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맥주의 블로그
제 독서 메모는 마음대로 퍼 가셔도 괜찮습니다. 상업적으로 이용하셔도 됩니다.좀 더 독자를 많이 만났으면 하고 바라는 책이다. 무엇에 대한 책이냐고 묻는다면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농촌의 몰락, 빈곤과 마약과 가정폭력의 악순환, 외롭고 절망적인 사랑, 그리고 어둠과 화염……. 남루한 행색의 남녀가 주인공이다. 멍하고 주눅이 들어 뵈는 사내는 여인에게 뭔가를 애원한다. 여인의 마음은 해석하기 어렵다. 표독스러운가. 깊은 상처를 품고 있나. 이 모든 야단법석에 초연한가. 아니면 속으로 웃고 있나. 우리를 유혹하고 있나.
처음에는 민음사 번역본으로 읽었던가? 두 번째는 열린책들 번역본으로 읽었다. 열린책들 번역본의 본문 마지막 문장은 ‘행복한 시지프를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로 되어 있는데 내가 기억하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하여야 한다’와 미묘하게 의미가 다르고 감동도 덜하다. 불어를 모르니 원문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도 철학적 자살이 그냥 자살보다 더 나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게 뭐 어떤가, 하는 이에게 딱히 반박할 말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다 유용하고 옳은 지침들이지만 실천이 너무 힘들고, 보상이 책에서처럼 빠르고 확실하게 오지도 않는다. 그래서 얼마간 체념한다. 얼마간 체념하라는 조언에 대해서도.
인간이란 논리적이지 않고, 모든 걸 자기 위주로 생각하려 하고, 비판 받는 걸 싫어한다. 그러니 상대를 비판하지 말고, 상대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절대 남의 체면을 깎지 마라. 물론 사회인이라면 다들 알아둬야 할 내용이다. 출간 80년이 지나, 책의 메시지가 상식이 된 시대를 사는 우리는 파훼법도 고민해야 할 거 같고. 자칫하다가 호구 된다.
게스트하우스 2층에는 책장과 테이블이 있는 작은 공간이 있었는데, 그 책장에는 의외로 뻔하지 않은 좋은 책들이 꽤 꽂혀 있었다. 나는 휴대폰으로 전자책을 읽었지만 HJ는 그 책장에서 책을 몇 권 꺼내 왔다. 그 중에 만화가 정우열의 『올드독의 맛있는 제주일기』가 있었고, 그 책은 함께 읽었다.
정우열 작가는 8년 전에 제주도로 이주해서 살고 있는데, 제주관광공사의 지원을 받아 제주 향토음식에 대한 웹툰을 포털 사이트에 연재했다. 그 만화들을 묶은 게 이 책이다. 모두 스무 가지 향토음식을 다뤘는데, 우리가 그 사이에 먹은 요리도 있고 못 먹어 본 것도 있었다. 남은 여행 기간 동안 고사리육개장, 몸국, 각재깃국, 옥돔구이, 보리빵, 빙떡을 먹어보자고 계획했다.
정작 협재해수욕장에 머무는 동안에는 제주 특산음식은 그다지 즐기지 않았다. 젊은 관광객들을 겨냥한 팬시한 식당에 가서 껌승, 반미, 상하이 파스타 같은 외국 요리를 맛보거나 매생이갈비탕, 맑은도가니탕 같은 다른 지역 음식들을 먹었다. 모든 가게들이 깔끔했고, 가격 대비 성능비가 만족스러웠다.
제주 향토음식 중에는 한치물회를 먹었다. 제주 물회가 포항 물회보다는 나은 것 같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물회라는 요리 자체가 자극적이고 얄팍한 음식인 것 같다. 정우열의 책에 나온 설명에 따르면 우리가 먹은 물회는 정통 제주식이 아니라고 하지만. 오히려 함께 먹은 돼지애호박찌개는 묘하게 매력적이었다. 고수나 박하, 혹은 홍어를 넣은 것처럼 알싸했다.
