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맥주의 블로그
제 독서 메모는 마음대로 퍼 가셔도 괜찮습니다. 상업적으로 이용하셔도 됩니다.저자 서문의 유머 감각이 상당히 비범함. 약자가 약자의 입장에서 약자를 위해 쓴 책이라고 『군주론』을 풀이한다. 우리 모두 자신의 비르투로 각자의 포르투나에 맞서자고 주장하는데, 당연히 나도 그렇게 믿는다. 내게 주어진 비르투와 포르투나를 생각하면 머릿속이 복잡해지지만.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 11권. 피렌체와 토스카나 소도시를 누비며 『군주론』
을 해설한다. 끝에 500년 전 피렌체와 21세기 한국을 비교하는데 뻔한 얘기로 들리지 않는다. 우리의 역량과 활력은 어디에 있나.
강정인, 김경희 교수의 번역과 김운 찬 교수의 번역 양쪽으로 모두 읽었다. 이 책이 500년 동안 정치 지도자들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영감을 줬던 이유는, 결국 여기에 다른 저자들은 감히 말하지 못한 인간에 대한 진실이 담겨 있어서이지 않을까 한다. 사랑과 두려움을 동시에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살면서 자주 느낀다.
리조트 호텔에서 나와서는 다시 남쪽으로 내려갔다. 다음 숙소는 복층 펜션이었는데, 제주 한 달 여행 중 가장 외진 곳에 있었다. 가장 가까운 편의점은 1.3킬로미터, 가장 가까이에 문을 연 카페는 2.8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펜션에는 자전거가 여러 대 있었고, 투숙객들이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 그리고 남으로도, 북으로도 잘 정비된 자전거도로가 바다 옆으로 뻗어 있었다. 우리는 펜션에 머무는 동안 매일 두 차례씩 밖으로 나가 자전거를 탔다.
그 길의 이름은 노을해안로였다. 잘 붙인 이름이었다. 해안에 있는 길이었고, 노을이 질 때 정말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북서와 남동 방향으로 곧게 이어진 길이라서 저녁 무렵에 북서쪽을 향해 페달을 밟으면 석양을 향해 달리는 기분이 들었다. 바다를 향해 ㄱ자로 꺾인 절벽 위를 달릴 때에는 그대로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자전거를 탈 때에는 늘 HJ의 뒤에서 달렸다. 자전거를 타면서 내가 이미 갖고 있는 것들, 잃어서는 안 되는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다시는 우울증에 굴복하지 않겠다고, 무너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세상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세상이 미쳤고, 내가 정상이다. 나는 세상이 미쳐가는 원인도 조금씩 알 것 같았다. 그걸 하나의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어쩌면 사상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어쩌면 환영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노을해안로는 국제보호종인 제주남방큰돌고래를 관찰할 수 있는 명소이기도 했다.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나갈 때마다 남방큰돌고래 무리를 보았다. 돌고래들은 십여 마리가 모여서 수면 근처에서 접영 선수처럼 헤엄을 쳤다. 간혹 물 밖으로 솟구쳐 몸 전체를 보여주는 녀석도 있었다.
어떤 때에는 돌고래들이 해안에 너무 가까이 와서, 저러다 바다 아래 바위 바닥에 그네들의 배가 쓸리는 게 아닌가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노을이 질 때 수십 마리가 일직선으로 늘어서 햇빛을 향해 헤엄을 치기도 했는데 그 광경은 장엄하면서도 신비스러웠고 또 시원했다.
처음 남방큰돌고래를 봤을 때에는 대단한 행운이라고 여겼는데, 알고 보니 그 일대에서 돌고래를 보기는 무척 쉬운 일이라고 했다. 연구자들은 지느러미 모양을 보고 개체들도 식별한다고 한다. 100여 마리 정도가 몇 년 전부터 이 지역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펜션 근처에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식당과 카페를 찾아갔다. 롤스시와 모듬초밥을 먹기도 했고 흑돼지도 먹었고 메뉴가 하나뿐인 어촌계 식당에서 정식을 먹기도 했다. 정식은 반찬이 10가지가 넘었고 다 맛있었다. 그 식당에는 젊은 보디빌더의 사진이 벽 곳곳에 붙어 있었는데, 식당 주인의 아들이라고 했다.
어촌계 식당에서는 개를 두 마리 키웠는데, 한 마리는 희었고 다른 한 마리는 검었다. 흰 개는 앞발 하나가 기형이어서, 네 발로 걷지 못했다. 흰 개는 목줄을 매지 않았고, 식당 앞 도로를 절룩절룩 건너거나 아예 도로 한 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표정은 아주 태평했다. 개가 차에 치일까봐 우리는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펜션에서 어촌계 식당을 가는 길 중간에 있는 언덕에는 하멜이 탔던 배의 선원들 중 제주 앞바다에서 숨진 이들의 넋을 기리는 위령비가 있었다. ‘이곳이 하멜이 표착한 곳’이라고 주장하는 푯말의 문구는 과도하게 비장해서 웃음이 나왔다. 위령비는 몇 년 전에 세웠다고 한다.
흑돼지는 맛이 없지는 않았지만 너무 비쌌다. 흑돼지를 파는 식당은 펜션도 운영했고, 조랑말도 두 마리 키웠다. 말은 몸집은 작은데 눈이 엄청나게 컸다. 식당은 부부가 운영했는데, 젊은 남편이 서빙을 하러 매장을 뛰어다니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장사도 잘 됐다. 흑돼지 식당을 나오는데 밤하늘에 별이 많았다. 몽골 게르에서 본 것보다 더 수가 많았다.
