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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맥주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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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이언 모리스)

단 세 단어로 이렇게 도발하기도 쉽지 않겠다.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말인즉슨 지금 서양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얘기렷다? 무슨 근거로? ‘서양’은 뭘 뜻하고, ‘지배한다’는 개념의 의미는 뭔데? 책 제목이나 두께를 보아하니 논리적인 이유를 제시하겠다는 분위기인데, 설마 ‘서양의 지배’가 당연하다고 말할 참이야? 이거, 현학의 가면을 쓴 신종 유럽우월주의 아냐?

어떤 사람들은 정반대로 시큰둥할 지도 모르겠다. 그거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총, 균, 쇠』에서 다 한 얘기 아닌가, 문명 발달 초기에는 세로로 길쭉한 대륙보다 가로로 늘어진 대륙이 유리하고, 중기에는 그런 유라시아에서도 해안선이 단조로운 중국보다 땅 모양이 들쭉날쭉한 유럽이 더 조건이 좋다고…….

고고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이언 모리스는 이런 두 종류 비판에 대한 반론을 먼저 제시한다. 우선 ‘서양, 동양, 지배’라는 단어를 상당히 좁게, 그리고 꽤 설득력 있게 정의한다. 그리고 서양의 우세가 필연이었다고 보는 ‘장기고착이론’은 자연환경 요소를 너무 강조하고, 반대인 ‘단기우연이론’은 산업혁명이 유럽에서 시작했다는 사실에만 주목한다고 지적한다. 두 관점 모두 산업혁명 이전 수천 년의 사회사를 간과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 수천 년에 집중하는데, 읽는 동안 저자의 진짜 질문은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가 아니라 ‘문명은 어떻게 발전하는가’임을 깨닫게 된다. 책은 거대한 시야로 동서양의 역사를 살피며 사회학도 지리적 요소만큼 중요함을 보여준다.

동서양 어떤 강대국도 수백 년 이상 권세를 누리진 못했다. 초기에 그 나라를 일으킨 힘이 몇 세대 뒤에 반드시 걸림돌이 됐다. 그때 주변부 세력이 ‘후진성의 이점’을 업고 새 강자로 등장한다. 동양도 서양도 비슷한 단계에 대붕괴를 겪었다. 중앙집권국가가 출현하기 직전에 한번, 제국이 농경사회의 한계에 부딪힐 때 다시 한번이다.

익히 알던 사실(史實)을 재구성하는 관점의 위치가 까마득히 높아서, 웅장하다고 해야 할지 장쾌하다고 해야 할지 하여간 읽는 내내 희한한 흥을 맛보게 되는 책이다(작가도 외계인의 시선으로 보자고 독자를 부추긴다). 로마-한나라, 르네상스-주자학, 합스부르크 왕가-도요토미 히데요시, 테오도라 황후-측천무후라는 식의 짝짓기를 접하는 즐거움도 쏠쏠하다. 저자가 고전과 대중문화 양쪽에 모두 해박하고 유머와 재치도 빼어난 데다 대체역사소설 기법까지 능수능란하게 써먹는 특급 글쟁이인지라, 1006쪽이 후다닥 넘어간다.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514. 컨버전스 (피터 왓슨)

에드워드 윌슨이 사용한 ‘통섭(consilience)’ 대신 ‘컨버전스(convergence)’라는 용어를 택한 이유는 아마 뒷부분에서 ‘이머전스(emergence)’를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지금까지 여러 학문의 수렴과 통합 현상을 다룬 앞부분도 재미있었지만 바로 그 도발적인 뒷부분은 무척 흥미진진했다. 이 책도 『재수사』를 쓸 때 참고가 되었다.

컨버전스
컨버전스
513. 무신론자의 시대 (피터 왓슨)

박학다식의 표본이자 내게는 무조건 믿고 읽는 작가. 이번에도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무신론이라는 키워드로 니체 이후 서구 철학과 예술, 대중문화를 분석한다. 『재수사』를 쓸 때 많은 참고가 되었다.

무신론자의 시대
무신론자의 시대
512. 오렌지나무 사이로 (비센테 블라스코 이바녜스)

 정말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제는 절판되어 구할 수 없다. 레오노라라는 캐릭터가 강렬했고, 그 대사 몇 문장을 『표백』에 인용했다. 이 소설이 나중에 할리우드에서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레오노라 역은 그레타 가르보가 맡았다고 한다.

511. 아벨 산체스 (미겔 데 우나무노)

 지인의 메일에 답장을 하다 이 책이 떠올랐다. 나는 주로 카인이고 때로 아벨이다. 질투에 휘말려 있는 사람들은 공격을 할 때도 공격을 당할 때도 자신이 정당하다고 믿는 것 같다.

아벨 산체스
아벨 산체스
510. 조현병의 모든 것 (E. 풀러 토리)

 잔인한 병이다. 워낙 몰랐던 터라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그만큼 딜레마도 많이 생겼다. 헛것이 보이고 존재할 수 없는 목소리가 들리고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일이 어떤 것인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그들은 때로 자신이 미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함께 읽은 멤버들이 모두 건조한 문장에서도 저자의 마음 씀씀이가 느껴진다고 했다.