협재해수욕장 근처를 걷다가 카페에 들어가서 분위기를 살피고 괜찮아 보이면 거기서 시간을 보냈다. 계획 없이 찾아간 카페에서 뜻밖의 즐거움을 누리는 경험을 우리는 인생에 대한 비유로 여겼다. 이상하게 우리가 들어갈 때에는 손님이 없던 카페들이 우리가 앉아 있으면 곧 북적이게 되곤 했다. 우리가 손님을 몰고 다니나? 보틀샵에도 한번 더 들러 그레이엄 크래커 포터 캔맥주를 샀다.
게스트하우스의 공용 공간은 해가 지면 꽤 큰 스크린과 제법 좋은 좌석을 갖춘 극장으로 변신했다. 한쪽 벽에는 주인아저씨가 모은 VHS 비디오테이프가 가득 꽂혀 있었다. 거기서 하루는 한국에서 특히 인기를 모았다는 영화 《라라랜드》를, 다음날에는 픽사 애니메이션 《소울》을 보았다.
두 영화 모두 감명 깊게 보았으나 나는 《라라랜드》를, HJ는 《소울》을 좀 더 높이 샀다. 《소울》은 쉽게 풀어 쓴 인문 교양서 같은 느낌이 좀 났다. 반면 《라라랜드》는 박하게 평가한다면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같다고 할 수 있었다. 주제보다는 시각적 스펙터클이 중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의 오랜 팬인 나는 그 스펙터클에 흠뻑 빠졌다.
공교롭게도 연이어 본 두 영화에는 공통점이 꽤 많았다. 남성 주인공들의 직업은 재즈 피아니스트였는데 그들은 예술적 인정을 받기 위해 분투하는 동시에 생계를 고민해야 했다. 영화의 톤은 전반적으로 동화적이었다. 무엇보다 흔한 할리우드 영화와는 달리, 꿈을 좇는다는 행위에 대해 강한 불신을 드러냈다.
그런 회의감은 우리도 요즘 깊이 느끼는 바였다. 나보다 HJ가 더했다. 《라라랜드》를 보고 난 밤에도, 《소울》을 보고 난 밤에도, 우리는 침대에 누워 영화 내용과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오래 토론했다. 내 생각에는 목적이 이끄는 삶과 목적이 이끌지 않는 삶 양쪽 모두 추구하다 보면 논리적으로 막다른 지점에 이르게 된다.
《라라랜드》를 보고 난 다음날 오전에 앞으로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는 일을 그만둬야겠다고 결심했다. 비장한 결정이라기보다는,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은 페이스북에 3일에 한 번씩 간단한 독서 후기를 올리고 있었다. 소셜미디어, 아니 속세 전체에 정나미가 떨어졌다.
《소울》을 보고 난 다음날 오전에 오디오북을 무단 발행한 출판사와 출간 계약을 해지하고 해당 책을 절판하기로 결심했다. 대신 출판사에 공개 사과문을 인터넷에 올리라고 요구했다(전에 요구한 대표 명의의 사과문을 한 달 넘게 기다렸지만 응답이 없었다). 이 공론화로 인해 나도 내키지 않는 일들을 이러저러하게 겪을 테지만, 그동안 너무 오래 참았다. 그 출판사에서 내게 달리 행동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
그렇게 절판 결심을 내리고 나니 후련했다. 진작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앞으로는 말만 번드르르한 자칭 기획자들에게 절대 속지 않겠다. 그날 점심은 굶었고, 오후에는 제주맥주 양조장을 견학했다. 설명은 친절했고 공장 구경도 흥미로웠지만 투어 비용은 다소 비싼 것 같다.