흑돼지를 먹은 날 제주 펠롱 에일과 다른 맥주들을 마셨다. 제주 펠롱 에일은 제주맥주의 두 번째 맥주이며, 역시 서울에서 맛봤었다. 홉을 다양하게 첨가했다는데, 시트러스 향이 강하고 바디는 가볍다. 끝맛은 약간 쌉쌀한 정도의 페일 에일이다. ‘펠롱’은 제주 방언으로 ‘반짝’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다리 아픈 개, 밤하늘의 별
노을을 향해 헤엄치는 돌고래
모든 반짝이는 것들
하루는 마침 제주를 여행 중인 막내 처제 가족이 우리 숙소에 놀러왔다. 처제 가족은 한라산 아래와 서귀포시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모듬회와 딱새우회, 전복죽을 배달시켜 먹었는데 양이 부실했고 맛도 별로 없었다. 서귀포매일올레시장에서 맛본 땅콩만두, 흑돼지꼬치와 함께 제주에서 경험한 음식들 중 드물게 실망스러웠다.
노을해안로의 펜션을 떠나기 전날 화상 강연을 했다. 대학 부설 연구소에서 주최한 강연이어서 청중이 학부생이나 대학원생일 거라고 여겼는데, 아니었다. 그 연구원들 대부분이 현역 교수들이었다. 그 사실을 강연 한 시간 전에 알게 되었고, 부랴부랴 원고를 즉석에서 고쳤다. 다행히 강연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명견만리: 미래의 가치』를 읽었다. 지난해 나도 강연자로 참여해 촬영했던 명견만리 특집편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책이다. 추천사 요청을 받고 출판사로부터 PDF로 원고를 받아 읽었다. 십여 년쯤 전에 공부한다는 마음으로 한국 사회에 대한 한국개발연구원의 주요 보고서들을 통독한 적이 있었다. 세상에 대한 업데이트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또 여러 경제보고서들을 내려 받은 상태였는데, 이 책을 읽은 것으로 얼추 넘어가도 될 것 같다.
윤원섭이라는 캐릭터와 벽수산장이라는 공간의 존재감이 굉장히 강렬해서 거의 초현실적인 분위기마저 풍긴다. 사람과 장소 모두 전혀 사랑스럽지 않은데 그 옆에 있으면 나도 어쩔 수 없이 휘둘리게 될 것 같다. 책장을 덮고 나면 다들 이게 어디까지가 실화야 하면서 인터넷을 검색해보게 될 듯. 역사는 뭐고 청산은 또 뭔가. 다시 보니 제목이 아이러니하네. 책이 출간되기 전에 벽수산장 이야기를 작가로부터 직접 듣고 사진도 봤다는 게 내 소소한 자랑이다.
1편과 마찬가지로 단편소설 22편이 실려 있다. 외국인 노동자와 이주 여성을 소재로 한 한이의 「체류」, 갑질 문제를 다룬 송시우의 「사랑합니다, 고객님」은 범죄소설로도 수작이고 동시에 진지하고 날카로운 사회비판 소설이기도 하다. 2012년에 나온 선집이라 네이버와 미다졸람은 나오지만 소셜미디어와 펜타닐은 아직 언급이 없다. 3권도 나오기를 기대한다.
한국추리작가협회가 펴낸 걸작선 1권. 김내성, 문윤성 같은 작가와 현역으로 활발히 활동하는 생존 소설가들의 작품이 함께 실려 있다. 국경 밖에서 자유로운 상상을 신나게 펼치는 작품들도 있지만, 역시 한국의 범죄에 눈길이 간다. 김성종의 「회색의 벼랑」은 냉전 시대를, 서미애의 「반가운 살인자」는 외환위기 이후 파괴된 가정의 풍경을 실감 나게 보여준다.
디킨즈의 『위대한 유산』에 대한 긴 오마주. 주인공이 하는 일이 좀 적다. 프랜즌의 대표작으로 남을 것 같지는 않고, 그가 심오한 메시지를 고민하면서 이 작품을 쓴 것 같지도 않다. 그래도 읽는 재미는 있다. 뒤틀린 인물의 내면에 대한 깊이 있는 묘사를 문학을 통해 접하게 되면 정말 인간에 대한 이해도 깊어질까?
리처가 사건에 휘말리는 경위가 하도 괴상하고 그의 마음 씀씀이가 평소보다 섬세한 데다 사건 진행도 느릿느릿하고 폭력의 쾌감도 이상할 정도로 적어서 오히려 독특한 맛이 난다. 슬프고 쓸쓸한 사건 내용이나 세상의 끝 같은 공간 배경도 그렇 고. 그래서 나쁘지 않게 읽었다. 잭 리처 시리즈가 아닌 독립된 작품이었더라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핸콕이 본격적으로 유사역사학 서적들을 내기 직전의 초기작으로, 이 책은 그래도 꽤 읽을 만하다. 우선 현장을 찾아다니는 르포이며, 핸콕도 학자인 척 굴지 않고, 사실들을 존중하고 자기가 펼치는 주장의 한계를 아는 것처럼 보인다(그래서 결말이 허무하다). 성궤를 찾는 과정과 서양 저널리스트로서 아프리카의 군사 정권에 협력한 개인 경력을 반성하는 부분을 겹쳐 서술한 대목은 상당히 울림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