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맥주의 블로그
제 독서 메모는 마음대로 퍼 가셔도 괜찮습니다. 상업적으로 이용하셔도 됩니다.저자들이 주장하는 사고의 본질을 두 단어로 요약하면 범주화와 유추다. 범주화를 하기 때문에 지성이 가능해진다. 인간은 모든 사물, 관계, 개념에 수없이 많은 라벨을 붙이며, 그런 작업들 통해 새로운 개념들을 유연하게 탐구할 수 있다. 사고의 도약도 그렇게 일어난다. 일반화, 범주화를 폭력이라고 몰아붙이는 얼치기들에게 정중하게 권하고 싶은 책.
히치하이커 시리즈는 2편에서 끝마쳤다면 아주 좋았을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4편에서 마무리지었어야 했다. 5편은 작가도 짜증을 내며 쓴 것 같고, 결말에서는 자포자기하는 심정마저 엿보인다.
‘히치하이커 시리즈는 2편으로 끝났어야 한다’고 썼지만, 사실 4편에서 아서 일행이 신의 마지막 메시지를 찾으러 가는 에피소드도 좋아한다.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신의 섭리는 결국 인간 소설가나 시나리오 작가의 생각일 뿐이라 창작자의 철학을 뛰어넘을 수 없다. 그래서 신의 메시지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픽션은 대개 그 지점에서 맥이 풀리곤 한다. 히치하이커 4편은 드문 예외다.
히치하이커 시리즈는 2편에서 마치는 게 적절했다. 물론 그랬다면 속편에 대한 요 구가 아우성쳤을 테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어 3, 4, 5편이 나오게 된 것이겠지만. 3편은 줄거리가 어수선한데 원래는 닥터 후 대본용으로 썼다고 한다. 크리켓에 대해 보다 더 잘 알았더라도 그리 재미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제주도로 떠나며 HJ와 내가 가장 걱정한 것은 긴 여행 기간 동안 우리가 서로 싸우게 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한 달 동안 24시간 붙어 있어야 하고, 그 중 상당 시간은 좁은 숙소에서 보내게 된다. 틀림없이 다투겠지. 그것도 여러 번.
그런데 우리는 한 번도 싸우지 않았다. 사소한 말다툼조차 없었다. 한 달 동안 별 위기도 없었다. 서울에 돌아오기 직전 HJ에게 여행 중 가장 큰 위기의 순간이 언제였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마지막 숙소에서 변기가 막혔을 때라고 대답했다.
내 생각에는 그때가 이번 여행에서 두 번째로 큰 위기였던 것 같다. 내 생각에 가장 큰 위기는 한림읍의 리조트 호텔에서 머문 후반기였다. 딱히 할 일도 없었고, 갈 곳도 없었는데, 떠나기 전날에는 종일 비까지 내렸다. ‘이만하면 충분히 쉬지 않았나, 이제 서울에 올라가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는 읍내에 나가 볼 일들을 처리했다. 서울에 보내야 하는 서류들이 있어서 읍사무소와 우체국에 갔다. 제주도에 머무는 동안에도 칼럼을 썼고, 편집자들과 연락하고, 강연 요청을 받고, 일정을 조율했다.
특히 3월 중순부터 하순까지 2주 사이에는 영상콘텐츠업계의 요청을 네 건이나 받았다. 드라마 시나리오나 게임 세계관, 미디어믹스 프랜차이즈나 애니메이션 시리즈의 1회 트리트먼트를 개발해 달라는 내용들이었다. 모두 거절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고 사실 얼마간 위안도 되었다. 돈이 몰리는 업계에서 판단하기에 내가 쓸 만해 보인다는 얘기 아닌가. 그리고 나중에 소설가로 먹고 살기 힘들어지면 밥벌이를 할 길이 그런 방향으로도 하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내가 한림읍 중심가에 나갔던 날 HJ는 제주에 사는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HJ의 동기이기도 하고 나의 대학 후배이기도 했다. 그 후배는 어린 아들이 있는데,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가 터진 이후로 2년 동안 서울에 오지 못하고 제주에 갇혀 지내고 있다고 했다. 제주도민이 내륙에 다녀오면 그 자녀를 어린이집에서 2주일간 받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 후배와 따로 만나지는 않았다. 그녀와 헤어진 HJ와는 한림읍사무소 앞에서 만났다. 우리는 마트에서 장을 보고, 한림항을 지나 한림해안로를 천천히 걸었다. 아직 관광지로는 개발되지 않은 지역이었고, 주변 풍경은 가슴이 미어질 것처럼 쓸쓸했다. 그리고 아름다웠다.