견학을 마치면 샘플러 4종을 제공하는데, 양조장에서 마실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배럴 시리즈가 없어 아쉬웠다. 현대카드와 함께 만들었다는 아워 에일도 재고가 없다고 했다. 샘플러에는 제주 위트 에일, 제주 펠롱 에일, 제주 슬라이스, 생활맥주 레드 라거가 있었고, 처음 마셔 보는 맥주는 없었다.
제주 슬라이스는 백향과 퓨레를 첨가한 가벼운 세션 에일이다. 과일 입자가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향과 맛은 무척 새콤하다. 내가 맛본 제주맥주 제품들은 모두 캔 디자인이 예뻤고, 바디감은 무척 가벼웠다. 이게 이 회사의 정체성인지, 배럴 시리즈의 임페리얼 스타우트 에디션도 그럴지 궁금하다.
그것도 괜찮지 않을까
백 가지 향기를 내는 가벼운 삶
목적을 끝내 몰라도
HJ는 맥주에 대한 나의 관심을 궁금해 했다. 어떤 때에는 무척 진지해 보이고, 어떤 때에는 심드렁한 것 같다고. 나는 그냥 우표 수집 정도로 생각한다. 여러 종류의 맥주를 찾아 마신다고 무슨 통찰이 생길 리 없고, 맥주의 역사와 배경에 대해 아무리 공부한들 얻는 지식은 피상적이다. 독서와는 완전히 다르다.
제주맥주 양조장을 나와서는 협재해수욕장의 돈가스 전문 식당에 갔다. ‘뷰깡패’라는 간판이 있는 곳이었는데, HJ와 나는 그 표현이 너무 천박하다며 투덜거렸다. 그런데 들어가 보니 과연 깡패라는 단어가 무색하지 않게 독보적인 전망을 지닌 가게였다. 창가 자리에서 해가 붉게 지는 모습을 넋을 잃고 보았다. 싸고 푸짐한 왕돈가스를 먹고 테라를 두 캔 마셨다.
게스트하우스로 오는 길에는 벨기에 수도원 맥주를 전문으로 취급한다는 펍에 들렀다. 뷰깡패 돈가스 식당과 달리 고급스러운 가게였고 술이나 안주 값도 다 비쌌다. 사과 주스를 넣은 밀맥주인 콜센동크 애플 화이트와 하이네켄을 마셨다.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 전에는 여기서 저녁마다 재즈 공연도 했다는데, 멋있었을 것 같다.
동물의 사고능력, 그리고 동물학과 동물학자들에 대한 이야기. 인간 어린이와 유인원의 인지능력을 비교하는 실험이 그렇게 불공정하고 비과학적일 줄 몰랐다. ‘비인간’이라는 용어도 다시 생각해본다.
연재 초기에 지인이 너무 재미있다면서 추천해줘서 읽었는데 중간에 잠시 놓쳤다가 전자책으로 읽었다. 독서가들도 이제 거의 보호대상종인 거 같은데, 그들의 허세를 꼬집는 게 즐겁다는 사실이 미안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재미있다. 한 권으로 완결된 줄 알았는데 2편도 얼마 전 연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소년탐정 김전일》의 세련된 대학생 버전 정도인 줄 알았는데, 어안이 벙벙해지게 장르가 섞인다. 나는 장르 혼합은 거의 무조건적으로 지지하고, 이 작품도 간혹 헛웃음을 지으면서도 재미있게 읽었는데 분개하는 독자도 있는 걸 보고 좀 놀랐다.
실력 있는 과학저술가들이 우주, 뇌, 진화, 정수론에서 인간 사회와 도박에 이르기까지 우연을 주제로 최신 이론과 가설을 소개한다. 빅뱅에서 인류의 탄생까지를 말하는 1장, ‘우연을 활용하기’라는 제목이 붙은 6장이 아주 흥미진진하다.
가사 노동을 무시하는 남편에게 천벌을. 앞부분은 흥미진진한데 뒷심은 다소 부족하다. 부기맨 괴담을 직접 언급하고 연관성도 뚜렷하다. 영화 《캔디맨》도 좀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