조현병의 모든 것
조현병의 모든 것
509. 13.67 (찬호께이)

감탄하며 읽었다. 유명한 이유가 있는 소설이었다. 어려운 중국 이름도, 홍콩 지리나 사회를 모른다는 점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주인공은 매력적이고, 사건은 실감나며, 반전도 설득력 있다. 혼란스러운 시대에 혼란한 장소에 있었던 사람들의 축축한 절망감도 잘 전달된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찾아 읽어야겠다.

13.67
13.67
508. 로마는 왜 위대해졌는가 (메리 비어드)

키케로를 주인공으로, 아우구스투스를 주조연으로 잡은 로마의 첫 천년 이야기. 무작정 교훈으로 삼기에는 현대와 매우 다른 사회였음을 틈틈이 강조한다.


로마는 왜 위대해졌는가(양장본 HardCover)
로마는 왜 위대해졌는가(양장본 HardCover)
507. 보수의 정신 (러셀 커크)

보수는 이념이 아니며, 세계의 복잡성을 이해하고 인간의 격정과 불완전함을 경계하는, 신중한 사람들의 존중 받아야 할 태도이자 세계관이라고 주장. 휙휙 읽히진 않는다.

보수의 정신
보수의 정신
46. 유미의 위트 에일과 제주신화월드

산방산 아래 펜션을 떠나는 날에는 하멜상선전시관과 용머리해안을 구경했다. 하멜상선전시관은 하멜이 탔던 스페르베르 호를 일대일 크기로 재현한 모형 안에 하멜 관련 자료를 전시했는데 어째 안에 있으니 멀미가 났다. 나뿐 아니라 HJ도 그렇다고 했다. 60명이 넘는 사내들이 이런 작은 배를 타고 대양을 건널 생각을 한 그 시대가 참 대단하다.

낮에는 황우치해안에 있는 힙한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다. 발리의 유명한 비치클럽인 쿠데타와 비슷한 곳이었다. 산이나 바다 풍경도 좋았지만 다른 손님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다. HJ는 아무리 봐도 불륜인 듯한 커플을 목격했다고 얘기해줬다. 나이 많은 남자 쪽이 전화를 받더니 상대방을 “여보”라고 부르면서 사업 때문에 제주에서 며칠 더 머물러야 할 것 같다고 얘기했다나.

제주도에서 처음 며칠 동안은 찾아가는 곳마다 기대보다 좋아서 그 이유를 분석하고 싶어질 정도였다. 내가 너무 기대를 안 해서였을까. 아니면 이제 대한민국 사회 수준이나 디자인 감각의 평균이 나를 앞지른 것일까. 중국인 관광객을 노리고 거액을 투자해 시설들을 잘 만들어놨는데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사람이 없어서 이 시기 제주를 찾는 이들이 뜻밖의 호사를 누리는 걸까.

그 모두 조금씩 맞는 얘기 같다. 그리고 우리가 처음에 서귀포 외곽에서부터 여행을 출발한 게 탁월한 선택이기도 했다. 그만하면 충분히 한적하다고 여겼지만, 서쪽으로 향할수록 점점 더 숙소 주변에 걸어서 갈 수 있는 가게들이 줄어들었다. 산방산 아래 있던 펜션 다음 숙소는 골프 리조트 안에 있는 호텔이었는데, 여기서는 정말 도보로 갈 만한 곳이 한 곳도 없었다. 외출을 하려면 꼭 택시를 불러야 했다.

이 호텔에서는 5박 6일을 머물렀다. 우리는 제주도에 내려와서야 머물 숙소들을 예약했는데 성수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느 기간, 어느 지역에서는 마땅한 장소를 구하기 어려웠다. 그런 때 펜션보다는 객실이 많은 큰 호텔에 빈 방이 많다.

리조트 호텔은 바닷가에 있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산 전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중국인 관광객을 노리고 만든 듯했는데 손님이 없어서 썰렁했다. 식당은 아예 운영하지 않았고 프론트와 호텔 내 편의점조차 밤이면 문을 닫았다. 피트니스클럽과 수영장 등도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때문에 리조트 회원이 아닌 일반 투숙객에게는 개방하지 않았다.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꽤 심심했다. 끼니를 챙겨먹는 것도 일이어서 배달 앱으로 치킨을 시켜 먹기도 하고 편의점에서 만두와 샌드위치를 사 와서 해결하기도 했다. 숙박 첫째 날에는 아예 호텔에 늦게 도착해 체크인을 저녁 때 했고 둘째 날과 셋째 날에는 오전에 택시를 타고 근처 시설에 갔다가 점심을 먹고 오후에 돌아왔다.