그렇게 나의 후배이자 HJ의 동기 이야기를 들으며 넓고 흐린 하늘 아래 먹색 바다 옆을 걸었다. 나의 후배이자 HJ의 동기 역시 힘든 40대를 보내는 듯했다. 그러다 카페 겸 게스트하우스를 우연히 발견하고 들어갔다. 게스트하우스는 방 하나짜리 작은 건물이었고, 카페는 인테리어를 집시풍으로 꾸몄다. 조용하고 음악도 좋았다.
카페에서 해가 질 무렵까지 있다가 나와서 근처 식당에 들어갔다. 제주식 고사리닭육개장이라는 메뉴가 있어서 주문하고 닭한마리칼국수도 시켰다. 둘 다 훌륭했다. 값도 비싸지 않고 맛도 좋았다. 제주식 고사리닭육개장은 고사리와 닭고기를 푹 고은 걸쭉한 죽이었는데, 이때까지 우리는 고사리육개장이라는 제주 특산 요리가 있는 줄 몰랐다.
종일 비가 온 날에는 잠시 리조트의 골프 코스를 둘러본 것 외에는 호텔 건물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나는 웹진에 연재하는 칼럼 원고를 썼다. 잠시 비가 그쳤을 때 창밖에는 무지개가 커다랗게 떴다. 호텔 안에 있는 편의점에서 제주 위트 에일과 제주 슬라이스, 그리고 다른 맥주들을 사 와서 마셨다.
제주 위트 에일은 제주맥주의 대표 상품이고 첫 제품이다. 벨기에식 밀맥주인데, 호가든처럼 고수 씨앗을 첨가했고, 제주산 감귤 껍질도 추가했다. 무난한 맛에 마케팅을 잘해 인기를 끌었고, 나도 서울에서 종종 사마셨다. 제주맥주는 홈페이지에서 국내 인디 뮤지션들의 음악을 큐레이션해서 제공하는데, 맥주를 마시며 함께 들었다.
심심해서 리모컨 버튼을 이리저리 누르다 호텔의 TV로 주문형 비디오를 보는 방법을 깨쳤다. 배달 앱으로 치킨과 김말이를 주문하고, 무료 영상 중에서 《조선명탐정: 사라진 놉의 딸》을 골라 감상했다. 맥주를 마시고 튀긴 닭을 먹으며 보기 딱 적당한 오락 영화였다. 나보다 HJ가 더 좋아했다.
2021년 봄에
제주로 한 달 여행을 갔고
큰 무지개를 봤죠
히치하이커 시리즈는 전체 줄거리는 별 의미가 없고, 에피소드들을 즐기려 읽는 책이다(라고 생각한다). 시리즈 전체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은 부분이 바로 2권 초반에 나오는 ‘우주의 끝’과 거기에 있는 레스토랑 이야기다. 세계의 종말을 묘사한 모든 창작물 중에 가장 유쾌하고, 어쩌면 가장 스케일이 큰 이야기일지도.
1995년에 새와물고기에서 첫 번역본이 나왔을 때 읽었다. 그때는 크게 웃은 대목도 있었고 영국식 유머가 뭔지도 모르면서 아무튼 그게 나랑 안 맞는다고 생각한 부분도 있었고, 과유불급이라 여긴 페이지들도 있었다. 지금은 ‘~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라는 표현 자체가 한국 대중문화에서도 일종의 관용어구가 된 듯하고 이 책에 대해서는 무조건 배꼽 잡게 웃기다고 찬양해야 할 것만 같은 분위기다. 그리고 그 사이에 나는 남들 안 볼 때 영국식 유머를 몰래 구사하는 사람이 되었다.
원래 국내 번역서가 ‘온난화라는 뜻밖의 횡재’라는 제목으로 나왔다가 이후 제목을 지금처럼 바꿨다. 타깃 독자층을 생각하면 잘 바꾼 거지만, 원제는 뜻밖의 횡재, 바람에 떨어진 과일을 뜻하는 ‘Windfall’로 처음 국내 제목에 더 가깝다. 책 내용도 ‘막을 수 없는 문제니 적응하자’는 제안과 너무 적응을 잘하는 이들에 대한 냉소 사이를 다소 오락가락 한다. 그래도 어쨌든 지금 벌어지고 있는 흥미로운 현상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기후 변화에 대한 가장 강경한 주장일 것이다. 이른바 ‘지구공학’은 미친 과학자들의 아이디어이며, 자본주의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역설한다. 한 챕터를 제외하고는 의외로 감성에 호소하지 않는다.
이제는 절판되어 구하기도 쉽지 않은 책이다. MBC PD수첩은 1990년 시작했고, 〈소쩍새마을의 진실〉 편은 1995년 방영되었다. 소쩍새마을 설립자 일력은 중국에서 약물중독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구상하던 소설에 참고하려고 읽었는데 그 아이디어는 끝내 현실화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