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맥주의 블로그
제 독서 메모는 마음대로 퍼 가셔도 괜찮습니다. 상업적으로 이용하셔도 됩니다.「천 마리 학」, 자신의 죄와 남의 슬픔을 슬쩍 가린 이기적인 남자의 에로티시즘이 왜 이렇게 정갈해 뵈는가. 『설국』도 좀 그런 느낌이었는데.
구소련에서 실시한 그 유명한 여우 가축화 실험, 그리고 러시아 과학자들의 이야기. 책을 읽을 때에는 인간 역시 가축화한 동물이라는 얘기에 무릎을 쳤는데 이제는 많이 알려졌다. 궁금해서 은여우 동영상을 찾아봤는데 아무래도 진짜 개만큼 인간과 교감을 잘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내러티브에 대한 믿음, 가족과 연인 사이의 신뢰, 고용주의 신임, 신탁 재산, 1929년 월가 대폭락을 불러온 제도, 금융이라는 추상적인 구조에 대한 신용. 진실은 우리의 믿음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일까, 밖에 놓인 것일까. 믿음 그 자체가 현실이라면, 믿음을 조정하고 구부리는 일에 나서야 하는가, 혹은 막아야 하는가. 라쇼몽식 서사가 이 작품의 제일 큰 매력은 아니다. 3부를 무척 감탄하며 읽었다.
독서토론의 중요성을 실제 모임을 운영한 학교 선생님 눈높이에서 생생하게 잘 전달한다. 저자가 귀엽고(이렇게 표현해도 될까?) 입담이 좋다. 몇 번 맞장구도 크게 쳤다. 특히 모든 이에게 발언권을 줘야 한다는 부분.
내용은 조금 허술한 면이 있지만 그 논지에는 상당히 공감했다. 소상인이 중심이 되는 사회로 가는 게 맞다, 더는 풍요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되겠다, 생각한다. 그런 사회를 설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튼, 현수동』을 쓸 때 참고했다.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강남 룸살롱 문화의 탄생 배경이나 예술의 전당 건설 비화 등등을 읽다 한국 현대사가 너무 기묘하고 우스꽝스러워 탄식하게 된다. 그 시절에는 그게 심각하고 진지한 일이었을 텐데. 공저자 중 한 사람이 시인이자 정치인인데 다소 편향적으로 느껴지는 서술도 없지 않다.
요한 하위징아의 명저 『중세의 가을』을 흔히 이런 식으로 요약한다. ‘중세는 암흑기가 아니었고, 르네상스의 씨앗이 이미 그 시대에 뿌려져 있었다’는 내용이라고.
글쎄,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내 생각엔 썩 제대로 된 요약도 아니다. 이 책은 르네상스의 기원을 찾아내려 애쓴다기보다는 그냥 14~15세기 프랑스와 네덜란드, 독일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이 어떤 풍습을 지녔고 어떤 문화를 즐겼고 세상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시간여행을 다녀온 저자가 유려한 문체로 쓴 견문록 같다고나 할까?
『중세의 가을』이 펼쳐 보이는 중세 후기는 결코 르네상스의 예고편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둠과 광기의 시대도 아니다. 성(聖)과 속(俗)은 달뜬 활기 속에 섞여 있었다. 성지순례는 데이트 여행이었고, 교회 안에서 매춘부가 호객 행위를 했다. 성 유물을 전시하는 건너편에서 알몸 공연이 벌어졌다.
중세인들은 자주 울었고, 쉽게 감동받았고, 잔인했고, 무절제했다. 죄수에게 가하는 고문은 최고의 구경거리였지만, 사형수의 마지막 참회에는 다 같이 눈물을 흘렸다. 방탕에 가까울 정도로 향락을 즐기는 동시에 종말론과 염세주의에 사로잡혀 있기도 했다.
현대인의 기준으로는 이런 모순이 너무 낯설어 이해하기 어려운가? 나는 그렇지 않았다. 어렸을 때 익히 경험했던 감정 상태였으니까. 그런 순진한 정서가 한 사회를 지배하는 분위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어쩌면 눈물을 부끄러워하고 감정을 다스리고 관용을 미덕으로 받드는 현대가 중세보다 더 기괴한 시대인지도 모른다.
인간 사회가 참으로 다양한 모습일 수 있다는 발견은, 지금 우리 사회의 형태 역시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후대인들은 21세기를 돌아보며 어떤 모순을 지적할까. 그들의 눈에는 우리 시대 역시 다른 방향으로 잔인하고 탐욕스럽게 비치는 건 아닐까.
『중세의 가을』은 국내 출판사 세 곳에서 각각 번역본을 냈는데, 연암서가의 776쪽짜리 책이 가장 두껍고 최신 번역이다. 연암서가는 홈페이지도 없이 묵직한 인문교양서를 뚝심 있게 펴내는 출판사. 권오상 연암서가 대표는 “『중세의 가을』은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와 핵심 주제가 겹치는 자매 같은 책”이라며 “2010년 『호모 루덴스』를 낼 때부터 『중세의 가을』 출간을 염두에 뒀다”고 말했다.
딱히 줄거리나 설정이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아니지만 한데 모여 있으니 확실히 어떤 효과를 낸다. 오, 재미있다, 오, 잘 쓰신다, 하면서 읽었다. 기분 나쁜 이야기인데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마냥 편안하지도 않으면서 여운도 남는다. 이런 감수성은 훈련한다고 얻어지는 건 아닐 테지.
마이애미, 수수께끼의 금고, 변태적인 악당들. 토머스 해리스가 오랜 침묵을 깨고 발표한 작품임을 잊고 『양들의 침묵』만 떠올리지 않으면 충분히 괜찮은 소품이라고 본다. 콜롬비아 무장혁명군 소년병 출신 아름다운 불법 이민자 가정부도 너무 넷플릭스 드라마 같지만 그래도 재미있는 설정이고.
한국 번역본이 출간되자마자 읽었고 중반부터 ‘뭔가 아닌 거 같다’는 실망감을 맛봤다. 『레드 드래곤』이나 『양들의 침묵』의 핵심 매력이었던 서늘함은 없고 변태적이고 잔인한 묘사만 있었다. 그래도 결말은 소설이 영화보다 나았다. 『한니발 라이징』이 나왔을 때에는 안 읽어도 되겠다 싶었다. 이후 작가가 렉터 박사를 떠나 금방 다른 작품들을 쓸 줄 알았는데 그러기는 했지만 시간이 아주 오래 걸렸다.