그렇게 찾아간 곳이 오설록 티뮤지엄과 제주신화월드였다. 오설록 티뮤지엄은 차밭 한가운데 있는 차 문화 체험공간인데, 조경이 아주 예뻐서 감탄하며 구경했다. 차도 마시고 차밭도 돌아다니고 해녀 바구니를 콘셉트로 한 심심한 도시락과 샐러드도 먹었다. HJ가 나중에 돈을 많이 벌면 이런 건물을 짓고 사회공헌사업을 하고 싶다고 해서 조금 놀랐다.

그날 저녁에 호텔에서 핸드앤몰트 유미의 위트 에일을 두 캔 마셨다. 맛있어서 서울에서도 종종 사 마시던 독일식 밀맥주다. 가볍고 상큼하고 달달한 바나나 향도 난다. 디자인도 예쁜데, 모티브가 된 웹툰 《유미의 세포들》은 내가 한창 우울증에 시달릴 때 봤던 작품이기도 하다. 끝까지 보지는 못했다. 작가는 성장하는 주인공을 그리려 했는데 인기가 많아지고 이야기가 길어지면서 극성팬들의 입김에 휘둘리지 않았나 싶다.

핸드앤몰트는 2014년에 설립된 한국 브루어리인데 몇 년 전에 오비맥주가 인수했다. 미국양조협회는 수제맥주 업체를 정의하면서 ‘대기업 지분이 25퍼센트 이상이면 안 된다’고 규정했다. 한국수제맥주협회도 그 기준을 참고해 ‘수제맥주 회사는 주류 관련 대기업 지분이 33퍼센트 미만이어야 한다’고 협회사 자격 조건을 정했다. 그래서 핸드앤몰트는 정의상 수제맥주 회사가 아니다. 그런 기준을 만들게 된 여건은 이해하지만 그 분류법에 완전히 동의하는 건 아니다.

요즘 제프 올워스의 『맥주 바이블』을 전자책으로 재미나게 읽고 있는데, 수제맥주 업계도 자존심과 비주류정신, 허세와 현학이 얽힌 문화 전쟁이 꽤 심한 바닥인가 보다. 한국 장르소설계가 연상된다. 그런 태도가 젊은 세대에게 점점 대세가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기업과 정부 같은 거대 조직들이 만든 질서 안에서 개인이 무력감에 휩싸일 수밖에 없는 시대라서 그런 걸까?

그 시대정신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단순히 그 특징을 관찰하는 게 아니라 원인과 방향을 파악하고 싶다. 내 생각에는 무력감이 중요한 키워드인 것 같다. 자존감에 대한 대중의 욕구가 날로 커지는 현상이나 점점 퍼져가는 나르시시즘의 기운, 포퓰리즘이 다 한데 엮여 있다. 《유미의 세포들》과 그 웹툰을 소비하는 독자들의 반응 역시 그런 맥락으로 읽었다.

 

유미 씨 반가워요

행복하세요, 소설도 잘 쓰시고요

한림읍에서 장모 올림

 

제주신화월드는 오설록 티뮤지엄과 달리 휑뎅그렁했다. 여의도의 85퍼센트 면적에 2조 원이 넘는 중국 자본이 투입돼 지어진다는 초거대 복합 리조트 타운이다. 호텔, 테마파크, 카지노, 컨벤션 센터, 쇼핑몰, 스파까지 모두 갖췄다. 한국에서 가장 큰 복합 리조트이고 제주도로서도 중요한 프로젝트라고 한다.

하루에 3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는데, 우리와 같은 시간에 이곳을 찾은 관광객은 30명쯤 되어 보였다. 대부분의 시설이나 식당은 문을 열지 않았다. 시설은 다 새 것이어서 을씨년스럽거나 기괴하지는 않았지만 활기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좋아했을 만한 장소는 아니었다. 모든 것이 너무 컸다. 한국 최대, 아시아 최대, 세계 최대를 향하는 그 의지가 오히려 시대에 안 맞는다고 느껴졌다. 아…… 그 놈의 시대정신.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에 손님이 끊겼다고 생각했는데, 기사를 검색해보니 이 리조트는 전부터 이슈가 많았다. 한한령(限韓令) 때문에도 큰 피해를 입은 모양이고, 중국 100대 부동산 재벌이라는 모기업 회장이 캄보디아에서 갑자기 실종되었다가 두 달 뒤에야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부패 혐의로 중국 공안에 의해 구금되었고, 이후 경영에서 사실상 물러났다는 관측이 있다. 올해 초에는 제주신화월드 내 카지노 금고에서 현금 145억 원이 사라지는 사건이 터졌는데, 그게 회장의 비자금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나온다.

제주신화월드에서는 미디어 아트 전시회를 보았다.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디지털 이미지로 만들어 커다란 벽에 영사하고 애니메이션을 가미하거나 관람객과 상호작용하도록 만든 전시였다. 전시관에 사람이 없어 마음 놓고 눈을 호강시키고 나왔다. 고흐가 그린 별밤과 밀밭, 클림트의 금가루 이미지들이 천장과 사면에서 쏟아지게 한 메인 전시실에서는 한가운데서 HJ와 함께 저질스러운 춤을 추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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