차렸다. 이들의 홍보 문구 중 하나가 ‘서울에서 태어났고 제주에서 양조하는(Born in Seoul, Brewed on Jeju)’이다.
이번에 제주에 온 김에 맥파이와 제스피 양조장 투어도 해볼까 했는데 두 곳 다 우리가 이동하는 코스와는 맞지 않았다. 그래도 제주도 술집에서는 맥파이나 제스피 맥주를 쉽게 마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뜻밖에도 가파도 편의점에서 맥파이 맥주를 보게 된 것이었다. 이 편의점에서 그 외에 파는 맥주가 국산 대기업 맥주와 칭따오 뿐이어서 더 신기했다.
편의점 주인아주머니가 유쾌한 분이었다. 내가 맥파이 IPA를 고르고 값을 치르려 하자 “그거 비싼 맥주예요” 하며 경고를 해주었다. 애초에 공급가가 비싼 것이지 자신이 과한 이윤을 취하는 게 아니라며, 맥파이 맥주를 팔 때마다 손님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나는 흔쾌히 계산하자 주인아주머니는 함박 미소를 지었다.
“내가 중국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데……” 주인아주머니가 말을 걸었다. 관광객이 줄어서 장사하기 어렵다는 이야기인가? “맥주는 칭따오가 최고예요. 정말 맛있어.” 주인아주머니가 말했고, HJ와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주인아주머니는 맥파이가 가파도 청보리로 맥주를 만든다고 했다. 숙소에 와서 찾아보니 과연 맥파이의 제품 중 ‘봄마실’이라는 세종 맥주가 가파도 청보리와 제주 메밀을 사용한다고 한다. 아마 그렇게 한 제품에 가파도산 재료를 쓰다 보니 가파도 편의점에 캔맥주를 공급해야겠다고 결심한 게 아닌가 추정한다.
내가 만약 가파도에서 머물게 된다면 이 편의점에 일주일에 세 번씩은 오겠지. 제주도로도 자주 나가게 될까? 먼 바다에서 지진이 발생해 해일이 덮쳐 오면 어디로 피해야 할까? 건물 2층에 있으면 안전할까? 해발 20미터인 전망대로 모든 섬사람들이 모이나?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배를 기다렸다.
돌아올 때는 갈 때보다 바다가 더 잔잔했다. 제주도로 돌아와서는 운진항에 있는 커다란 카페에 들어갔는데 매장에 한때 유기견이었다는 골든 리트리버가 있었다. 확실히 펜션에 있는 개들보다 몸집이 작았고 웃는 표정이었고 애교도 많았다.
그날 저녁에 맥파이 IPA와 다른 맥주들을 마셨다. 맥파이 IPA는 적당히 무겁고 다소 씁쓸하고 홉 향이 강했다. 캔에는 까치(맥파이)가 그려져 있고 장난스럽게 ‘이파’라고 적혀 있다. 제주도에 온지 11일째 되는 날이었다.
작고 평평한 섬
기왕이면 청보리 여물 때
다시 오고 싶은데
라스콜리니코프보다 스비드리가일로프가 훨씬 더 문제적 인간이며, 이후 이 캐릭터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서 끼릴로프, 스따브로긴, 이반 까라마조프로 되풀이해서 나타나게 된다. 라스콜리니코프의 마지막 꿈속에서 인류는 영적 존재인 기생충에 감염되어 자신만이 진리를 안다고 믿고 서로를 증오하며 죽인다. 모두 혼란스러워하고, 모두 불안해하며, 사람들이 어떤 사안에도 의견을 합의할 수 없는 그런 악몽. 요즘 세상 같지 않나.
퓰리처상 수상자의 생생하고 감동적인 인터뷰집. 자기 일과 삶에 대해 말할 때면 누구나 조금씩 철학자가 되는 것 같다. 세상에 쉬운 직업은 없고, 사람은 돈만큼이나 존경과 의미도 절실히 원한다. 인터뷰어, 저널리스트 지망생들에게는 꼭 추천하는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